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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신윤희 辛潤喜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 3학년. 1992년생.
dynamitebox@naver.com
두 사람이 서 있다
내가 이 집에 들어온 다음 날, B도 이 집에 들어왔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중이었다. 뜨개질은 내 취미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브레인칩의 데이터베이스에 ‘취미는 뜨개질’ 이라고 사전에 입력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뜨개질을 했다. 어제 감시자의 안내를 받아 이 집에 들어오고, 내가 머물게 될 방의 구조를 간단히 살펴보고, 간소한 짐을 방에 푼 이후로 나는 소파에 앉아 줄곧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방 안에 붉은 털실이 있기에 그것으로 목도리를 만들기로 했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나는 뜨개질감을 소파에 그대로 두고 현관으로 나갔다. B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B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나도 B에게 인사했다. B가 자신의 손에 들린 가방을 내게 내밀었다. “이 가방 좀 받아주시겠어요?” 내가 말했다. “이 가방은 제 것이 아닙니다.” B가 덧붙였다. “제 짐을 저기 빈 방으로 옮겨주셨으면 좋겠다는 뜻이에요. 아시다시피 제가 B타입인데 신체 동기화가 덜된 상태라서요. 몸을 움직이기가 조금 불편합니다. 동기화 작업 때문에 하루 늦어진 거기도 하구요.”
나는 B의 가방을 들었다. 내 가방보다 훨씬 무거웠다. “감사합니다.” B가 말했다. 나는 B의 방문 앞에 가방을 내려다놓고 다시 소파에 앉아 뜨개질감을 들었다.
“짐 정리하는 것도 좀 도와주시겠어요?”
B가 자신의 방 쪽으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B의 방은 내 방과 거의 비슷했다. 씽글 사이즈의 침대 옆에는 협탁이, 협탁에는 작은 스탠드와 탁상시계가 놓여 있었다. 침대의 오른쪽에는 흰 커튼이 달린 창문이, 왼쪽에는 옷장이 있었다. 내 방과 다른 점이 있다면 B의 방에는 책장이 있었다. 나는 B의 가방 안에서 책을 한권 꺼냈다.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여 천천히 글자를 읽고 있는데 B가 그 책을 책장에 꽂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B의 책을 책장 맨 위 칸에 꽂았다.
“그건 두번째 칸에 꽂아야 되는데……”
B가 중얼거리며 내가 꽂은 책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B의 손이 공중에서 살짝 떨리고 있었다. B는 팔을 자기 쪽으로 거두고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고정했다. B가 다시 책장으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그 순간, B가 들고 있던 책을 놓쳤다. 책의 뾰족한 모서리가 B의 발등 위로 떨어졌다.
“아.”
소리를 낸 것은 B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발가락을 움찔거렸다.
“아프겠다.”
“글쎄요.”
B가 웃으면서 말했다. 실리콘으로 덮인 B의 발등 위로 책 모서리에 찍힌 자국이 났다. B는 고개를 숙이고 발등의 자국을 한참 바라보았다. 곧이어 B는 허리를 구부리고 바닥에 떨어진 책을 향해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아, 저기 제가 기름이 다 떨어진 것 같……”
B의 말은 중간에서 끊겼다. B의 동작이 그 상태에서 그대로 정지했다. 책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구부리고, 오른손은 떨어진 책을 향해 뻗고, 고개는 숙인 채였다. B는 아무 말도,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동상처럼 책장 앞에 멈춰 있었다.
나는 기름에 대해 생각했다. 머릿속에서 기름의 종류를 차례대로 분류한 후 이 집에서 기름 혹은 기름과 가장 유사한 성질의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석유나 경유, 등유, 휘발유 같은 광물성 기름은 찾을 수 없었다. 당장 제일 찾기 쉬운 기름의 종류는 아마도 옥수수유나 포도씨유, 쌀눈유, 해바라기씨유, 아마씨유, 아보카도 오일 같은 식물성 기름일 것이다. 그것들이라면 대부분 부엌 찬장에 있었다.
조리대의 찬장을 열었다. 바닥이 드러난 옥수수 식용유가 있었다. B의 몸집—눈대중으로 봤을 때 B의 키는 대략 178cm 정도로 추정되었다—를 계산했을 때 이 정도의 기름이라면 부족할 것 같았다. 옆 찬장을 열어보았다. 참기름이 있었다. 참기름은 참깨에서 추출한 기름이니 식물성 기름에 속했다. 나는 참기름을 집어들었다. 통 안에 가득 찬 참기름이 찰랑거렸다. 나는 참기름을 들고 B에게 향했다.
B는 여전히 책장 앞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오른손은 책을 향해 뻗고, 고개는 숙인 채로 멈춰 있었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B의 안구를 살펴보니 사람들이 흔히 ‘눈빛’이라고 부르는 것이 달아나 있었다. 역시 몸에 기름이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B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B가 쿵 소리를 내며 옆으로 넘어졌다. 나는 B의 몸통을 번쩍 들어보려 했다. 경직된 B의 몸은 제법 무거웠다. 나는 B를 질질 끌다시피 하여 부엌으로 데려갔다.
휴머노이드 B타입의 경우 연료통이 등판 쪽에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나는 B의 몸통을 뒤집었다. 옷을 걷어올리자 등 쪽에 가로 10cm, 세로 15cm 정도 크기의 덮개가 있었다. 덮개는 언뜻 보면 그냥 평평한 살색 등판처럼 보였다. B의 덮개를 열자 몸속으로 핏줄을 대신하여 어지럽게 연결된 전선들이 보였다. 가운데에는 가장 굵은 전선과 연결된 기름통이 꽂혀 있었다. 몇 방울 남지 않은 기름이 흰 통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은 기름의 빛깔이 참기름의 빛깔과 유사했다.
나는 기름통에 참기름을 가득 넣었다. 참기름이 기름통의 입구까지 찰랑거렸다. 뚜껑을 닫고 기름통을 B의 등판에 넣었다. 덮개를 닫자 B에게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나는 다시 B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제 몸에 참기름을 집어넣으셨단 말씀이세요?”
“어쨌든 기름이지 않습니까.”
어쨌든 참기름도 기름이었고, 어쨌든 B는 다시 이 집으로 돌아왔다. B는 돌아오자마자 커다란 목소리로 내게 따졌다.
참기름을 채워넣은 후에도 B는 미동조차 없었다. 기름을 넣었으니 언젠가는 움직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다시 뜨개질을 시작했다. 그림자가 길어졌다. 목도리도 길어졌다.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으로 접어들 무렵, 나를 이 집으로 데려온 그 감시자가 찾아왔다. 감시자의 손에는 큰 캐리어가 들려 있었다. 감시자는 높은 굽의 구두를 신은 채로 집 안까지 들어왔다. 감시자의 구두 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 검은 발자국이 찍혔다.
