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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오언 존스 『차브: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 북인더갭 2014

문제는 계급전쟁이다

 

 

심성보 沈星輔

문화연구자 500miles@hanmail.net

 

 

167촌평-심성보_fmt차브(Chav)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래된 계급분할사회 영국에서 최근 유행하고 있는 표현으로, 존엄성을 박탈당한 노동계급과 그 문화를 중간계급과 그 동맹자, 특히 ‘막돼먹은’ 정치인, 언론인, 경제인 들이 거리낌 없이 조롱하는 언사이다. 영국의 젊은 저널리스트 오언 존스(Owen Jones)가 『차브』(2011, 한국어판 이세영·안병률 옮김)를 저술한 목표는, 이렇게 모욕적인 표현이 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중립적인 ‘팩트’로 통용되는 영국적 현실, 즉 사회의 지형 자체가 오른쪽으로 급격히 쏠린 세태를 역사적 관점에서 고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지난 30년간 진행된 계급전쟁의 현실을 직시하자고 ‘돌직구’를 던진다. 한때 존중받았던 노동계급과 그 문화가 오늘날 시궁창에 처박힌 것은 새처리즘 이후 체계적으로 진행된 보수혁명, 즉 자본과 지배블록의 공세 때문이며, 이러한 흐름은 좌우를 막론하고 하나의 대세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저자는 흥미진진한심지어는 지루할 정도로수많은 자료와 문헌, 인터뷰를 동원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는 지배계급의 무지함과 무능력, 비인간적인 민낯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확대, 자본의 금융화, 복지의 축소, 사회의 범죄화, 도덕의 침하로 특징지어지는데, 그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영국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노동계급의 희생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노골적인 계급전쟁은 노동자의 계급정치를 지탱했던 토대, 예컨대 노동조합과 산업노동, 노동당을 비롯한 좌파블록을 허물어뜨렸고, 그것은 사회를 보수화하는 문화전쟁을 수반했다. 그리고 문화전쟁의 산물이 바로 차브라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던 공동체 기반의 제조업이 급격히 해체되고, 실업과 불안정노동이 만연하게 되었으며, 사회복지체계는 민영화로 옮겨가고 복지수급자는 세금도둑으로 공격받으며, 주거개념 중심의 공영주택은 소유개념 중심의 분양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과거 한때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었던 가난과 실업, 질병 등 인간적 고통이 이제는 근대사회의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라 그들의 무능력, 무기력, 무책임에서 비롯한 개인의 속성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신자유주의가 문화전쟁인 만큼 이러한 개인책임좋은 말로는 자기계발을 사람들 스스로 수용하게 되고 낙오자들을 동일한 논리로 비난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회 곳곳에서 불평등이 치솟고 있지만 공동체 중심의 공감과 연대는 찾아볼 수 없고,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에서 견고한 정체성을 상실한 민중은 그들을 대표하지 않는 노동조합과 시민사회운동, 정당에 실망해 극우민족주의 정당에 표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저자는 무엇보다 개혁진영이 스스로 폐기한 계급정치를 서둘러 복구하자고 주장한다. 그렇게 할 때 양질의 안정된 일자리가 제공되고, 복지를 비롯한 재분배 정책이 강화됨과 함께 저렴하고 살 만한 주택이 공급되고, 공적인 의료, 교육, 보육이 확장되며, 비인간적 문화가 자취를 감출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장점과 단점이 교차한다. 저자가 애써 축소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문제는 계급 간 전선이 명확하지 않으며 정치지형도 단순히 시장이냐 사회냐, 혹은 야만이냐 복지냐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복잡한 문제의 원인을 계급전쟁으로 단순화시킨다. 특히 저자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고전적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이다. 피지배계급이 어떻게 자신의 지배에 스스로 동의하게 되는가? 이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간단하다. ‘저들’ 지배계급이 ‘우리’ 노동계급을 속였다는 것이다.

