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평론

 

언어적 무중력 상태에 가까운

배수아 번역하기

 

 

데버러 스미스 Deborah Smith

번역가, 영국 Tilted Axis Press 대표. 한강 장편소설 『채식주의자』 번역으로 2016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공동 수상.

 

 

2003년 출간된 배수아(裵琇亞)의 『에세이스트의 책상』(문학동네)은 작가가 11개월에 걸친 독일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집필한 소설로, 2012년 겨울, 얼어붙을 듯이 추운 서울에서 내가 친구 집에 머물며 최초로 번역한 책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내가 단행본 분량의 한국문학 작품 중에서는 처음으로 완독한 작품이며, 그것도 번역을 하면서 작품을 읽었다. 번역계에서는 이게 그리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개개인의 취향, 그리고 개별 번역 프로젝트에 수반하는 구체적인 제반 조건 때문에도 번역가들 중 상당수가 번역에 착수하기 이전에 그 작품을 완독하지 않기도 한다. 내가 배수아 작가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현대 한국문학을 주제로 한 박사논문 준비 과정에서였다. 배수아를 일컬어 한국어를 훼손하는 작가라는 식으로 묘사한 대목인가를 보고 나는 (이 말은 아마도 저자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나 싶지만) 그 즉시 이 작가의 소설들을 찾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가에 대한 이러한 묘사를 보는 순간, 설레는 마음의 와중에 브라질의 거장 작가 끌라리시 리스또르(Clarice Lispector)가 떠올랐던 까닭이다. 리스또르는 풍성한 내면성과 독특한 문법의 활용으로 이름이 난 빼어난 언어의 연주자다(그리고 마침 리스또르의 단편 전집을 독일어본에서 한국어로 옮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그게 바로 배수아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배수아 작가와 나는 미국 전역의 서점을 돌며 작가의 신간을 홍보 중이다. 다만 이번에 미국 출간을 앞둔 작가의 소설에 붙은 제목은 ‘ The Essayists Desk’가 아니라 ‘A Greater Music’이다. 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은 ‘에세이즘’을 일컬어 자명한 이치에 대한 염증이자 심사숙고를 동반하는 잠정적인 시도요, 불확실성의 수용이자 지적 모험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자세라고 뜻매김한 바 있는데, 하나하나 배수아의 글을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인 정의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책의 제목을 결정하는 과정에는 해당 도서시장을 고려한 신중한 고민이 따라야 하는 만큼그러므로 번역을 거치면서 책 제목이 바뀌는 경우가 다반사일뿐더러 영국과 미국의 출판사들은 때론 같은 책의 두가지 영문판에 서로 다른 제목을 붙이기도 한다배수아의 이 작품을 두고도 미국 출판사에서는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란 제목을 직역할 경우, 구매자 및 독자 들에게 잘못된 인상을 주어 소설이 아닌 에세이집으로 분류해버리는 오류를 빚지 않을까 우려했다. 내가 대안으로 제시한 ‘A Greater Music’은 이 소설을 여는 구절이기도 하다. 한국어 ‘더 많은 음악’에 부정관사 ‘a’를 붙임으로써 제목으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많은 음악’으로 시작하여 총 3면에 걸쳐 이어지는 이 작품의 첫 단락은 이 표현이 어째서 비문법적이고 또 정황상 부적절한지를 순환적으로 논하고 있는데, 그렇기에 물론 번역하기에도 어렵기 그지없다(이는 배수아 작품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주제이기도 하다). 처음에 나는 어설프게도 ‘더 많은 음악’을 ‘more music’이라고 옮겼는데, 원문에서 ‘더 많은’은 수식하는 형용사로서 사용되고 있지 않으므로 이건 분명 잘못된 번역이다. 소설 전반에 걸쳐 ‘더 많은’이라는 말이 여러 맥락에서 되풀이되고 있으므로 나는 이에 상응하는 표현을 찾기 위해 우선은 각 맥락에 통하는 표현을 찾아야 했고, 또한 영어로도 실제 사용될 법하나 막상 통용되는 것은 또 아닌 표현을 찾아야 했다. “더 죽어 있다, 라고 우리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 문장에 이르러 ‘더 많은’을 ‘greater’로 번역하게 되었는데, 이는 greater란 말이 ‘더 많은’에 상응하는 (불필요한) 비교의 뜻을 내포하고 있어서다. 이 단락의 말미를 보면 greater로 수식하기에 부적절한 명사들이 나열되고 있는데, 그중에는 내가 북투어 첫날밤에 이 대목을 낭독하다가 발견한 “a more primordial human”(“더 많은 최초의 인간”)도 포함돼 있다. 이를 굳이 ‘발견’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낭독을 하면서야 내가 이 구절을 애초 번역했던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a greater primordial human’이라고 쓸 경우에 greaterprimordial이 아닌 human을 수식한다. 그런데 정작 원문의 의미는 ‘a more greatly primordial human’이다. 번역할 때 왜 이 후자의 표현을 택하지 않았는지는 내게도 수수께끼라서(물론 출간 후 자신이 번역한 글을 읽으면 불가피하게도 이러한 경우들을 발견하고 무력할 수밖에 없는 후회에 젖기 마련임이 곧 번역계의 보편법칙이자 주지의 사실이긴 하지만), 나는 첫 낭독 때는 물론 이후의 낭독에서도 이 대목을 내가 번역한 대로가 아닌 번역‘했어야’ 하는 대로 고집스레 읽어나가면서 매번 민망함에 얼굴을 찌푸려야 했다. 그러나 이 구절로부터 불과 한줄 뒤에 이르러, 3면에 걸친 이 단락은 아주 우아하게 끝을 맺는다. 물론 이는 역자가 특별히 솜씨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언어 고유의 알맞춤한 성질에 힘입어 한국어 원문보다도 더 음감이 살아 있고 균형이 잡힌, 강세 실린 영어 구가 빚어진 결과다: “greater winter”.


