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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사막의 밤별을 보며 우는 시인의 천형
오봉옥 시집 『노랑』
고명철 高明徹
문학평론가,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 평론집 『지독한 사랑』 『뼈꽃이 피다』, 산문집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등이 있음. mcritic@hanmail.net
시인 오봉옥(吳奉玉). 그의 이름을 입속에서 천천히 굴릴 때마다 시집 『붉은 산 검은 피』(실천문학사 1989)를 휩싸고 도는, 저 불의 시대의 끝자락에서 부정한 것을 일소해내고자 하는 사자후의 전율이 되살아난다. 지금도 생생하다. 반민주·반민족에 대한 강렬한 시적 저항의 육성이 왜 그토록 황홀한 아름다움의 마성을 뿜어냈는지를.
이제 그는 지천명에 이르러 시집 『노랑』(천년의시작 2010)을 엮으면서 자신의 시세계를 성찰한다. 젊은 시절, 사회변혁의 시적 전망에 신열을 앓던 시인은 그 뜨거운 시적 화기를 다스리면서 지금, 이곳의 시인과 삶을 웅숭깊게 노래한다. 여기서 이번 시집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울음’의 심상이 자아내는 시적 매혹에 흠뻑 젖어든다. 시인의 숙명을 절묘히 빗대는, “어둠 속에 갇혀 홀로 세상을 그려야 하고, 때론 고개를 파묻고 깊숙이 울어야만 한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그런 천형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달팽이가 사는 법」)처럼, 시인의 천형(天刑)은 어둠 속에 유폐된 곳에서 뭇 존재들의 상처를 뼛속 깊이 아파하며 울어야 한다. 하여, 시인은 빈곤한 삶을 살고 있는 어느 가정에 압류 딱지를 붙이는 장면을 보다 “멍하니 서 있던 열 살짜리 계집아이가 순간 울음을 터뜨”리고(「어느 하루」), 분단의 경계 너머에 있는 북쪽 동포들이 여는 식당에서 그들의 노래와 춤을 보며 “눈은 금세 고동치고, 나부끼고, 글썽”인다(「민족식당」). 그런가 하면 자식 셋을 남기고 죽은 사내가 “눈물 그렁그렁 달고끌고 떠나가더니/은방울꽃 되”어(「은방울꽃」) 무덤가에 피어난 일이며 “얼른 어른이 되고 싶”은 별똥별의 비밀을 간직한 “계집애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서 흘러나오는 눈물(「별똥별의 비밀」)과 “울엄니 어쩌다가 나를 밀어 올려놓고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울었”는지(「저 바람」), 이 모든 울음에 얽힌 사연들을 온몸으로 보고 듣고 느낀다. 세계의 숱한 유무형의 폭력 속에서 삶터를 빼앗기는 순진무구한 어린애의 두려움 사이로 솟구치는 울음, 안간힘을 쏟으며 삶의 터전을 지켜나가는 이 세상 어머니들의 저 먹먹한 울음, 분단자본주의의 현실을 마주하며 와락 밀려드는 분노와 연민 그리고 아픔의 눈물,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는 유한자의 숙명 앞에 샘솟는 외로움과 그리움의 눈물, 서둘러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계집애의 성장통의 눈물…… 이 울음들을 통해 시인은 “또 한 生을 시작”(「초록」)하고 싶다.
그런데 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시인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타자뿐 아니라 자신을 대상으로 하여 그토록 슬피 운다. 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시인에게 타자의 울음은 이내 자신의 울음으로 스며들고, 자신의 울음은 자연스레 타자의 울음으로 확산된다. 이 울음을 통해 시인은 “제 몸을 스스로 지운다는 거/자신을 스스로 거두어간다는 거”(「그 노을을 본다」)에 깃든 혹독한 자기성찰의 과정을 주저하지 않는다.
낯익은 자신의 영육(靈肉)을 환골탈태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바꿔 말해 이 일은 시인의 시적 갱신을 위한 힘든 싸움의 시작인바, 지천명에 이른 시인이 자신을 엄정히 성찰하는 가운데 새로운 시의 도정을 헤쳐나가야 할 시적 과제를 탐문하는 것이다. 때문에 시인은 정해진 길이 없는 것 자체를 매우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그래서인가. 시인은 인위적 길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자연스레 생성되는 몽골 초원의 길에 주목한다(「경계가 없다」). 강조하건대, 이것은 새로운 시적 도정을 시인이 헤쳐가고 싶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를 향한 사막의 밤길도 마다하지 않는 것 역시 시인이 새롭게 가고 싶어하는 길에 대한 욕망에 연유한다. “돌아보니 스르륵 오던 길도 지워진다. 지워지는 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지나간 세월을 잠시 묻어두자는 것.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아주 잠시만 잊어보자는 것. 길은 사막의 밤하늘에도 있더라. 난 지금 사막의 밤별들을 더듬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다”(「오아시스」)에서 행간에 녹아 있는 자기성찰의 도정이 지닌 진정성이 소중히 전해온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더이상 밤하늘의 별을 보고 우리의 길을 갈 수 없다고. 하지만 오봉옥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 전언을 시적으로 과감히 전도시킨다.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자, 그리고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이미 정해지길 바라는 자에게는 별이 보이지 않으며, 애써 별을 보려고 하지 않으니 오아시스를 향해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을 쉽게 포기할 수밖에 없다. 비록 오아시스를 찾는 일이 더디고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 도정 자체가 어쩌면 오아시스인지 모를 일이다. 하여, 시인의 한층 “깊어진”(「거기」) 눈에는 “내가 저세상까지 지고 가야 할 말”(「말」)을 그득 채우고, “가만히 뉘어놓고/세상의 한 끝을 응시하”(「폐허의 눈」)는 순정한 눈물이 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