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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자본주의 이후’를 상상하기

 

자본주의 위기 이후, 무엇이 오는가

 

 

백승욱 白承旭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 등이 있고, 최근 논문으로 「‘해석의 싸움’의 공간으로서 리영희의 베트남전쟁: 『조선일보』 활동시기(1965~1967)를 중심으로」 등이 있음. swbaek@cau.ac.kr

 

 

1. ‘자본주의 위기’라는 질문

 

우리가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극단적 양극화, 고용의 불안정성 증가, 저성장 체제로의 전환, 고령화와 결합한 실업의 증대, 사회보장의 부재 또는 와해, 정치의 중심성 상실 등 한국사회에서도 중요한 현안으로 등장한 문제들은 세계화시대에 전지구 어디서나 발견된다. 위기 증상은 중심부뿐 아니라 반주변부나 주변부까지 확산된다는 점에서 전지구적이지만, 이 체계의 한계를 뛰어넘을 새로운 도전세력은 역설적으로 약화되고 분산되었으며, 위기가 확대되고 심화할수록 위기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세력의 집중성과 구심력은 전에 없이 취약해졌다. 현재 위기를 더 크게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지난 시대에 얻은 성과를 상실해가고 있으며 앞으로 상실이 더 커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온 시대에 대한 상실감과 미래의 불안정함·불투명함이 위기감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위기의 성격과 관련해 질문을 제기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자본주의(의) 위기’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차원에서 그런가?

지난 20세기 내내 ‘자본주의 위기’라는 담론은 누구보다 좌파, 특히 사회주의자들의 담론이자 주장이었고 이들의 운동을 결집하는 구심점이었다. 자본주의는 삶을 피폐화하고 세계를 몰락의 길로 몰아가는 문제의 근원이며, 모순은 자본주의 원리에 내적이어서 회피할 수 없다는 인식이 이들 사상의 저변을 형성했다. 이 위기는 저항세력에게는 곧 기회이니, 위기를 돌파하고 기회를 잡아 대안적 세상을 만들자는 호소가 꽤나 힘을 가졌고,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담론이 되었다. 이에 반해 자본주의를 옹호하려는 세력은 그들이 통치하는 자본주의에 문제가 발생했음을 부인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가 ‘자본주의 위기’에 있는 것이 아님을 설파하는 데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이 대안으로 제기한 쟁점은 산업화, 기술발전, 자유민주주의, 문명의 충돌, 근대화, 합리성 등 사회과학 교과서를 반복해 채운 많은 내용들이었다. 자본주의는 논의되더라도 위기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성장-관리-조절의 틀 속에서만 이야기되었다. 자본주의 위기라는 이야기를 꺼내면 곧바로 “아직도 낡은 경제결정론에 빠져 있는 좌파로군!”이라는 비난이 되돌아오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다시 되돌아온 위기의 시대에, 자본주의 위기라는 주장을 줄곧 펼쳐온 세력은 그들 중 일부가 지속적으로 이 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도 과거에 비해 훨씬 힘이 약해졌고, ‘비판적’ 입장을 지닌 사람들은 ‘인권’이나 ‘복지’ 등을 더 많이 이야기하지 자본주의 위기라는 화두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흥미롭게도 오히려 자본주의의 옹호세력 쪽에서 지금 이 자본주의 위기라는 이야기에 더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앞서 자본주의 대신 산업화라든가 기술문명이라든가 뭔가 다른 용어를 써서 방향을 틀려던 사람들이 이제 좌파보다 더 ‘노골적으로’ 자본주의 위기를 운운하는데, 그 취지는 현행 자본주의를 수선하지 않으면 정말 극복하기 어려운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서 자본주의의 내적 대안을 제시하려는 관심이다. ‘자본주의 4.0’이라는 개념도 나오고, 거대 투기꾼인 조지 쏘로스(George Soros) 자신이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선두주자가 되고 있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21세기 자본’이라는 제목을 내건 삐께띠(T. Piketty)의 책이 일으킨 붐과 그에 대한 반응 또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사용하는 이론적 틀이나 그가 반향을 얻은 청중들 측면에서 과거 ‘자본주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보다는 그 반대쪽에 더 중심이 놓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 위기라는 표현이 빈번히 쓰이는 만큼 위기가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위기의 성격과 원인이 무엇이며, 다른 위기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합의된 결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규정이 너무나 상식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정작 신자유주의가 무엇이며 어떤 동학과 모순을 가지고 있는지 심층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의외로 많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고 너도나도 위기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위기의 특성, 기원, 유형화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는 의문이고, 그 때문에 혼동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피폐화하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괴물임을 점점 더 느끼게 되지만, 막상 이 괴물과 맞붙어 싸워볼 만한 무대가 우리 눈앞에 잘 차려지지 않고 우리의 싸움 상대가 자신의 전모를 한눈에 잘 보여주지도 않아서, 막상 대면해 싸워보기도 어려워진 것이 현실이다. 위기는 있으되, 위기의 태풍의 눈이 어딘지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까? 그래서 위기라고 말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위기인지, 어디서 온 위기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이 글은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를 당연하게 여기고 출발하기보다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자본주의 위기’라는 용어법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이로부터 한발 더 나아가,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이 어떤 종류의 위기인지를 좀더 면밀히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위기와 관련해 이 글이 제기해보려는 질문은 ‘자본주의의 위기’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와 같은 것인지, 자본주의의 위기와 ‘발전’의 위기는 같은 것인지이다.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는 그것이 작동하고 재생산되기 위해서 특정한 역사·제도적 조건들 속에 뿌리내려야 하지만, 자본주의의 본성 때문에 그 역사·제도적 조건이 지속될 수 없는 위기가 초래된다. 그렇지만 이 과정은 단순하지 않은데, 위기는 처음에 자본축적의 위기인 ‘자본주의 위기’로 시작되지만, 자본주의는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이 뿌리내리고 있던 역사·제도적 조건을 파괴하고 그 공간적 경계를 벗어나거나 비트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 눈앞에 주로 펼쳐지는 것은 자본주의 위기와 구분되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와 이 때문에 나타나는 우리의 피폐화한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자본주의의 종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역사는 위기극복이라는 명분 아래 세계가 더 나쁜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늘 보여주었다.

