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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저작권법 시대의 예술작품
스벤 뤼티켄 Sven Lütticken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에서 예술사와 예술비평 강의 중. 저서 Secret Publicity (2006), Idols of the Market: Modern Iconoclasm and the Fundamentalist Spectacle (2009) 등이 있음.
*이 글의 원제는 “The Art of Theft”이며, 필자가 『뉴레프트리뷰』(New Left Review) 2002년 1-2월호에 발표한 글이다. ⓒ Sven Lütticken, 2002 / 한국어판 ⓒ 창비 2016
영화각본과 미술작품, 대중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저작권 침해에 관한 최근의 소송과 논쟁의 숫자만 보더라도 ‘지적 재산권’과 그에 따르는 이익이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이클 잭슨 같은 스타들은, 어쩌면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을 예술가들의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고소에 맞서 정기적으로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 터무니없는 사건인 경우도 종종 있으나 걸린 금액은 엄청나다. 많은 진지한 예술가들이 소송 절차에 파묻히지 않고 작업에 전념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기존 자료를 전유하는 것은 현대의 다양한 문화적 행위에 필수불가결한 일이지만, 이러한 문화적 행위는 점점 더 법률가 군단의 압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음악 분야에서 샘플을 둘러싼 논쟁은 법률 전담 부서를 둔 대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는 밴드나 예술가들에게 특히 숨 막히는 일이다. 이러한 사태 진전의 문화적 함의는 광범위하다. 샘플링(sampling)과 저작권에 관한 당면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밴드인 네거티브랜드(Negativland)는 “더는 저작권법 이전 시대와 같은 방식으로 문화적 진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예컨대 진정한 포크 뮤직은 더는 가능하지 않”은데, 포크 뮤직은 멜로디와 가사를 자유롭게 재사용함으로써 번성할 수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1) 비디오 아티스트와 영화 제작자들—장뤼끄 고다르(Jean-Luc Godard)의 「영화의 역사」(Histoire(s) du Cinéma)의 경우 상당 부분 역사에 남을 만한 영화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도 비슷한 문제에 대처해야 한다.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도 시청각자료를 쓸 때마다 움찔할 만큼의 액수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저작권이 있는 자료를 개인적, 과학적, 혹은 예술적 목적을 위해 ‘공정하게 이용’(fair use)한다는 개념은 위협받고 있다. 저작권은 사실상 상표와 특허를 포함한 ‘지적 재산권’이라 불리는 더 넓고 점차 통합되고 있는 분야의 일부일 뿐이다. 더구나 지금 컴퓨터 소프트웨어 및 웹사이트 부문에서는 지적 재산권이 엄중한 사용자 계약으로 보호받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빌보드닷컴(Billboard.com) 웹사이트 유료 가입자들은 그들이 사용료를 지불하는 기사나 데이터로부터 얻은 정보를 결코 재전송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된 동의서에 서명해야 한다.2) 그럼에도 저작권법은 여전히 음악이나 그림, 혹은 텍스트의 사용권과 관련해 위세를 떨치고 있다. 1997년 마텔(Mattel)사는 인터넷 아티스트 마크 내피어(Mark Napier)의 프로젝트 「일그러진 바비」(Distorted Barbie)를 상대로 그가 만들어낸 변형된 바비 인형의 이미지가 저작권 침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더 기상천외한 경우로, 워너브라더스의 법무팀은 인터넷에 해리 포터 팬페이지를 만든 아이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사용자들은 어디서나 수동적인 소비자가 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3) 심지어 MP3 파일을 개인 용도로 복제하거나 상업적 목적 없이 배포하는 행위조차 대규모 소송 사건으로 이어져왔다.
저작권법은 이렇게 예술가나 일반 대중에게 봉사하기보다 멀티미디어 기업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이 법은 지적 재산이라는 새로운 통치제도에 전적으로 참여해 저작권이 있는 자료에 대한 비판이나 패러디, 창의적인 재사용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현재의 풍토에서는 사실상 모든 형태의 인용이나 전유가 도둑질로 간주되거나, 최소한 도둑질이 아님이 입증될 때까지는 그 혐의를 받게 된다. 우리는 기이하게 고풍스러운 상태의 문명에 도달했는데, 이 상태에서 모방(emulation)의 이상은 저작권의 금기에 자리를 양보하고 말았다. 마치 바비 인형과 해리 포터가 승려계급의 수호를 받는 신의 형상인지라 이를 신성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불경스럽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현대 예술과 이론은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의 독창성 숭배(cult of originality)를 포기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그것은 법으로 복구되었다.
이 지배적인 법률적 시각에 반격을 가하려면 법이 사용하는 어휘를 반어적으로 전유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유리할지도 모른다. 역동적이고자 하는 모든 문화에 도둑질은 필수적인 요소라고 주장하면 어떨까? 발전적이고 자기비판적인 문화치고 훔치는 기술을 구성요소로 갖지 않은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 인용하고 전유하는 것은 자료를 조작해 또다른 의미를 도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술에서의 도둑질이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사유화된 단자들을 돌파해버린다는 사실 자체가 기업에 불안을 초래한다. 마텔사로부터 프로젝트를 인터넷에서 내리라는 법적 압력을 받고 난 뒤, 내피어는 “그들의 공격은 이윤 때문이라기보다는 바비라는 픽션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며, “의미가 왜곡된다면 바비는 더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다소 낙관적으로—말했는데 그 지적은 타당한 것이었는지 모른다.4)
모방의 시대
낭만주의가 현대문화에 물려준 유산 하나는 진정한 예술가는 ‘대자연’처럼 완벽한 자율성이 확보된 상태에서 창작한다는 관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술에서 고전주의 전통—르네상스에서 18세기를 거쳐 19세기 초에 이르는—은 모방 혹은 모조의 한 요소로서 훔치는 일의 중요성을 인정했으며, 이 자체가 (후기) 르네상스 예술이론의 초석을 이룬다. 고전주의 말기에 이 신조에 관해 제시된 가장 중요한 옹호로 조슈아 레놀즈(Joshua Reynolds)의 여섯번째 ‘미술론’ 강연(1774)을 들 수 있는데, 여기서 그는 청중들에게 “화가나 시인이 정신을 쏟아부어 작업할 자료, 만들어내는 일의 출발점이 되는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려 애쓰는 것은 헛되다. 무(無)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5)
레놀즈가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모방, 즉 ‘옛 거장’을 주의 깊게 연구함으로써 배우는 것이다. 물론 좀더 구체적인 방식의 모방이 있고, “특정한 생각이나 행동, 태도, 혹은 인물”을 다른 사람의 작품에서 직접 따오면 표절 혐의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을 레놀즈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조차 결과가 좋거나, 심지어 원작보다 우월하기까지 하다면 정당화될 것이다. 또한 “근대의 작품들은 작가의 재산에 가깝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고전 예술에 대해서만 자유롭게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하면서도, 레놀즈는 여전히 왕립미술원 학생들에게 훔친 것으로 새로운 예술작품을 창조할 수만 있다면 ‘근대 작품’에서도 약탈하라고 충고한다.
