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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근화 李謹華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칸트의 동물원』 『우리들의 진화』가 있음. redcentre@naver.com
까만 양복에 어떤 양말을 신어야 하는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발음이 자꾸 새는 디제이가 반갑다
(간밤에 펐다)
새벽까지 요란한 음악이 흘렀겠지
오늘의 (술 취한) 질문은 이런 것
까만 양복에 어떤 양말을 신어야 어울리는가
당신의 패션감각은 몇점인가
자선냄비의 빨간색은 다 어디서 왔는지
한해를 곱게 물들이는 당신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은데
(오늘도) 사랑을 전하기 위해
눈이 펑펑 내린다
눈도 소리를 가졌으면
음퍽음퍽 크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일의) 지붕을 부수었으면
그러니까 오늘의 답은 이런 것
와인색 양말
짙은 밤색 양말
무난한 스트라이프 양말
(검정 양말은 다 어떡하라고)
싼타의 무게에 선물의 무게까지 합하여
(비현실적으로) 부담스럽다
미래에도 굴뚝은 좁고 길고 어둡겠지
(수염은) 감쪽같지만 (목소리는) 숨길 수 없다
허스키보이스와 캐럴의 궁합에 맞추어
눈이 펑펑 내린다
눈도 맛을 가졌으면
막대사탕처럼 아이들을 유인해
알록달록한 세계에 빠뜨려 휘저었으면
풀기 어려운 문제처럼
눈 쌓인 운동장에 발자국 글씨
사랑해 누구야
외국어처럼 낯설고 아름답게 빛난다
눈이 펑펑 내린다
평등하게 쌓여서
세계는 반쯤 지워진다
그러니까 오늘 당신의 까만 양복 아래 빛나는 양말은 무슨 색깔인가
당신은 누구의 땅을 밟고 있는가
네버랜드
에버랜드
내 땅은 없다
(내 땅의 시작과 끝이 없다)
내 땅에 내릴 눈은 없는데
발자국을 남기는 용감한 이의 입술은?
가난한 내 땅에 비행기가 뜨고
남의 땅을 함부로 가로지른다
당신의 감색 재킷이나 회색 넥타이 같은 건
보지 않아도 (뻔하다)
양말은 (모르겠다)
주의 깊게 살펴야겠지만
고부라진 발가락이 하나쯤 눈치 없이 새지는 않았는지
눈이 펑펑 내린다
(질문과 답을) 지우면서
마치 그것이 하나라는 듯이
각설탕처럼 뾰족하게 내린다
나의 밀가루 여행
귀머거리나 벙어리들이 공갈빵을 구워 판다
오백원이어서 말이 필요 없다
천원이면 두개를 봉투에 담아준다
공갈빵은 속이 텅 비었지만 한번 터지면 시끄럽다
옷에 들러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맛있다거나 고소하다거나 싸다거나
그런 말 대신에 좀 더 사는 게 어떻냐는 듯이 쳐다보지만
금세 눈빛을 거두고 어둠을 퍼나른다
골목길에 트럭이 한대 나방을 모은다
공갈빵은 가볍고 바삭하다
푹 찔러보지만 내 삶은 누아르가 되지 못한다
한지붕 아래 고요한 손수다가 오가겠지
오늘은 몇개? 너무 추웠어!
끄덕끄덕 전봇대가 알아듣겠지
철판 위에선 뭐든지 납작해지고 순서가 있다
챙챙챙 차례대로 악어를 뒤집느라 바쁜 손
잘 마른 식욕이 정글의 법칙을 만든다
오늘 당신의 사냥은 어땠습니까?
가방에 불룩한 그것은 호랑이 가죽? 사슴의 뿔?
아니 아니 덮고 잘 커다란 잎사귀
지붕을 엮을 질긴 나뭇가지
배가 고프고 졸립습니다
악어를 한 마리, 아니 두 마리 잡아먹어야겠습니다
내 말이 맞다는 듯이 꿀이 한 방울 두 방울
아예 주르륵 떨어진다 악어의 눈물처럼
기름진 호떡을 맛있게 먹을 때마다 나는 내 가난을 실감한다
천원에 다섯개 하던 것이
이제 특허받은 녹차호떡 오백원이다
자주 프랑스 아이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철골 귀신 같은 에펠탑을 지겨워하겠지
날마다 다른 사람들과 입맞추며
옛날식 다리를 수도없이 건너겠지
딱딱한 빵을 뜯으며 인생에 관해 논하고 싶다!
그런데 집 앞에 프랑스 빵집이 생기고야 말았다
어쩌자고 개업 축하 쎄일까지 한다
내가 죽으면 썩지도 않을 거야
프랑스 아이로 태어나지도 못할 거야
고소한 빵냄새를 풍기며 차가운 땅속에 누워 있다면
개미나 두더지가 찾아오겠지
커다란 눈을 내어주지 내 코는 달콤해
머릿속에는 설탕이 두 컵 고여 있다
설탕물이 흐른다면 한사람이 생각나고
또 한사람이 미워지겠지
밀가루를 탐험하느라 나는 내 인생을 허비하고야 말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