 

 

2. 어떤 위기?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영미권 사회학계 원로들의 토론을 모아 최근 펴낸 책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1) 이 책에 참여한 다섯명의 사회학자들은 모두 세계체계분석 또는 거시역사사회학이라 부르는 분야의 접근법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장기적 시간과 전지구적 공간 속에서 현재의 위기를 평가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고, 그런 만큼 이들은 현시기 세계의 변화를 읽는 서로 다른 비교점을 제시해준다. 여러 각도에서 이 책을 읽어볼 수 있지만, 여기서 다룰 이야기와 관련해 이 책의 필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세가지 흥미로운 대립점에 주목해보기로 하자.

첫번째 쟁점은 현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있는가에 대한 이견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과 랜들 콜린스(Randall Collins)가 현재 전지구적으로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라면, 마이클 맨(Michael Mann)과 크레이그 캘훈(Craig Calhoun)은 이런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다. 맨은 자본주의의 내적 법칙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캘훈은 위기란 장기적·역사적 과정이며 단기적으로 결판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반대의 입장을 편다.

두번째 쟁점은 첫번째 질문을 조금 더 파고들어간 것으로,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가 자본주의와 어떤 관련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이 첫번째 질문과 다른 것은, 지금 우리가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자본주의라는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복합성을 구성하는 다른 요인들은 무엇인지에 대해 논자마다 입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다시 첫번째 질문으로 되돌아가 현재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라 할 만한 것이 있는가에 대한 분기(分岐)를 뒷받침하게 된다. 우리는 글의 서두에서 자본주의 위기와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가 동일한 것인지를 질문했는데, 여기서 제기된 두번째 쟁점은 이 질문과도 연관된다.