“이게 무슨 냄새죠.”
“참기름 냄새입니다.”
“설마 B-499에게 참기름을 주입하신 겁니까?”
감시자가 엎어져 있는 B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예. 참기름입니다.”
“참기름이라……”
감시자는 무어라고 작게 중얼거린 후 B의 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감시자가 한숨을 쉬었다. 감시자는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감시자는 내게 작은 드라이버를 건넸다.
나는 감시자가 시키는 대로 B의 셔츠를 벗기고 B의 관절을 연결하는 나사를 풀었다. B의 성별은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었고, 감시자의 생물학적 성별은 여성이었다. 내가 B를 분리하는 동안 감시자는 내내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B의 목과, 팔 두짝, 다리 두짝, 그리고 몸통이 따로따로 분리되었다. 분리가 끝나자 감시자는 B가 담긴 가방을 질질 끌고 나갔다.
다음 날 B는 다시 돌아왔다.
“참기름이 온몸에 다 스며들었단 말입니다. 손가락 끝까지요! 저를 고철덩어리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동기화 작업을 끝냈는데!”
“그렇습니까.”
“사과하세요!” B가 소리쳤다. “무엇을요?” 내가 물었다. “제 몸에 참기름을 넣은 일을요!” “기름이 떨어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반문했다. “그렇다고 참기름을 넣으면 어떡합니까!” “참기름도 기름이지 않습니까.”
아오. B가 뜻을 알 수 없는 모음들을 내뱉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B는 아오 열불나, 하면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해댔다. 나는 내 방에서 해열제를 찾아 B에게 건넸다. “지금 장난하세요?” B가 물었다. “장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이 나신다면서요.” 내가 말했다. B가 주먹을 쥐고 자신의 가슴을 쿵쿵 쳤다.
“그냥 사과하시면 됩니다. 미안합니다, 하고요.”
“기름이 떨어졌다고 해서 기름을 넣었을 뿐인데, 그게 어째서 미안한 일이 됩니까.”
“이래서 A타입은 안된다니까…… 머리가 이상하잖아.” B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제 머리가 이상합니까?” 나는 머리카락을 만지며 B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A씨.” B가 말했다. “A씨의 의도는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A씨가 제 몸에 기름을 넣었는데, 그 기름이, 그 참기름이! 제 첨단 안드로이드 신체 시스템하고는 맞지 않는 식용기름이라서! 갓 동기화를 끝낸 제 신체 시스템이 중대한 오류를 일으켰어요. 엔지니어 분들은 방금 전까지도 날밤을 깠고.”
“밤을 까서 먹은 것입니까?”
“A씨, 시스템 사용 언어가 대체 어느 나라 말로 설정되어 있어요?”
“한국어입니다.”
“다행이네요. 제가 하는 말도 한국어니까 말귀를 좀 알아들으세요.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면서까지 시스템 오류를 수정했다는 거예요.”
“제가 A씨의 시스템에 오류를 불러일으킨 것입니까?”
“그렇죠. 엔지니어 분들께서 저 때문에, 아니 A씨 때문에 잠도 못 주무셨어요.”
“잠을 못 주무시는 것은 심각한 일입니까? 잠을 못 주무시면 어떻게 됩니까?”
“사는 게 좀 힘들어져요.”
“모든 결과의 원인이 저입니까?”
“네. A씨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결과가 안 좋게 나타난 거예요. A씨가 참기름을 넣어서 이렇게 된 거라고요.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나는 B의 말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과해요. 미안합니다,라고.” B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나는 B에게 사과했다. “알았어요. 됐어요. 어쨌든 이제부터 같이 살게 될 텐데.” B가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악수해요. 악수.” 악수하자는 말에 나도 손을 내밀어 B의 손을 잡았다. “제 소개가 이틀이나 늦어졌네요. 휴머노이드 B타입 499번이에요. 줄여서 B-499, A는 498번이죠?” B의 자기소개가 끝난 후 우리는 악수를 했다. 서로 손을 잡고 손목을 위 아래로 가볍게 흔드는 동작이었다.
그때, 내 손 안에서 B의 손가락이 한바퀴 돌았다. 악수를 하는 B의 손목이 360도로 완전히 돌아가며 회전하고 있었다. “손목 돌아갔어요!” B가 소리쳤다. B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내 손을 뿌리쳤다. B는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잡고 다시 제자리로 돌린 뒤 단단하게 고정시키며 말했다. “이게 다 참기름 때문이야.”
나와 B는 ‘휴머노이드 프로젝트’에 의해 만들어진 두개의 상반된 휴머노이드 타입이었다. A타입인 나는 인간의 신체에 ‘브레인칩’을 이식한 형태였고, B타입인 B는 인간의 세포를 복제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뇌에 기계화된 신체를 이식한 형태였다.
설명에 따르면 최초 생성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휴머노이드 B타입은 대뇌의 운동피질, 감각피질과 연결된 시스템 뉴런의 동기화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신체를 이용한 활동이나 감각에 있어 사소한 오작동이나 탈착, 제약이 있을 수 있으므로……
“제 왼쪽 손목 못 봤어요? 방금 전에 고정해놨는데 그새 떨어진 모양이에요.”
나는 ‘사소하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생각했다. ‘보잘 것 없이 작거나 적다’는 의미였는데, B의 제멋대로인 신체에는 ‘사소한 제약’이라는 말보다는 ‘중대한 결함’이라는 말이 더 어울려 보였다. B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잃어버린 손목을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나는 식탁 밑에 떨어져 있는 손목을 주워 B에게 건넸다.
식탁에는 감시자가 전해주고 간 배급품이 있었다. 15kg짜리 쌀과 라면, 조미료, 계란 같은 식료품과 치약이나 샴푸 같은 생활용품이었다. B는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고정시키면서 말했다.
“일단 밥부터 먹어요. A씨는 배 안 고파요?”
“딱히 배는 고프지 않습니다.”
“인간은 밥을 먹어야지 힘이 난다고 하더라고요. 정해진 시간에 세끼 꼬박꼬박.”
“B씨나 저나 인간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연습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인간 연습.”
내가 요리를 하는 동안 B는 소파에 놓인 털실뭉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예요?” B가 물었다. “간단합니다. 바늘로 실과 실을 엮으면 됩니다.” B는 이젠 제법 길게 짜인 목도리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겨울에 이 목도리 하고 다니면 좋겠다.” B가 말했다. 열린 창밖에서 조금씩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계란프라이가 점점 하얗고 노랗게 익어갔다. 코끝에 뜨거운 기름이 튀어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계란프라이가 완성되었다. 나는 식탁의 냄비받침에 계란프라이가 담긴 팬을 통째로 놓았다.
