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강지희 姜知希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동물성을 가진 ‘식물-되기’」 「장르의 표면장력 위로 질주하는 소설들」 등이 있음. iskyyou@hanmail.net
신용목 愼鏞穆
시인.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가 있음. 97889788@hanmail.net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 『소설의 고독』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이 있음. myosu02@hanmail.net
정홍수(사회) 안녕하세요. 2015년 한해, 신용목 시인과 함께 ‘문학초점’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번 봄호의 초대손님은 요즘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평론가 강지희씨입니다. 두분 반갑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상작을 고르는 일부터가 만만치 않았는데요, 사전 논의를 통해 김인숙(金仁淑) 장편 『모든 빛깔들의 밤』(문학동네 2014), 권여선(權汝宣) 장편 『토우의 집』(자음과모음 2014), 김희선(金希鮮) 소설집 『라면의 황제』(자음과모음 2015), 김희업(金熙業) 시집 『비의 목록』(창비 2014), 이제니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문학과지성사 2014), 성동혁(成東爀) 시집 『6』(민음사 2014), 이렇게 여섯권을 선정했습니다. 일단 두분의 간단한 인사말씀 듣고 시작하는 게 어떨지요.
신용목 네. ‘문학초점’에 참여하면서 걱정이 많았던 게 사실인데 두분 뵈니까 마음이 놓입니다. 앞으로 정홍수 선생님과 함께 초대손님으로 오시는 분들이 작품의 문제성을 세심하게 짚어주실 것이라 믿고, 저는 부족한 대로 최대한 솔직하게 제 독후감을 말씀드리겠다는 것으로 첫 인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강지희 작년부터 이 코너를 재미있게 읽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함께할 수 있어 기쁩니다. 그동안 소설 쪽으로만 평론 활동을 해온 터라 공식적으로 시집을 평한다는 것에 조금 부담을 안고 왔는데요. 든든한 두 선생님께 기대어 오늘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김인숙 장편 『모든 빛깔들의 밤』
정홍수 김인숙의 장편부터 이야기해볼까요? 백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대형 기차사고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아기를 구하지 못하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의식과 함께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앓고 있는 아내 조안, 그리고 아내를 보살피며 치유를 돕는 남편 희중의 이야기가 서사의 중심에 있는데, 소설이 진행되면서 희중을 포함한 주변인물 모두가 이 고통의 이야기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죠. 희중이 유년기에 저지른 작은 거짓말 한마디가 죄의식의 기원으로 자리잡고 있으면서 전혀 동떨어져 보이는 사건들이 연결되고, 인물들은 얽혀 있습니다. 그 얽힘 속에서 용서를 구한다든지 애도를 한다든지 하는 과정이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을 때 봉인되고 억압된 것들이 귀환하는 거대한 악몽의 서사가 펼쳐집니다. 제 의문은 이겁니다. 그 연루와 얽힘이 너무 지나치고 과장된 것은 아닌가. 그리고 모두가 유죄라는 상황을 만들면서 인물들 모두를 죄의식의 기원으로 데려가려고 한 작가의 문제의식이 역설적으로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으로 귀결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강지희 저도 비슷하게 읽었는데요, 처음에는 소설이 열차 전복사고와 관련해서 시스템에 총체적으로 얽혀 있는 문제들을 짚어주는 것처럼 느꼈어요. 그런데 중반부 이후 열차사고를 가족의 사적인 역사 속으로 너무 끌고 들어가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희중의 아버지가 성폭행 사건의 범인인지의 문제는 사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너무나 분명한 건데, 원인이 끝없이 확장되면서 가해와 피해를 규명하기 어려운 시스템 차원의 사건이라는 층위에서 다루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이 작품이 의미있게 느껴진 건, 세월호같이 많은 죽음들을 수반하는 거대한 사건 앞에서 문학이 이를 어떻게 마주하고 풀어갈 것인지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에요. 제 생각에 문학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시스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책임까지도 짊어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소설에는 희중뿐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가 죄의식을 안고 있더라고요. 희중은 어린 시절 자기가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아버지를 궁지로 몰았다는 죄책감이 있고, 조안의 동생 상윤은 자신이 저지른 사고를 수습해주는 누나에게 미안함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는 식이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미처 애도하지 못한 존재들이 오히려 일종의 위안이 되어 돌아온다는 점이었어요. 결정적인 순간마다 희중을 도와주는 우산을 든 신사가 희중의 아버지와 닮아 있잖아요. 그 신사는 희중을 사고현장에 데려다주기도 하고, 기억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해주죠.
정홍수 우산을 든 신사는 위안이 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죄책감 자체가 물질화된 어떤 환영 같은 것 아닌가요? 죄의식을 환기하고 그 기원으로 이끄는 소설적 장치로서 말이죠.
신용목 그 사건을 피하지 말고 대면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어떤 기만일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정면으로 부딪치라는 측면에서 궁극에는 위안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강지희 맞아요. 위안이라는 말이 단순하다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말로 바꿔도 좋을 것 같아요. 다른 예로 웹툰작가로 나오는 백곰에게 삼촌은 죄책감의 대상이지만, 일상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로도 나타나고 있거든요.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소녀도 처음 읽었을 때는 공포스러웠지만, 소녀의 웃음과 함께 날아가는 나비가 희중이 용서받았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신용목 대형사고로 대변되는 시스템 문제가 어느 순간 증발되고 작품이 관계의 문제로 치달아갑니다. 저는 오히려 그것이 작가의 의도는 아닐까 생각했어요. 시스템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고착된 시점에서 결국 서로를 상처와 고통의 원인이자 결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거잖아요. 모든 관계가 우리에게 ‘원죄’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했습니다. 목격자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는데요. 대관절 목격자는 무슨 까닭으로 그 사건에 운명적으로 개입되느냐는 거죠. 여기서 ‘본다’는 감각의 윤리성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도 있을 것 같아요. 세월호는 거대한 시스템의 부조리에 의해서 침몰한 것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일 뿐이지만 이 시스템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죠. 극단적인 말 같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정홍수 희중의 어린 시절 일어난 소녀 살해사건과 아버지의 연루 문제는 사실 명백하게 밝혀질 수 있는 일 아닌가요. 그 부분을 모호한 상태로 만들면서 희중의 죄의식을 해소되기 힘든 지점에 두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법적 책임이 가려지는 대목에서 더 나아가 죄책감이나 죄의 연루를 묻는 일이 문학의 몫일 테지만요. 작가는 우리 모두가 얼마만큼은 죄인이며, 그때그때 적절한 사과나 필요한 애도를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그 문제의식에는 충분히 공감하고, 그런 묵직한 윤리적 질문을 추리적 서사 속에 잘 녹여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그 연루와 엮임이 다소 작위적이고 과도한 느낌을 주면서 인물들이 품게 된 죄의식이 일종의 운명론적 순환에 갇힌 것처럼 보이는 것은 비판적으로 짚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용목 요즘 TV 연속극에서 인물 간의 관계가 작위적으로 얽혀 있잖아요.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기 위한 장치일 텐데, 한편으로는 대중에게 흥미를 유발하는 측면도 있어요. 모든 우연이 운명처럼 짜여 있지만 진실은 안개에 가린 듯 늘 부유하고 있어서, 써스펜스 같은 묘한 불안감과 긴박감을 주죠. 그런 요소들로 인해 운명론으로 흘러가는 듯하다는 말씀도 이해가 가지만, 책임의 문제를 소설이 꼭 완결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망을 보여줄 수 있다면 좋지만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이 현실에 비추어 더 작위적이지는 않는지. 사실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늘 그것이 고민이고 힘든 부분이기도 합니다.
강지희 두분 말씀처럼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무거운 책임의 굴레 속에 있지만, 한편 소설 안에서 어느정도 치유의 순간까지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득 자신이 간접적으로라도 가해자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순간에, 세계가 마법처럼 열리면서 존재들 사이에 따뜻한 관계망이 형성되는 거죠. 이 소설에서는 갈등하는 것으로 나오는 조안과 백곰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마지막에 백곰이 새로 웹툰을 시작하고 이를 조안에게 보여주는 장면은 그들 사이에 모종의 연대가 가능해지는 순간으로 보였습니다.