이와 관련해 상이한 입장들을 간단히 검토해보자. 월러스틴의 위기이론은 이미 앞서 출판된 그의 많은 책에서 되풀이된 주장인데, 핵심은 자본주의의 순환적 위기와 구조적 위기를 구별하는 것이다. 전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꼰드라띠예프 순환(Kondratiev cycles)과 헤게모니 순환에 따른 위기를 배정하고는 이를 자본주의의 지속 속에서 나타나는 내부적 전환의 계기로 본다(두 순환 모두 상승하는 A국면과 하강하는 B국면으로 나뉜다). 이에 비해 후자인 구조적 위기를 설명할 때는 자본주의적 팽창이 자기한계에 도달함에 따라 나타나는 위기를 배정하고, 이 위기가 구조적이라고 보는 이유로 수익성, 노동력 저수지, 민주적 요구 등 몇가지 ‘점근선’이 체계의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주장을 편다. 여기서 월러스틴이 구조적 위기만을 체계의 ‘이행’과 밀접히 연관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행은 순환적 위기의 반복에 의해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콜린스는 월러스틴과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지만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는데, 이는 팽창의 한계라는 관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가 중시하는 한계점은 기술에 의한 노동 대체의 한계이다. 기술에 의한 육체노동의 대체가 20세기 전반기에 나타난 특징이고 이것이 초래한 위기를 지식노동에 기반한 중간계층의 확대로 극복했다면, 20세기말 전개된 ‘정보기술혁명’은 사무직 노동을 대체하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고용총량을 급격히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전자가 200년 걸린 반면 후자는 20년 만에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체계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한계점이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소하려는 여러가지 노력 또한 한결같이 구조적 제약에 부딪히고 있다.

이에 비해 마이클 맨은 자본주의가 구조적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에 유보적인데, 그 이유는 그에게 근대세계는 체계가 아니라 상호중첩되어 상호작용하는 네트워크이며, 이 네트워크 중 이데올로기적·경제적·군사적·정치적 권력관계가 핵심인데 그 결합은 역사적 우연 아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 위기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체계의 내적 필연성의 귀결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역사특수적 상황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캘훈은 대표적으로 환경적 요인이 자본주의를 위협하지만, 이 위기는 장기에 걸쳐 나타나는 것이며, 서로 다른 시대의 요소들이 혼재되는 이행과정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현 시점을 한 체계가 무너지고 다른 체계가 등장하는 구조적 한계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제기한다.

위기의 이해와 관련된 세번째 쟁점은 위기의 발현형태와 종료방식에 대한 이견으로 이어진다. 이 쟁점을 둘러싼 대립은 앞선 두가지에 비해 덜 가시적이지만, 각 주장의 상이한 맥락을 통해 암묵적 차이가 확인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앞서 검토하지는 않았지만 이 책에 포함된 논자인 게오르기 데를루기얀(Georgi Derluguian)이 쏘비에트체제의 몰락과 관련해 제기하는 흥미로운 쟁점도 이 문제와 관련된다. 위기가 표현되는 형상은 대체 어떤 모습에 가까울까? 이와 관련해 몇개의 단어를 떠올릴 수 있는데, 그 목록에는 몰락, 쇠퇴, 붕괴, 한계, 이행 등이 포함될 것이다. 데를루기얀의 글에 기대어 이야기해보자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본주의 위기는 러시아혁명의 무대가 된 제정러시아의 위기와 붕괴, 또는 러시아혁명의 역전이라 할 1980년대말 쏘비에트체제의 위기와 붕괴, 아니면 2차대전과 함께 운명을 마친 파시즘의 붕괴 등에서 보이는 급격한 몰락이나 붕괴와 유사할 것인가,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것일까?

 

 

3. 자본주의 위기와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

 

이상의 대립을 간략히 검토해보면, 우리는 이 작은 토론집단 내에도 위기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미묘한 차이나 혼동이 있음을 보게 된다. 굳이 구분해보자면, ‘자본주의 위기’ 자체와 이와는 대조되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 사이의 차이가 문제가 되며 이를 둘러싼 쟁점이 있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이는 월러스틴 자신에게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쟁점인데, 그의 논점에 따르면 ‘자본주의 위기’는 그 자체로 몰락이나 붕괴로 귀결되지 않는, 상승국면과 하강국면으로 구분되는 순환적 성격을 띤다. 하강은 상승을 준비하는 시기일 따름이며, 한곳에서의 위기는 다른 곳에서의 상승이고, 한 자본가집단의 몰락은 다른 자본가집단의 성장이다. 위기는 모두의 위기일 수 없다. 맑스가 이야기했듯이 말이다.

그래서 월러스틴은 자본주의의 순환적 위기와 구분되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따로 이야기하며, 이를 자본주의적 팽창이 불가피하게 초래한 위기이자 자본주의 재생산 조건 때문에 초래된 위기로 설명한다. 그렇게 되면 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 내부로부터 나오겠지만, 구조적 위기의 필연성은 자본주의와 그것을 둘러싼 외부적 조건 간의 관계에서 제기된다. 이는 미묘한 쟁점이 될 수 있는데, 앞서 검토한 바에 따르면 마이클 맨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라는 테제를 거부한 것은, 그가 현재 위기가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보는 위기는 자본주의 위기라기보다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 또는 자본주의의 동학과 결합한 국가의 복합적인 동학에서 귀결되는 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 위기가 발생한 원인을 반드시 자본주의로 소급해서 설명할 수는 없게 된다.

