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제때 이루어야 할 전환의 중요성
● 책을 좋아하는 걸로는 둘째라면 서러워할 다독가에 장서가라고 스스로 자부하지만, 내 서재에는 유독 계간지가 없다. 이유라면, 여기에 나오는 시나 소설, 비평은 어차피 나중에 대부분 단행본으로 묶여서 나올 것이고, 좋은 평을 받는 책이라면 그때 가서 구입해 읽을 게 분명하니 굳이 계간지를 사서 드문드문 읽을 필요성을 못 느껴서이다. 그럼에도 이번 여름호는 선뜻 구입을 했다. ‘세월호 이후, 다시 생각하는 한국문학’이라는 특집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지면 곳곳에 현실과의 팽팽한 대면에서 길어올린 다양한 토론과 사유가 엿보였다. 문예지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 가운데 “제때에 전환을 이루지 못할 경우 나라가 어떤 혼란과 난경에 빠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세월호사건의 최대 교훈이라고 백낙청이 앞서 지적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라는 거대한 메타포는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위의 교훈은 나 자신과 『창작과비평』에도 필요하다. 한국문학이 침몰하는 뼈아픈 사건이 생기지 않도록 제때 이루어야 할 전환의 문제가 있음을 상기하고 논란에 잘 대처하여 긴 호흡으로 한국문학에 남아 있어주길 바라는 바이다. 특집의 마지막 부분에 인용된 신호성 학생이 남긴 시 속의 물음, 우리의 물음이기도 한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이 나무를 베어 넘기려는 나무꾼은 누구인가/그것을 말리지 않는 우리는 무엇인가”.
신영주 pipipic@naver.com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잊을 수 없는 마음으로
● 잊지 않겠다는 당위의 문장은 아직 유효하다. 그러나 일년이 지난 지금, 그 당위의 문장은 어딘가 희미해지고 있다. 우리에게 세월호는 여전히 어딘가에 정박하지 못하고 있다. 문학은 여기서 조심스러운 탐색을 한다. 여름호 특집에서 백지연은 1980년대 문학을 중심으로 문학적 ‘전망’에 대해 진단한다. 문학의 전망의 의미는 “현재 살고 있는 세계가 은폐하거나 잃어버린 삶의 귀중한 조각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데서 만들어진다”는 메시지는 ‘잊지 않음’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80년대 문학의 주체가 노동자로서 자발적 문제의식을 가졌다면 세월호사건의 주체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한다. 사건의 주체는 희생된 아이들만이 아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그렇다. 잊지 않는 우리 모두가 세월호사건의 주체여야 한다. 그러나 수많은 주체들 중에서 희생된 아이들의 부모님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관계는 서로에게 이름과 그에 맞는 책임을 부여한다. 연인은 이별로, 친구는 절교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잃어도 여전히 부모로 산다. 이와 관련해 특집에서 신샛별은 세월호 이후에 발표된 몇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 잃은 부모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월호에 대해 잊지 않으려는 시도는 사건을 기록하고 이후를 전망하는 시도와 맞닿아 있다. 이 시도를 멈춰서는 안될 것이다.
최혜련 what1be@hanmail.net
‘평화’의 존재에 관하여
● 여름호에 실린 정이현과 한강의 소설을 읽고 쓴다. 두 작품은 각기 다른 목소리로 ‘평화’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정이현의 「천사는 날개를 달고 오지 않는다」의 주인공 ‘나’는 넉넉지 못한 형편이 생활의 목을 시시각각 졸라오자 동거하던 ‘남우’와의 이별을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그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담보한 거액의 돈이 찾아오고, ‘나’는 남우에게 그런 행운이 찾아든 것을 부러워하며 그가 불온한 일에 참여하기 바란다. 그녀는 “내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죄가 또 유예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하고 절망했다”라고 말한다. 그 문장에서 고요하지만 균열된 일상이 보인다. 돈가방 속에 ‘평화’는 없었고, 이때 ‘천사’는 지독한 반어가 된다. 한강의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에서 회사 내에서의 성차별적 규정에 저항하는 ‘경주언니’와 그에 동참하지 않는 ‘임선배’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인 사회문제이기도 하여 공감의 폭이 컸다. 임선배와 경주언니가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임선배의 혼령이 느닷없이 k를 찾아와 말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지금도 k씨는 평화로워 보여”라는 말에 k는 항변한다. “아니요, 불가능해요. 이 세상에서 평화로워진다는 건.” 여기에 대한 임선배의 대답이 마음을 울린다. “하지만 평화는 부끄러운 게 아니야.” 그것은 임선배뿐 아니라 k와 모든 방관자를 향한 위로의 말이다. 죽은 자도 산 자도 미처 누리지 못하는 평화. 어쩌면 k의 말대로 살아 있는 한 평화로워진다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은 말한다. 평화는 현재를 넘어선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눈과 눈이 마주치는 그곳에 있을지 모른다고.
조아라 ara7921@hanmail.net
탈북인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
● 대화 ‘탈북인의 자리를 돌아보다’를 읽으며, 탈북인의 실질적인 어려움과 우리 사회의 실체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는 한 단어는 ‘정체성’이다. 한국사회는 탈북인을 비정상적인 존재로 따돌린다. 탈북인이 탈북인다울 때 돕겠다고 한다. 도움받을 위치에 있도록 요구하고, 그것을 넘어서면 불편해하거나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데도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살려면 여기에 맞는 정체성을 유지하라고 요구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탈북인이 정체성을 찾으려면 본인의 노력 외에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 특정한 정체성을 강요받는 탈북인이 아닌,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나’.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나고자 한다면 탈북인과도 서로의 정체성을 굳이 확인할 필요 없이 진실한 만남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최한솔 bravepine1@daum.net
탈북인, 그리고 그들의 자리
● 여름호 대화는 크게 탈북자에 대한 제도적 문제와 탈북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문제를 주제로 삼고 있다. 경제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었으나 종교활동에 이용된다거나 방송매체에서 자극적인 왜곡 보도를 한다는 사실은 꽤 충격이었다. 그리고 탈북자라는 용어 자체가 사실 타인에 의해 규정된 명칭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 말 속에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자리한다. 누군가를 ‘탈북인’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를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인식하게 되며 그들과 우리 사이엔 울타리가 쳐진다. 본래 탈북인이라는 용어는 대한민국의 일원임을 의미하기 위해 만들었겠지만 정작 이 말은 소수집단에 대한 권력의 도구로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글을 다 읽고 나서 풀기 어려운 실타래를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복잡해졌다. 정부 차원의 제도와 지원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 사람들의 인식이 변해야 한다는 것은 아마 많은 사람들이 예전부터 생각해온 것이 아닐까. 그러나 금세 차가웠다 뜨거웠다를 반복하는 남북관계 속에서 북에 대한, 탈북인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자리잡기는 힘든 상황인 듯하다. 그래도 이 글을 읽고 나서 그나마 그들의 ‘자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이젠 그들의 자리가 교실 맨 뒤의 주인 없는 책걸상 같은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달까.
서바른 peaceba@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