정홍수 언젠가부터 한국소설에서 ‘트라우마의 귀환’이라는 정신분석학의 담론이 인간 이해의 방식으로 공식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그 유효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고, 상처를 서사화하는 데는 썩 유용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작동하는 여러 다양한 변수를 일상의 흐름 속에서 가급적 전체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소설의 몫이라고 할 때, 트라우마의 서사에만 집중하는 것은 인간 이해의 폭을 좁히는 게 아닐까요. 이 소설에서 어느 지점에 가면 아내에 대한 태도를 포함해서 희중의 진술을 신뢰할 수 없게 되는데, 그 부분은 희중이 겪고 있는 죄의식의 혼란이 투영된 것으로서 이 작품의 묘미이기도 하죠. 그러나 약사로 살아가는 희중이 일상에서 버텨나가는 모습, 그리고 여타의 인간관계가 좀더 균형있게 다뤄지는 가운데 그런 혼란이 암시되는 것이 더 설득력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강지희 지적하셨던 문제가 한국문학의 취약점 중 하나일 수 있겠네요. 많은 한국소설에서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인물 대부분이 상당히 윤리적이에요. 하나의 사건을 두고서도 상징적인 악인이 나온다거나, 무심하게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외국문학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독자가 윤리적인 인물에게 감응하기를 원하는 작가들의 욕망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신용목 제가 시를 써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설에는 누구나 가지고 있으되 각자 어딘가에 숨겨놓은 특정한 증상들을 극대화해 보여주는 장면들의 배치에서 흥미로운 점이 많았어요. ‘비밀과 거짓말’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그중 하나인데요. 어떤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도, 사실과 다르게 말한다고 해도 모두 죄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우리는 의외로 쉽게 노출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소설에는 백곰을 찾아간 희중이 자신의 집에는 아이가 없다고 말하고 나서, 사고로 죽었으니 그 말이 사실인데도 아이를 부정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대목이 짧지만 강렬하게 그려져 있어요. 이처럼 트라우마를 겪었던 사람이나 특정한 부분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보이는 날카로운 증상들이 모든 인물에게서 뾰족하게 살아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정홍수 죄의식의 심연을 심문하고, 거기에 윤리적 시련을 부여하는 대목이 이 소설의 빛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그런 윤리에 너무 무감해져 있는 만큼 더욱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동시에 상처 입은 사람들 나름대로 일상을 견뎌나가는 방법이 있을 텐데, 그런 지점들을 찾아내서 보여주는 것도 작가의 임무가 아닌가 싶어요.
신용목 그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다만 일상성이나 흔히 ‘삶은 숭고하다’라는 명제가, 거대한 모포처럼 그 밑에 덮인 수많은 해골바가지들을 억지로 모르는 체하는 것은 아닐까. 삶이 균형을 유지하는 건 기어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일 텐데, 말씀처럼 일상에서 그것을 견뎌가는 인간의 모습도 중요하겠지만, 문학적 노력이 인간을 일상적인 삶 속으로 복귀시키거나 고통을 넘어서는 삶의 위의(威儀)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 또한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드는 거죠.
강지희 일본의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오(小津安二郎)나 고레에다 히로까즈(是枝裕和)가 그런 점을 잘 그려낸 것 같아요. 그들의 영화에서 가족은 상처와 죽음을 안고 있지만 곁에서 주로 나타나는 건 매우 일상적인 풍경이에요. 어느 순간 상처가 튀어나올 때도 있지만 어떤 슬픔이라도 세월의 힘에 묻혀서 희미해지고 마모되는 과정을 아름다운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저는 이 소설에서도 끝에 가서는 상처를 딛고 넘어서려는 안간힘이 느껴졌어요. 죄책감의 대상이 온화하게 바뀐 목소리로 남는다던가 도움을 주는 인물로 현현하는 것이 결국 그런 망각의 측면을 보여주려고 했던 건 아닐까 합니다.
권여선 장편 『토우의 집』
정홍수 권여선의 『토우의 집』 이야기로 넘어가볼까요. 1970년대가 배경입니다. 최근 지난 7, 80년대를 되돌아보는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당면한 현실에서 무언가 꽉 막힌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현실의 뿌리, 연혁을 되짚어 성찰하고, 망각된 것, 버려진 가능성들을 일깨우려는 게 아닌가 합니다. 『토우의 집』은 삼벌레고개라는 서울 변두리 산동네 이야기인데, 세태풍속을 다루며 한 소녀의 평이한 성장소설처럼 전개되다가 소녀의 가족에게 끔찍한 정치적 재앙이 닥치면서 소설의 톤이 확 바뀌게 됩니다. 그 대조랄까 낙차가 서늘하고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며 예전에 작가가 발표한 단편 「문상」(『분홍리본의 시절』, 2007)의 우정미라는 인물을 떠올렸습니다. 다섯살 때 아버지가 정치범으로 사형을 당했다는 이 여성은 권여선 소설 특유의 뒤틀린 인물이랄 수 있는데, “당신들은 모조리 죄인이에요! 나를 봐요! 당신들의 죄가 만들어낸 이 괴물을 좀 보라고요!”라고 외치죠. 그 소설의 현재에서 큰아버지가 죽는 것도, 이 작품 속 소녀 원의 양복점 큰아버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정신병원행 이후 원은 실어증에 걸리는데 이 소녀와 우정미 사이에 놓인 시간을 막막한 마음으로 생각해봤습니다. 『토우의 집』은 작가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테마가 아닌가 싶습니다.
신용목 인혁당사건이 배경이겠죠? 워낙 극단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소설에서도 다소 극단적인 서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겠지만, 정작 그 사건을 직접 노출시키지 않아서, 그런 종류의 폭력에 노출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여기서 아이의 시선이 주를 이루잖아요. 아이의 천진함과 대비시켜 이 세계의 적대와 모순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갈 줄 알았는데, 그 아이들이 상처 속으로 하나둘 빨려들어가더라고요. 상처를 다루는 방식이 내면적이고 서정적인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혼돈도 있었어요. 아이들의 서사와 어른들의 서사가 겹쳐지는데, 그로 인해 얕은 시선과 깊은 시선이 교차되는 게 왠지 익숙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읽다보니 오히려 그게 평면적인 마음의 결을 따라가는 것보다 어떤 정서적인 운동성을 부여하는 것 같더라고요. 정서의 입체감이랄까.
강지희 맞아요. 입체감이 있죠. 특히 이 소설에서 권여선의 특장이 빛난다고 느낀 부분은 순분이라는 인물을 그릴 때였어요. 권여선 소설에는 유난히 먹고 마시는 장면이 많이 나오잖아요. 아무리 지독하게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인간이란 먹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여기에 담기는 미묘한 치욕스러움과 결국 그게 살아가는 힘으로 변모하는 숭고한 순간을 누구보다 잘 그린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번 소설에서는 그런 생동의 힘이 순분을 통해서 드러났어요. 순분은 새댁네가 파탄 났을 때 마을에서 유일하게 그 가족에 동정을 베풀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냉정하게 선을 그어버리잖아요. 인간적으로 좋다 나쁘다 쉽게 말할 수 없도록 복합적으로 그려졌어요. 뒷담화를 하는 뻔뻔함에서부터 통렬한 죄책감까지 감정의 스펙트럼도 가장 넓죠.