배수아의 작품 중에서 내가 완역한 두번째 소설이자 20171월에 영문으로 출간될 예정인 소설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서울의 낮은 언덕들』(자음과모음 2011)로 알려져 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낮은 언덕이란 애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얼마나 영리하고 작품에 맞춤한 제목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어로 이 작품을 접하는 독자들 중에 이 역설을 인지하고 있을 사람이란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은 독자라면야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옛 도시인 우루크를 “낮은 언덕들의 도시”라고 묘사한 대목을 발견하고는 ‘서울의 낮은 언덕들’이라는 원 제목이 지니는 의미를 가늠하고, 시간과 지리상의 간극이 나누어놓은 이 두 도시가 슬며시 포개지는 경험을 했을 테지만 말이다. 더 나아가 이 제목은 그러한 구분을 허물고 그에 의문을 표하려는 작가의 전체적인 구상과도 말끔히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이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는 제목을 가장 먼저 접할 수밖에 없고, 그에 의존해 작품에 대한 일말의 정보나 느낌을 얻고 그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받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원 제목으로는 독자에게 이렇다 할 인상을 심어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제목은 작가의 브랜드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영문판 제목인 ‘A Greater Music’은 배수아가 음악에 관심이 많은 작가라는 점을 영어권 독자들에게 최소한 암시하는 제목이기는 하다. 더욱이 주인공이 집에서도 음반가게에서도 음악을 즐겨 들으며 독주회를 자주 찾기도 하는 이 소설에서 작가의 이러한 관심은 유독 두드러지며, 또한 그 구조에 있어서도 이 소설은 다분히 ‘음악적’이다. 배수아의 작품에서는 내용이 곧 형식이고 형식이 곧 내용인데, 이 소설에서는 주제가(혹은 주제들이) 일련의 변주를 거치며 진행되는 구조 속에 엇비슷한 비유와 이미지 들이 도돌이표를 단 듯 되풀이되면서 매번 다른 조성으로 연주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음악에 방점을 찍은 이 소설의 영문판 제목은 작가가 작품 속에서 ‘에세이즘’에 대한 정의를 인용하면서 의도했던 바를 충실히 반영한다. 즉 작가가 새로운 형식을 탐색 중임을 암시한다. 배수아는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사랑 이야기라고 보았으나, 소설이라는 장르가 전통적으로 멜로드라마로 쏠리며 그에 걸맞은 제반 표지들로 단장하려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므로 본인은 이 사랑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라도 그러한 경향을 탈피하고자 했고, 그렇기에 전통 소설이나 픽션 전반의 형식과는 다른 새로운 형식을 찾고자 한 것이다. 한편 『서울의 낮은 언덕들』의 경우 나는 영문판 제목을 ‘Recitation’(낭송)으로 정했는데, 이는 음악과의 연관성을 함축하는 동시에 형식의 중요성을 암시함으로써 다시 ‘A Greater Music’과 연결된다. 미국에서 소설작품은 흔히 속표지 어딘가에 ‘장편소설’(A Novel)이라는 설명이 덧붙은 채 출간되기 마련인데(영국에서는 이런 경우가 훨씬 드물지만 공교롭게도 최근에 그런 드문 일이 있었으니 바로 한강(韓江)의 『채식주의자』(창비 2007, 영문판 The Vegetarian, 2015)다. 출판사에서 이렇게라도 명시해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 책을 요리책으로 분류하는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우려한 결과다), 이 점을 고려해 나는 애초 이 소설에 ‘ The Low Hills of Seoul: A Recitation’이란 제목을 붙이고 싶었다.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음성을 가리켜 주인공이라고 일컫는 것은 분명 무리한 경우에 속하나, 이 소설을 통틀어 굳이 주인공이라고 지칭할 만한 인물을 찾는다면 전직 (실제로 그런 이름의 직업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낭송배우’인 경희를 꼽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소설에 무대에서 낭송을 하는 장면과 녹음으로 낭송을 듣는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나, 무엇보다 의미심장하고 가히 혁명적이라 할 요소는 소설 자체가 하나의 낭송으로서 쓰였다는 사실이다. 앞의 여섯 장에서는 머릿수와 성비가 명시되지 않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기차역에서 만난 경희라는 젊은 여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회상하고 있다. 이들은 경희라는 여자가 자기들이 오래전에 떠난 나라에서 왔다고 믿고 그녀를 집으로 초대한다(이 나라가 어디인지는 물론 명시되지 않는데, 이러한 불특정성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논하겠다). 6장까지는 따라서 거의 대부분이 간접화법으로 쓰였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 이 책의 화자는 ‘우리’일 텐데, 정작 이들의 집합적인 목소리가 드러나는 건 맨 마지막 장에서뿐이다. 마지막 장에서 이들은 경희를 찾으러 서울로 향하는데, 막상 서울에 도착해서는 ‘낭송배우’라는 직업은 존재하지 않으며 “경희는 없다”는 말만 듣는다. 감질나게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경희가 여기 이 마지막 장에서 단지 음성으로서먼지 쌓인 구멍가게에서 돌아가는 음반의 잡음 섞인 녹음으로, 얇은 호텔벽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로서존재한다는 사실은 경희란 인물이 작품 전체에 걸쳐서도 목소리로서만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이로써 독자로서 우리가 경희를 화자로 여기는 유일한 이유가, 그녀가 한 말이라며 인용되었던 말들, 돌이켜 떠올린 것인 양 전해졌던 그 말들이 너무나도 장황하다는 오직 그 사실 하나에 기대어 있다는 점이 명료해진다. 여기서 떠올린 것인 ‘양’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장황한 인용의 길이 자체가, 그리고 경희가 자신이 기억하고 지각한 바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문법적 주어의 생략이(이는 역시나 한국어에서 더욱 극명히 드러나는 효과다), 그러한 장황한 이야기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기억해 정확히 다시 말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역설하는 기능을 하는 까닭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현실성, 즉 리얼리즘에 대한 논쟁을 접할 때면 나는 언제나 작가들이란 “좀더 큰 현실을 반영하는 리얼리스트들”(realists of a larger reality)이어야 한다는 어슐러 르귄(Ursula Le Guin)의 주장을 떠올린다. 더 많은 현실,이라고도 할 수 있으려나.)


