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문학초점

 

윤이형 소설집 『큰 늑대 파랑』

‘사이’의 감각이 소중하게 다가올 때

 

 

김미정 金美晶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버려야만 적합한 것이 되는 것’의 윤리」 등이 있음. metanous@naver.com

 

 
3541이제껏 한국소설에서 픽션(fiction)의 의미가 지금처럼 진지하고 폭넓게 사유된 시절은 없는 것 같다. 이른바 현실을 초과하는 서사들,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시공간의 제약을 떨치기, 공공연히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전제하기. 즉 이것은 픽션으로서의 소설을 가능케 해온 제약이 지금만큼 의식되었던 적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문학에서 픽션은,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의 의미에 충실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해온 아이러니한 말 중 하나였던 셈이다.

윤이형(尹異形)의 두번째 소설집 『큰 늑대 파랑』(창비 2011)은 그런 맥락에서 단연 서두에 놓일 필요가 있다. 이 세계는 경험과 기억의 블랙홀이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고 거기서부터 삶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현실과 환상’ 같은 익숙한 구분법을 촌스러운 이분법으로 전락시킨다. 장르적 상상력이라고 칭하기에는 협소한 세계이며, 설혹 디스토피아가 이야기될지언정 예의 그 비관론은 무기한 연기(延期)시키고자 하는 세계다. 「이스투아 공원에서의 점심」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이것은 일상과 상식의 어떤 틈·구멍을 상상·고안하고 그 안으로 빠져들어가 종횡무진하는 앨리스들의 세계다.

이런 면에서 윤이형의 소설은 그간 한국소설의 결락을 보충하기, 혹은 그 외연을 초과·확대하기의 늦은 사례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이 세계는 결코 낯설고 불편하고 새로운 것만도 아니다. 이 상상력은 차라리 지금 이곳에서 감각적으로 경험·인식되는 사태들로 되돌아와 그것을 문제적으로 환기시키는 편이다. 이것은 때로 진지한 알레고리적 독해를 요하기도 한다. 가령 「스카이워커」나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이 능청스러운 허구의 이야기라고는 해도, 한편으로는 한 작가의 글쓰기를 둘러싼 자기반영 서사로 읽을 여지가 충분하다. 즉 이 작가가 구사하는 상상력이 실은 파천황적인 무언가를 위해서만 복무하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그의 소설은 한국소설의 무엇 ‘이후(너머)’라기보다, 어떤 ‘사이’를 보여주고 있다.

「스카이워커」에는 이곳이냐 저곳이냐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여전히 이곳과 저곳 ‘사이’에 남는 것이다. 이 선택은, 스스로를 즐겁게 하는 것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한다(43면)는 마음가짐을 확인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사이’를 고집하는 것의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택은 제자리걸음 이상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질문은 계속 같은 방식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때, 스스로의 즐거움이 만들어낸 세계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물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큰 늑대 파랑」은 조금 진일보한다. 이 소설은, “재미있는 것들이 우리를 구원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게 뭐야?”(135면)라는 말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좋다. 그 말이 함축하는,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된 일련의 일들에 공모된 자기책임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애초의 질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어진 선택지 자체를 느슨하게 만들어버린다. 자기책임을 향한 고민의 철저함이 그들을, 그리고 이 소설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완전한 항해」가 보여주는 선택지들—영생과 업그레이드를 통한 완전함이냐 소멸의 순간 역설적으로 경험하는 완전함이냐 혹은, 종속될 것을 알면서도 영영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추구할 것이냐 삶의 우연들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운명 그 자체로 받아들일 것이냐—과 그 가치들 사이에서의 진자운동도 소중하다. 이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후자는, 삶을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로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달되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다. 이 소설은 애초에 주어진 선택지를 보기좋게 따돌린다. 소설은, 결정론적 운명을 받아들이거나 그것을 무리하게 거스르는 것 모두를 배신한다. 대신, 우연들이 만들어내는 역설적인 필연, 그리고 그것을 사랑해야 할 당위를 새롭게 생성해낸다. 애초의 질문이나 양자택일의 선택지는 무화되면서 다른 의미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또 한번 분류를 한다면, 「맘」이나 「결투」는 동의·옹호하고 싶은 세계지만,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은 그러기 어려운 세계다. 특히 소설 속에서 어떤 선택을 둘러싼 갈등과 그 해결과정을, 마치 텍스트 바깥에 있는 작가적 고민의 해결과정과 상동적으로 읽는 한 그렇다. 소설 속에서 소설쓰기의 알레고리를 엿보는 한 그렇다. 이 작가의 소설이 보여주는 ‘사이’의 감각이, 현재 한국소설이 처한 고민을 좀더 오랫동안 대변해주기 바라는 한 사람으로서 읽자면 이렇다는 말이다.

김미정

저자의 다른 계간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