정홍수 예, 정말 그렇죠. 새댁 캐릭터도 흥미로웠습니다. 순분네 우물집에 이사 오던 날, 새댁은 핸드백에서 펜과 잉크병을 꺼내 한자를 휘갈기며 등장하죠. 권여선은 이런 ‘배운 여자’를 그리는 데 정말 일가견이 있습니다. 소설 후반부에 남편이 끌려간 이후 너무 급격하게 무너지면서 생기를 잃어가는 모습이 더 안타까웠던 것도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상적인 건, 원이 국가폭력에 의해 상처를 입는 얘기만 있는 게 아니라 순분의 아들 은철이 다리를 다쳐 불구가 되는 이야기도 함께 나온다는 겁니다. 은철이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 이후 혼자 화장실에 가는 장면을 꽤 자세하게 그리죠. 우리는 은철이 앞으로 살아갈 시간도 생각하게 됩니다. 큰 고통, 작은 고통, 이렇게 고통을 나눌 수 있나 하는 생각도 하면서 말입니다.
신용목 요즘이야 좀 다르겠지만 과거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에게는 전쟁이나 정치적 폭력도 천재지변이나 마찬가지였겠죠. 이 소설에서 아이들에게 닥친 일들도 그렇겠고요. 그 고통을 지극히 순박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순분도 마찬가지예요. 순분이 새댁한테 호의를 가지는 게 자기의 고통을 통해서거든요. 그전까지는 냉소적이었죠. 자신의 고통을 통해서만 타인의 고통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극적 반전보다는 일상에서 오는 심리의 세부 묘사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좋았습니다.
정홍수 이 소설의 묘미는 그런 세부 묘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새댁이 돈을 구하러 동창을 찾아가는 대목이 생각나네요. 뜬금없이 “뜯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친구가 꺼내자 “뜯기는구나.” “뜯기지. 뜯겨도 이만저만 뜯겨야 말이지” 하고 대화를 주고받는데, 이런 장면은 권여선 아니면 못 그리겠다 싶게 뛰어납니다. 또 원의 아버지가 딸을 우물가에 묶어놓고 심하게 벌을 주죠.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길어져서 딸은 손톱이 깨지고 경기를 일으킵니다. 그 몇분이 나중에 자신을 체포하는 기관원이 주는 3분의 시간과 겹치는 대목도 그래요. 얼핏 사소해 보이는 지점에도 공평하고 균형있는 시선을 주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 분량이면 경장편이라 해야 할 텐데, 분량 때문인지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대목에서 멈춘 느낌도 있습니다.
신용목 그래서 인물들이 하나하나 다 살아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인물이 각자의 사연을 짊어지고 등장하는데, 아쉽게도 그냥 던져만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는 인물은 순분이 거의 유일하고, 나머지 동네 사람들은 조금은 박제된 것처럼 나오고 들어갑니다.
강지희 새댁네와 순분네에 대한 묘사가 나뉜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새댁이 원숭이 오백나한이나 효자효녀 이야기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준다면, 순분네 우물집을 지배하는 언어는 사실상 험담과 구별되지 않는, 풍문(風聞)의 언어들이죠. 이런 점과도 관련되는데, 이 소설 저변에 깔려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언어인 것 같아요. 말장난이나 노래가 참 많이 나오는데, 이걸 보면 작가가 언어를 매우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무엇보다 언어의 주술성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순분이 새댁네 시누이가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았는지를 신나게 떠드는데, 자신의 아들이 바로 그와 너무나도 비슷한 모습의 불구가 되는 것이 대표적이죠.
정홍수 새댁이 해주는 계란볶음밥 얘기가 아주 재미있게 나오는데, 「가을이 오면」(『분홍리본의 시절』)에도 옥탑방에서 편의점 햇반으로 김치볶음밥을 해먹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볶음밥이라는 코드가 작가한테 닿는 무언가가 있나봐요.(웃음) 또 『레가토』(2012)에서 헌신적으로 주인공을 보살피는 권보살은 이번 소설에서 무당집 운문원에서 공양내기로 일하는 뚱선할매와 겹치는 면이 있습니다. 작가의 기억 속 삽화나 인물이 이 소설에 스며 있다는 이야기겠죠.
신용목 『레가토』가 국가권력과 고뇌하는 개인의 문제에 집중했다면, 『토우의 집』은 국가권력과 생활공동체의 문제를 다루려고 한 것일 텐데요.
강지희 『레가토』에는 확실히 정연의 수난사가 서사의 중심에 있었죠. 『토우의 집』은 소설의 도입부터 삼벌레고개의 유래라든가 말라버린 우물 이야기 등을 통해 공동체에 대한 의식을 분명히하고 있어요. 마을의 인물들도 다채롭게 소개되고 있고요. 새댁네를 둘러싼 정치적 사건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생생하게 잡아내려고 했던 것 같은데, 공포에 짓눌려서인지 너무 단순화되어 있어 아쉬웠습니다.
신용목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정홍수 선생님은 저희보다 공감의 폭이 넓으실 테고, 강지희씨는 이 이야기의 실감이 어떤가요? 인혁당사건이라든가 80년 광주라든가 하는 이야기들이요.
강지희 저는 2000년대 중반 이후 대학생활을 시작했는데요, 입학했을 때는 이미 대학 내 운동세력이 많이 붕괴되어 있었어요. 우리 현대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의무감은 있었어도 선배들이 이를 학습시켜준다거나 시위현장에 나가 국가폭력을 직접 체감하게 되는 일은 거의 없었죠. 그래서 머리로는 알지만 선배들처럼 뜨겁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쩌면 저희 세대는 아버지가 정확히 무슨 사건에 연루된 건지 모르는 원의 인식과 유사할지도 모르겠네요.
신용목 저도 『레가토』와 『토우의 집』은 실감이 다르더라고요. 90년대 초반 학번인 저는 『레가토』만 하더라도 위 선배들이 겪었던, 직접 전해들은 생생한 경험담처럼 느껴졌는데, 따지고 보면 2차 인혁당사건은 80년 광주와 6년 차이밖에 안 나는데도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져요. 그건 사건에도 소설에도 모두 적용되는 건데, 두 사건을 외형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안될 일이지만, 규모와 충격 면에서 차이가 있어서 그런가 생각도 했어요. 여기 나오는 원이 저보다 겨우 예닐곱 많은 인물인데도 옛날 사람처럼 느껴지는 거죠.
강지희 하지만 80년 광주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역사적 평가가 이뤄졌다는 생각이 드는데, 인혁당사건은 2012년에 한 정치인이 대법원의 재심 무죄판결을 부인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잖아요. 오히려 더 시의성이 강한 문제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작품에서 이 사건이 좀더 전면에 드러나도 좋았을 것 같아요.
정홍수 80년 광주는 저한테 바로 어제의 일처럼 가까운데, 인혁당사건은 제게도 좀 멀게 느껴집니다. 권여선은 저랑 비슷한 세대인데, 아마도 원의 시점이 작가가 정직하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작가의 말’에서 쓴 “어린 고통”이라는 말이 그 이야기인 것 같고요.
김희선 소설집 『라면의 황제』
정홍수 일본의 평론가 후꾸시마 료오따(福嶋亮太)의 『신화가 생각한다』(김정복 옮김, 기역 2014)를 보면, 리얼리티가 생겨나는 지점이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말이 나옵니다. 인터넷 네트워크 문화 속에서 정보가 모의실험(simulation)되고 피드백되는 가운데 리얼리티가 결정된다는 이야긴데요, 무제한의 정보는 그 과정에서 ‘신화’(문화의 정보처리 방정식)를 통해 감축되고 걸러진다는 겁니다. 『라면의 황제』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 작가가 이런 차원의 리얼리티 생성의 메커니즘에 아주 익숙하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메커니즘을 메타화한다고 할까, 패러디하면서 자신의 소설 쓰기 전략을 구축하고 있는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소설의 화자가 대개 삼류 미스터리 잡지의 기자들인데, 어쩌면 우리가 매일 인터넷에서 접하는 많은 글들이 이런 형태가 아닌가 합니다. 주류 언론의 기사도 사실 별반 차이가 없고요. 그 서사의 바닥에는 일종의 음모론 같은 게 흥미를 위해 작동하고 있죠. 김희선은 그 메커니즘을 그대로 가져와서 음모론이나 외계인 같은 상상력을 매개로 이야기를 증폭시킵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소설문법을 알려주는 자기지시적 층위를 중간중간 끼워넣어 일종의 메타소설적 측면을 확보해내고 있습니다.