종종 몇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기도 하는 이 기나긴 대목들을 읽다보면 독자들은 그 길이에 빠져 이 대목들이 서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했다가 “경희는 말했다” 혹은 “경희는 대답했다”(이 역시 영문판 제목의 후보 중 하나였다)를 보고서야 이것이 화자의 회상에서 나온 이야기임을 퍼뜩 깨닫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영어 번역으로 이 작품을 읽을 때면 되레 가중된다. 서술이란 ‘담화체’로 쓰일 수도 있으며 실제로 종종 그리 쓰인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한국어에서는 문장을 끝맺는 종결어미가 여럿 존재하기에 그 문장 혹은 단락이 구어체로 혹은 문어체로 읽히도록 쓰였는지를 분간하기가 같은 문장 혹은 단락을 영어로 읽을 때보다 수월하다. 내가 한국어로 말할 때 가장 진땀 흘리는 부분도 이런 부분이다. 아니, 사실은 어투에 무신경할 때가 더 많으니 ‘진땀 흘린다’는 표현은 적절치 못한지도 모르겠다(내가 전달하려는 바를 그나마 명쾌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진땀을 흘리는 수준이라 내 어투가 ‘자연스러운지’ 혹은 ‘구어적인지’ 따질 여력조차 없다). 한국어의 종결어미는 감탄형부터 수사적 의문형까지 다양하여 구체적인 정보를 알리는 데 유용하기는 하나, 실제로는 어투나 문체를 나타내는 문법상의 표지로 주로 사용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어의 종결어미와 ‘등가’인 영어 문법은 동사어미가 아니라 어두에 well, so, 그리고 근래에 흔해진 like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like 같은 단어는 텍스트를 단순히 담화로서 표지해주는 것을 넘어 이것이 지극히 구어적인 발화임을 나타내는데, 이는 이러한 단어들이 일상회화에서 말고는 비교적 쓰임이 적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단어들은 화자의 특질을 암시해주기 마련이어서, 예컨대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며 캐주얼한 태도를 지녔고, 화자가 만일 영국인이라면 그가 미국 영어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릴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한국어의 ‘지요’와 같은 어미를 이러한 표지 단어들로 ‘번역’하려 할 때에, 경희의 말이 허물없는 일상적 구어가 아니라 낭송된 말이라는 점이 걸림돌이 된다. 따라서 한국어 문장에서 종결어미가 빚는 효과의 등가를 영어 문장에서도 확보하기 위해 번역가가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그만큼 효과적이기도 한) 방법인 구어적 말씨의 활용은 이 경우에는 내게 가능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구어적 표현을 아예 기피한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이런 단어들을 삽입할 때는 최대한 절제해 사용하고, 길게 이어지는 인용단락들의 앞부분에 삽입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화자의 엄청난 회상 능력을 부각시키는 이 단락들에서 우리가 또 주목할 부분은, ‘ X는 말했다’ 류의 표현이 이러한 기나긴 대목의 첫머리와 말미에 붙거나 첫머리 혹은 말미에만 붙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표현을 독자가 두번째로 (즉 그 기나긴 대목의 말미에 이르러) 마주칠 즈음에는 어김없이 여태 읽은 대목이 서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가 급작스럽게 각성하게 된다. 