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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프랭크 도너휴 『최후의 교수들』, 일월서각 2014
한국 대학, 미국식 ‘종말’을 맞을 것인가
천정환 千政煥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heutekom@naver.com
지난 2014년 11월 7일 성균관대 인문학연구소와 문과대학교수협의회가 주최한 심포지움 ‘식민화하는 대학, 대항하는 인문학’에는 무려 삼사백명의 청중이 몰렸다. 나는 근래 열린 어떤 심포지움이나 학회에도 이 정도 인원이 참석한 걸 보지 못했다. 주최 측은 깜짝 놀라며 자료집을 여러차례 더 복사해야 했다.
전공과 직급을 초월해 학부생부터 원로 교수까지 참여한 모임의 뜨거운 열기 자체가 의미있는 생각거리가 아니겠는가? 주제로 삼은 ‘대학의 식민화’란 물론 자본과 영어제국주의에 의한 한국 대학의 예종(隸從)을 뜻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 과연 현재 인문학이 ‘저항’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아직’이라 말할 수밖에 없지만, 오늘날 한국 대학과 인문학이 처한 사태의 심각성과 그 개선의 필요에 대해 상당히 광범위한 공감이 있다는 것이겠다.
그런데 심포지움 말미에 패널로 참석한 김기봉(金基鳳) 교수(경기대)와 김누리 교수(중앙대) 사이에서 중요한 논전이 벌어졌다. 두 중견 인문학자는 각각 한국연구재단과 자신의 학교에서 중임을 맡아 한국 대학과 인문학의 ‘현실’을 최전선에서 경험한 바를 바탕으로 서로의 견해를 공박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김기봉 교수는 인문학자들이 학문 후속세대와 대학생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스스로 변화하여 정부나 대학당국에 대해 협상력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이에 대해 김누리 교수는 자본과 싸운 경험을 바탕으로 그런 견해가 오히려 ‘대학의 식민화’에 뒷문을 열어주는 논리라며 적극적으로 권력과 자본에 저항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김기봉 교수의 견해에 더 공감하는 쪽이다. 누구나 대학과 인문학의 위기를 쉽게 진단하고 비판하지만, 그 진단과 비판은 대개 공허한 원론의 동어반복이다. 폭주하는 기관차 같은 대학의 현실 앞에서 원론을 상기하는 일이나 고전적인 인문학의 가치 운운하는 것은 대개 별로 효과가 없다. 구체적인 대안이 아니면 안 먹힌다. ‘좋았던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그러고 보면 한국 대학교수의 ‘최전성기’도 1990년대였다). 한국 신자유주의 대학체제의 중핵을 구성하고 있는 한국연구재단이나 대학 당국자들을 단순히 ‘악마화’하는 일부 인문학자의 논리에도 동조하기 어렵다. 대학 안에서도 공동의 대안이 필요하고, 사회 전체에서는 근본적으로 ‘대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재합의가 필요한 것이다. 여전히 70% 이상의 고교졸업자가 대학을 가려 하는, 그러나 저성장과 인구감소가 객관적인 현실이 된 사회에서 대학은 무엇이고, 인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 그런데 과연 한국 인문학이 대학 내부의 다수자인 공학·경영학·법학 종사자나, 생존의 차원에서 취업전선에 내몰린 대학생들을 설득할 논리를 갖고 있는가? 아니라 본다. 다만, 오늘날과 같은 사분오열·지지부진·각자도생의 절망적 상태를 벗어나 토론할 기회를 갖기 위해서라도 어쩌면 비상한 각오의 저항과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에선 김누리 교수의 견해에 찬성할 수 있다.
이 토론 중에 언급된 책이 프랭크 도너휴(Frank Donoghue)의 『최후의 교수들: 영리형 대학 시대에 인문학하기』(차익종 옮김)였다. 미국 대학과 인문학의 참담한 현실을 주로 교수직에 초점을 맞춰 쓴 책인바, 인문학(또는 일부 사회과학) 교수나 교수가 되려 하는 사람은 꼭 읽어야 한다. 자신의 미래를 ‘판타지’ 없이 가늠해보기 위해 그렇다. 이 책에서 묘사된 미국 대학과 인문학의 상황은 한마디로 암담한데, 신자유주의에 관한 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이 한국의 나쁜 미래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책은 한국 대학과 인문학을 위한 ‘지옥의 묵시록’으로도 충분하다.
그 종말적 상황의 공통점은, 우선 대학을 둘러싼 학벌사회·대학서열화의 가속화 상황, 대학의 기업화 또는 자본에 의한 대학의 식민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한국 대학에서도 인문학(대학원)의 고사 위기와 교수직의 위기(정년보장 교수제의 쇠퇴와 교수직 전반의 비정규직화)가 닥쳐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재와 미래를 담담하고도 체계있게 그리면서, 3500여개나 되는 미국 대학 시스템 속에서 근근이 버티는 ‘어중간한’ 주립대학의 교수임을 자처한 저자는, 인문학 하는 자들이 전통적 교수의 멸종이 명백한 상황에서 이를 ‘위기’라 추상화하거나 인문학을 ‘낭만화’하지 말고 저 자신부터 제대로 성찰할 것을 결론으로 삼았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우리나라 인문학 교수들도 대부분은 ‘위기’를 느끼지만, 자신이 변화하거나 자기 학문의 좁은 시야로부터 나오려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세대별로 다르긴 하지만,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는 태도로 자기 호구(糊口) 외에 아무것에도 별 관심이 없거나 벌써 바짝 ‘쫄아’ 자리를 지키는 데만 전전긍긍 몰두하고 있다. 나도 그래왔다. 그런 태도 자체가 우리가 한국 ‘최후의 교수’임의 증거가 아닌가 싶다.
미국식 ‘종말’을 맞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을 읽다보면 한국과 미국 사이의 높은 ‘씽크율’에 놀라지만, 아직은 서로 다른 점도 많다는 것을 느낀다. 첫째, 미국 인문학과 한국 인문학의 역사와 사회적인 기능에 차이가 있고, 아직까지는 대학의 기업화 정도가 판이하다. 미국 대학은 오랜 완전경쟁 상황에서 이제 ‘막장’에 닿아, 교육기업이 대학 자체를 대체해버리는 단계에 이르렀다 한다. 한국 대학이 그렇게 되려면 시간이 남은 듯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국가와 대학의 관계가 다르다는 점이 중대한 차이다. 사회의 규모와 대학의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한국에서 국가가 계속 대학에 대해 갖는 생사여탈권과 결정적인 힘이야말로 양날의 칼처럼 한국 대학과 인문학이 압축근대화처럼 압축적으로 ‘폭망’하게 하든지, 아니면 대안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인 것이다.
그래서 결론을 내려야 하는 마당에 굳이 밝은 면을 바라본다면, 이같은 사실로부터 단 하나 우리가 붙들어야 할 키워드가 있다. 대학의 공공화와 고등교육의 공공성이다. 이를 위해 학부생부터 대학총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학의 성원은 할 일이 있다. 대학의 모든 이슈가 서로 얽혀 있는 고리라 그중 하나하나를 푸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박근혜 대통령의 대표적인 ‘사기공약’의 하나인 반값등록금만 하더라도 대학생과 그 가족에게는 생계문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비싼 대학등록금은 대학서열체제와 대학기업화의 중요한 고리이기 때문이다. 대학총장은 조선일보·중앙일보 대학평가를 거부해야 하고, 강사와 대학원생, 교수들은 조직을 만들어 새로 연대해야 한다. 그리고 교수들은 한국판 ‘최후의 교수들’을 써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