사실 우리가 자본주의 위기라고 말하는 많은 현상은 엄밀하게 규정하면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라 할 수 있다. 즉 고용의 불안정성, 국가의 위기, 양극화, 저성장, 전쟁, 고용 불안정성 등 넓게 말해 ‘삶의 위기’ 형태로 나타나는 다양한 위기들은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이며, 자본주의적 재생산에 한계를 부여하는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엄밀한 의미에서 자본주의 위기란 자본의 위기이며, 이는 다시 말해 자본축적의 위기를 말하는데, 이 두 위기를 구별해야 하는 이유는 자본의 위기의 공간적 외연이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의 공간적 외연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 위기는 모든 자본의 위기가 아니라 항상 특정 자본의 위기가 다른 자본에는 기회로 나타나는 것이며, 따라서 이 위기는 모든 자본의 붕괴나 몰락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반면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는 자본주의 위기 자체와는 달리 매우 시공간 한정적이고 제도한정적이어서 그 위기가 진행되는 곳에서는 두드러지게 붕괴나 몰락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맑스를 다시 잘 읽어볼 필요가 있는데, 맑스에게 자본의 위기는 순환적 성격을 띤다. 물론 그것은 어떤 자본과 기존의 축적방식에 대해서는 폭력적 단절을 이루지만, 자본주의의 지속성과 관련해서는 붕괴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지속은 그 담지자로서 특정한 자본가 주체의 지속을 의미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구별하게 되면, 자본주의란 역사적 체계의 특정한 작동원리를 지칭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월러스틴이나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가 지적하듯이, 자본주의란 ‘끝없는 자본축적’의 원리이며, 맑스식으로 말하면, ‘잉여가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체계를 지칭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근대 자본주의’가 되어서 특정 사회의 지배적 원리가 되려면 이 체계의 원리를 작동시킬 최소한의 역사·제도적 조건이 필요해진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맑스의 『자본』 서술은 매우 특징적이다. 『자본』은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로서 작동하는 원리를 보여주고자 하는데, 그럼에도 이 원리는 근대사회가 만들어낸 특정한 조건하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는 시기구분을 전제(즉 단순 상품생산과 구분되는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쟁점)한다. 이 최소한의 조건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노동력을 상품으로 만드는 역사적 조건이 첫째이고, 화폐-신용-금융의 체계가 하나의 질서로 구성되는 역사적 조건이 둘째이며, 비자본주의적 체계의 일부로서만 존속했던 전근대적 자본주의와 구분되는 근대적 자본주의의 공간적 특성인 ‘세계경제’가 그 셋째 조건이다. 『자본』은 이 세가지 최소한의 조건(아직은 충분히 역사특수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인)을 전제로 한 시공간 속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원리와 동역학에 대한 규명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그런데 현실의 세계에서 이런 자본주의의 원리가 실제로 작동하려면 역사·제도적 조건이 훨씬 구체적으로 확장되어야 하며, 또한 그 조건들은 시기적으로 상이한 형태로 나타나고 진화할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국가, 산업, 고용방식, 계급갈등의 조절, 법률적 장치, 이데올로기적 형태 등 다양한 조건으로 분화하며, 그 특징들 속에 뿌리내려 구체적으로 역사성을 지니는 자본주의가 될 것인데, 이것이 우리가 월러스틴이나 아리기 등의 연구를 통해서 이해하게 된 ‘역사적 자본주의’라는 대상이다.2)제도적 조건이라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모양새와 분리되어 설명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 조건들로 환원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논의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자본주의라는 원리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특정한 조건과 분리되어서는 성립하고 작동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뿌리내린 역사·제도적 조건의 위기가 심화하면 그와 더불어 몰락하기보다 새로운 역사·제도적 조건으로 그 뿌리를 옮겨서 다시 생존과 재생산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선 시기의 역사·제도적 조건에 뿌리내리고 있던 특정 세력의 몰락이 곧 자본주의의 몰락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역사·제도적 조건도 두 층위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최소한의 추상적인 형식조건인 ‘역사·제도적 조건 1’(노동력 상품화, 화폐의 제도화, 세계경제)과 역사적 자본주의가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바탕인 ‘역사·제도적 조건 2’(현실조건)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발생한 위기와 그 효과에 대해서도 구분을 요구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가 목격한 역사적 상황에서 자본주의 위기는 그것이 뿌리내린 역사·제도적 위기를 증폭시켰고, 그것이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를 심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를 곧 자본주의 위기라고 여겼을 것이고,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 곧 자본주의 위기의 해결이라고 혼동했을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 곧 삶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삶이 제대로 돌아가고 재생산되고 이어지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을 첫번째 근원이 되는 위기인 자본주의적 위기가 극복되고 재생산이 지속될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그 위기의 극복을 자본(주의)의 위기의 극복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현실에서 이 둘 사이의 차이점과 연결고리가 인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본의 위기는 자본의 힘만으로는 극복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그 위기가 극복되는 것은 이처럼 그 위기로 피해를 겪는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순환을 되살려내는 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는 서로 다른 구조와 공간이 얽혀 있는 문제로 제기되어야 할 것이고, 그것에 대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상정되어야 할 공간의 위상학적 복잡성도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어야 한다. 이것은 점점 더 관심을 얻고 있는 ‘사회적인 것’에 대한 질문이며,3) 그와 관련해 맑스가 제기하는 독특한 입장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인 것’이라는 질문은 경제와 사회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서 출발하는데, 이때 ‘정치경제비판’의 관점에서 ‘사회적인 것’이라는 질문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맑스의 입장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경제〓사회적 관계’라고 보는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 드러나는 장소에서는 사회적인 것의 기원을 찾을 수 없다고 보는데, 이런 관점이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서로 얽힌 복합적 위기구조에 대한 이해와 관련해서 중요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장소에서 좀더 심층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정리해보면,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가 심화하더라도 자본주의 위기는 극복되어 자본주의는 당분간 재생산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이후를 구상하게 되겠지만, 위기에 대한 우리의 실제 대응방식은 그것이 자본주의를 위해 새로운 역사·제도적 공간을 정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자본주의가 더이상 뿌리내리기 어려운 방향으로 역사·제도적 조건들을 변환시킬지의 분기를 낳게 될 것이다.