작가가 애초에 영어로 글을 썼더라면 이런 효과를 오히려 더 가중시킬 수 있었을 텐데, 이는 영어에는 한국어의 ‘다’와 같은 정형화된 종결어미의 반복이 부재하므로 ‘문어적’ 발화를 단순 서술과 뚜렷이 구분할 방도가 비교적 적은 까닭이다. 다시 말해 간접인용된 대목임을 알리는 뚜렷한 표지가 없으므로 독자가 영어로 쓰인 대목의 마지막에 이르러 “경희는 말했다”를 접했을 때 한국어로 이를 접하는 것에 비해 더 뜬금없이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배수아는 이 작품의 의도를 설명하며, 독자가 이야기로부터 거리를 느끼도록 만들고 싶었다고 내게 말한 바 있다. 즉 플롯이나 줄거리라고 할 흐름을 유지하기는 하되, 이를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색다른 나만의 렌즈”를 통해 바라봄으로써 전통소설의 멜로드라마로 치닫는 경향을 피하고자 했다고 한다. 작가가 사용한 용어는 아니나, 작가의 이런 의도적인 전략은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소외 효과(verfremdungseffekt), 즉 독자가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리얼리스트 픽션이 의도하는 바)을 방해하는 서사기법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효과를 얻기 위해 배수아는 종종 언어를, 심지어는 번역을 전경화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예컨대 대부분 한국어로 쓰인 이 소설에서 배수아는 다른 언어로 글을 써온 작가들의 문장을 텍스트에서 심심찮게 인용하는데, 이때 기존 번역서로부터 문장을 인용하고 그 출처를 밝히는 통상의 방법을 따르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그리하여 보르헤스( J. L. Borges)가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상설(常設)한 시간관을 인용할 때도 보르헤스로부터 직접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배수아가 가장 좋아하는 독일 작가이자 작품을 직접 한국어로 옮기기도 한 작가인 제발트(W. G. Sebald)의 『토성의 고리』(한국어판 창비 2011)에서 빌려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배수아의 텍스트에서 화자경희가 빈(Wien) 도심의 스타벅스에서 만난 한 이름없는 ‘동양인’는 이렇게 말한다. “아, 이건 내 말이 아닙니다. 틀뢴, 이것은 보르헤스의 개념이죠. 그리고 제발트는 그의 책 『토성의 고리』에서 이 개념을 아주 멋지게 시적으로 해석해놓았어요. 나는 그들의 문장을 재구성해서 인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제발트 관련 자료들은 “작가 나름으로 재편집하여 인용”한 것이라고 별도로 명시해두었는데, 여기서 ‘작가’란 배수아 자신을 뜻한다. 정리하자면, 아르헨띠나 작가를 인용한 독일 작가를 한국 작가가 다시 인용한 것인데, 이 각각의 단계에서 ‘인용’이란 개별 작가의 구상과 목적에 따라 자유로이 다듬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대목을 번역할 때 옮긴이는 직접 번역을 시도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참고문헌을 찾아내 기존의 번역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나는 이 대목들을 직접 번역하는 쪽을 택했다. 이런 선택을 한 배경에는 내가 작품에 언급된 보르헤스와 제발트의 저서 정도는 이미 읽었다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실도 작용하긴 했으나, 결정적으로는 귓속말 전달하기 놀이를 닮은 이 작품의 특징상 그 놀이에 나 또한 참여하는 것이 적절하리라는 판단이 있었다.