강지희 작년에 소설과 관련된 많은 담론들이 한국소설 안에서 이국(異國) 공간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가를 조명했는데요. 그간 무국적의 이야기를 논할 때 주로 예시된 작가가 천명관(千明官)이나 박민규(朴玟奎)였죠. 그런데 김희선은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와 맞닿는 지점을 흥미롭게 보여줍니다. 한국 안에서도 소외되어 잊혀진 인물이나 변두리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세계사에서도 메가톤급으로 중요한 사건과 맞물려 새로운 서사를 교직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기존의 거대담론을 해체하고, 더 나아가 세계와 지방의 이항대립적 위계도 넘어서고 있죠. 그런 점에서 「지상최대의 쇼」를 재밌게 읽었어요. 한국에 비행접시가 나타났다는 뉴스를 보고, 미국 퇴역소방관협회에서 『재난 시 소방관 행동규정』을 보내주지만 결국 그 책은 도서관 서고 구석에 방치된다는 이야깁니다. 이전에는 미국이라는 존재가 수퍼히어로로서 세상을 구하고 모든 나라를 선도해나갔다면, 이제 그런 위계가 무너지고 우스워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죠. 「페르시아 양탄자 흥망사」에서 진품과 모조품의 위계가 해체되는 것 역시 유사한 지점을 건드리고요. 그런데 모든 위계가 다 사라졌어도 가장 공고한 질서 하나가 남아 있는데, 그 뼈다귀가 바로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질서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이 질서하에서는 다른 나라의 소소한 문화들은 질식해 사라지고, 마트 옆 구멍가게 역시 몰락할 수밖에 없죠. 거대 역사와 담론을 유쾌하게 해체하면서도, 다 해체해버리지 않고 중요한 건 비판적으로 남겨두는 방식이 소설을 매력적으로 만들었어요.
신용목 김희선의 작품들이 여타 소설과 다른 지점이 있다면, 근저에 있는 어떤 건강한 유물론적 현실감 아닌가 생각했어요. 외계인이나 음모론에 맞닥뜨리면서도 당장 눈앞의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든가 하는, 현실적인 생활감각과 관련된 고민을 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니까요. 문제는 완성도 면에서 적잖은 편차를 보인다는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주인공이 쟁기를 들고 탱크를 부수는 한장의 사진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사람은 농부가 아니라 장사꾼인데도 쟁기를 들고 있고, 이 사람이 부숴야 할 것은 마트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인데 그걸 탱크로 대체한 데서 묘한 아이러니를 느꼈어요. 그것이 인식의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구사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실제로 작가가 그리고 싶은 것은 음모론의 연장일 수도 있는데, 정확히 그 이유가 드러나진 않지만 생계의 차원이 된 일들을 신화로 환원하려는 욕망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사유의 운동성 같은 게 서사 뒤편에 남아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작품들은, 말씀하셨듯 주변과 중심을 흩어놓고 알레고리로 세계의 모순과 아이러니를 재차 환기시키는 것은 좋지만, 그 속에 인간의 얼굴이 조금은 더 들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알레고리화해서 인간의 내면을 배제한다 하더라도 내적 갈등이 야기하는 예측할 수 없는 행동들이 있을 텐데, 그것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지나치니까 조금 뻔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강지희 저는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부분 역시 놓치고 있지 않다고 봤어요. 「교육의 탄생」을 보면, 소련에서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하고 싶었지만 엉뚱하게 나사(NASA)에서 ‘우주 무의식’을 연구하는 레오니드 몰로디노프라든가, 영재로서 민족중흥의 꿈을 안고 나사에 입성했지만 결국 수학기계처럼 사용된 주인공이 나오죠. 거대한 체제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한 개인의 씁쓸함이 묻어 나오면서도, 그 둘을 만나게 함으로써 모종의 우정을 형성하는 따뜻함이 있었어요. 물론 권여선이나 김인숙의 소설처럼 인물의 내면으로 파고들어가 탐구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서사 교직의 폭이 넓고 활달해지는 부분이 있잖아요. 우리가 새로운 매체를 통해 세계와 접촉하는 방식을 즉물적으로 잘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정홍수 탈내면적 상상력의 계보와 닿는 부분도 있을 텐데요, 내면 탐구에 대한 회의도 있겠지만 일부러 깊이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여백을 남기는 방식처럼 읽혔습니다. 인물들이 사태에 즉자적으로 반응하는 상황이, 그 인물에 대한 희비극적 연민을 끌어내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거대담론이나 이항대립, 위계의 해체 뒤에도 어떤 공고한 질서를 남겨둠으로써 비판적 시선을 확보한다는 견해는 조금 과찬인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남는 지점이 통상적으로 이미 우리가 알고 느끼는 지평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측면에서요. 오히려 이 작가가 취하고 있는 알레고리적 서사나 음모론적 장치가 부분적 세태 풍자나 비판 이상으로 소설을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지희 동의하는 지점이 있어요. 자본주의 비판이나 이항대립의 해체 자체가 이 서사들의 핵심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에도 작가가 서사를 교직하면서 그런 지점에 대해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체제의 유연성이 모든 차이와 변화를 다 이해 가능한 것으로 포용함으로써 정치가 문화화되어가는 지점을 서사의 구조로서 접근한 것은 아닐까요. 거의 모든 사건에 액자 바깥의 화자가 사후적으로 개입하며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그들이 아마추어 역사학자라든가 삼류 기자라는 게 재밌잖아요. 한발 뒤로 물러나 간접적으로 혹은 아마추어적인 입장에서 사건을 기술하는 이런 접근방식 자체가, 매체를 통해 느슨한 고리로만 이어져 있고 사실상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우리 현실을 오히려 제대로 보여준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정홍수 저는 그 지점이 양날의 칼이라고 봤거든요. 현실의 리얼리티가 문화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새로운 양상을 반영하고 패러디하면서 확보하는 비판적 층위는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그 이상 나아가는 지점은 잘 모르겠더군요. 그런 비판의 방식이 소설 자체를 제약하는 측면이 있고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지다가도 결말에 이르면 액자 바깥에서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는 식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까닭 같습니다. 저는 그보다는 이 작가가 ‘이야기’ 혹은 ‘진실’의 소통 방식에 대해 갖고 있는 자의식이 인상적이었고, 거기서 더 새길 게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경이로운 도시」의 주인공 후안 곤잘레스가 자신의 기막힌 인생사를 방어하면서 반문하는 대목, “자기들이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흐름이란 게, 현실에선 가장 말도 안되고 엉성한 스토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같은 지점. 서사에서 우연이나 곁가지 이야기를 복원하는 작업을 의뭉스럽게 밀고 나가는 데 이 작가의 특장이 있다고 봤습니다.
신용목 판단이 쉽지 않은데요. 저는 오히려 이 작가가 애초부터 그런 거대담론을 배제한 상태에서 소설 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정홍수 선생님이 말씀하신 삼류 기사물에 대한 비유를 제 독후감의 부정적인 뉘앙스쯤으로 가지고 있기도 했는데요, 그냥 흥미만을 좇는 이야기는 아닐까 하고요. 물론 이 소설들이 의미있는 지점까지 도달하려면 좀더 깊이 성찰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처음 느꼈던 부정적인 면을 작가의 장점으로 끝까지 가져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계에 대한 거절이나 부정이 아니라, 애초에 그것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정홍수 이야기의 직조 방식에서 인상적인 또 한편의 작품이 「어느 멋진 날」이었습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상상하며 소설을 쓰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의 한 소년 이야기가 나오는데, ‘기시감’의 모티브를 매개로 물리적 거리를 넘고 서로 닿을 것 같지 않은 우연들을 엮으면서 이야기를 빚어나갑니다. 언어를 통해 사람의 무의식에 침투한다는 아이디어는 이 작가가 이야기, 혹은 소설에 대해 갖고 있는 자의식의 암시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강지희 맞아요. 그런 점에서 음모론적 상상력이 지나치게 전면화된 「개들의 사생활」보다는 독특한 연결지점에 대한 아이디어로 승부를 본 다른 작품들이 훨씬 재미있어요. 때로 거대역사 너머에 복원된 개인의 형상이 너무 왜소해 보이거나 세계가 지나치게 평면화된다는 우려가 들기도 했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목할 작가 같아요.