이와 같은 모방은 표절의 노예근성 같은 게 전혀 아니며, 정신의 끊임없는 훈련이자 지속적인 창조이다. 뛰어난 기술과 주의력으로 빌리고 훔친다면 스파르타인들에게 있었던 것 같은 관대함을 누릴 권리를 갖게 될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은 도둑질은 처벌하지 않았고, 도둑질을 숨기는 솜씨가 부족하면 처벌하였다.6)
레놀즈의 말은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들린다. 현재의 신념이나 관행과는 반대로, 그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예술을 위한 도둑질을 반드시 재산을 훔치는 것같이 취급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간곡한 권유로 강연을 마친다.
그러므로 거장들의 위대한 작품을 끝없이 연구하라. 그들이 연구한 순서에, 방식에, 원리에 가능한 가깝게 연구하라. 주의 깊게 자연을 살피되, 항상 거장들을 벗 삼아 연구하라. 거장들을 베껴야 할 본보기로 생각하는 동시에 맞서 겨루어야 할 경쟁상대로 여겨라.7)
레놀즈는 이미 점증하는 초기 낭만주의의 독창성 숭배의 압력 아래 놓여 있었다. 그가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과는 절대 화해할 수 없는 일로서 진정한 창조를 격찬하는 사람들을 공격한 것만 봐도 그 점이 명백해진다. 그는 수세기 동안 위대한 대가든 그에 못 미치는 대가든 정전화된—예컨대 다빈치나 라파엘로의 작품 같은—작품들을 베끼던 전통의 끝자락(혹은 그 근처)에 서 있었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모방은 전시될 목적이라기보다는 미래에 새로운 작품을 만들 때 쓰려고 갖고 있던 (부분적) 스케치였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새 작품에는 존경하는 거장에게서 의식적으로 따온 부분들이 포함되곤 했다. 미술가들은 회화와 조소, 조각상 등을 연구하기 위해 종종 이딸리아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으나, 인쇄기술의 발달로 인해 이전과는 달리 어떤 작품들은 훨씬 더 광범위한 유포가 가능해졌다. 일례로 16세기 초 마르깐또니오 라이몬디(Marcantonio Raimondi)가 동판으로 찍어낸 라파엘로의 작품 「파리스의 심판」( The Judgement of Paris)은 후에 루벤스나 심지어 (더 우상 파괴적인 양식이긴 하지만) 마네 같은 화가까지도 모방하게 되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Déjeuner sur l’herbe)은 라파엘로의 창작을 재가공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복제에 대한 규제
마르깐또니오 라이몬디는 훔치는 기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며, 새로운 복제술의 발달에 따른 고전주의 전통의 위기를 예고해주기도 한다. 그의 오랜 명성은 라파엘로의 화실을 위한 작업에서 비롯되는데, 선명도는 물론이고 미증유의 뛰어난 입체감으로 라파엘로의 작품을 동판화로 바꾸었다. 초창기에 라이몬디는 뒤러(A. Dürer) 같은 북부 미술가들의 작품으로 판화를 만들었다. 바사리(G. Vasari)가 말하길 1506년에 뒤러는, 마르깐또니오가 자기 이름의 머리글자인 ‘AD’를 새긴 목판화 사본들을 만들었고, 그걸 사람들이 진짜 자기 작품인 줄 알고 샀다는 사실에 격분한 채 베네찌아에 도착했다. 이 독일 예술가는 당국이 개입해주기를 원했다.8) 선례가 없었기 때문에 마르깐또니오의 행위를 둘러싼 당시의 법적 상황은 극도로 혼란했다.8) “16세기 초 복제 판화가의 권리와 특권은 분명치 않았다. 왜냐하면 이 직업은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자신의 창작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이 창작품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판화가에 의존하면서부터 성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9) 베네찌아 당국은 신흥 르네상스 예술이론이 예술의 ‘지적’ 요소—즉 예술가의 ‘구상’(conceptio)—에 새롭게 부여한 중요성을 아마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중세의 경향을 따라 사고하며 마르깐또니오의 솜씨를 평가했던 것 같다. 만약 그가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정교한 형태로 제작할 수만 있다면, 별 문제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뒤러는 마르깐또니오에게 서명용 머리글자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 이상의 법적 행동을 베네찌아 군주에게서 이끌어내지 못했다. 마르깐또니오는 글자 그대로 그의 ‘카피라이트’(copyright), 즉 ‘복제할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었다. 다만 이 복제품을 뒤러 자신의 작품으로 속여 넘기는 행위가 허용되지 않았을 뿐이다.10)
마르깐또니오가 제작한 뒤러 작품의 판화는 르네상스 시대의 모방 관행과 유사하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현대의 상업적 목적을 위한 저작권 침해(의류에 그려진 해적판 「캘빈과 홉스」 만화처럼)에 가깝다. 그에게 운이 따랐던 건, 그가 사용한 복제매체(판화)에서는 수작업이 여전히 중요한 구성요소였기 때문에 당국이 그의 책임을 면제해준 것이었다. 즉 그 복제품은 ‘그 자신의 작품’이었다. 이런 식의 논리는 현재의 디지털 형식에서는 불가능해졌다. 특별한 기술이 없더라도 누구나 음악파일을 다운로드하거나 삽화를 스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자신이 고안한 디자인을 판화가들이 표절하는 것을 수수방관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판화를 찍어내거나, 아니면 판화의 생산을 관장하고 통제하기를 원했다. 현대의 정부나 기업이 해커를 고용하는 것과 얼마간 유사한 조처로, 라파엘로는 마르깐또니오를 그의 공식 판화가로 채용했다. 일관성의 문제로 비난받을 일은 거의 없었지만, 라파엘로와 마르깐또니오는 원작자와 판화가의 구분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여러 판화에 둘의 이름을 모두 서명했다: ‘라파엘로 창작’(RAPHAEL INVENTIT), ‘마르깐또니오 제작’(MAF, Marcantonio fecit). 사업에 관한 둘 사이의 합의가 정확히 어떠했는지는 아직도 그리 확실치 않고, 판화 제작에 대한 규정도 오랫동안 혼란했다. 어떤 화가들은 판화가에게 고용되거나 직접 판화가와 계약을 맺기도 했지만, 작고한 화가는 누구나 잡아도 되는 사냥감이었다. 가령 16세기에 제작된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의 작품을 찍어낸 것이라고 생각되는 판화 작품들이 (언제나 사실은 아니지만) 다수 존재한다.