이 소설 곳곳에서 배수아는 이러한 인용문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보다는 생경하게 다가오게끔 거리 두기 전략을 적극적이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동원한다. 예를 들어 독자가 이러한 인용문들이 본문과 동일한 언어로 쓰였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게끔 그 ‘이질성’(foreignness)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필립 라킨(Philip Larkin)의 시 한편을 전체 인용한 경우를 봐도 원문을 영어 그대로 적고, 이를 앞뒤 문단과 구분해 표기한다. 그리고 불과 몇줄 뒤에는 작가 본인이 한국어로 번역한 동일한 시의 한 연이 뒤따르는데, 이 부분은 본문의 일부로서 산문으로 풀어 적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의 영문판에서는 이 부분을 어떻게 다룰지를 두고 아직 편집자와 논의 중인데, 개인적으로는 시의 원문과 작가의 산문 번역/풀이 모두를 유지하는 쪽으로, 즉 후자의 한글 표기를 번역문에 포함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 나는 평소 원서의 효과를 역서에서 최대한 충실히 재현하려고 하는 편이고, 이 경우에는 한글을 포함시키는 것이 영어로 작품을 접할 독자들의 대다수를 소외시키는 적절한 효과를 가져오는 동시에 번역이라는 침해성 강한 중재 행위에 대해서, 그리고 어느 두 언어도 진정 등가일 수는 없다는 사실에 대한 마찬가지로 적절한 생각을 부추길 것이라 본다. 그럼에도 이 경우 그 효과의 ‘정도’에 있어서는 원서와 역서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그 까닭은 한국어로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대다수가 영어로 인용된 대목을 사전을 들춰서라도 어느정도는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이 소설을 영어 번역으로 접하는 독자들의 역시나 대다수는 헤아릴 길 없는 기호들의 행렬을 마주하게 될 것이며, 이 기호들의 뜻을 알아내고자 사전을 들춰보기는커녕 이 문자들을 어떻게 읽고 발음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리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게 아니더라도 여기서 진정 등가라고 할 수 있을 효과를 내기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물론 영어와 한국어가 세계문학의 역사적 및 현행 관행과 정치에 있어 대단히 다른 역할을 맡아왔기 때문이다. 독일어를 영어로 옮기는 번역가 마이클 호프먼(Michael Hofmann)이 최근 「번역, 그리고 지나친 고민의 위험」이란 글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영어[가] 더 큰 언어, 상업적으로도 평판에 있어서도 좀더 큰 중요와 잠재성을 지닌 언어”라는 사실은, 그러므로 영어로 번역을 할 때에, 그것이 다른 어떤 언어로부터건, 하지만 특히나 한국어와 같은 소위 ‘더 작은’ 언어나 소수언어로부터 영어로 번역을 할 때에는, 그 과정을 지정학적 권력구조의 맥락 안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이 경우에는 한글 구절을 번역하지 않은 채로 포함시키는 것이 영어권 독자의 이해 편의를 돕기 거부함으로써 영어의 패권에 도전하는 동시에, 번역이 말소할 수 있는 여타 언어체계의 존재와 그 미적 자율성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불러온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러한 효과는 정치적 프로젝트를 예술작품 안에 구둣주걱으로 밀어넣고자 하는 의도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간의 비교 불가능한 성질에 대한 해당 예술작품의 본격적인 탐구에서 비롯된 효과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이 텍스트는, 다른 많은 텍스트가 그러하듯, 번역문이 원문과 동일한 효과를 발휘할 기회를 당장 이 대목에서는 어렵더라도 이후나 이전의 또다른 대목에서 제공하고 있다. 그리하여 번역문에서 나는 바그너(R. Wagner)의 「로엔그린」에서 인용된 대사(“Nie sollst du mich befragen...”)를 원문인 독일어로 표기하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부분의 ‘등가’ 번역은 독일어 대사를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었겠지만(배수아가 이 부분을 한국어로 번역해 실었듯이), 나는 그 대신 이러한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앞선 대목에서 확보하지 못한 효과를 얻고자 하였다.