“음식은 접시에 담아야죠.”
B가 접시를 꺼내왔다. B는 숟가락을 들고 심호흡을 했다. B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B가 계란 프라이를 접시에 옮겨놓았다. “성공이네.” B가 웃으면서 말했다.
“앞으로 A씨가 요리할 동안, 식사 준비는 제가 할게요.”
내 앞에는 B가 퍼 담아온 하얀 쌀밥이 놓여 있었다. B가 내 앞으로 숟가락 하나와 젓가락 한짝을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B 역시 자신의 숟가락 하나와 젓가락 한쌍을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잘 먹겠습니다. B가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밥 먹을 때 꼭 그런 절차를 거쳐야 합니까?” 내가 물었다.
“A씨가 해주신 음식이잖아요. 음식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겁니다.”
“그럼 저는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됩니까?”
“음…… 그건 아니죠. A씨가 계란프라이를 만들기 위해서 오늘 아침에도 알을 낳은 암탉과, 그 암탉을 돌보느라 오늘도 고생하는 수많은 양계업자 분들과……”
그때 내 뱃속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표음문자로 표기해보자면 마치 꾸루룩, 같기도 하고 꾸웨엑, 같기도 했다. “일단 먹어요.” B가 숟가락을 들었다. 나도 숟가락을 들었다.
“그거 맛있어요?”
B가 계란프라이를 삼키는 내 입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아직 ‘맛’이라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신체를 통해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감각과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된 기존의 단어를 대칭지어 설명하는 과정이 아직까지는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데이터베이스에 수집된 단어도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B가 ‘기분’이나 ‘느낌’ ‘맛’ 같은 단어를 물어올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B가 시시때때로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손가락이나 손목을 매번 고정시킬 때처럼. 나 역시 ‘맛’이라는 단어 하나에 대해서, 맛을 느끼지 못하는 B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는 일이 번거로웠다.
나는 밥을 열번 씹었다. 부드러운 쌀밥과 미끌미끌한 계란 노른자가 입안에서 한데 뒤섞여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B는 식사 도중에 일곱번 숟가락을 떨어트렸고 물이 담긴 컵을 네번 엎질렀다. B는 내가 밥을 먹는 중간에 일어나서 행주로 식탁을 닦을 때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감시자는 일주일에 한번 이 집에 들렀다. 감시자는 마당에 검은 차를 주차해둔 후 현관문 앞에서 나와 B를 불렀다.
“날라요.” 이게 감시자가 하는 말의 전부였다. 감시자가 ‘날라요’ 하고 말하면 나와 B는 마당 밖으로 나가 트렁크 안의 식료품이나 생활용품을 집 안으로 옮겼다. 그것들은 모두 정기적으로 상부에서 지급되는 배급품이었다. 나는 주로 무거운 쌀이나 과일이 담긴 박스를 통째로 들었고, B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씨리얼이나 간식거리, 과자 같은 것을 들었다.
감시자가 두번째로 집에 들르는 날이었다. 감시자는 검은 차를 끌고 와 마당 앞에 서 있었다.
“날라요.” 마당 밖에서 감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B는 내 뒤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따랐다.
감시자의 차 트렁크가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트렁크로 다가가 쌀 포대를 어깨에 짊어졌다. 내가 쌀과 사과 한 박스를 집 안에 옮겨놓을 때까지 B는 마당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해요. 짐 나르라니까.”
감시자가 B에게 소리쳤다. B는 감시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다가 그녀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B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감시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단발머리에 검은 썬글라스를 낀 감시자는 B보다 머리 하나만큼 작았다. 썬글라스 너머 감시자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B는 보이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그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감시자가 말했다. 어쩐지 화가 난 듯한 목소리였다. B가 며칠 전에 내게 해준 말이 생각났다. B는 사람들은 보통 화가 나면 목소리가 커지고 높아지지만, 때때로 아주 많이 화가 났을 경우에는 평소에 비해 목소리가 무겁게 낮아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감시자의 목소리 톤은 평소에 ‘날라요!’ 하고 날카롭게 소리치던 것에 비해서 낮게 깔려 있었다.
“도와달라고 말해요.”
“뭐라고요?” 감시자가 되물었다.
“앞으로는 이 짐을 옮겨야 하는데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부탁해달라고요. 그게 예의잖아요.” B가 대답했다.
감시자는 말이 없었다. B 역시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감시자와 B는 마당에서 한참을 마주보며 서 있었다. 얼마 후 감시자가 B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B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트렁크에 마지막으로 남은 과자와 빵 봉지를 양손에 집어들었다. 감시자는 트렁크 덮개를 내리고 차에 올라탔다.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검게 썬팅된 차창이 스르르 올라갔다. 손목에 빵 봉지를 건 B가 감시자의 차창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다음에 올 때, 커피믹스 한봉지 좀 부탁해요. 맥심 아라비카로.”
B가 감시자에게 웃어 보였다. 감시자는 말없이 차창을 닫았다. 차가 출발했다.
B는 보통 사람들은 남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면서 여러가지 대화와 사교활동을 한다고 했다. 우리도 사람들처럼 커피를 마시는 것이 몸에 밸 때까지, 정해진 시간에 커피 먹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B가 커피 두잔을 내왔다. 흰 커피잔과 받침접시가 거실의 투명한 유리 테이블에 놓였다. 감사합니다. 나는 하던 뜨개질을 멈추고 B에게 말했다. B는 웃으면서 “오, 많이 발전하셨네요.” 하고 말했다. B는 여전히 뜨개질에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원하신다면 가르쳐드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B는 말없이 웃으면서 촘촘하게 얽혀 있는 털실 목도리의 결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아마도 이건 부드럽다고 말할 수 있는 느낌일 거예요. 그렇죠?”
나도 목도리의 결을 손가락으로 더듬어보았다. 목도리를 만지는 손가락 끝에 신경을 집중했다. 털실의 감촉을 쭉 따라가면서 나는 B가 말한 단어를 생각했다. 부드럽다. 부드럽다.
커피는 처음 마셔보는 것이었다. 나는 B를 바라보며 커피를 쭉 들이켰다. 평소와 똑같이 물을 마시는 것처럼. 커피는 무척이나 뜨겁고 썼다. 내 입에서 채 삼키지 못한 커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B는 내 앞에서 커피잔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커피를 꼴깍꼴깍 들이켜고 있었다. B는 세모금 만에 커피를 다 마셨다. “이번엔 제가 특별히 결심을 했거든요. 커피는 플라스틱컵 말고 커피잔에 마셔보고 싶어서……” 이상하게도 내 귀에는 B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눈물이 고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입안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반쯤 남은 내 커피잔에서는 하얀 김이 나고 있었다. “커피가 뜨거우면 뜨겁다고 미리 말을 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나는 B에게 소리쳤다. 내 입에서 60데시벨 이상의 목소리가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B는 당황한 눈으로 내 어깨를 붙잡고, “왜 그러세요? A씨 괜찮아요?”를 연발했다. 나는 B의 손을 뿌리치고 냉장고 앞으로 달려갔다. 냉동고에서 얼음 두개를 꺼내 우적우적 씹었다. B가 중얼거렸다.