하지만 국가 규제의 서막을 알리는 복제와 증식의 가장 혁명적인 방법이 등장했으니 바로 서적 인쇄였다. 왕의 ‘특권’으로 특정 기간 출판업자들에게 일정 서적을 출판할 독점권을 주었는데, 이는 저작권법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국가 통제 형식이었다.11) 영국에서는 1709년 앤여왕법(Statute of Queen Anne, 최초의 저작권법으로 저자에게 배타적 권리를 부여하고 저작권의 기한을 28년으로 한정—옮긴이) 선포로 검열이 지배적 요인이 되기를 그쳤지만, 프랑스에서는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프랑스혁명 이전의 절대군주체제—옮긴이)이 출판을 막기 위해 계속 특권제도를 이용했고 이로 인해 ‘불법 베스트셀러’의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꽃피기도 했다.12) 현대의 저작권에서 우리는 근대 저작권법이 제정되기 전 옛 특권제도의 배후에 있는 논리로 일부 복귀하는 광경을 목격하는 듯하다. 내피어의 「일그러진 바비」 같은 ‘저작권 침해 사례’에 대해 기업이 취한 행동들은 검열체제에 상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8세기와 19세기 초에 저작권법이 제정된 것은 작가들이 어지간히 생계를 꾸리고 그리하여 새로운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주로 촉발되었다. 애초에는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1790년 제정된 미국 최초의 저작권법은 오로지 책과 지도만을 대상으로 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이 금세 분명해졌다. 1802년의 수정법안은 저작권법의 대상을 판화와 에칭화로 확대했고, 1831년에는 음악작품이 추가되었다. 들라로슈(P. Delaroche), 그리고 이후 홀먼 헌트(Holman Hunt), 알마타데마(L. Alma-Tadema) 같은 19세기의 인기 있는 화가들은 자신의 저작권을 이용하는 데 능숙해져서, 구삘(A. Goupil)이나 감바르트(E. Gambart)처럼 적극적인 미술상에게 저작권을 팔았고, 이들은 다시 판화가를 고용하여 유명한 판화들을 생산해냈다.
이들 화가에게 복제권의 판매는 실제 그림의 판매를 보충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수입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업자가 뛰어난 판화가를 고용하는 일에 기꺼이 투자한다는 조건이라면 저작권을 싼값에 넘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들은 진짜 그림은 개인 소장품이 되어 자취를 감추는 일이 많기 때문에, 복제품이 평판에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13) 구삘과 감바르트는 사진의 가능성 역시 재빨리 간파했다. 1858년 구삘은 ‘사진 갤러리’(Galerie photographique)라 불리는 일련의 복제본뿐 아니라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넣고 설명을 곁들인 들라로슈 작품의 전작 도록을 출간했다. 구삘은 심지어 라이몬디가 제작한 판화들을 사진으로 찍어 출판하기도 했는데 이는 역사적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 새로운 형태의 복제술은 축복이자 저주임이 드러났다. 구삘과 감바르트가 출판한 판화를 다른 사람들이 사진본으로 만들어서 적은 비용으로 제공하기가 비교적 쉬워졌기 때문이다. 이 미술상들은 이 위협에 대응해 ‘자신들의’ 판화를 해적판으로 만든 혐의로 사진사들이 기소되게끔 애썼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유럽 법규의 한계 때문에 대개 효과가 없었다.14)
기계적 복제를 둘러싼 소란이 아무리 커도, 미술가들은 여전히 그들의 수작업에 대한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유럽의 많은 박물관에서 화가들이 옛 거장들의 그림을 공들여 모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박물관들이 책이나 잡지에 사용되는 사진 복제와 관련해서는 자기네 저작권을 최대한 이용할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반적으로 회화나 소묘에서의 ‘모방’은 법적 문제에 휘말리는 일이 없었으나, 낭만주의 예술관의 영향 아래에서 베끼거나 인용하는 것이 점차 ‘예술상의’ 죄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독창성 숭배가 예술가들 사이에 일종의 소유욕을 불러일으켰다. 즉 일정한 형식이나 구성 유형이 ‘자신들의 것’이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낭만주의와 그 후예인 모더니즘의 검열관적 태도가 예술을 위해 훔치는 행위를 범법행위로 간주할 수 있게 했을지 모른다.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가 현대의 독창성 숭배와, 이딸리아의 모델을 활용해 오르페우스를 묘사하는 판화를 만든 뒤러 사이의 대립적 입장을 법률용어로 기술했을 때, 그는 이 사실을 감지했던 것 같다. 말장난하듯, 바르부르크는 만약 판사가 뒤러의 ‘미술 창작과정/소송’(artistic Prozess)에 대한 증거를 조사한다면, 뒤러도 역시 훔친 적이 있으며 그 역시 “현대적 의미에서의 개인이 아니었음”15)이 명백해지리라는 것을 시사했다.