어느 번역에서고 원문의 특징적 요소들 중 재현이 불가능한 (혹은 나로서는 마땅한 재현의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던) 구체적인 요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중 하나가 한국문학 작품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한국어의 특징인 수많은 동음이의어다. 예컨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성문’이라는 단어는 그 대목의 맥락으로 봤을 때 city gate(城門)로 옮기는 것이 옳은 번역임은 명확하나, 이럴 경우 glottis(聲門)로도 번역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이 사라지고 만다. 물론 이 맥락에서 후자의 의미로 이 단어를 쓰면 논리적인 문장이 성립하지는 않으므로 ‘성문’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라기보다는 내가 ‘유령 의미’(ghost meaning)라고 부르는 뜻을 지닌 경우에 속하는데, 이때 독자는 작품 전반에 걸쳐 목소리를 내는 기관과 연관된 단어들, 예컨대 성대와 점막 등의 단어가 종종 등장하는 사실에 힘입어 이러한 유령 의미의 존재를 자연스레 인식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도 문제적인 요소이자 특징으로 작가가 영어 단어를 한글로 음역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들 수 있을 텐데, 이런 음역은 보통 대화 중에 발생하지만(‘사우스코리아’, ‘오케이’) 대화 주변의 텍스트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리드미컬한 율동’). 그래도 다행인 건 이와 맞먹는 효과를 지니면서 번역 과정에서 보존하는 것 역시 가능한 다른 경우들 또한 존재한다는 건데, 이 중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모국어’란 말의 사용이다. 이 단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것은 정확한 번역인 동시에 ‘모국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드문 영어권 독자의 눈에 덜 두드러지는 번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한국 작가들의 상당수가 ‘한국어’를 뜻하는 좀더 일상적이고 자연스런 동의어로서 ‘모국어’란 단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위에 언급한 음역이라는 특징적 요소가 빚는 이질적인 효과를 번역문에서도 살리고 싶었으므로 ‘모국어’를 ‘mother tongue’으로 직역하는 방식을 택했다. 즉 그러한 의도된 효과 없이는 독자가 망각하기 쉬운 사실이 대화가, 그리고 Recitation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어쩌면 거의 모든 대화가 실은 번역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러한 번역 전략은 앞서 논한 ‘ X는 말했다’화자의 말임에도 딱히 서술과 구별되지 않을뿐더러 워낙 길게 이어지는 대목들의 마지막에서나 불쑥 등장하여 독자를 동요케 하는와 동일한 기능을 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든 이 대목에서 경희는 ‘동양인 남성’과 자신의 모국어인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와 대화를 하는 경희의 머릿속에는 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과 기억 들이 한국어로 떠오르고 있음을, 즉 경희가 사실상 번역을 하고 있음을 ‘모국어’란 단어의 사용은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러한 자기번역의 행위와,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말을 하는 행위가 암시하는 여러 의미들 또한 따라붙는다. 경희가 마리아에게 이야기하듯, 외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려고 시도하는 이들은 “늘 과도한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으니까”. 번역을 하는 내내 나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자 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대화 중에 등장하는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들을 적당히 누그러뜨리려는 유혹을 느꼈을 것이다. 번역가가 언어를 ‘입말’에 가장 근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대화를 옮길 때인데, 다만 이 소설에서 대화란, 배수아의 모든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오히려 부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기능을 한다. 그렇기에 나 역시 평소 한국어 작품을 번역할 때보다 대화 특유의 통사구조에 훨씬 근접한 번역을 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 X said’를 통상의 영어 구문에 맞춰 첫번째 절 뒤로 이동하는 대신 여러 절이 줄줄이 이어지는 대목의 앞머리에 그대로 두었으며, 또한 평소라면 한 문장으로 옮겼을 짧고 독립된 문장들도 그대로 번역했다: “ Kyung-hee laughed. At the hawks being there.”(“경희는 웃었다. 매의 거기 있음에 대하여.”)


