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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햄릿』, 창비 2016

명작의 새 번역: 온고지신의 미덕

 

 

김태원 金泰源

서강대 영미어문학과 교수 twkim@sogang.ac.kr

 

 

‘창비세계문학’ 시리즈의 50번째 작품으로 설준규(薛俊圭)가 새로 번역한 『햄릿』(Hamlet)이 출간되었다. 『햄릿』 번역본은 이미 충분히 많지만, 만족스러운 번역을 찾기는 쉽지 않다. 10여종이 넘는 국내 『햄릿』 번역본 중에서 그동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으로 최재서(崔載瑞) 역본과 최종철(崔鐘鐵) 역본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원문에 매우 충실한 번역으로 꼽히는 최재서 번역에서 “솔토지민(率土之民)” “막비왕민(莫非王民)” “기체만안” 같은 표현을 만났을 때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현대의 독자는 드물 것이다. 설준규의 『햄릿』은 고전의 옛스러움을 잃지 않으면서 현대 독자들이 이해할 만한 어휘를 발굴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다소 생경한 한자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자성어는 되도록 피하고 한글세대에게 충분히 이해될 만한 어휘들을 선택하여 굳이 한자병기가 필요하지 않다. 또한 운문의 시적 울림과 산문의 일상성을 맥락에 맞게 잘 살려 번역한 점도 눈에 띈다. 최종철 번역은 우리말 운율을 잘 살리고 운문의 유장함을 느끼게 해주는 번역으로 평가받는다. 그렇지만 영어 어순을 따르느라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어긋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예를 하나 들자면, 32장에 등장하는 ‘극중극’ 첫 여섯행(4행의 주절과 Since로 시작하는 2행의 종속절로 구성된 한 문장)을 옮기면서 최종철은 영어 원문 순서에 따라 번역한다. 원문 구조를 그대로 따른 점을 문제 삼기는 어렵지만, 영어 어순에 낯선 독자라면 5번째 행에 다다라서야 문장 전체의 의미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설준규는 이 대목에서 종속절과 주절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독자들이 긴 대사의 논리를 수월하게 따라갈 수 있게 배려한다. 우리말 논리에 따라 원문의 어순을 바꿈으로써, 독자들이 극의 흐름을 쉽게 이해하고 인물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만한 방안을 선택한 것이다. 원문의 문장구조를 따라 번역하는 것이 흠결일 리는 없지만, 이 대사가 극중극의 일부로서 극 내부의 관객에게 전달될 연극적 효과를 고려한다면 원문의 구조를 변경해서라도 그 의미가 간명하게 전달되도록 번역하는 편이 더 효과적으로 보인다. 사실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할지 가독성을 중시하여 읽기 쉽게 옮길지는 답하기 곤란한 문제다. 특히 『햄릿』 같은 고전의 번역은 어떤 원칙을 따르더라도 아쉬움이 남게 마련이다.

22장에서 광인을 연기하던 햄릿이 폴로니어스를 조롱하며 내뱉는 대사, “For yourself, sir, shall grow old as I amif like a crab you could go backward”는 비록 짧지만 설준규 번역의 장점이 드러나는 다른 예다. 최재서는 이 대목을 “자네도 게처럼 뒤로 걸어가면 나만큼이나 늙을 테니까 말이오”로 간략하게 옮긴다. 내용은 명확하지만 두 문장이 하나로 묶이면서 미친 척하는 햄릿의 대사치곤 논리가 지나치게 정연하다. 최종철은 “왜냐하면 자네도 나처럼 늙을 테니까만일 자네가 게처럼 뒷걸음칠 수 있다면 말일세”로 옮긴다. ‘왜냐하면’(for)이나 ‘만일’(if) 등의 어구가 들어가면서 촌철살인의 원문이 다소 산문적으로 된다. 설준규는 이를 “자네도, 이봐, 나만큼 나이 먹을 것 아닌가자네가 게처럼 뒷걸음을 칠 수 있다면 말일세”로 번역한다. 햄릿의 무례함이나 도발적인 태도가 드러나는 ‘yourself’와 ‘sir’ 같은 단어를 살리고, 원문의 ‘if’구절은 간결하게 ‘~있다면’으로 줄였다. 어찌 보면 조금 부자연스러워 보이게 옮기고 줄표()를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햄릿의 광인 연기에서 단절과 연쇄, 논리와 파편화가 교차하고 있음을 드러내준다.