법률만능주의의 승리는 최근의 사건이다. 두 세기 가까이 저작권은 책, 그림(판화를 매개로) 등을 통째로 ‘베끼는 것’으로부터 저자와 출판사, 그리고 미술가들을 보호하는 일에 주로 관여해왔다. 다시 말해서 레놀즈의 관심사(모방)가 아니라 라이몬디의 관심사(복제)에 결부되어 있었다. 지난 수십년 사이에 비로소 음악작품의 단편적 일부나 줄거리의 어렴풋한 유사성까지 적용에 포함되는 것으로 저작권이 확대되었다. 저작권은 거의 지각되지 않은 채 또다른 방식으로도 팽창되어왔다. 레놀즈 같은 화가이자 이론가에게 화가가 위대한 문학작품에 나오는 장면을 묘사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으며, 이러한 행위가 법적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은 결코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사실 이 생각은 부분적으로 옳은데, 원작자들이 오래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초에 단편 및 장편 소설들이 영화의 원작으로 쓰이면서 제작사가 저자들에게 영화 제작권에 대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원칙이 재빨리 생겨났다.16) 이처럼 비교적 일찍부터 한 분야의 작품을 다른 분야 작품의 토대로 사용하는 것 같은 기존의 예술적 관행이 저작권 위반으로 여겨졌다. 더 최근에 벌어진 사건들에서 보듯, 이러한 행위는 활발한 문화적 개입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즉 오직 대형 영화사만이 특정 저서에 대한 권리를 살 수 있고, 다른 (어쩌면 더 우월하고, 어쩌면 더 비판적인) 버전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든지 소송을 당하게 될 것이다. 물론 ‘공식적으로’ 이 모든 일은 ‘저자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어쨌든 한편 이상의 ‘상업 영화’로 만들어진 책을 판매함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얻게 되지 않겠는가? 또한 제작사가 저자들의 책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에 대해 수수료를 내고라도 그들의 승인을 얻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면, 저자들은 이로부터도 득을 보게 될 것이다.
기호학 전쟁
문화는 대규모 사업이 되었지만, 대규모 사업이 점차 문화가 돼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확실히 저작권과 관련된 법률 근본주의의 한 원인이 된다. 자본주의는 독일 관념론, 혹은 접신론으로 타락한 독일 관념론의 기미를 보이면서 신플라톤주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즉 이미지와 브랜드와 사용자 경험이 실제 상품보다 더 중요해지면서 정신이 물질에 대해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일부 비판적인 그룹과 개인 들은 대응책으로 ‘문화방해’(culture jamming)를 제안해왔다. 마크 데리(Mark Dery)가 1993년에 발표한 선언서 「문화방해: 기호의 제국에서 자르고, 베고, 쏘기」(Culture Jamming: Hacking, Slashing and Sniping in the Empire of Signs)17)를 통해 이 용어를 대중화했고, 네거티브랜드 역시 이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 문화가 다국적기업에 의해 광범위하게 통제된다면, 대안 제시를 위해 문화에 비판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 기호를 조작해야 하며, 훼손해야 한다. 이와 같은 (데리가 에꼬U. Eco로부터 인용한 표현대로) ‘기호학적 게릴라 전투’ 행위는 해방의 힘을 지니고 있다. 이들 행위는 ‘기호의 제국 안에서 행해지는 급진주의 정치’를 이룬다.
문화방해는 다른 외관을 취할 수도 있다. 캐나다의 ‘애드버스터즈’
(Adbusters, 캐나다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1989년 결성한 단체로,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 캠페인을 이어왔고 2011년 월가 시위를 처음 제안했음—옮긴이) 그룹에게 문화방해란 주로 광고, 특히 의류·주류·담배 상품의 광고 조작을 의미한다. 하지만 애드버스터즈의 상업주의(우리는 그들로부터 문화방해 상품을 살 수 있다)는 그들을 또 하나의—세련되고 진보적이고 ‘비판적인’—브랜드처럼 보이게 만든다.18) 더 심각하고 본질적인 문제는 그들의 메시지가 그래픽의 형태를 띤, 정치적 정답주의식(politically correct) 상투형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담배와 술은 당신에게 해롭다 같은 것 말이다. 흐느적거리는 모양의 병과 ‘절대적 불능’(Absolut Impotent)이라는 광고 문안을 가진 ‘앱솔루트 보드카’(Absolut Vodka) 광고는 약간의 청교도적 독선으로 버무려진 초라한 유머이다. 이러한 형태의 광고는 확실히 인습적인 풍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즉 기 드보르Guy Debord 쪽이라기보다는 앨프리드 뉴먼Alfred E. Neuman 식이다). 애드버스터즈는 동시대에 진행되는 문화방해의 유난히 초라한 사례이고 더 지적인 문화방해의 실천들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문화방해의 목표가 제한적이라는 사실이 두드러진다. 데리는 그가 공언하는 실천의 역사적 선례로서 상황주의적 ‘전용’(détournement, 轉用)을 불러온다. 지난 수십년간 훔치는 기술이 어떻게 변형되어왔는지 이해하려면 좀더 자세한 비교가 필요할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하여 1956년에 쓴 논문에서 드보르와 길 올만(Gil Wolman)은 ‘전용’ 개념을 단순한 ‘희극적 효과’를 내기 위한 패러디와 분명히 구분했다. 전통적인 패러디는 여전히 ‘원작’(original)의 관념을 전제로 한다(예컨대 『매드』지의 패러디는 그것이 조롱하는 영화와 TV쇼에 늘 의존한다). 반면에 상황주의자는 그가 사용하는 ‘원천’(sources)을 가치 없거나 공허한 것으로 간주한다.19) 그리피스(D. W. Griffith)의 영화처럼 걸작으로 인정된 작품을 전용할 때도 이 사실은 마찬가지이다. 상황주의자의 전용(개념과 때로는 실천)에서 놀라운 점은 자본주의 세계가 파멸할 운명이며, 따라서 전유해야 할 이미지나 그밖의 자료들도 같은 운명이라는 바로 그 신념이다. 상황주의자들에게 주변의 번지르르한 간판들은 이미 폐허처럼 보였다. 