책은 노동계급의 ‘좋았던’ 시절은 지나치게 낭만화하고, 노동계급 내부의 갈등과 균열, 억압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축소하고 있다. 이것은 지배블록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일관된 전략 아래 똘똘 뭉쳐 자본의 지배를 회복하거나 노동계급을 공격한다고 묘사된다. 이처럼 저자는 도적적 판단을 전제로 삼는데, 노동자와 하층민은 무조건 선하고 지배계급과 그 대리인은 악하다는 식이다. 이렇듯 단순한 도덕적 구분 때문에 이 책의 선명한 ‘규범적’ 주장의 설득력이 반감되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보인다. 게다가 저자는 구조적·역사적 분석을 가정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계급정치, 즉 조직노동과 정당정치를 강조한 나머지,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사회운동과 그것의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했다. 그러나 이 책에도 넌지시 언급되어 있듯, 진보적 운동과 정치는 현대 자본주의의 고유한 계급모순을 신사회운동이 제기한 문제여성과 환경 등 계급정치가 해결하지 못하고 배제한 것들와 새롭게 접합하려는 시도에 있을 것이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근대사회를 분석하면서 오늘날 대중의 처지를 ‘쓰레기’가 되어가는 삶으로 묘사한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 아래 인간은 세가지 임무를 띠는데, 그것은 노동자와 소비자, 사회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노동능력도 없고, 소득이나 부채를 끌어와 소비할 능력도 없고, 인구는 차고 넘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들이 폭증하고 있다. 그나마 개중에 쓸모있는 ‘재활용품’은 불안정노동을 전전하거나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로 소모되고, 다른 한편 ‘폐품’의 처지에 놓인 자들은 최소한의 생필품으로 연명하면서 자선이란 명목으로 우리에게 심리적 만족감을 제공하거나 생체장기를 제공할 뿐이다. 영국의 차브는 재활용과 폐품 사이 어느 지점에 놓인 자들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사회에서 차브는 과연 누구일까? 머릿속에 ‘잉여’라는 표현이 떠오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비정규직이나 노숙인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자가 옮긴이의 말에서 밝혔듯이 한국어판의 부제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은 어느정도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한국적 맥락에서 잉여는 노동시장에 진출하지 못한 중산층의 청년들이 자신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빗대는 표현이거나, 온라인상에서 유행하는 ‘병맛’이나 ‘덕후’처럼 의미를 유희하는 경우에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잉여라는 자기지칭적이고 어쩌면 긍정성을 내포한 중간계급의 용어와 달리, 차브는 지배계급이 타자를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담론이기 때문에 ‘양아치’나 ‘쓰레기’가 이러한 의미에 가까워 보인다.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는 노동자 일반을 쓰레기나 양아치 수준으로 공개적으로 비웃지 않는다. 그러나 감시의 시선을 늦추어서는 안될 것이다. 평범한 이웃들은 언제든지 잠재적인 범죄자나 골칫거리로 전락할 수 있다. 실제로 종편채널을 보고 있노라면 하루종일 쏟아지는 혐오표현과 그 대상에서 잠재적 차브를 손쉽게 찾아낼 수 있다. 사소한 가정불화부터 연쇄살인범까지, 불량식품에서 외국인 범죄까지, 된장녀와 김치녀에서 쏘시오패스까지 수많은 일상적 딱지가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혹은 사회문제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아니면 단순한 오락거리로 남발되고 있다. 공적영역에서 사회적 인정이 아니라 무시가 일상적으로 통용될 때, 평범하고 정상적인 누구든지 손쉽게 차브의 처지로 전락할 수 있다. 그들이 그렇게 되는 것은 그들의 무능력, 무기력, 비도덕 탓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 자신의 미래상이다. 오늘날 타도할 대상은 그들이 아니라 지배계급이다. 정확히는 불평등하게 기울어진 자본주의사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