특정 단어가 일회적으로나 외따로 등장하면 번역 자체가 좋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이 책의 영문판 편집자는 ‘mother tongue’과 같이 이질적으로 들리는 표현들을, 본문을 통틀어 그 단어 혹은 표현이 두번 이상 반복되기만 한다면 그대로 두는 것에 동의했다. 되풀이됨으로써 예사로워지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러한 효과로 희한하다 싶던 표현이 그렇게 이상하지만은 않은 표현으로 ‘정상화’된다고는 해도, 이러한 효과조차 먹히지 않는 기이한 표현들 또한 있기 마련인데 그중 하나가 ‘젊은 여성 저널리스트’이다. 이를 나는 “young female journalist”로 옮겼는데, ‘치유사’(역시나 유난한 표현이다)로 불리는 남자는 이 표현을 쉴새없이 반복하다가 급기야는 경희를 폭발하게 만든다. 인물들을 특정한 이름으로 호명하는 대신 이러한 피상적인 묘사동양인, 남자 손님 등등로 반복해 지칭하는 것은 거리 두기의 또 한가지 전략인 동시에, ‘무녀’나 ‘여학생’ 같은 단어에서처럼 특정 젠더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한국어 단어의 특징을 환기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남자 손님’이란 표현은 ‘여학생’처럼 단독으로 존재하는 단어를 직역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한국어에 그에 해당하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작가가 예컨대 ‘여학생’ 같은 단어를 영어로, 혹은 적어도 독일어로 직역했다가 그 표현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 듯하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작가의 또 한가지 의문은 “단지 임의적 기호일 뿐인”(『에세이스트의 책상』) 이름과 그 이름이 붙은 사람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전자는 후자와 동일시될 수 없으며 후자에 대한 어떤 의미있는 사실도 알려주지 않는다. 배수아는 종종 인물을 묘사함에 있어서 그의 민족이나 젠더를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거나 뭉개는 방식을 택한다. 예컨대 “그 이름은 여러분들에게는 너무나 낯선 이국적 발음일 테니 그냥 간편하게 마리아라고 해두죠”(『서울의 낮은 언덕들』)라고 한다든가,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 MM으로만 지칭할 뿐, 그에게 성별을 특정하거나 ‘그녀’ 같은 대명사로 묘사하지 않듯이 말이다. 그러나 A Greater Music에서는 영어의 특성상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만약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지나치게 눈에 거슬리고 어쭙잖게 조작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Recitation에는 자칭 이민 경찰이라는 세명의 남자가 경희를 경희와 동명이인인 어느 ‘외국 여자’로 오인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그러나 실은 동명이인이라는 이 여자의 이름이 애초 잘못 기록된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듯 배수아는 정체성이란 사실상 막연한 개념일뿐더러 우리가 평소 그리도 맹목으로 신용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이러한 구분으로는 결정지을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한다. 그렇기에 나 역시 이에 힘입어 다른 때에는 좀더 간략하게 지칭했을 인물을 예컨대 “the child called Kyung-hee”(“경희라는 아이”)라든가 “the woman who was her mother”(“그녀의 어머니인 여자”) 같은 다소 에두른 표현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앞서 말했듯이 반복은 정상화를 가능케 하는데, 이는 패턴을 이루는 것은 일회적인 것에 비해 느닷없다는 느낌을 덜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복이 불러오는 효과 중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유별나다 싶은 표현을 투박한 직역의 결과가 아니라 원문을 충실히 반영한 결과로 읽어내도록 해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원문에 등장하는 패턴이나 맥락 중에는 번역가가 이러한 효과를 노리며 적절히 활용하기에 어려운 것들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뭐든 두번 이상 반복한다고 해서 재깍 수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패턴에는 크게 두가지 유형이 있어서 나는 번역할 때 어느 유형이냐에 따라 각기 다르게 접근한다. 