“뜨겁다는 게 이런 것이었군요……”
나는 뜨개질에만 열중했다. B는 내 옆에서 책을 읽었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책을 읽다가도 B는 소리 나게 한숨을 쉬거나 고개를 숙이고선 으으, 하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B가 갑자기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은 후 탁자에 올려놓았다. 어느새 B는 내 옆으로 바짝 붙어와 앉아 있었다.
“입술이 많이 부었네요.”
B가 손을 뻗어 내 입술을 만졌다. B의 손가락에서 고무냄새가 났다.
“언제까지 만지실겁니까.” B는 대답하지 않고서 계속 내 입술만 만졌다. 천천히, 입술의 작은 주름과 하얗게 올라온 각질 하나하나를 더듬듯이 만졌다.
“저는 사람의 몸이나 감각 같은 게 늘…… 궁금합니다. 뜨거운 것에 닿으면 살갗이 부어오른다는 게 사실은 조금 신기해요.”
B는 내 퉁퉁 부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면서, 눈으로는 뜨개질을 하고 있는 내 손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읽던 책을 덮었다. 표지에는 하얀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글보다 그림이 더 많고 두께가 얇은 어린이용 그림 동화책이었다. 나는 밤마다 동화책을 작게 소리 내어 읽었다. 봄 햇빛은 포근해. ‘포근해’라는 단어 앞에서 ‘포근해’와 ‘따뜻함’의 차이는 무엇일까 한참을 생각했다. ‘가을의 바람은 살랑살랑.’ 어쩐지 살랑살랑,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눈을 감고 싶어졌다. 자꾸 ‘기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갔다. 따뜻하고 보들보들한 내 이불. 나는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포근해. 목소리를 내어 중얼거려보았다. 포근한, 이불. 그렇게 말하자 정말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포근해, 따뜻해. 보들보들해, 부드러워, 촉촉해, 축축해. 뜨거워, 화끈화끈, 살랑살랑, 차가워, 서늘해, 싸늘해…… 수없이 많은 단어들이 내 머릿속에서 나무처럼 가지를 뻗는 느낌이었다. 때로는 아무렇게나 내리는 눈처럼 마구 흩날렸다. 이런 기분을 한번에 설명할 수 없었다. 감각이나 기분이 말을 따라가지 못할 때도 있었다. 입술을 만지던 B의 말랑말랑한 손가락이나, 그 손끝에서 나던 옅은 고무냄새에도 분명히 기분이 있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스탠드의 불을 껐는데도 어디선가 빛이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작게 열린 내 방 문틈으로 새어들어오는 빛이었다. 나는 방문을 조금 더 열어보았다. 거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어슴푸레하다,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어슴푸레한 빛이 들어오는 복도를 지나 거실까지 다다랐을 때, 거실 불을 켜놓고 소파에 앉아 있는 B의 등이 보였다.
B는 홀로 소파에 앉아 커피잔과 받침접시를 반복해서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B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커피잔과 받침접시가 부딪히면서 가볍게 달달, 울렸다. B는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다시 한번 유리잔을 들어올렸다. B는 커피잔을 입술까지 가져다 댄 후 무엇인가를 천천히 마시는 시늉을 했다. 잔을 내려놓은 B는 잠시 눈을 감고 깊게 숨을 쉬다가 다시 한번 천천히 손을 뻗었다.
B는 밤새 몇번이나, 빈 찻잔을 들었다가 제자리에 놓기를 반복했다.
“뜨거운 커피니까 조심해서 마셔요.”
매일 아침 식사를 마친 후 B는 커피를 내왔다.
커피잔에서는 하얀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B에게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B는 미소를 지으며 능숙하게 커피잔을 들어올렸다
B에게 뜨개질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우리는 매일 아침, 같이 식사를 한 후 B가 타준 커피를 마시고 오전 내내 뜨개질을 했다. B의 뜨개질에는 진전이 없었다. B는 첫 코를 뜨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종종 B의 손목이나 발목이 어디론가 사라질 때도 있었다. 뜨개질을 하다 말고 우리는 B의 손목을 찾으러 소파 구석구석을 뒤졌다. 결국 B는 시작조차 못한 뜨개질감을 발끝으로 슥 밀어놓고선, 책을 읽거나 내 옆에 가까이 붙어 내가 뜨개질 하는 것을 구경해야만 했다.
“매일 뜨개질만 하면 좀이 쑤시지 않아요?”
“뜨개질을 하는데 어디가 쑤십니까?”
내 말을 듣고 있던 B는 크게 웃으면서 읽고 있던 책을 여러장씩 빠르게 넘겼다. 단단해 보이는 갈색 표지의 아주 두꺼운 책이었다. 나는 가만히 B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B는 책의 어떤 부분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곧이어 B의 손가락이 책의 어떤 글자를 짚었다. 나는 B의 손가락이 짚은 글자를 보았다.
‘좀이 쑤시다.’
그 단어 밑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마음이 들뜨거나 초조하여 가만히 있지 못하다.’
“그 책은 뭡니까.”
“사전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말의 뜻을 알려주는 책.”
B는 사전에서 ‘뜨겁다’라는 단어를 찾아 읽었다. “뜨겁다. 그러니까 뜨겁다는 것은, 몸에 상당한 자극을 느낄 정도로 온도가 높은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는 것 같습니다. 뜨거운 커피를 삼켰을 때는 상당한 자극 때문에 입안이 아팠습니다.”
“어떻게 아팠어요?” B가 물었다. “아프다는 말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더군요. 아리다, 쓰리다, 쑤시다……”
B는 사전을 펼쳐 ‘아리다’라는 단어를 찾았다. 어느새 B는 내 옆으로 가까이 붙어 앉아 있었다. B의 검지와 내 검지가 바싹 달라붙어 사전 위의 단어를 하나하나 짚어갔다. “어느 쪽에 더 가까워요?” B가 물었다. ‘아리다’라는 단어의 아래에는 세 문장이 적혀 있었다.
‘혀끝을 찌를 듯이 알알한 느낌이 있다.’
‘상처나 살갗 따위가 찌르는 듯이 아프다.’
‘마음이 몹시 고통스럽다.’