김희업 시집 『비의 목록』
정홍수 시 이야기로 넘어가볼까요. 기본적으로 김희업의 시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문법, 그리고 리얼리즘의 시선 안에서 씌어집니다. 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시는 「통증의 형식」이에요. “생각하지 않으면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처럼 이면에서 화자가 겪었을 고통과 통증을 구절구절 되짚게 만들더군요. 그러나 그것뿐이었으면 평이한 시로 그쳤을 수도 있을 텐데, 마지막 두 연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오늘도 추운 곳에서 빙하가 녹는다 진리처럼 모순처럼/따뜻한 통증을 동반한 채”라고 담담하게 말하는데 한참을 생각하게 되더군요. 빙하가 녹는다 하더라도 그곳은 이미 추운 곳일 텐데, 이 모순이자 진리가 정말 새삼스럽더라고요. 통증의 한가운데에서 그 통증의 소멸을 정말 간절히 기구해본 사람만이 가능한 인식일 테지요. ‘따뜻한 통증’도 엄연한 통증이라는 점에서 이 깨침은 정확하지만 다시 아픕니다. 그래서 마지막 연에서 “언젠가 상쾌할 거라는 가설은 미완성으로 남겨놓는다”의 ‘미완성’의 울림이 더 커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문제는 우리 시대의 화두이기도 할 텐데, 그런 맥락에서 두번째 연의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세상에 존재하듯/아프고 안 아프고의 차이는 아픈 차이” 역시 무심한 듯 그 공감의 한계지점을 되새기게 해줍니다. 한편 서시 「에스컬레이터의 기법」에서 “30도의 기울기”를 두고 먼저는 “마음이 먼저 쏟아지지 않는 경사”라고 했다가 뒤에 가서는 “기울어진 생계를 떠안고/마음이 쓰러지지 않게”로 받아주는 긴장의 리듬도 좋았습니다. 그랬기에 “흙이 묻지 않는 보법으로 반복되는 생성 소멸”이 거창한 느낌을 덜고 일상의 단단함을 움켜쥘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거슬러 오르는 멋진 오류는 연어의 일”이나 “꼭 그만큼만 보여주는 생의 짧은 치마” 같은 데서 느껴지는 위트도 쓸쓸하면서도 여운이 깊었고요. “그곳이 화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날카롭게 포착한 「모서리의 사랑」의 ‘모서리’가 이 시인의 고유한 좌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강지희 문법적으로 세련되기보다는, 일상의 자리 곳곳에서 발견되는 운동성을 예민하게 포착하면서 공감의 폭을 넓히는 시인 같아요. 이 운동성은 「에스컬레이터의 기법」이 보여주는 것처럼,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매일 기계적으로 작동하고, 어떤 도약이나 초월 없이 공회전하는 것이죠. 말씀하신 “흙이 묻지 않는 보법으로 반복되는 생성 소멸”이란 구절이 잘 보여주듯, 끊임없이 본래 자리로 돌아오는 운동 속에서 굳이 거슬러 올라가거나 내려가지 않고 이 현기증을 감당하는 삶의 의지 같은 것이 담담하게 드러나고 있어요. 시집 곳곳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고단함이 눈에 띕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새’를 다루는 시편들이었어요. 기존의 서정시들에서 새란 대개 자유로움의 상징으로 통용되었던 것 같은데, 여기선 “앉지 마라/착지가 너희를 불안케 하리라”(「철새들의 본적」)라고 쓴다거나, “바람의 계시를 받으러 가는” 새가 “매번 운임도 안 나오는 빈 하늘 싣고” 날개짓 하면서 힘겨운 노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그린다는 거예요. “살처분된 가금류들”은 지금 “날개를 땅속에 파묻고 파업 중이시다”(「새」)라는 표현도 있고요. 새가 일상으로부터 떠나 있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자신과 유사하게 생계를 위해 노동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기존의 서정시를 배반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용목 말씀하셨듯이 문법적으로는 조금 낡은 것도 사실인데, 「통증의 형식」 같은 시를 마주하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허물어졌어요. 아무리 낡은 형식이더라도 생의 극점을 치고 나가는 순간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다시 했습니다.
시의 문법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자면, 「모서리의 사랑」에서 결론은 좀 뻔한 면이 있습니다. “그리하여/그리하여/모서리의 중심이다”라는 진술은 인식으로 사물을 포괄하는 전통적 기법에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점들이 엿보이기도 하는데요, 같은 시에서 모서리가 중심으로 되기까지의 과정을, 모서리가 “화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전통적인 문법을 구사하는 시들이 하나의 사물에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심상을 확장해간다면, 김희업의 시는 사물에 덧씌워질 수 있는 의미를 부정하면서 가고 있어요. 자기의 고통을 승화시키려고 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합니다. 고통을 고통 자체로 가지고 있을 뿐, 구도나 구원으로 연결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다보니, 흔히들 자아를 대상에 기입하는 것으로 시를 완성하는 것과 달리, 김희업의 시는 자아가 대상에 의미를 기입하는 순간 자아에게도 대상이 기입되는 지점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내 고통이 저 빙하에 닿고, 빙하의 비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내가 있는 곳까지 추운 곳이 되는 역전환이 일어나는 것이죠. 한편으로는, 미래파 이후의 논의들이 전통 서정시의 문법을 대타항에 위치시킴으로써 그 특성을 부정적으로 고착화한 것과 달리, 전통적 문법들도 자신의 방향을 지속적으로 변화·발전시켜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뻔하다고 여겼던 시들에 대해서도, 동일성의 원리나 자아의 성격만으로 단순화할 수 없는 운동성을 세밀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지희 그러고 보니 「양들의 침묵」 같은 시편이 다시 읽히네요. 잠을 못 이루고 양을 세는 것은 고통을 묵묵히 눌러 내리는 시간일 텐데, 이 시 마지막에 보면 “내일은/오늘 센 양의 수와 또다를 겁니다”라는 의미심장한 구절이 나와요. 언뜻 사라지는 양에 대해 연민의 감정이입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그보다는 내일도 똑같은 고통이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처럼 보이네요. 고통을 승화시키거나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 아니라, 고통을 고통 자체로 직면하겠다는 의연함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신용목 「양들의 침묵」에서 마지막에 달라지는 것이 물리적인 숫자만은 아니듯, 그것을 시대를 대하는 자세로도 바꾸어 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더불어 “나무들 잎을 끄고 소등한 채로 겨울 채비에 나선다”로 시작해서 “전원을 끄지 않은 채 기다리기로 한다”로 끝나는 「지금은 화면조정시간입니다」 같은 작품을 보면, 동세대 시인들이 특유의 열정과 격정으로 시대와 마주했다면, 김희업의 시들은 역동적인 실천의지나 후일담의 감성보다는 그것들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기어이 견디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강지희 그런데 저는 개인을 넘어서 시대나 사회와 관련된 발언에 있어서는 조금 약한 측면도 있어 보이더라고요. 예컨대 「거짓말」에서 싹을 틔우는 고구마에서 혁명을 발견하는 것은 너무 낙관적이기도 하고, 정치에 대해 다소 추상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용목 저도 그런 부분이 적지 않아서 안타까웠는데요. 같은 시의 “목마른 자 가까이 샘물 가득 준비해놓는 일,/혁명이란 그런 거지”라는 대목도 비슷하죠.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인식이 일상성의 차원에서도 지속되고 있다는 반증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시집을 엮는 일도 그런 것일 텐데, 세계에 대응하는 팽팽한 긴장감이 주는 피로와 힘겨움을 잠시 내려놓는 순간도 필요할 거고요.