 

 

4. 20세기 ‘발전’의 위기

 

자본주의 위기와 맞물리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의 역사·제도적 특이성이 중요하고 그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세계체계의 20세기적 이례성 또한 중요해지는데, 우리는 특히 ‘발전’ 담론에서 그 문제를 확인해볼 수 있다.

19세기와 비교해보면 20세기에는 몇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나타난다. 우리가 21세기 상황에서 그것이 이례적이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모든 면에서 후퇴가 발생했고, 이 후퇴가 단순히 일시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두가지를 들어보자면, 탈식민지체제의 형성과 제3세계의 부상이 하나고, 조직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노동의 힘’의 강화가 또하나다. 비서구세계가 민족국가 공동체의 성원으로 인정받고, 이 국가들이 ‘발전’의 주체로서 잇달아 공업화의 길에 들어서서 경제성장을 주도해갔다는 점, 그리고 서구와 비서구 많은 곳에서 노동자계급의 조직적 역량이 성장하고 사회적 힘이 커져 여러가지 방식으로 과거에 비해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는 점이 20세기를 발전의 시대로 규정지은 핵심적 특징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배경에는 민족국가 단위로 구성된 국가의 중요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 ‘제3세계’라는 지칭 자체가 소멸해버린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발전’의 핵심주체들 자체가 반()붕괴 상태에 이르렀고, 조직된 중심을 발견하기 어려울 만큼 ‘계급’으로서 노동자들이 지니는 ‘노동의 힘’도 구조적으로 약화되고 있다는 면에서, 앞선 20세기 ‘발전’ 시대의 중요한 특징들은 점차 과거 역사가 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20세기의 주요한 특성들이 누적적으로 ‘진화’해온 것이 아니라, 이례적 특성으로 한시적으로 지속되다 그 기반이 약화한 후 신속하게 무너졌던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된다. 그것이 자본주의 위기 자체는 아니더라도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의 핵심적 특징을 구성하고 있다.