좋은 번역이란 충실성과 가독성이라는 원칙 중의 하나를 고집스럽게 따르기보다는, 이처럼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다른 원칙을 적용하는 유연성에 바탕을 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설준규 역본의 가장 큰 장점은 원문의 의미를 정확하고 실감나게 옮기는 최재서본과 시적 운율도 살리고 쉽게 읽히는 최종철본의 장점은 계승하면서도, 영어와 우리말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원칙과 유연성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한다는 데 있다. 원문 내용에 충실하면서 고전의 이질감은 충분히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번역전략일 것이다. 설준규의 『햄릿』은 고전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들려는 새 번역이지만, 동시에 쉽게 풀어 번역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고전의 낯섦과 까다로움을 실감하게 만드는 번역이다.

‘창비세계문학’의 발간사가 밝힌 고전문학의 새로운 번역 목표, 즉 ‘지금 여기’의 관점을 관철시켜 번역하는 일은 말보다 실천이 훨씬 어렵다. 추상적인 번역론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난제들이 산재한 원문과 오랜 기간 씨름해온 역자의 땀과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설준규의 번역이 『햄릿』과의 지난한 지적 쟁투의 결과임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은 여럿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그 유명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that is the question) 독백을 새롭게 번역한다는 점이다. 이 유명한 독백 번역은 『햄릿』 번역의 성패를 가름하는 시금석으로 여겨지곤 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대한 역자 나름의 해석이 명백히 드러나는 대목이기 때문일 것이다. 설준규는 이 대목을 “이대로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다”로 옮긴다. 역자에 따르면 이 독백은 “삶과 죽음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그것을 넘어설 것인가라는 삶의 방식에 관한 것”(288면)이다. 최재서는 “살아 부지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라고 옮긴 바 있고, 최종철은 “존재할 것이냐, 말 것이냐”로 번역한 바 있다. 최재서와 최종철을 포함한 많은 역자들이 제각각 나름의 근거를 들어 이 독백을 갱신해왔지만, “사느냐 죽느냐”라는 구절의 강렬함을 넘어서지는 못한 듯하다. 설준규의 새로운 번역이 독자들에게 인정받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설준규의 『햄릿』에는 100면이 넘는 부록과 자세한 작품해설이 붙어 있다. 부록에는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햄릿』과 관련한 ‘고전적’ 관점이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다. 역자는 그와 같은 비평전통에다 역자 자신만의 해석을 덧붙임으로써, 번역과 작품 이해가 결코 별개의 작업이 아님을 보여준다. 『햄릿』을 읽고 추가적인 정보가 궁금한 독자라면 부록과 작품해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심화된 작품감상의 기회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햄릿』 읽기가 텍스트 감상에만 머무르지 않고 수세기 동안 축적된 독서경험의 역사 혹은 지적 전통에 참여하는 일임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역자가 제공하는 비평적 전통과 역자 해설이 대략 1960~70년대에서 멈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1980년대부터 지난 30여년 사이 영미권의 셰익스피어 비평에는 혁명적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심대한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에서 멈춘 이유를 짐작 못할 바는 아니지만, ‘지금 여기’를 강조하는 창비세계문학의 발간사를 상기한다면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한편, 『햄릿』 원본 텍스트를 확정하기 어려운 저간의 사정을 제법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번역의 저본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점을 칭찬하고 싶다. 그동안 『햄릿』 번역본의 상당수가 정체불명의 텍스트를 저본으로 삼았으며, 판본에 관심이 없었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진일보한 셈이다. 그렇지만 역자가 해럴드 젱킨스(Harold Jenkins)의 ‘종합본’(conflated text)을 저본으로 삼게 된 근거를 설명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듯하다. 셰익스피어의 초기 판본 중 하나가 아니라 ‘종합본’을 저본으로 삼은 함의에 관해 간략하게라도 밝혔어야 했다. 무릇 번역이 그러하듯, 텍스트의 편집도 결코 중립적이거나 기계적인 것이 아니며, 젱킨스본은 그만의 해석이 도처에 자리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셰익스피어를 ‘지금 여기’의 관점으로 다시 창조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는 편집과 번역 작업이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김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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