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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용택 金龍澤
1948년 전북 임실 출생. 1982년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섬진강』 『맑은 날』 『그 여자네 집』 『나무』 『수양버들』 등이 있음. yt1948@hanmail.net
콩잎
논두렁콩이 잘되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런닝샤쓰 구멍으로 햇살이 따가운지
콩들이 잎을 뒤챈다.
구멍 뚫린 옷 밖으로 나온 어머니의 살은 콩알처럼 햇볕에 탄다.
콩은 낫으로 베지 않고 호미로 꺾는다.
뿌리째 뽑히기도 해서 흙을 탈탈 털며 휴대폰을 받는다.
응, 응, 응, 그래 잘 있다. 너는? 올해는 콩들이 다닥다닥 붙었구나.
그래, 한달이 크면 한달이 작기 마련이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머니, 그건 이제 야생 감나무에게서도 사라진 옛말입니다.
나는 다달이 작고, 다시 넘을 고개는 오를수록 까마득하게 가파르기만 합니다.
내년이 있어서, 농사꾼들은 그래도 그 말을 믿고 산단다.
퇴근할 때 붓꽃을 꺾어들고 강 길을 걸었다.
아내는 강 건너 밭둑에서 나물을 뜯고
아이들은 보리밭 매는 할머니 곁에서
강 건너온 흰나비를 쫓고 놀았다.
아내는 할 말이 많은 날은 오래오래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문 산을 머리에 이고 징검다리를 건너면
강물에 어른거리는
햇볕에 이마가 따갑다는 것을
아내도 알게 되었다. 바짝 메마른 입술,
하얀 수건을 쓰고 아내가 마당에서 콩을 털 때쯤이면
마른 감잎들이 마당 구석으로 끌려갔다. 아이들은 달아나는 콩을 줍고
어머니는 강 건너 밭에서 콩을 가져왔다.
뒤틀린 마른 콩깍지 끝에 불꽃이 일고 콩깍지가 터지면서 뒤틀리고
한쪽 얼굴이 까맣게 탄 콩이 튀어 부엌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변에서는 찔레꽃 붉은 열매가 익는다. 콩이 많이 열리기도 했구나.
올해도 빈 콩깍지같이 빈 집 몇채가 저절로 폭삭 내려앉으며,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고 마을에서 사라졌다. 집이 사라지니,
저쪽 들길이 문득 나타나 텅 비는구나.
허망하다.
벌레 먹은 콩잎, 그 구멍으로 햇살이 새어들고, 어머니의 살은 지금도 붉게 탄다.
우리 집 바로 뒤 당숙모네 집은 이제 영원히 사라졌다.
삶
매미가 운다.
움직이면 덥다.
새벽이면 닭도 운다.
하루가 긴 날이 있고
짧은 날이 있다.
사는 것이 잠깐이다.
하는 짓들이 헛짓이다 생각하면,
사는 일이 하나하나 손꼽아 재미있다.
상처받지 않은 슬픈 영혼들도 있다 하니,
생이 한번뿐인 게 얼마나 다행인가.
숲속에 웬일이냐, 개망초꽃이다.
때로 너를 생각하는 일이
하루 종일이다. 너 아니면 집을 나온 내가 어디로 돌아갈까
내 곁에 앉은
주름진 네 손을 잡고
한세월 눈감았으면 하는 생각,
너 아니면 내 삶이 무엇으로 괴롭고
무슨 낙이 있을까
매미가 우는 여름날
새벽이다.
삶에 여한을 두지 않기로 한,
맑은 새벽에도 움직이면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