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화평
웰컴 투 더 리얼 월드!
정지은 鄭知恩
문화평론가. 제2회 사회인문학평론상 당선자 pacific00@naver.com
#1. “가장 혼자 벌어서 네 식구 그럭저럭 먹고살고 애기들 키우고 하던 그런 시절. 이제 그런 세월은 다시 안 와요. 꼭지만 틀면 나오는 수돗물처럼 마음대로 쓰다가 아무 때나 갖다 버릴 수 있는 이 좋은 세상을 어느 미친놈이 바꾸고 싶겠냐고?! 몇년만 더 지나봐. 그런 시절 있었던 거 기억도 못할 거야”(최규석 웹툰 「송곳」 중)
#2. “계약직이 암만 파리목숨이라도 이건 아니지.” “이건 부당해고예요. 회사의 일방적인 계약위반이라고요.”(영화 「카트」 중)
대중문화가 달라졌다. 영화·웹툰·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장르들이 ‘노동’과 만나고 있다. 그동안 한국 드라마는 ‘의사가 사랑하면 의학 드라마, 변호사가 사랑하면 법학 드라마’라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로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직업은 주인공의 사랑을 위한 배경이나 양념 정도로 쓰일 뿐이었고, 주인공도 재벌이거나 재벌의 숨겨놓은 자식이었다.
하지만 이제 전혀 다른 종류의 주인공들이 속속 등장 중이다. 웹툰 「송곳」(최규석 글·그림, 2013.12~), 영화 「카트」(부지영 연출, 2014), 웹툰(윤태호 원작, 2013년 단행본 완간)에서 드라마(김원석 연출, 2014)로까지 나온 「미생」이 대표적이다. 이들 작품은 각각 까칠한 노동상담소 소장 ‘구고신’, 반찬값이 아니라 생활비 벌러 나오는 마트 여사님들, ‘장그래’로 대표되는 화이트칼라 계약직(비정규직)의 세계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현실을 공론화했다. 현실을 날것 가까이 드러낸 이 문화콘텐츠들은 ‘노동’이라는 낯선 주제를 안방에서, 스마트폰에서, 극장 스크린에서 환기시킨다. 심지어 광고에서조차 ‘법으로 정한 대한민국 최저시급은 5580원’ ‘대한민국 알바들의 야간근무수당은 시급의 1.5배’ ‘알바라고 무시하면 새 알바를 찾아 나서세요’라며 아르바이트생의 근로기준법상 권리를 소재로 삼았다(구인구직 싸이트의 이 광고는 광고배포 중지와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소상공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현재는 방송중단 상태다). 개그 장르로 분류되는 「가우스전자」(2011.6~)라는 웹툰에서조차 “3년 전에 권고사직 받고도 안 나가고 버티고 계시는 분이야. 지금은 보직도 직무도 없이 창고 같은 사무실에서 버티고 계시지”라는 대사가 등장하고, “이게 바로 ◯◯에서 하는 짓거리, 저 정도면 양반임” 같은 댓글이 실시간으로 달린다. 낯설기만 한 주제인 ‘노동’이 이렇게 대중문화 전반에서 공공연하게 다뤄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한국사회의 현실 그 자체다. 2007년 비정규직법이 개정되고, 26개로 제한됐던 파견직이 전 업종에 허용되면서 파견직 노동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청년노동자 첫 일자리의 36%는 비정규직이고, 아르바이트 노동조합이 공식 인정을 받을 정도로 ‘알바’는 이제 많은 사람들의 ‘직업’이 되었다. 그런데도 시간당 5580원인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전체의 12.1%, 180여만명에 달한다. 한국은 ‘20대엔 비정규 알바, 30대엔 비정규 파견, 40대엔 비정규 하청, 50대엔 비정규 일용, 60대엔 비정규 공공’으로 살아가야 하는 나라다. ‘3포세대’(경제적 어려움으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는 기본이고 ‘5포세대’(3포+취업, 주택)도 모자라 ‘7포세대’(5포+인간관계, 희망)라는 말까지 등장할 정도다. 거기에 ‘갑질’과 ‘열정 페이’ 논란, 한정된 일자리를 놓고 빚어지는 세대 간 갈등까지 겹쳐진 현실의 중심에 바로 ‘노동’이 자리한다.