마릴린 먼로는 한겹의 화장으로 가려진 시체였고, 호시절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점이 대부분의 현대 문화방해자들과의 뚜렷한 차이인데, 동시대의 방해자들은 역사가 빌 게이츠나 마이클 아이즈너(Michael Eisner, 이 글 발표 당시 월트디즈니사의 CEO—옮긴이)의 편이 아니라 자신들의 편이라는 데 그만큼 확신이 없다. 오히려 자기 존재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세력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느낌이 있을 뿐이다. ‘눈부신 상품경제의 쇠퇴와 멸망’이 곧 닥친다는 것을 믿기 어렵기 때문에, 상황주의자들이 품었던 오만한 우월의식은 좀더 겸허한 형태의 실천에 자리를 양보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자그마한 실천마저도 저작권 침해라는 이유로 박해받을 위험을 항상 무릅써야 하는 반면, 상황주의자들이 독창성 숭배와 상품화된 예술작품에 가했던 비판은 ‘빌리거나 훔치는’ 행위들이 모두 빌리고 훔치는 행위로 취급되지는 않던 시대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공개 활동에 대한 상황주의자들의 태도는 여러해에 걸쳐 달라졌다. 유명한 예술가들의 참여와 더불어 상황주의 인터내셔널(SI)이 처음 창립되었을 때, 그것은 문자주의 인터내셔널(Internationale Lettriste)이 처했던 완전 무명 상태에서 빠져나와 미미하게나마 각광 비슷한 것 속으로 진입한 한 걸음이었지만, 드보르와 그의 협력자들은 그저 뒤로 기대어 앉아 체제의 임박한 와해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굳건히 믿었던 것 같다(물론 마침내 때가 무르익으면, 혁명가들에게 든든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할 팸플릿을 제작할 준비는 해야 했다). 이와 반대로 오늘날의 문화방해는 가장 작은 변화조차 싸워야만 얻을 수 있고 대개의 다른 변화들은 최악으로 가는 변화이며 더군다나 체제 전복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드보르의 영화에서 보이듯, ‘전용’이 종종 심오하고 이해하기 벅찬 반면 문화방해는 대중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바로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영화감독 크레이그 볼드윈(Craig Baldwin)처럼 명백히 상황주의자들을 참조한 예술가들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것으로, 그의 다큐영화 「소리의 무법자」(Sonic Outlaws)는 샘플링을 둘러싸고 네거티브랜드가 휘말린 분쟁에 기반한다. 볼드윈의 비교적 중도적인 입장은 저작권법에서 ‘공정 이용’의 개념이 다른 작품의 파편들로부터 창조된 새 작품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견해(네거티브랜드 역시 이 견해를 표방했다)에 분명히 드러난다.20) 문화방해의 충동은 현재의 자본주의 문화를 파괴하려 하기보다는 그 과도함을 제어하고, 훔치는 기술이 필수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는 예술 창작을 어쨌든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인 듯하다. 씨바 바이드야나단(Siva Vaidhyanathan) 역시 이 경향의 옹호자다. ‘공정 이용’ 개념의 더 개방적인 해석을 옹호하는 것과 별개로, 그는 저작권을 재산권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일정한 햇수 동안 생산자에게 부여된 특권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에는 대담한 기호학 테러리스트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문화방해의 형식을 채택한 적도 있다. 즉 문화방해가 주류문화의 일부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바비 인형에 대한 다양한 ‘공격’이 그 한 예가 될 만하다. 곳곳에 존재하는, 이 플라스틱으로 된 이상화된 여성성이 그 나름의 훼손을 겪어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훼손의 형태는 “바비는 창녀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우리 집 근처의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소녀에서부터 여러가지 바비 웹사이트, 심지어 1997년 아쿠아(Aqua)의 히트곡 「바비 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데리가 선언서를 쓸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쿠아가 만들어낸 싱거운 팝 음악 은 아닐지 모르지만, 마텔사가 소송을 제기할 만큼—“플라스틱으로 된 인생, 환상적이네”—충분히 위협적이긴 했다. ‘문란한 짓’(hanky-panky)이라는 가사처럼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것을 언급한 사실만으로도 반짝이는, 티 없이 깨끗한, 구멍 없는 물신(物神)으로서의 바비의 본질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마텔사가 보기에 이 본질에 대한 공격이말로 핵심적인 문화방해였다. 마텔사의 변호사들이 즉각 행동에 돌입했지만, 아쿠아 뒤에는 비용이 많이 드는 법정 투쟁을 기꺼이 치를 거대 레코드사가 버티고 있었고, 결국 아쿠아가 승리를 거두었다.21) 마크 내피어의 경우, 그같은 기업의 후원이 없었기 때문에 좀더 추상적인 형태의 「일그러진 바비」 웹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프로젝트의 이미지에서 바비 인형의 모습을 알아보기란 불가능했다. 작품은 사실 이런 전략으로부터 득을 보았는지 모른다. 나중에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실제 모습에 가까운 이전의 이미지들이 결여한 신비롭고 기괴한(uncanny) 힘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사태를 냉정히 일깨우는 실례이다. 주류문화 형식의 문화방해를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뭔가 급진적인 것이 이번에도 역시 접수되고 말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바비에 대한 공격이 각기 다른 방면으로부터 나오고 주류사회의 연예물로부터 예술과 하위문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는 사실에서 희망의 징조를 볼 수도 있다. 즉 저작권 문화가 도처에서 공격받고 있고, 저작권을 활용하는 바로 그 회사들이 때로는 돌아서서 저작권에 대항해 싸워야 하는 형편이다.