정홍수 저는 그렇게 시인이 자기 의지를 피력하는 시보다는 「그림자 산책」의 “가까이하면 감전될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드는/밤/ 그림자를 두고 잠을 청해본다”나 “일상을 통틀어 빛 한번 못 본/그림자의 순애(殉愛)”처럼 자기 고통을 담담하게 응시하는 지점이 새로운 시적 발견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봤습니다. 이 시만 하더라도 그림자와 ‘나’ 사이의 동행과 결별이 벌이는 시적 운동이 어떤 쉬운 의지적 합일보다 “그림자에 가려져 내가 안 보였다//어쩌지요, 사는 동안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데”처럼 그 갈등을 내버려두는 자리에서 열리는 느낌을 줍니다. 시간의 힘이랄까 고통의 누적을 통해 도달하는 김희업의 세계에 아직 가능성은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니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신용목 물론 저를 포함한 이야기인데요, 창작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러지 않으려 해도 저도 모르게 유행하는 주류 비평을 쫓아가는 일이 많더라고요. 어느 순간부터 ‘비인칭적인 것’에 대한 시 쓰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자연히 그런 시류를 따르는 시인들이 많아졌지요. 기표놀이의 작위성이 지나치다는 느낌을 종종 받을 때도 있는데, 이제니만큼은 언어의 생래적인 흐름 위에 자신을 올려놓을 줄 아는 귀한 시인 중 한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제니에 대해서는 다들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있고 또 그 때문에 수작임에도 평범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음을 전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단어와 문장의 나열과 반복으로 음악성을 살리고 그 흐름으로 묘한 의미를 배태하는 이제니의 특장은 이번 시집에서도 계속됩니다. 하지만 첫 시집에 비해서 ‘시’와 ‘나’라는 단어의 빈도수가 확연히 증가했고, 그만큼 ‘시에 대한 시’ 쓰기와 고백투가 잦아졌어요. 한편으로는 과도기를 겪고 있다고도 생각되는데요. ‘시’에 대한 언급이나 ‘나’에 대한 진술이 인식의 깊이를 놓치는 부분이 더러 있고, 기표 연쇄를 통한 음악적 효과 위에서 길을 찾다보니 조금은 아쉬운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정홍수 이제니 시는 말 자체의 운동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 ‘시적인 무언가’를 발생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과정을 즐기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음악성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그런 즐거움만 있는 게 아니라 독백 같은 난해성의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시집의 맨 앞에 수록된 「코끼리 그늘로부터 잔디」를 보면 시인 자신이 그런 지점을 예리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거대한 코끼리가 줄을 지어 가면 그늘이 생기고,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가 할 텐데, 그럴 때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하는 말들이 오갑니다. 이 혼잣말은 귀엽기도 하지만 왠지 조금 쓸쓸하기도 합니다. “속으로 속으로 혼잣말을 하면서/나아갔다가 되돌아갔다가//코끼리는 간다”로 끝나죠. 자신의 시는 계속 가지만 그게 혼잣말의 곤경이 될 수도 있음을 아프게 의식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경계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이제니 시의 힘은 미지의 감정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 그러니까 말의 기의를 넘어선 시적 음률의 운동으로 그 미지를 열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미지가 어느 정도의 바깥인지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강지희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2010)에서는 노스탤지어의 감정이 강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때도 기표와 기의를 분리시키는 고유한 말놀이의 재기발랄함이 많이 언급됐지만, 기본적으로는 ‘페루’처럼 실제의 고향은 아니지만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먼 기원에의 갈망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에요. 기원이 부재하기에 필연적으로 ‘고아들의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외로움과 슬픔이 있었죠. 이번 시집에는 그 노스탤지어의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섰다는 생각이 들어요. 휘돌며 천천히 하강하며 죽음에 가까워지다가, 소멸되는 순간에 돌연 강렬해지는 감각 같은 것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나선의 감각’ 연작은 이 시집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명편들입니다. 언어를 통해 이차원적 평면을 넘어 어떻게 삼차원적 깊이를 실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여기 있어요. 이 연작 중에서 제가 특히 아름답다고 느꼈던 건 「나선의 감각—물의 호흡을 향해」입니다. 형식적으로도 ‘~라고 하자’라는 가정법이나 ‘그렇다/그렇지 않다’를 계속해서 오가는 구절들을 통해 판단을 지연시키고 계속 거리를 두지요. 지금 “어둠에 둘러싸여 어둠으로 말하는 내가” 어떻게 해도, “심해의 어원”처럼 보이지 않고 말하지도 않는 당신에게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 같은 것이 느껴져요. 그 감정들이 나선으로 회오리치는 눈길과 회한의 물결로 드러나고 있고요. 다가가는 만큼 멀어지는 물결 속에 있으므로 당신을 향한 나선의 운동은 그칠 수 없는 무한의 영역에 두어진 것이겠죠. 그런데 물이라는 형체 없는 사물 속에서 당신과 내가 일시적으로나마 합일되는 순간이 나타납니다. 호흡이라는 것은 개인의 고유한 리듬일 텐데, “하나의 호흡 속에 있는 네개의 동공” 같은 구절에는 그 리듬이 순간적으로 뒤섞이면서 무화되는 걸 보여줘요. 시집 전반적으로 물이나 빛, 구름같이 흩어지고 형체를 분명하게 포착하기 어려운 물질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요. 대상과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인지하면서, 그 간극에서 무한과 무화를 오가는 운동을 우아한 나선의 리듬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신용목 네, 그것이 이제니가 만드는 세계일 텐데요. 저는 오히려 그런 점이 너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게 걸렸습니다. 시인의 의도를 이야기하는 것인데요. 첫 시집에서는 반복적 효과를 통해서 기표를 기표 자체로 계속 운동하게 만드는데, 그것이 기표의 물질성을 극대화하면서 발화자로서의 나를 지속적으로 소외시키는 효과를 불러오죠. 그래서 자아가 소외됨으로써 발생하는 묘한 멜랑꼴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이야기를 하지만 이야기를 할수록 이야기하는 당사자는 지워져버리는 데서 오는 묘한 슬픔. 그것은 정말 멜랑꼴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텐데요. 다만 첫 시집의 그런 세계가 의도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효과였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자아가 개입되면서 그런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가 노출되는 것이죠.
정홍수 그런 것들이 직접적 진술로 드러나는 경우가 더러 눈에 띄더군요.