특정 단어가 한 대목에서, 혹은 밀접한 두어 대목에 걸쳐서 여러번 반복되는 경우, 나는 번역문에서 그 단어를 두세번 이상 반복하지 않는다. 영어에서는 이 정도의 비교적 짧은 호흡 안에 동일한 단어를 두세번 연속해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그 단어를 효과적으로 강조할 수 있다. 그보다 더 자주 되풀이하는 것은 오히려 작가의 입김이 과도하다는 느낌을 주어 결과적으로 문장을 졸문으로 전락시킬 따름이다. 반복되는 패턴의 두번째 유형이자 배수아의 작품에서 좀더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은 작품 전반에 걸쳐 드문드문 등장하는 특정 단어들이다. 이는 동화에서 아이들이 빵 부스러기를 흘려 길을 만들듯, 의미로 연결된 자취를 작품 속에 남기는 기능을 한다. 그러니 작가가 이러한 용도로 골라낸 단어들이 마침 다의적으로 읽거나 번역할 수 있는 단어라는 사실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여러 뜻으로 읽거나 번역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 패턴을 번역문에서 완전히 재현하기란 당연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된다. 서로 다른 언어에서 온 두 단어가 상대 언어에서 각기 지니는 의미의 온 범위와 뉘앙스를 모두 아우르는 경우는 몹시 드물기에.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 나는 그저, ‘의미’의 반복만으로도 주의 깊은 독자가 이 실줄기를 놓치지 않고 충분히 따라가기를 바라는 동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인 동일한 머리글자나 심지어는 동일한 첫 음절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선택하는 수밖에는 없고(다행히도 어원을 공유하는 단어들의 경우는 이러한 선택이 실제로 가능한 편이다), 심지어는 번역가가 통상은 피하려 하는 부자연스러움을 의도적으로 조성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을 때도 있다. Recitation에서는 ‘흘러내리는’이라는 단어가 작품 전반에 걸쳐 되풀이되면서 사람의 신체가 그 구성요소들로 붕괴하는 개념을 전경화한다(‘요소’란 단어도 이 작품의 ‘실줄기 단어’ 중 하나다). 나는 이 단어를 가능한 한 ‘slipping’이라고 번역했는데, 영어의 맥락에서 slipping은 서서히, 그리고 불가피하게 아래로 이동하는 움직임이라는 뜻과 함께 어떠한 척도나 기준이 하락 또는 쇠퇴하고 있다는 의미의 slipping standards, 실수하다, 그르치다를 뜻하는 slipping up 등의 부정적인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단 ‘slipping eyes’라는 표현만큼은, 두 눈이 몸에서 아예 분리되고 있다는 암시를 하는 만큼 아무리 배수아의 작품이라 해도 지나치게 기괴한 표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터이기에, 나는 애초에 “흘러내리는 눈”을 ‘rheumy eyes’로 읽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처음에는 이 부분을 “four reddened, rheumy eyes”(네개의 붉게 충혈된, 점액질의 눈)으로 번역했고, 반복되는 패턴과 연결해야 하는 필요성이 아니었더라면 따로 수정하지 않고 이대로 두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표현을 확장해 이 부분을 “rheum slipping out from four reddened eyes”(네개의 붉게 충혈된 눈에서 흘러내리는 점액)으로 번역함으로써 독자가 이 장면을 눈앞에 그려볼 수 있게 함과 동시에, 점액을 ‘흘러내린다’고 표현한 부자연스러움을 통해 이 단어의 반복에 독자의 주의를 집중시키고자 했다. 물론 이 번역이, 다른 여느 번역도 마찬가지지만,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의 말을 빌리자면 각각의 번역은 단지 “필연적으로 못 미칠 수밖에 없기에, 그러한 필연적 못 미침에 새로이 도전하는 방법”(a new way of necessarily falling short)에 불과하고, 이는 곧 몽떼뉴적 의미의 에세이이며, 또한 배수아적 에세이의 의미이기도 하다.

 

번역: 이예원/문학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