이와 같은 동시대의 ‘전용’ 활동들이 내피어가 믿는 것처럼 대중문화의 주요 아이콘의 파괴로 이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만, 마텔사의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의미를 도입할 수 있음은 확실하다. 이는 아이콘의 파괴가 아니라 아이콘의 변형—예견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과정—을 뜻한다. 거듭 말하지만 오늘날의 문화방해는 자본주의 사회를 파괴하는 것보다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목표를 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동시대 많은 실천의 역사적 선례를 찾는다면, 상황주의적 ‘전용’이라는 극단적인 야심보다는 바르뜨적 관념인 ‘2급 신화’(second-degree mythology)가 그것이 될 것이다(반드시 자본주의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전제하지 않으면서, 대중문화의 ‘신화’를 끌어다가 비판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22)
물론 상황주의자들에게 바르뜨는 겨우 아이젠하워나 드골정도로 급진적이다. 하지만 맥시멀리즘에서 멀어지는 일이 (애드버스터즈의 경우처럼) 사소하고 직접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데 만족하는, 일종의 비더마이어(Biedermeier)식 비판으로 귀결될 수도 있지만, ‘문화방해’의 가능성과 문제점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그 자체로 긍정적이며 최근의 일부 ‘전용’(예컨대 다양한 웹사이트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은 상당히 공격적이면서 교활하다. 이와 같은 실천이 법률 소송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이야말로 훔치는 기술을 넓게 실천할 필요성을 강조할 뿐이다(훔치는 기술들이 주류문화와 주변문화 양쪽에서 더 많이 실행될 필요성 말이다). 오직 문화방해를 지속하고 강화하는 것만이 저작권법 개혁에 필요한 발의에 동력을 부여할 수 있다.
제도화된 전유
1970년대 말과 80년대에는 전유가 포스트모던 예술의 핵심 전략으로 간주되었다. 기존의 자료를 전유하는 것은 모더니스트의 독창성 및 진정성 숭배를 고의로 사보타주하는 일이었다.23)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나 셰리 리바인(Sherrie Levine) 같은 예술가는 에반스(W. Evans)와 웨스턴(E. Weston) 같은 고전적 사진작가가 찍은 광고와 작품을 ‘재촬영’했다. 리바인은 또한 실레(E. Schiele)나 스튜어트 데이비스(Stuart Davis) 같은 모더니스트들의 회화와 소묘를 베끼기도 했다. 이론가들은 이러한 전유미술의 선례를 레디메이드와 꼴라주에서 찾았다. 이 형식들은 급진적 아방가르드 미술전략으로서 깊이와 진정성, 독창성을 추구하는 ‘공식적’ 모더니즘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던의 독창성 비판은 이제는 완전히 정착된 지적 재산권 개념과 충돌하게 되었다. 살펴보았듯이 상황주의자들은 미디어 이미지와 텍스트를 전용함으로써 독창성에 대한 모더니스트의 신념과 스펙터클의 지배 모두를 다소간 자유롭게 비판했지만, 법적 분쟁에 직면하지는 않았다. 1960년대에 앤디 워홀(Andy Warhol)은 (코카콜라, 브릴로 비누 패드 같은 제품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훨씬 더 공개적으로 광고 사진과 뉴스 사진들을 재사용했지만, 분쟁에 휘말리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제프 쿤스(Jeff Koons)가 1980년대 자신의 조각 작품 일부에 키치적인 엽서에서 따온 이미지를 사용했을 때, 그의 행위는 법률 소송으로 이어졌다. 쿤스의 조각 「끈처럼 이어진 강아지들」(String of Puppies)을 둘러싼 소송 사건에서 이 미술가와 그의 변호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그의 작품 「샘」(Fountain), 즉 ‘R. 머트’(R. Mutt)라고 서명된 그 유명한 소변기를 변호했을 때 썼던 전략을 사용했다. 뒤샹은 익명으로 ‘미스터 머트’(Mr. Mutt)의 작품을 옹호했는데, 머트가 “그 대상물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창조했다”는 근거에서였다.24) 물론 뒤샹은 법률 사건에 대해 논쟁을 벌인 것이 아니다. 독창성 숭배에 반발하여, 소변기에 서명하고 그것을 자신의 예술작품으로 제출하는 ‘미스터 머트’의 ‘예술적’ 권리를 옹호했던 것이다. 비슷한 노선으로 쿤스는 그가 엽서의 사진을 ‘다른 표현방식’으로 옮김으로써 그 사진에 ‘영혼’과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노선의 변호는 실패했다. 1990년 쿤스는 사진작가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으로 판결받았다.25)
예술계 내부에 관행으로 존재하는 훔치는 기술에 위험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표절 사건이나 저작권 문제 일반에 대해 만연한 침묵이다. 예술상의 절도행위를 둘러싼 최근의 논쟁은 묘하게도 더 확고한 위치에 있는 예술기관과 출판계에 의해 무시되어왔다. 마치 이런 문제들은 금전적 이해관계가 그다지 크지 않은 활동가들에게 맡겨두는 게 낫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침묵 규약(code of silence)에도 불구하고, (잡지나 영화 혹은 텔레비전으로부터) 이미지를 전유하는 예술가들은 지금 법적 문제에 상당한 시간과 돈을 써야만 한다. 이같은 현실은 ‘거물급’ 예술가에게는 별로 힘든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상업적으로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예술가에게는 확실히 곤란한 상황이다. 예술가들이 이 문제를 좀더 공공연히 다루기 시작해 그들의 작품 속에도 흘러들어가고 그리하여 좀더 공공의 관심사가 되기를 희망해야 한다.
