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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최태욱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를 말하다』, 책세상 2014
분단구조에 맞는 새로운 통치 양식은?
채진원 蔡鎭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ccw7370@hanmail.net
2015년말까지 국회의원 지역구별 인구편차를 기존의 3대 1에서 2대 1로 고치라는 헌재의 판결을 계기로 선거제도 개혁과 개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선거제도 개혁과 개헌의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은 매우 논쟁적이기 때문에 토론이 필요하다. 토론용 교재로는 최태욱(崔兌旭) 한림대 교수가 쓴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를 말하다』가 제격이다. 이 책은 저자가 지난 십여년간 작성한 여러편의 논문과 칼럼 등을 재구성한 열정의 작업물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가 세월호참사를 야기한 신자유주의 늪에서 벗어나야 하며, 이를 위해서 ‘시장조정 시스템’으로 체제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신자유주의를 구축하는 ‘배제의 정치’가 문제다. 배제의 정치란 다수대표제, 양당제, 단일정당정부로 상징되는 ‘다수제 민주주의’다. ②‘한국형 시장조정 경제시스템’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포괄의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 ③포괄의 정치란 비례대표제 확대, 구조화된 다당제, 포괄형 연립정부로 상징되는 ‘합의제 민주주의’다. 합의제 민주주의란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가 도입돼 구조화된 다당제가 확립되고, 이를 기반으로 국회 및 정부 차원에서 좌·우·중도 정당이 연합하는 정치가 펼쳐지는 것을 말한다. ④포괄의 정치를 위해서는 선(先) 선거제도 개혁과 후(後) 개헌이 필요하다. ⑤개헌의 방향은 의원내각제와 분권형 대통령제가 바람직하다. ⑥개헌을 이끌기 위한 조직으로, 정치기업가(political entrepreneur)인 ‘시민회의’가 필요하다. 이 책은 저자의 주장이 분명하고 논리적 일관성과 체계성을 갖췄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 주장의 현실성과 이론적 적실성은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토론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자는 서문에서 “문제는 정치야!”(9면)라는 말로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실제 논리전개나 설명방식은 정치보다 경제결정론적인 접근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의 비중을 낮추면서 그 내용도 법제도의 ‘사회심리적 조건’을 창출하는 실천보다는 ‘제도’로 한정하는 약점이 있다. 저자는 정치 차원에서 인과적 해법을 찾지 않고, 정통 맑스주의처럼 경제의 결과(종속변수)로 정치를 본다. 이것은 경제에 가깝다. 정치적인 설명은 주어진 권력의 분포, 정파적 이해관계, 계급투쟁과 갈등, 정치문화 등을 근거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신자유주의라는 경제개념에서 시작하여 우리 사회가 달성해야 할 ‘목적’으로 시장조정 시스템을, 이를 위한 ‘수단’으로 선거제도와 권력구조 개혁을 제시한다. 내용상 정치의 비중을 높이기 위해서는 경제가 먼저 오고 나중에 정치(권력구조)가 오는 서술 순서를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 또한 합의제 민주주의가 이미 20년 전에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에 의해 주창되었음에도 왜 현재까지 그 성과가 미미한지 이유를 밝히면서 진전된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선행연구와 비교분석이 없으면, 선진 복지국가가 좋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고, 이를 위해서 권력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 식으로 흘러 결국 한국의 정치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원론적 주장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 저자는 합의제라는 말을 빌려 사용하고 있음에도, 합의제 개념의 제공자인 네덜란드 정치학자 아렌트 레이프하르트(Arend Lijphart)의 주장을 오해하고 있다. 레이프하르트는 『민주국가론』(법문사 1985)에서 다수제 모델이든 합의제 모델이든 둘 다 대의민주주의의 유형으로, 그 차이는 사회의 동질성 여부에 따른다고 설명했다. 즉 동질성이 강하면 다수제 모델이, 다원성이 강하면 합의제 모델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레이프하르트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다수제는 문제가 많고 합의제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이론화한다.
셋째, 저자는 다수제 모델의 나라로 영국과 미국을 꼽는다. 하지만 영국은 1945년부터 1970년 사이 단 25년간만 다수제 모델과 일치할 뿐 나머지는 ‘잦은 연립정부’ 등으로 다수제 모델에서 이탈해 있었고, 미국도 합의제적 성격을 갖고 있는 삼권분립, 양원제, 연방제도 등으로 다수제 모델과 합의제 모델 사이 ‘중간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레이프하르트의 설명이다. 그의 분석은 과연 한국이 저자의 주장처럼 순수하게 다수제 모델에 해당하는 것인지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 한국은 ‘중간형’인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뿐 아니라 헌법상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있어 오래전부터 여야 합의제적 정치관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다원성의 사회에서 합의제 모델이 적합하다는 레이프하르트의 분석은 분단구조인 한국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합의제가 이론적 적실성을 갖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남긴다. 우리나라가 스위스, 캐나다처럼 다원적 사회라면 당연히 합의제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어, 민족 면에서 동질성이 강하며 분단구조로 다원성이 제약된 만큼 합의제 모델의 작동성은 떨어진다. 특히 세계화, 정보화, 후기산업화, 탈물질주의, 탈냉전 등으로 표현되는 변화한 시대상황은 다수제든 합의제든 대의민주주의를 타격함으로써, 시민참여와 함께 숙의(熟議)와 공화(共和)를 강화하는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새로운 통치양식을 탄생시켰다. 거버넌스의 도래는 합의제 민주주의의 이론적 적실성을 약화시킨다. 거버넌스에 기초한 정치는 선거제도 개혁과 개헌 이전에 정치행위자인 정당이 거버넌스에 맞게 다양한 행위자들의 협치(協治)공간으로 변모하도록 정당모델의 혁신부터 고민한다. 최장집(崔章集) 교수처럼 당원이 공급될 수 없는 시대에 원론적인 대중정당 모델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가 발전한 시대상황에 부합하도록 당원과 시민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네트워크정당(플랫폼정당)’ 모델로의 변모를 실천한다. 또한 계파의 사당화(私黨化)를 재생산하는 공천권의 폐해를 막고 공당(公黨)으로 혁신하기 위해서 ‘오픈 프라이머리(국민경선)의 법제화’를 실천한다. ‘국민승리21’의 후계정당들은 왜 그동안 독일식 정당명부제 도입과 개헌에 실패했는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임의 룰을 바꾸는 일은 여야 합의사항으로, 진보정당이 제1야당이 되지 않고서는 실현이 어렵다. 진보정당의 역량이 약할 때 추진되는 개헌은 좋은 제도가 무엇인지와는 별도로 ‘보수대연합’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의원정수 확대와 비례대표 확대부터 실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