내 손가락은 세번째 문장을 몇번인가 더듬은 후 지나가 두번째 문장과 첫번째 문장 사이에서 맴돌았다. B의 시선은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갔다. 나는 내 혀에 감돌던 느낌을 상기하며, 대단한 결단을 내리기라도 하듯 첫번째 문장을 짚었다.
감시자는 짐을 다 옮긴 나와 B에게 교통카드 한장을 건네주었다. 감시자는 휴머노이드의 신체능력 함양과 사회화 과정을 위한 상부의 지시로, 내일부터는 외출을 허락하겠다고 했다. 장소의 제한은 없지만 밤 10시 전에는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감시자가 돌아간 후에도 B는 신이 나서 집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다리가 꼬여 넘어졌다. B는 땅바닥에 엎어져서도 계속 웃었다. 밥을 먹다가 컵을 떨어뜨려도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하지 않았다. B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감시자가 건네준 교통카드를 주머니에 넣었다 빼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집고 위로 들었다가 놨다가 허공에 흔들면서 흐음흐음,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B는 잠들기 직전까지 자신의 주머니 속에 교통카드가 제대로 들어있는지를 몇번이나 확인했다. “이제 그만 주무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내가 물었다. B는 원래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잠들어서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 역시 잠이 오지 않더라도 늘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했다. “휴머노이드는 원래 잠 안 자도 돼요.” B가 말했다.
어젯밤 B는 들뜬 표정으로 외출계획을 읊었다.
“내일은 영화를 본 후에 좀 돌아다니다가 레스토랑에 가서 스빠게띠를 먹는 거예요.”
“집에서도 먹는 밥을 왜 굳이 외출해서 또 먹습니까. 왜 하필 스빠게띠입니까.”
“집에서 먹는 거랑 바깥에서 먹는 건 또 달라요.”
“무엇이 다릅니까?”
“일단 A씨가 매일 해주는 계란프라이보단 맛있을걸요.”
“B씨는 맛을 못 느끼지 않습니까.”
“아.”
B는 보통 사람들은 모두, 가끔씩은 식당에 가서 평소에는 잘 먹지 않는 음식을 먹고 ‘분위기’라는 것을 낸다고 했다. B는 우리 역시 인간의 분위기를 연습해야 하지 않겠냐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를 보지도, 레스토랑에서 스빠게띠를 먹지도 못했다. 늘 조용하던 집안과 달리 바깥은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소음으로 시끄럽고 혼잡했다. 몸을 움직이기가 불편한 B는 천천히 걸었다. 나는 내 걸음을 B에게 맞추면서도 B가 넘어지지는 않는지, 몸이 탈착되지는 않는지를 살폈다. B에 집중해서 걷다보면 다가오는 사람들과 부딪히기 일쑤였다. 나는 사람들과 부딪힐 때마다 B가 일러준 대로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늘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하던 B와 달리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B와 나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뀌었다. B는 천천히 한걸음씩 내딛었다. B는 입모양으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작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B의 걸음과 맞추기 위해 B보다 더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빠르게 지나갔다. B가 잠깐 휘청거렸다. 횡단보도를 반도 다 건너지 못했는데 신호등이 다시 빨간불로 바뀌었다. B는 초록불이 되면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고 했지만 횡단보도 한가운데에서 다시 빨간불로 바뀔 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해준 적이 없었다. 졸지에 나와 B는 횡단보도 한가운데 갇히게 되었다. 클랙슨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B는 그 자리에서 한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나 역시 B 옆에 계속 멈춰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 뒤편에는 작은 시내가 있었다. 멀리서 까만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이쪽으로 몰려왔다. 물고기들이 물 위로 튀어올랐다. 물고기와 강물이 부딪혀 통, 통, 하는 소리를 냈다. 북적였던 번화가와는 달리 강가는 한적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벤치에 앉은 B는 팔과 다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B의 옆에 앉았다.
“A씨, 혹시 인형놀이 알아요?”
돌아오는 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던 B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잘 모릅니다.”
“인형놀이라는 게 있대요. 인형은 자기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지만 무대 뒤의 사람이 인형의 팔과 다리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끈을 연결해서 움직이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지금, 그 인형이기도 하고 그 인형을 움직이게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한걸음을 디딜 때마다, 아니면 이렇게 손을 들 때마다.” B는 그렇게 말하며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런 작은 동작 하나도 실은 몇번을 연습해야 합니다.” B가 다시 손을 자기 쪽으로 거두어갔다. “인형을 움직이게 하는 사람이 무대 뒤에서 몇번이나 연습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 몸 안의 모든 실들이 다 꼬인 느낌이에요. 솔직히 말하면 지쳐서 한발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B는 한숨을 쉬더니 곧 웃었다. “A씨에게 폐만 끼친 것 같아서 죄송해요.” 나는 B가 내게 늘 그랬듯이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와 B는 한동안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물소리가 내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귀로부터 서서히 퍼져나가 온몸을 통과하듯이 나를 조용히 지나갔다. 초겨울의 햇빛이 강물 위로 비치고 있었다. 우리는 그 햇빛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첫 외출 이후로 B는 잘 걷는 연습을 해보겠다며 저녁을 먹고선 밖으로 나가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내가 같이 나가겠다고 했지만 B는 나 없이도 돌아다니는 연습을 해야 한다며 사양했다. 나는 이 집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혼자 남게 되었다. 원래부터 조용한 집이라고 생각했지만 B가 없어지자 이곳은 더욱 적막해졌다. 나는 뜨개질도 하지 않고 집 안을 서성거렸다.
고요 속에서,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와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내 발소리, 바람에 커튼이 흔들리는 소리,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 같은 것들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일부러 들으려 하지 않아도 자꾸만 들렸다.
나는 이 집이 여러 소리들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소리 위를 부드럽게 덮으며 이 집의 소리를 완성하는 하나의 소리가 빠진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냉장고도, 시계도, 커튼도 원래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것들의 소리가 제자리를 잃고 한꺼번에 내 귓속으로 달려드는 것 같았다. 나는 뜨개질을 하다가도 몇번씩 시계를 보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B의 방에 들어갔다. 흐트러진 침대 시트를 보며 B의 윤곽을 생각했다. 나는 B의 책장 두번째 칸에 꽂힌 책을 꺼냈다. B의 발등에 찌그러진 자국을 남긴 책이었다. 책 제목을 눈으로 훑으면서 손가락으로는 책의 모서리를 더듬었다. 나는 그 책을 품에 안고 B의 방을 나왔다.
“A씨!”
현관문이 열리고 B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B는 신발을 벗으면서 쾌활하게 말했다. “오늘은 꽤 많이 걷느라 좀 늦었어요. 저번에 A씨랑 같이 갔던 강 쪽까지 혼자서 걸었어요.”