이러한 접근법의 한 예로 삐에르 위그(Pierre Huyghe)와 필리쁘 빠레노(Philippe Parreno)의 앤 리(Ann Lee)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이 예술가들은 일본 만화 캐릭터인 앤 리의 저작권을 사서 여러 컴퓨터 애니메이션 비디오의 주제로 만들었다. 위그의 비디오 「2분의 시간」(Two Minutes out of Time)에서 앤 리는 시청자에게 어느 회사가 고안한 ‘기호’가 되어 ‘판매용으로 출품’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서두에 그녀는 시청자에게 2분간 주의를 기울여주기를 당부한다. “2분간 이어지는 여러분의 시간. 그건 제가 이야기 속에 어떤 식으로 지내다가 잊힐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에요.” 이 말은 앤 리가 아주 사소하고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캐릭터가 될 속성들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뜻한다. (마치 이 사실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예술가들은 그녀의 이름을 Ann Lee, AnnLee, Annlee 등으로 철자를 바꿔 쓴다.) 위그와 빠레노는 말하자면 그녀를 이러한 운명에서 구조해 그녀에게 목소리를 부여했다. 위그의 비디오는 묘하게 감동적이다. 이 컴퓨터로 창조된, 이방인의 눈을 가진 존재를 보면, 마치 노예가 누군가의 소유물로서의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는 듯하다. 앤 리는 가상세계의 노예인 것이다. 그녀를 구매함으로써 이 예술가들은 저작권의 경제에 참여하지만 이 구매행위를 공개적으로 만들고 자신들의 비디오에서 이를 상세히 다룸으로써 예술계의 침묵을 깨뜨린다.
옛 영화자료를 자주 이용하는 위그는 감당해야 할 몫 이상으로 저작권과 씨름해왔고, 작품에서 이 문제를 반복적으로 언급해왔다. 그의 비디오 설치작 「제3의 기억」(The Third Memory)에서 서로 이어지는 두 영상은 전(前) 은행강도 존 워토위츠(John Wojtowicz)를 주역으로 다루는데, 그의 이야기는 씨드니 루멧(Sidney Lumet)의 영화 「뜨거운 오후」(Dog Day Afternoon)의 주제였다.26) 위그는 「뜨거운 오후」의 세트인 은행을 추상화되고 단순화된 형태로 변형해 그 속에 있는—이젠 늙고 비대해진 남자—워토위츠를 보여준다. 워토위츠는 FBI의 교묘한 속임수와 워너브라더스에 대해 불평하는 와중에 그 나름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워너브라더스가 아직도 자신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위그는 작품 서두에서 영상물 불법 복사에 대한 FBI의 경고를 보여주는데, 그러한 행위는 연방법 위반에 해당한다. 패자라는 입장에 있기는 하지만 워토위츠는 어떤 면에서 워너브라더스나 이와 유사한 기업들과 같은 입장에 서 있다. 그는 자신의 저작권에서 최대한 단물을 빨기 원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수정하고 싶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오직 자신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워너브라더스가 지불하는 돈이 재정적으로 도움이 되겠지만, 워토위츠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위그가 그에게 제공한 것, 즉 은행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FBI가 어떤 식으로 그를 배신하고 그에 대해 거짓말을 했으며 워너브라더스는 어떤 식으로 같은 짓을 되풀이했는지 말할 기회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비현실적이고 양식화된 세트를 비추는 조명이 위로 올라갔다 사라지면서, 이 모든 것은 워토위츠가 끊임없이 지어내는 꿈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는 모든 것을 되풀이하지만 이번에는 통제권이 그에게 있다. 비록 그 통제권이라는 것이 이미 결론 난 이야기의 서술자가 됨으로써만 얻어진 것일 뿐이라도 말이다. 이런 식으로 위그는 ‘「뜨거운 오후」 뒤에 숨겨진 진실’보다는 신화가 된 삶에 휘말린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FBI의 경고를 삽입함으로써 위그는 이처럼 저작권의 보호를 받는 신화(copyrighted mythology)를 가지고 하는 작업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데, 「뜨거운 오후」는 그러한 신화의 핵심적 일부이다. 「뜨거운 오후」의 바르뜨적 ‘전용’으로서, 또 거대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실현된 2급 신화로서, 「제3의 기억」은 저작권 문화의 현상태에 대한 가장 복잡하고도 시사점이 많은 고찰 중 하나다.