이 쟁점을 좀더 파고들려면 우리는 20세기를 발전의 시대로 만들었던 몇가지 전제에 대해 재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20세기의 자본주의는 그것이 뿌리박은 특정한 역사적 제도와 그것을 지탱한 관념적 구조물 위에 성립되었는데, 이 관계는 단순히 기능적인 것은 아니었고, 특히 20세기를 ‘인민의 세기’로 만든 특정한 정치적 조건에 의한 규정성이 매우 컸다. 이 때문에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가 발전이라는 관념과 떨어질 수 없었는데, 지금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하에서 이 양자의 관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자본주의’라는 개념 자체와 연관된 진보-팽창의 신화라는 쟁점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20세기는 ‘발전’과 자본주의를 동의어로 생각한 시기인데, 과연 이 전제가 타당한지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문제가 되고 있다고 보인다. 20세기에는 반주변뿐 아니라 주변부에서조차 국가장치가 일정한 확장적 지속성을 지니면서 등장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누적적 팽창〓발전’이라는 착시현상을 안겨주었다.

둘째, 월러스틴이 이야기하듯 근대세계체계의 ‘지구문화’가 자유주의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더욱 중요한 것은 19세기의 ‘문명적 자유주의’로부터 20세기에 ‘발전자유주의’라는 틀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이 또한 ‘국가’의 중요성이 커진 자본주의 시대와 다시 연결되는 쟁점이다. 자본주의 세계가 비서구 주변부를 자유주의의 틀로 포섭할 수 있느냐는 체계 팽창의 지속성과 관련해 매우 핵심적인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발전의 위기는 곧 자유주의의 위기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 또한 이해된다.4)

셋째, 반주변과 주변부가 세계체계의 핵심구조였다고 할지라도, 종속이론의 등장이 보여주었듯이 그것을 쟁점으로 만든, 민족국가에 기반한 ‘주체들’이 등장한 것은 20세기적인 특징이었다. ‘저발전의 발전’에 대응하는 전략으로서 ‘궤도이탈’(de-linking)이나 사회주의적 발전이 함의하는 따라잡기 전략의 전망이 가능했던 것도 이런 주체들의 등장과 관련이 있었다.

넷째, ‘발전’은 비서구 주변-반주변이 근대적인 ‘사회적인 것’의 영역으로 포섭되어가면서 형성된 쟁점이었다. 발전을 동반한 변화가 진행되면서 식민지를 겪은 ‘후기-후발’사회와 서구의 ‘후발’국가 사이의 차별성이 흐려졌으며, 변형된 근대화론이 다양한 외양 속에 지속될 수 있는 배경이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근대화론에 대한 도전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었듯이, ‘제3세계적인 사회적인 것’은 중심부와 다른 특성을 보였기 때문에 서구와 비서구의 발전관념을 같은 평면에 놓고 비교할 수 있을지 의문시되었다.

다섯째, 이 모든 전환의 중요한 정치적 배경으로, 20세기가 사실상 ‘인민주권’의 도전하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20세기의 출발점이 혁명과 파시즘 논쟁으로 시작했고, 그 세기의 마지막에 우리가 다시 자유와 평등의 외양 하에 나타나는 ‘폭민(暴民)’이라는 아렌트(H. Arendt)의 질문이 두드러지는 상황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이 배경에 깔린 ‘인민주권’이라는 질문, 그리고 그 위험성의 거세를 향한 부정적 진화의 길의 질문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세기 동안 니체에서 폴라니(K. Polanyi)를 거쳐, 아렌트와 푸꼬(M. Foucault)에게서 상이하게 반복되어온 질문은 대중의 역능(力)이 어떻게 제어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사실 혁명과 발전의 시대의 곤경이 숨어 있는데, 거기서 우리는 단적으로 자율적인 대중과 구조변혁 사이에서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난점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혁명적’ 노력은 한편에서 대중을 역사변동의 자율적 주체로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을 추진한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 이 노력은 자율적 주체가 형성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적 제약의 변혁을 필수적으로 전제한다. 한쪽은 다른 한쪽을 조건으로 삼지만, 그렇다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구조가 변혁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대중의 자율성은 더욱 제약되어 비틀린 방향으로 나아가기 일쑤였고, 자율적으로 변화한 듯 보이던 대중은 구조를 변혁할 입구를 찾지 못하고 길을 잃기 일쑤였다.