신용목 「몸소 아름다운 층위로」를 보면, “한편의 시를 쓰고 있었다/이런 낱말들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하면서 단어들을 쭉 나열합니다. 뒷부분에서 그 단어들을 두고 “믿을 수 없게도 모두 함께 시를 쓰고 있었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이 종이에서 저 종이로”라고 말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단어들을 ‘시 쓰기’라는 자의식으로 묶어내고 있죠. 지희씨가 말씀하셨듯 구름이나 나선형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을 향해가고 있지만, 「어둠과 구름」에서처럼, “마음속으로만 마음속으로만 퍼져나가고”라든지, “언젠가의 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등의 표현을 통해 그것을 자신에게 귀착시키고 마는 대목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단어들이 그 물질적 운동성으로 심연을 스스로 개척하기보다는, 이제는 자아의 또렷한 인식이 작용하면서 그 알 수 없는 지대의 폭을 좁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정홍수 「그을음 위로 그 울음이」 같은 시는 기표, 언어의 물질성을 활용하는 이제니 특유의 시적 운동이 어떤 존재적 불안을 향해 차오르고 가라앉는 리듬을 매혹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시에는 화재(火災)라는 구체적 사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만 언어의 반복과 번짐, 스밈만 있는 것도 같습니다. 불에서 그을음을 거쳐, 울음으로 이어지고 이윽고 “몸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물” “그 모든 가장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물”이 나오는데, 그 흐름이 정말 유려합니다. 그러니까 이 시의 경우는 중간에 나오는 “귀신과 현재 사이에는 고통이 있다” 같은 진술이 시의 전체적 리듬에 녹아들어서 시의 울림을 증폭시킵니다. “불길 뒤에 오는 것들” “불길 뒤에 남는 것들”은 단 한 글자만을 바꾼 차이와 반복인데도 묘한 낙차를 만들고요. 그러면서 시 전체적으로는 불안과 우울, 어떤 상실의 정조가 두텁게 깔리지요. 그렇게 해서 시의 마지막, “새들은 어제보다 낮게 낮게 날았다//너는 가방 속으로 천천히 손을 넣었다”는 마치 그러해야만 할 것 같은 필연의 느낌을 주네요. 다시 말해 여기에는 언어의 물질성에만 미루어두지 않는 ‘자아의 개입’ 혹은 ‘실존의 개입’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개입이 성공적이란 말이 될 테고요. 이번 시집은 이 둘의 균형을 찾아가는 어떤 과도기적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용목 시인이 궁극적으로 나선을 통해서 자아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 길을 자기만의 방식대로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강지희 시인에게는 인상파 화가처럼 순간순간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고 싶다는 열망도 있는 것 같아요. 「나선의 감각—역양」에서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그 믿음들 사이의 균열을. 그 틈새들 속에서 흘러넘치는 물방울의 표면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 자신이 읽고 싶고 쓰고 싶은 것이라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그 본질을 표면에서 출렁거리는 물질들을 통해 드러내다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자아의 심연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까 고민이 들어요. 일단 시집 제목부터가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인데,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말을 쓴 데는 어떤 맥락이 있지 않을까 싶거든요. 「잔디는 유일해진다」에서 잔디는 저마다의 속도로 유일하고 고유하게 자라나는 단독적인 존재지만, 물결처럼 동시에 움직이잖아요. 하나로 소급되지 않으면서 리듬을 만드는 무리로서 잔디를 인식하고 있어요. 끊임없이 얇고 가늘게 흩날리는 존재들은 순간 속에 박제하듯 대상을 명확히 포착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죠. 이 시 속의 우리는 스스로를 모르는 무지, 혹은 미지의 상태 속에서 흐려지고 출렁거리는 상태로만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아요. 세상에 투명하게 열려 있다는 느낌도 있고요.
신용목 ‘나’도 ‘세계’도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곳이라는 점에서 같은 장소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나-세계’, 우리가 함께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먼 곳으로부터 바람」에서 지금까지의 시 쓰기를 잠깐 고백해요. 리듬으로 시작해서 리듬으로 끝나는 시, “순간의 순간에서 순간의 순간으로” “겨울의 뒤편에서 거울의 뒤편으로” 이어지는 시들을 썼는데, 나중에 “웃음, 나는 울지/울음, 나는 웃지”라는 표현들에서처럼 조금씩 자신을 세계의 복잡하고 역설적인 관계 구조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겠죠. 「잔디는 유일해진다」나 「중국 새」 같은 시는 첫 시집의 연장선에서 설명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아무튼 흥미로운 변화를 선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정홍수 「구름 없는 구름 속으로」에 나오는 “시를 위한 시는 쓰지 않기로” 같은 구절도 그런 자의식을 드러내는 것이겠지만, 바로 그런 경우조차 “구름 없는 구름의 물기 속으로 입자와 파동의 형태로 번져나가는 관악기의 통로를 여행하듯 걸어간다 걸어간다 그저 지나치듯이 지나치듯이”라고 자신의 시를 재정의하는 힘이 이제니에게는 있습니다. 스스로 자의식을 깨뜨리고 균열시키면서 말이죠.
신용목 어쩌면 그 깨진 틈으로 지희씨가 말한 ‘흐려져 출렁이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성동혁 시집 『6』
정홍수 성동혁 시는 이미지가 아주 신선하고 새롭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육체적 고통이 기독교적 상상력과 만나면서 어떤 의외성을 발생시키는 지점도 흥미로웠고요. 그런 맥락에서 인상적으로 읽었던 시는 「나의 투우사—식사 기도」였는데, 여기서 중간에 “저녁이 온다고/소가 온다고!” 같은 구절을 아무렇지 않게 집어넣을 수 있는 힘이 놀라웠습니다. “정말 궁창을 찌르는 철탑/뿔이 관통한 그의 손바닥에서 빛이 터져나온다” 같은 구절은 ‘복사뼈를 땅에 묻고 움직이지 않는 투우사’를 시적화자 자신만의 고유한 예수이자 구원의 이미지로 등재하는 것 같더군요. 거친 듯하면서도 전체적으로 힘이 있는 시집이었습니다. 「어항」이나 「반도네온」은 세월호에서 죽어간 아이들을 떠올리게도 했는데, 그 연관 여부와 상관없이 죽음을 생각하는 깊이가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항」의 “문 닫은 박물관 앞에 앉아 죽은 새를 간질이며/전신으로 만나 흉상으로 헤어진 것들을 모아 본다” 같은 대목 말입니다. 자기 고통에서 연원한 이미지의 미더움 같은 게 곳곳에서 보이더군요. 「반도네온」에서 “아이들은 죽어서 그곳에 묻힌다”라고 한 뒤, 모종삽으로 아이들의 심장 소리를 듣는 모습, 마지막 행에서 아르헨띠나의 장례 풍습을 따라 “자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박수를 치자”라고 하는 대목은 「어항」의 “별똥별을 하늘로 반납하듯 폭죽이 터진다/기념일을 돌려주듯 홀가분하다”처럼 애도의 행위가 슬픔일 수만은 없겠다는 의외의 깨달음까지 안겨줬습니다.
강지희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의 아이들은 그냥 친구 느낌으로 다가오더라고요. 바람에 “푸르게 떨어지는 아이들”(「여름 정원」)을 본다든가 “같은 난간에 매달려서 예민한 기류에도 함께 흔들리는”(「나 너희 옆집 살아」) 모습에는 취약한 느낌이 있어요. 그런데 「서커스」에서는 좀더 강렬하게 이들을 부조해내죠. “나는 그런 친구가 많다/던진 칼을 온몸으로 받는//그래도 살아서 내게 나타나는 친구”라는 구절을 보면 객석에서 환호하고 박수치는 사람들과 다르게, 이들이 무대 위에서 얼마나 현란할 정도의 고통을 겪는지, 또 고독하게 사라지는지가 나타나요. 그럼에도 그런 친구가 많고 나 역시 그런 친구가 되어줌으로써, 고통 속에서 홀로 신과 대면하기보다는 고통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어요.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거듭 맑게 깨어나는 존재가 자리하고 있는 시집이었습니다.
신용목 대수롭지 않은 듯한 말을 툭툭 던지면서 거기에서 의미가 발생하게 만드는 일군의 시인이 있잖아요. 그중에서 통증에 반응하는 방식을 통해 의외성과 뛰어난 순도를 만들어내는 시인이 아닐까 합니다. 시집을 보면 시인이 그 구성에 있어서도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아요. 이를테면 서시가 「쌍둥이」고 마지막 시도 「쌍둥이」인데, 서시는 수직적 이미지가, 마지막 시는 수평적 이미지가 강해요. 그래서 서시는 수직적인 원죄나 죄의식을 이야기하고, 마지막 시는 그로부터 비롯된 수평적인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1부에는 「면류관」을 포함해서 죄책감에 대한 얘기가 많습니다. 「6」이 해설에서 언급되기로는 시인이 다섯번 위중한 수술을 하고 난 뒤 여섯번째 몸으로 살고 있다는 뜻이라고 하지만, 왜, 성서에서 여섯번째날 인간이 만들어지잖아요. 그래서 저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고통으로도 읽히더라고요. 2부로 오면서부터 「사순절」이나 「나의 투우사—식사기도」를 중심으로 육체를 이야기하고, 3부에서는 소멸을 말하는 것 같아요. 「반도네온」도 그렇고, 「리시안셔스」에서 눈이나 꽃에 관한 이야기도 묘하게 소멸로 읽혔어요. 4부로 오면서 고독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서커스」나 「수컷」 「기억하는 악몽—라넌큘러스」 같은 작품들을 배치했는데, 아무튼 하나하나 공들였다는 느낌입니다.