B가 들어서자 집안에서 강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요하고 낮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리였다. 그것은 B의 신체 시스템 구동음이었다. 희미한 진동과 울림을 가진 구동음은 마치 B와 함께 들었던 강물소리처럼 들렸다. 그 순간, 나는 집안의 모든 소리들이 강물소리 밑으로 들어가 제자리를 찾았다는 것을, 비로소 이 집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B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듣고 있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B도 떠들기를 그만두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강물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물고기 튀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몸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B는 매일 아침 마당에 나가 체조를 했다. 가벼운 맨손체조였지만 B의 표정은 진지했다. B는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어 돌리는 동작을 며칠 동안 연습했다. 얼마 후엔 나도 매일 아침마다 B와 체조를 했다. 체조를 한 뒤엔 밥을 먹고 뜨개질을 했다. 어느 지점에서 목도리의 끝을 맺어야 할지 몰랐다. B는 세상에서 제일 긴 목도리를 뜰 수도 있겠다고 말하며 웃었다.
내 데이터베이스에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단어와 문장이 쌓여갔다. 나는 이제 그림이 없고 글씨만 있는 두꺼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밤마다 B의 방에서 가져온 책을 읽었다. 몇몇 문장에 연필로 흐릿하게 밑줄이 쳐져 있었다. 밑줄이 쳐진 문장들은 데이터베이스가 아닌 몸에 새겨지듯이 남았다.
나는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창문에 서린 ‘푸르스름함’과 B와 맨손체조를 하러 나간 아침의 ‘푸름’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새벽의 푸르스름함 속에서 늘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벽에 가만히 귀를 대보면 강물소리가 났다. 옆방에는 B가 잠들어 있다. 푸르스름함에서 푸름이 올 때까지 벽에 귀를 대고 있었다. 천천히 푸름이 올 때쯤이면 나는 내 몸속에 튀어오르는 수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가만히 대고, 매일 새롭게 알았다.
B는 사전을 보면서 내게 ‘어느 쪽이에요?’라고 물어왔다.
“아까 맨손체조 할 때, A씨가 ‘오늘 참 따뜻하다’라고 말했잖아요.” “B씨는 어느 쪽이에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을 B는 기억하고 있었다. B는 사전 속에서 ‘따뜻하다’를 찾았다. 어디선가 고무냄새가 났다. ‘따뜻하다’는 두개의 문장을 안고 있었다. ‘1. 덥지 않을 정도로 온도가 알맞게 높다. 2. 감정, 태도, 분위기 따위가 정답고 포근하다.’ B와 내 검지가 사전 위에서 부딪혔다. B의 손가락은 첫째 문장을, 내 손가락은 둘째 문장을 짚었다. 나는 B의 옆얼굴을 살폈다. 내 손가락을 첫째 문장으로 황급히 옮기려던 찰나에, B가 사전을 소리 나게 탁 덮었다.
“누가 왔나봐요.”
감시자의 차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나와 함께 소파에 앉아 있던 B는 어느새 밖으로 나가 있었다. B는 비틀거리면서도 차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B의 뒤를 따랐다. 언제나 마당으로 먼저 나가는 것은 나였고, 내 뒤를 천천히 따르던 것은 B였다. 나는 마당으로 곧장 나가지 않고 현관문 앞에 서서 B를 보았다. B가 감시자와 마주보며 서 있었다. 둘은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간간히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순간 ‘뜨겁다’라는 단어가 왜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뜨겁다’라는 단어를 생각한 순간, B의 손가락과 몇번이고 스치던 그 손가락 끝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졌다. 어느 쪽이에요? B가 또다시 물어올 것 같았다. 나는 B의 사전을 다시 펼쳤다.
‘뜨겁다’
나는 손끝으로 ‘뜨겁다’를 뭉개버릴 것처럼 꾹 눌렀다. 손가락을 살짝 떼어보았다. ‘뜨겁다’는 흰 종이에 여전히 까맣고 선명하게 씌어져 있었다. 손가락은 첫째와 둘째 문장을 미끄러지듯 지나쳐 셋째 문장을 가리켰다. ‘3. 무안하거나 부끄러워 얼굴이 몹시 화끈하다.’
순간 배급품 봉지를 손에 들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B와 눈이 마주쳤다. B의 등 뒤로 감시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 사람이 여길 왜……”
“뭐, 중간점검 같은 거죠. 그렇죠?”
B가 감시자 쪽을 바라보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감시자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어깨를 작게 웅크리고 소파에 엉덩이를 반만 걸쳐 앉은 채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B 옆에 앉았다. B는 내 쪽을 보지 않았다. B가 감시자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집 안에 온 건 처음이죠?” B가 물었다. “저번에, B씨 연료 문제로 한번……” 감시자가 대답했다. B가 자꾸만 감시자에게 말을 걸었다. “네. 어쩌다 보니 제가 두분 담당이 된……” 감시자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럼 매일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요?” B가 물었다. “예, 뭐 그런 셈……” 내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썬글라스 벗으면 안돼요?” B가 감시자에게 말했다. “아, 저게 그……” 감시자가 주저했다. “우리가 알게 된 지 몇달이 다 되어가는데도 저 아직 그쪽 얼굴을 몰라요.” B가 감시자에게 우리라고 말했다. “아, 그런가요.” 감시자가 당황한 듯이 대답했다. 감시자는 약간 망설이는 듯싶더니 선글라스를 벗었다. 감시자의 눈은 물기가 많고 투명했다. 긴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눈꼬리 옆에 작은 점이 있었다. 감시자를 한참 쳐다보고 있던 B가 말했다.
“예쁘네요.”
“아, 저…… 감사합니다.”
감시자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내 방으로 향했다.
“A씨, 어딜 가……”
B가 손짓하며 나를 불렀다. 나는 잠깐 그들을 돌아보았다. 내 눈과 감시자의 눈이 마주쳤다. 물기가 많은 눈. 나는 방에 들어가 문을 소리 나게 쾅, 닫았다.
저는 두분이 잠들 때 같이 잠들고,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납니다. 상황보고실에는 여러대의 CCTV가 있습니다. 저는 종일 그 CCTV를 보면서 두분의 상태를 체크하고 상부에 보고합니다. 상황보고실은 다섯평 남짓 되는 아주 작은 방입니다. 간이 냉장고와 세면대, 침대 하나와 형광등, 하루 24시간 돌아가는 CCTV. 이게 제가 있는 공간의 전부입니다. 제가 매일 듣는 목소리라고는 두분의 목소리밖에 없습니다.