 

 

5. 이행과 혁명

 

우리는 지금까지 ‘자본주의 위기’가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와 다르다는 것, 그다음으로 자본주의와 그것이 20세기에 뿌리내린 역사·제도적 조건인 발전이라는 관념이 서로 연관되지만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 또한 살펴보았다. 이런 모호함과 복잡함은 자본주의 이후라는 질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또는 공산주의)라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자본주의가 20세기적 특징을 가진 것도, 그리고 자본주의 위기가 마치 조절될 수 있을 듯이 보인 것도 모두 20세기 역사적 사회주의의 존재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주의운동과 현실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궤적을 변형시켰을 뿐 아니라, 반대로 자본주의도 사회주의의 궤적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이념과 관련해 모호하고 복잡한 유산을 만나게 된다.

다시 되돌아가서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의 데를루기얀의 글을 읽어보자. 데를루기얀은 소련의 역사를 지정학적·역사적 특성과 연결시켜 설명하려 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가 끌어내는 교훈은 소련의 경험이 자본주의 이후의 양태를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위기가 전개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핵심은 자본주의 위기와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가 맞물리는 방식이 지정학적 특성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소련과 중국의 차이 또한 이 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이 접근은, 현실사회주의가 처음부터 변절/변질될 수밖에 없었다거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또다른 변종이었다거나 또는 전체주의에 불과했다거나 하는 주장은 아니다.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에 대한 대응을 통해 그 위기가 발생한 경계 내의 시공간 구조를 변형시킬 수 있으나, 그것이 그 자체로 자본주의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이는 자본주의가 뿌리내릴 전지구적 시공간에 새로운 제약을 부여할 수 있겠지만, 자본주의 위기가 역으로 전지구적 시공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편함으로써 극복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편된 시공간은 되돌아온 자본이 원활한 재생산을 위해 새롭게 뿌리내리는 토양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 주장으로부터 이행과 혁명의 변증법이 아포리아로 전환된 역사를 읽어낼 수 있다. 소련도 중국도 그 전개과정은 분명 ‘혁명’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쳤지만 그것이 이행, 즉 자본주의를 넘어서 그와 다른 체계로 도달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사후적으로 보자면, 월러스틴의 지적처럼 이행은 세계체계 수준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행기(과도기)를 거쳐 혁명의 완성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통해서 이행으로 나가는 것이어야 한다면, 여기서도 우리는 두개의 위기관념이 문제가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에서 자본주의 위기는 이행의 장소일 것이고, 이행을 통해서만 진정 그 위기의 근원은 지양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을 또한 우리가 이행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것이 캘훈이 월러스틴이나 콜린스에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몰락이나 붕괴가 있더라도 자본주의는 곧바로 사라지지 않고, 다만 오랜 기간 천천히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그것이 이행이다. 이에 비해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는 우리가 혁명이라는 관념을 통해 개입하려 해온 장소라고 할 수 있다. 혁명은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의 영향 속에 있는 제도들을 전복하거나 개편하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에 역으로 제약을 가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역사적 제도들 없이 자본주의의 재생산은 오래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드러난 바는, 이런 제약을 통해 약화되고 무너진 것이 자본주의가 아니라 현실사회주의였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위기하에서, 그것을 존립시킨 ‘역사·제도적 조건 2’(현실조건)의 변형이 ‘역사·제도적 조건 1’(추상적 형식조건)에 어떤 변형을 가져올 것인지가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에 대응할 시공간의 재편 노력은 매우 취약해졌고, 이것이 위기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만들고 있다. 극복하려는 위기는 대체 무엇이며, 거기서 바꾸려 하는 역사·제도적 조건은 무엇이고, 그 결과 예상되는 구조적 효과는 무엇인지 분석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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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매뉴얼 월러스틴 외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 성백용 옮김, 창비 2014.

2)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I-III, 김인중 외 옮김, 까치 1999; 조반니 아리기 『장기 20세기』, 백승욱 욺김, 그린비 2014(개정판); 백승욱 『자본주의 역사강의』, 그린비 2006.

3) ‘사회적인 것’이라는 질문은 근대시기에 와서 서로 다른 개인들이 동시에 어떻게 서로 연결된 특정한 사회적 관계 속에 놓일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인데,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란 달리 해석하자면 우리에게 익숙했던 ‘사회적인 것’의 위기로 해석될 수도 있다.

4) 또한 여기에는 좌파에게 늘 은연중에 존재하는 ‘리버럴에 대한 숨겨진 의존’과 다른 한편에서 리버럴과 결별했을 때 나타나는 보수주의와의 결탁(공산주의는 아닌, 보수적 사회주의)이라는 문제가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