‘웰빙’이 사회 트렌드였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이제 사람들은 재테크나 자기계발에 열중하지 않으며, ‘힐링’을 찾는 것도 지쳐 ‘생존’을 걱정한다. ‘더 나은 내일’ 이 아니라 ‘오늘보다 나쁘지 않은 내일’이기를 바라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사회에 대중문화가 반응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평생직장’은 무너진 지 오래, 청소년들의 꿈은 ‘정규직’이고, 문자로 해고통보를 당하는 게 더이상 놀랍지 않은데도 이런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다뤄지지 않았다. 예능프로 <무한도전>의 ‘극한알바’ 편 정도에서나 잠깐 등장했을 뿐이다. 그동안 우리는 김치로 귀싸대기를 때리는 막장 드라마에는 익숙해졌을지언정 막상 힘든 현실만큼은 TV 속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은커녕 최저시급이 얼마인지조차 광고를 통해 알게 되는 우리 사회 전반의 노동현실에 대한 무지도 한몫을 한다. “사람들이 현실에서 부딪히는 부당해고나 임금체불 등 노동문제에 대한 대응책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종의 학습만화로 기획한 측면도 있다”(한겨레 2014.10.19)라는 「송곳」의 최규석 작가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이 웹툰은 댓글에서 ‘노동상담소’가 차려질 정도로 우리 모두를 계몽하고 있는 드문 사례이기도 하다. 집회신고를 하기 위해 달리기 시합을 해야 하는 ‘웃픈’(웃기고 슬픈) 현실, 파업을 고민하는 육사 출신 정규직, 열심히 일했는데도 정규직이 되지 못하는 캐릭터는 대중문화에서 다뤄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노동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2001년 항공사 노조가 파업에 돌입했을 때를 상기해보면 놀랄 만한 변화다. “가뭄으로 국토가 타들어가든 말든 민주노총은 연대파업에 돌입하고, 연봉 1억이 넘는 항공기 조종사들까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동참한다”는 맹비난이 쏟아졌다. 가뭄과 파업이 무슨 상관이 있으며, 연봉 1억이 넘으면 파업하면 안되는 것인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귀족노조라며 모두가 한목소리로 노조를 비난하면서도 파업이 노동자의 권리라는 것은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여전히 파업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도 한 축의 현실이지만 분위기만큼은 확실하게 달라졌다. 자녀 세대는 정규직으로 고용될 가능성이 거의 없고, 부모 세대는 해고불안에 시달리는 이중고를 겪다보니 달라지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 현실이 ‘누군가’의 일이 아니라 ‘누구나’의 일이라는 것, 지금 정규직일지라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모두에게 깔려 있다. 한두명 능력 없는 사람의 딱한 사정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대중문화 안으로 노동이 완전히 들어왔다고 보기는 힘들다. 「송곳」은 ‘무려’ 네이버에 연재 중이지만, 조회수로만 따지면 결코 인기 콘텐츠가 아니다. 「카트」 역시 80만 관객을 조금 웃돌아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노동절’은 ‘근로자의 날’로, ‘노동자’는 ‘근로자’라 불리며, “노조 때문에 나라 망한다”는 공공연한 정서에 “빨갱이 소리만 안 들어도 다행”인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정부만 해도 그렇다. 「미생」이 흥행하자 정부는 지난해 말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고, 55세 이상 파견 허용 업종을 전면 확대하는 내용의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내놓고도 이에 대해 도리어 ‘장그래법’ 운운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현실 같은 영화가, 드라마가, 만화가 나와도 우리의 현실은 나아지지 않을지 모른다. 「카트」는 경찰의 물대포 공격을 동지가 된 여성 둘이 뚫고 나가는 장면에 장엄한 음악이 깔리면서 끝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끝나는 대신 길게 이어지며,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카트」가 천만 관객을 돌파한들 달라질 건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내 일이니까, 이 일이 지금의 나니까, 내게 허락된 세상이니까”(「미생」)를 말하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지고 있는 밑천이라고는 노력밖에 없는 청춘 장그래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현실은 갈 길이 멀지만, 대중문화 콘텐츠로서의 노동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노동자나 노조를 빨간 띠 두르고 데모하는 무서운 이미지 대신 ‘이수인’(「송곳」)이니 ‘장그래’니 하는 살아 있는 인물의 이야기로 생각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기대한다. 제2, 제3의 구고신과 이수인, 안영이(「미생」)와 장그래를 또다른 장르의 대중문화에서 만날 수 있기를. 그들은 어딘가에서 그냥 튀어나온 캐릭터가 아니라 누구나 피부로 느끼는 노동현실을 반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동현실이 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인물들을 만나게 될 테다. “웰컴 투 더 리얼 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