두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두분은 대부분 조용하게 생활합니다. 그러면 왼쪽 스피커에서는 A씨의 심장소리가, 오른쪽 스피커에서는 B씨의 구동음이 들립니다. 스피커의 볼륨을 조금 키우면 방 안이 온통 그 소리들로 가득 찹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면, 괜히 기분이 묘해집니다. 누군가의 심장소리를 이렇게 오래 들어본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A씨와 B씨가 아침체조를 할 때 저도 모니터 앞에서 기지개를 폅니다. A씨와 B씨가 밥을 먹을 때 저도 모니터 앞에서 간단한 식사를 합니다. A씨가 뜨개질을 할 때, B씨가 책을 읽을 때, 저도 모니터 앞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습니다. 제 생활 패턴은 두분과 거의 비슷합니다. 어쩌면 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두분을 가깝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두분을 어떤 ‘누군가’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분은 어찌됐건,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이 프로젝트에 처음 참여하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상황보고실의 문을 열었을 때 저는 이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는 제법 외로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에 B씨가 저에게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해줬을 때 말입니다. 그때 저는 두분보다 상급자이기 때문에,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두분을 기계로 생각했기 때문에…… 두분께 화를 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대할 때 무례하게 행동한 제 잘못이니까요. 아마도 그때부터 저는 두분을 기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좁은 방 안에서의 생활도 조금은 덜 외로워졌습니다. 두분이 너무 조용하게 생활하셔서 심심할 때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두분이 외출했을 때, 실례가 되는 말씀이지만 저 역시 두분의 뒤를 밟았습니다. 상부의 명령을 받은 일이라고는 하지만 저 역시 조금은 설렜습니다. 저는 강을 바라보고 있는 두분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두분이, 이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나지 않게 돼서 우리와 함께 살 수 있게 되길 바랐습니다. 여러가지로 제가 두분께 지금까지 실례되는 일을 해왔다는 것은 알지만…… 그러니까 두분께서…… 이 프로젝트가 폐기된다면……
나는 문틈으로 거실을, B와 감시자를 지켜보았다. 감시자의 말이 끝나자 B는 그녀의 얼굴을 한동안 오래 바라보았다. B는 천천히 손을 뻗어 감시자의 볼을 만졌다.
B의 손가락이 감시자의 볼에서 내려와 입술을 만지고 있었다. 순간 내 코끝을 스치던 옅은 고무냄새가 떠올랐다. 종이 위에서 부딪치던 나와 B의 손가락과 고무냄새의 기분을 떠올렸다. 온갖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우글거렸다. 온몸에서 열이 났다. 뜨겁다. 어느 쪽이지? 아리다. 어느 쪽이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B는 온 신경을 집중하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아무것도 없는 흰 백지 위에 부드러운 선을 그리듯이. 능숙하고 우아했다. 마치, 그녀를 만지는 것을 늘 상상하며 손짓 하나하나를 연습한 것처럼.
B가 감시자의 왼쪽 가슴에 귀를 가만히 댔다. 나는 내 왼쪽 가슴에 검은 손바닥을 댔다. 아직도 정확히 건져올릴 수 없는 단어들이 강물 밑에서 검게 모여들었다.
“저는 이 집에 들르지 않은 겁니다.”
돌아가기 전, 감시자가 그렇게 말했다.
“저는 두분과 얘기한 적이 없는 겁니다.”
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시자는 차를 타고 떠났다.
B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는 B의 방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B의 구동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B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천장을 보고만 있었다. 나는 B에게 등을 보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가 살짝 출렁였다.
“감시자를 좋아합니까?”
B는 대답하지 않았다.
“B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는 계속 말했다.
“어느 쪽입니까. 좋아한다는 건.”
나는 고개를 돌려 B의 얼굴을 보았다. B도 천장에서 시선을 옮겨 내 얼굴을 보았다.
“감시자는 이 집에 들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B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감시자는 B와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만해요.”
“B는 감시자를 좋아합니까? B가 감시자를 좋아하는 것은 B가 책을 좋아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좋아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건……”
B가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다시 한번 가볍게, 침대가 출렁였다. B의 시선이 다시 천장으로 향했다. 내가 방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는 순간에 B가 더듬더듬, 말했다.
“생각보다 복잡한 감정이에요.”
물고기 튀어오르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
B는 온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B는 밥을 먹지 않았다. 밥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B는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 나는 밥 대신 초코바를 까먹었다. 초코바를 한개 까먹었다. 초코바를 두개 까먹었다. 초코바를 세개 까먹었다…… 배가 고팠다. 나는 혼자서 밥을 먹었다. 식탁에 앉아 혼자서 밥을 먹으며 B의 방을 쳐다봤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밥을 먹고 체조를 하지 않았다. 잠들기 전에 책을 읽지 않았다. B의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하루 종일 뜨개질만 했다. 목도리가 아주아주 길어졌다. 목도리를 쭉 펴면 내가 앉은 소파에서 B의 방까지 닿을 정도로.
“날라요.”
현관문 밖에서 굵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검은 양복에 썬글라스를 썼다. 남자는 마당 앞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B는 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현관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트렁크의 짐을 혼자서 다 날랐다. 트렁크 속에는 커피믹스가 없었다. 나는 아주 잠깐 감시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짐을 다 나르자 남자는 차를 타고 떠났다. 문득 남자가, 그리고 감시자가 다시는 이 집에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찬장을 열어 남은 커피믹스의 갯수를 세어보았다. 네개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남은 커피를 다 타 마셨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날 밤, 커피를 많이 마신 탓에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못 주무시면 어떻게 됩니까?” “사는 게 좀 힘들어져요.” B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다음 날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눈이 내렸다. 마당 밖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나는 드디어 목도리 뜨개질을 마무리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목도리의 매듭을 지었다. 길고 붉은 목도리가 완성되었다.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볍게 일어난 털실의 잔털들이 내 얼굴을 간질였다. 나는 목도리를 개어 소파 한쪽 구석에 밀어놓았다.
“예쁜 목도리네요.”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B가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뜨개질이 끝났나요?”
“다음에는 털모자를 떠볼 생각입니다.”
나는 목도리를 들고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문 쪽으로 다가갔다. 타일의 차가움이 맨발 가득히 전해졌다. 문을 열었다. 눈에 반사된 빛 때문에 온 세상이 하얬다.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나는 천천히 눈이 쌓인 바깥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눈 위에 내 맨발이 닿았다. 차가웠다. 차갑고 푹신했다. 따뜻했다. 따뜻하고 날카로웠다. 날카롭고 뜨거웠다. 뜨겁고 다시 차가웠다. 차갑고 포근했다. 내 뒤를 B가 비틀거리면서 따랐다. 눈 위에 네개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혔다. 나는 몸을 돌려 내 등 뒤에 선 B를 보았다.
“날이 춥습니다.”
나는 들고 있던 목도리를 B의 목에 둘러주었다. 한번, 두번, 세번, 네번…… 목도리는 아주 길었다.