하지만 위그처럼 젊은 예술가뿐만 아니라 셰리 리바인이나 리처드 프린스 같은 예술가도 대체로 제도권 예술계의 한계에 머물러 있고 그들의 작업은 철저히 상업화되어 있다고 느낀다면, 전유 예술이 비판적 성격을 갖는다는 주장들이 우리에게 과연 얼마나 설득력 있을 것인가? 우리는 전유 예술을 비판적이고 지적인 참여라는 외관을 취하기를 열망하는 예술계에 의해 길들여진 형태의 ‘전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상황주의자들은 예술과 다소 불편한 관계였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은 ‘예술상의’ 전위파라기보다는 ‘혁명가’로 자신을 규정했으며, 아스거 요른(Asger Jorn)을 비롯한 예술가 멤버들이 생계를 위해 작품을 판매한 사실을 결코 수용하지 않았다.27) 예술과 문학에서 ‘전용’은 ‘구시대의 문화 영역’이 폐물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만 허용되었다. ‘전용’의 실제 활동 무대는 이처럼 전문화된 분야의 영역의 바깥, 즉 팸플릿·잡지·포스터·영화 같은 것이었다. 대조적으로 오늘날 이미지 전유에 헌신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제 문화산업의 하위 분야가 되었지만 여전히 자신만의 특별한 규칙이 있는 예술계에 남아 있는 것에 꽤 만족하는 듯하다. 27)
이는 그들의 작품에 대한 수용이 주로 전작(全作, oeuvre) 범주에 의해 결정됨을 뜻한다. 리처드 프린스가 재촬영한 말보로 카우보이는 남성성 및 담배산업에 의한 남성성 도구화의 아이콘을 해체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최소한 그에 못지않게 리처드 프린스의 작업 전체의 (회고전이나 카탈로그에 제시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결과가 담배광고 버전의 ‘절대적 불능’ 이상으로 뭔가 더 흥미로운 이유는 다름 아니라 프린스의 작품에서는 말보로 맨이, 재촬영된 ‘오토바이 타는 여자들’(biker chicks) 사이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린스의 것 같은 작품들은 상업화되어 있고 미술계에 단단히 갇혀 있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위치 덕분에 슬로건화되는 것을 넘어설 수 있다. 더 직접적이고 활동가적인 형식의 훔치는 기술도 필요하겠지만, 정교하고 세련된 접근법들을 무시하는 것은 훔치는 기술의 심각한 빈곤을 초래할 것이다. 대체로 획일적으로 편협한 기업들이 문화를 소유하고 있는 현실에서, 저작권법 개혁을 위한 발의는 매우 다양한 맥락과 다양한 방법—복잡함과 무의미함, 호전성과 교묘함, 하위문화와 주류문화, 고급예술과 대중가요를 망라하는—으로 훔치는 기술을 실행해야만 그 동력을 얻을 수 있다.
번역: 이종임(李鍾姙)/네브라스카 대학 영문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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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egativland, “Fair Use,” http://www.negativland.com/fairuse.html
2) Siva Vaidhyanathan, Copyright and Copywrongs: the Rise of Intellectual Property and How It Threatens Creativity, New York 2001, 178면.
3) 하지만 출처를 명시하는 한 자료를 자유롭게 재사용하도록 남겨두는 ‘오픈 소스’(Open Source) 운동이나 ‘카피레프트’(copyleft)의 실천 등 저작권에 대한 디지털 방식의 대안을 만들려는 시도들이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4) 마크 내피어의 해명(「일그러진 바비」가 마텔사의 권리를 침해할까?」)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보라. http://users.rcn.com/napier.interport/barbie/barbie.html
5) Joshua Reynolds, Discourses on Art (1797), ed. Robert Wark, New Haven 1975, 99면.
6) 같은 책 106~107면.
7) 같은 책 113면.
8) Giorgio Vasari, Lives of the Most Eminent Painters, Sculptors and Architects (1550/1568), trans. by Mrs. Jonathan Foster, London 1886, vol. III, 493면.
9) Elizabeth Broun, “The Portable Raphael,” The Engravings of Marcantonio Raimondi, Chapel Hill, NC 1981, 22면.
10) 이 문제에 관한 위베르 다미쉬(Hubert Damisch)의 논의는 The Judgement of Paris, Chicago 1996, 81~83면을 보라.
11) Royce Whale, Copyright: Evolution, Theory and Practice, Littlefield 1971, 1~7면.
12) Robert Darnton, The Forbidden Best-Sellers of Pre-Revolutionary France, New York 1995를 보라.
13) 스티븐 반(Stephen Bann)은 그의 저서 Parallel Lines: Printmakers, Painters and Photographers in Nineteenth-Century France (New Haven 2001)에서 들라로슈와 관련해 이 점을 강조한다.
14) Robert Verhoogt, “Kunsthandel in prenten: Over de negentiende-eeuwse kunsthandels van Goupil en Gambart,” Kunstlicht, vol. 20, no. 1, 1999, 22~29면; “Artistic Piracy: Modern Conflicts of Artistic Copyright in Historical Perspective,” http://www.unites.uqam.ca/AHWA/Meetings/2000.CIHA/Verhoogt.html
15) ‘Prozess’는 독일어로 과정과 재판 둘 다를 의미한다. Charlotte Schoell-Glass, Aby Warburg und der Antisemitismus: Kulturwissenschaft als Geistespolitik, Frankfurt 1998, 87면에 인용된 아비 바르부르크의 원고.
16) Siva Vaidhyanathan, 앞의 책 81~116면과 125면.
17) http://www.essentialmedia.com/Shop/Dery.html을 보라. 다른 웹사이트에서도 데리의 논문을 찾을 수 있다.
18) Carrie McLaren, “Culture JammingTM Brought to you by Adbusters,” http://www.ibiblio.org/stayfree/9/adbusters.htm을 보라.
19) Guy Debord and Gil Wolman, “Mode d’emploi du detournement,” Les Levres nues, no. 8 (May 1956), 3면.
20) “No Copyright? A Talk with Sonic Outlaws Director Craig Baldwin,” at http://www.deuceofclubs.
com/write/baldwin.htm을 보라.
21) Naomi Klein, No Logo, London 2000, 180~81면.
22) Roland Barthes, Mythologies (1957), trans. Annette Lavers, New York 1972, 135면.
23) Douglas Crimp, On the Museum’s Ruins, Cambridge, MA 1993; Craig Owens, Beyond Recognition: Representation, Power and Culture, Berkeley 1992를 보라.
24) Anonymous [Marcel Duchamp, possibly with Beatrice Wood], “The Richard Mutt Case,” The Blind Man, no. 2 (May 1917), unpaginated.
25) Geoffrey Batchen, “Post-Photography,” Each Wild Idea: Writing, Photography, History, Cambridge, MA 2001, 124면.
26) 전시 카탈로그 Pierre Huyghe: The Third Memory, Paris 2000을 보라.
27) Anonymous, “L’Avant-garde de la presence,”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no. 8, January 1963, 20~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