정홍수 고통 속에서 찾아내는 유머도 인상적이었습니다. 「口」의 “당신이 옆집에 살았으면 좋겠다/종량제 봉투 안에 가득 찬 악몽을 들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눈인사를 할 수 있도록” 같은 대목 말입니다. 여기서 ‘당신’은 하느님인 것 같은데, 죄의식의 무게를 툭 가볍게 만들어버리죠. 1부의 「6」에서도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하고 마가복음 구절을 인용한 뒤, 바로 이어 “왜 만날 나만 잔다 하시니”라고 덧붙이는데 고통 안에서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힘을 주는 방식을 찾아낸 것 같아요. 그런데 시집 앞뒤의 ‘쌍둥이’ 연작에서 쌍둥이 모티브는 잘 이해가 안되던데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건가요?
신용목 서시 「쌍둥이」는 저도 어렵더라고요. 여기서 쌍둥이는 실제 쌍둥이일 수 있지만, 또다른 자신이거나 고통 속에 있는 타자여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아무튼 그것은 정황일 뿐이고요. 명확한 의미 맥락보다는 각각의 문장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맥락을 따라가는 편이 더 정확하게 이 시에 접근하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 이미지 속에서 고통이 나한테만 고여 있는 것이 아니고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 모두에 내재한다는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서시의 경우는 “촌스럽게 전도하지 마/따라가기 싫어” “비옥한 조국은 몇대가 옳아야 형성되는 가계일까” “아버지” “제자” 등 계통적인 이미지를 연쇄시키고 있어요. 최근 시단에 부쩍 이런 시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를테면 의미의 연쇄를 따라가지 않고, 단어나 문장 또는 행과 연이 각각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배치를 통해서 특정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죠. 문제는 이미지들의 정서적인 연결에 성공하느냐인데요. 서시 「쌍둥이」도 그런 측면에서 문제점이 없지 않은데, 시집 중간중간에 낭만적인 구절들이 나옵니다. ‘낭만성’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속된 현실에 대한 부정의 함의가 내포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치기처럼 보일 때가 있죠.
정홍수 시집 전체적으로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색과 성스러움을 환기하는 흰색의 이미지를 대비하기도 하고, 서로 뒤섞기도 하면서 시를 조형해가는 것도 인상적이에요. 그래선지 두번째로 시집을 읽으면서는 서시 「쌍둥이」의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여/당신의 묽은 제자가 되고 싶어요/묽다가 묽다가 맑게”의 ‘묽다가 묽다가 맑게’가 좀더 구체적인 맥락으로 절실하게 다가오더군요. 시를 고심해서 배치했다는 말씀에 공감이 가는 대목입니다. 여하튼 그간 한국시에서 보기 어려웠던 상상력이 툭 튀어나온 느낌입니다. 예전에 조정권(趙鼎權)이 보여준 기독교적 상상력이 초월이나 숭고함 같은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면, 성동혁은 기독교적 상상력을 활용하면서도 수직적이기보다는 수평적이고, 또 맑은 소년의 눈 같다고 해야 할까, 그런 지점들이 작동하면서 자기만의 이미지를 견인해내는 힘이 있습니다. 이제니의 시가 소리 내어 읽거나 입속으로 음미해가며 그 미지성을 즐기게 되는 쪽이라면, 성동혁의 시는 이미지가 눈앞에 주루룩 그려지는 가운데 의외의 분출하는 힘을 만나는 즐거움이 큽니다.
신용목 네, 어떤 의외성이 있어요. 「수컷」에서도 “나는 정해진 불행은 믿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사실 정해진 불행을 믿으면 덜 외롭고 덜 고독해질 텐데, 고통 속에 머무르겠다는 의지도 엿보여요. 「서커스」에서 지희씨가 인용한 부분은 친구가 있다고 말하는데도 더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더라고요. 앞서 말했지만 시 속으로 잘 녹아들지 않는 이미지들이 군데군데 보이면서 습작품 같은 느낌을 주는 경우도 몇 있는데, 그런 부분들을 좀 걷어내면 더 좋겠다 싶지만 애초에 이 시인은 그럴 의지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그것까지도 포함해서 자기를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정홍수 그런 걸 오히려 툭툭 던져나가면서 자기 길을 찾아가는 시인인 것 같아요.
신용목 어떤 시인들은 좋지 않은 것을 걷어내라고 하면 왠지 좋은 것도 사라질 듯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있어요. 장점과 단점이 한몸으로 살아 있는 것이죠. 그래서 실패하는 것은 실패하는 대로 놔두고, 거기서 성공하는 경우를 더 많이 만들어가야 하는 시인이 있는 건데, 성동혁도 그런 부류가 아닐까 여겨져요.
강지희 성동혁 시에는 자기가 처해 있는 삶이 고통스럽고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는 지점들이 있어요. “서사는 발톱에서 시작되었다”(「6」)에서 자아는 포악함 속에 갇혀 있고, ‘멸망’이라는 시어가 여기저기 나타나기도 하죠. 또 “어느 장롱 안에서도 어른이 될 수는 없다”(「기억하는 악몽—라넌큘러스」), “혼자 어른이 되는 게 죄를 짓는 일 같다”(「퇴원」) 같은 표현에서는 성장 불가능에서 오는 절망감이 느껴지기도 해요. 그러다보니 시간은 적막하게 고여 있는데요, 「리시안셔스」를 보면 기다림이라는 행위를 통해 이 막막한 시간을 돌파해가며 미래를 끌어와요. 그래서 저는 이 시가 참 좋더라고요. ‘당신’과 ‘눈’은 모두 내가 잠든 후에야 의식의 후면에서 나타나고, 그런 한편 머물지 않는 대상이잖아요. 눈은 녹아버리고 화병에 꽂힌 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어버리겠지만, 그는 눈을 기다리고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아가요. 눈과 꽃은 모두 시간에 취약한 사물들이지만 그가 이를 기다림의 행위 속에 끌어넣는 순간, 이 희박하고 희미한 주체가 잠시나마 투명하게 미래를 열어내는 것 같았어요.
신용목 소멸의 이미지가 많다고 했던 3부의 대표적인 작품이 「리시안셔스」인데요. “눈은 내게도 온전히 쌓일 수 있는 기체인가/당신은 내게도 머물 수 있는 기체인가”라는 대목도 그렇지만, 눈이 오겠지만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상정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이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고 있다 (…) 내가 나중에 아주 희박해진다면/화병에 단 한번 꽃을 꽃아둘 수 있다면”에서 보이는 ‘단 한번’이라는 것, 그러니까 미래를 사유하고 있지만 그 미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식하듯 뻗어나가는 미래가 아니라, 한순간의 광휘같은, 그래서 켜졌다 사라지는 것으로서의 미래라는, 자신만의 시간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희씨가 말한 ‘열어내는 순간’도 꽃처럼 한순간 점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지희 아까 함께하는 삶의 형식에 대해 말씀드린 부분과도 연결되는 얘긴데요, 이 시에서 서랍을 열고 눈을 기다리고 있잖아요. 다른 시에서도 보이는 이 ‘서랍’이 어떤 사물로 드러나는 것일까 생각해봤어요. 서랍은 평소에는 비밀스럽게 닫혀 있지만, 분명 거기에 뭔가를 담을 수 있는 형식으로 존재하잖아요. 그게 마치 타인에 대한 포용을 예비하고 있는 화자를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다시 시를 보니, 충만하고 영원한 현재에 도취된 자아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할 미래로 아름다움을 유보하고 있는 이 화자가 문득 숭고해 보였습니다.
정홍수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 됐습니다. 초대손님으로 오신 강지희 선생이 준비를 많이 해오셨고, 시집 분야에서는 신용목 시인이 좋은 말씀을 많이 보태주셨습니다.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아픔이든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아픔이든 ‘고통’을 화두로 붙잡고 분투하고 있는 문학의 현장을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