“차가운 눈 위를 맨발로 밟고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들어요?”
B가 물었다.
발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이제는 온몸을 감싸고 있는 이 느낌을 표현할 말을 찾기 위해, 발밑의 눈을 느끼지 못하는 B에게 해줄 말을 찾기 위해 나는 오래 생각했다. B의 몸속에서부터 강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내 안의 수많은 말들이 강물 밑으로 모여들었다가, 모여서 튀어올랐다가 흩어져서 다시 눈 위에 쌓였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새하얬다.
나는 눈 위에 서 있었다. B도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우리는 눈 위에 서 있었다. 나는 연붉게 물들어가는 내 발등을 바라보았다. 내 발을 감싸고 있는 눈은 차갑고, 따뜻하고, 뜨겁고, 푹신하고, 날카롭고, 포근하고 아파서.
나는,
“생각보다 복잡한 감정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 | 심사평
올해 대산대학문학상 소설부문에는 총 284편의 작품이 투고되었다. 응모작 대부분이 일정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 예심을 마친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중에서도 본심에 올려 논의한 9편은 모두 나름의 수준과 독특한 개성을 지닌 작품들이었다.
본심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
「빨래」는 신선한 발상과 감각적인 문장이 돋보였다. 그러나 재기발랄한 하나의 장치에 지나치게 의존하다보니 서사를 끝까지 진행시키지 못하고 중간에서 힘이 빠진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우리 아버지 공장 닫혔네」는 현대 가족의 붕괴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별다른 사건 없이도 가독성있게 소설을 전개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더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무엇, 이를테면 가족제도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 등이 더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얼음의 기로」와 「미드나잇 블루」는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을 의도적으로 탈색하여 이국적 공간에서 서사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즈음 신인들의 작품에서 자주 드러나는 하나의 경향을 대표한다고 할 만하다. 이런 작품들은 우리 문학의 상상력을 넓히려는 하나의 시도라는 면에서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이국적인 배경이 소설의 전부인 경우도 적지 않다. 왜 그렇게 썼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소설 내부에서 밝히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소설의 현실이 실제의 현실을 환기시키지 못한다면 그 작품은 하나의 공허한 제스처에 머물 우려가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화이트 니」는 담담한 문체로 ‘코끼리-아버지’의 삶을 기술해가는 작품이다. 안정적으로 잘 짜인 소설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기시감이 느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환상적으로 처리된 결말 부분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나무라다」는 마지막까지 선자들을 고심하게 만든 소설이다. 발상과 전개 모두 흠잡을 데 없이 좋았으며 문장도 유려했다. 진짜 같은 허구의 세계를 무리 없이 잘 구축했다. 다만 주제의 확장성 측면에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미 완결된, 혹은 닫힌 하나의 세계가 아니다. 미숙하더라도 열려 있는 것. 그리하여 언젠가는 무한한 세계를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두 사람이 서 있다」는 그런 면에서 당선작이 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휴머노이드 프로젝트’에 의해 만들어진 두개의 상반된 휴머노이드 타입인 ‘나’와 ‘B’의 이야기이다. 설정 자체가 작위적이고 어설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소설을 읽어나갈수록 초반의 우려가 깨끗이 지워진다. 세심하게 배치된 문장과 대화 너머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만만치 않은 주제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완독 후 가슴에 오래 남는 것은 따뜻함과 슬픔, 인간이 인간이므로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감정이다. 그것이 바로 소설의 본령이라는 데 심사위원들은 어렵지 않게 합의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나게 되기를 기대한다.
백가흠 성석제 정이현
소설 | 당선소감
전화를 끊고 난 후 처음 든 생각은 ‘나 이제 어떡하지?’였다. 이후로도 며칠 동안 몸살 비슷한 것을 앓았다. 아직까지 백지가 두렵다. 지금 이 수상소감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글을 쓰면서 가장 무섭고 신기했던 일은 소설이 한 문장씩 쌓이면서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였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독자적인 의지를 가지고 혼자 꿈틀거리는 것이 무서우면서도 신기했었다. 그럴 때 ‘글’이라는 것이 괴물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괴물.
그러다가도 글은 어느새 저만치 앞에서 나보고 빨리 따라오라며 내 손끝을 이끌고 있다. 나는 글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서 언젠가는 너랑 내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잠깐 하게 된다. 물론 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나에게서 매번 도망치려 할 것이고 나는 글을 백지 위에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글과 계속 친구하고 싶다, 오래오래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상은 앞으로도 내 글을 잘 버텨내보라고 건네는 일종의 위로인 것 같다. 오래오래 쓰고 싶다. 지금도 막연하게 그런 생각만 하고 있다. 어떻게?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잘 모르겠는 말일수록 내게는 신앙이 되기 쉬운 것 같다. 마음이 어려서 이상한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오래오래 쓰고 싶다. 오래오래 쓸 것이다. 이 단 한마디를 믿고 가야지. 나한테 다가오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말씀들을 잘 믿어야지. 온몸을 손끝으로 생각하는 마음으로, 손끝을 온몸으로 생각하는 마음으로.
엄마, 아빠, 여동생, 살가운 말 한마디 못 드렸지만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동기들, 선후배님께도 정말 감사하다. 우리가 하나의 문장을 같이 읽고 나누었다는 것만으로 친구가 될 수 있었다는 건 신기하고 기쁜 일이다. 이채리, 고맙고 사랑한다. 상병 이경석과 일병 김학제, 날 추운데 고생이 많다. 스터디 ‘남는다’ 친구들, 희정언니, 유윤이 고마워요. 효미야, 남는다 잘 부탁해. 스터디 ‘독’ 친구들도 고맙다.
처음으로 소설을 가르쳐주신 편혜영 선생님. 오래오래 기뻐하고 오래오래 같이 쓰자는 말. 신앙처럼 품고 가겠습니다. 늘 세심하게 마음 기울여주시는 조동범 선생님, 감사합니다.
한강 선생님, 정말 많이 보고 싶어요. 어디 계시든지 건강하세요. 김혜순 선생님, 선생님께 많이 혼났지만 글 쓸 때마다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제일 많이 생각났습니다. 채호기 선생님, 못난 제자가 어리광 많이 부렸는데 따뜻하게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태용 선생님. 날카로운 지적도 애정 어린 격려의 말씀도 모두 감사합니다. 버스정류장에서 어깨 두드려주신 것 잊지 않고 있어요.
부족한 소설 좋게 봐주신 대산대학문학상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합니다. 사실 용기가 없었는데 심사평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글쓰기를 시작하고 3년 동안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꿈같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은석에게, 기나긴 글줄보다는 한번의 깊은 포옹을.
지금까지 써온 문장보다, 앞으로 쓸 문장을 믿으면서 가겠다.
신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