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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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경위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2016615일에 회의를 열고 올해 『창작과비평』 창간 50주년을 맞아 이 상의 의의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 중요한 개편을 단행했다. 상금을 2천만원에서 3천만원으로 올렸으며, 예심 통과작을 대상으로 1차 본심에서는 ‘최종심 대상작’ 목록을 확정하여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발표하고, 숙고기간을 거친 뒤 2차 본심에서 ‘수상작’을 최종적으로 선정하기로 했다. 아울러 만해문학상 특별상(상금 1천만원)을 신설하여 본상과 장르가 다른 작품에 수여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김소연 박형준 손택수(이상 시부문) 강경석 김미정 이경재(이상 소설부문)를 예심위원으로, 백낙청 한기욱 황인숙 황현산을 본심위원으로 위촉해 심사진을 구성했다.

예심위원들은 7월 중순까지 시와 소설 각 부문의 문예물뿐 아니라 문학적 성과가 인정되는 비문예물에 대해서도 대상작을 선정하여 심사를 진행했다. 만해문학상 규정에 따라 등단 10년 이상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최근 3년간(2016615일까지 출간된 작품)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한 예심에서 시집 6종, 소설 5종, 비문예물 3(총 14종)을 본심 진출작으로 선정했다.

이어서 4인의 본심위원들은 841차 본심을 열고 다음 7권의 작품을 ‘최종심 대상작’으로 결정했다.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김경욱 『개와 늑대의 시간』, 이인휘 『폐허를 보다』(이상 소설), 송경동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장철문 『비유의 바깥』(이상 시), 김형수 『소태산 평전』, 416작가기록단 『다시 봄이 올 거예요』(이상 비문예물).

992차 본심(최종심)에서는 송경동과 장철문의 시집이 수작으로 손색없으나 올해 한국문학의 수확이 소설 부문에서 더 풍성하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권여선과 이인휘 소설집으로 대상을 좁혀 논의를 이어가면서 두 작품의 개성과 성취를 두루 검토한 결과 후자로 점차 기울어졌고 만해문학상의 취지에도 후자가 더 부합한다는 합의에 도달했다. 신중한 토론 끝에 심사진은 우리 시대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핍진하게 그려내면서도 과거의 노동소설과는 사뭇 다른 면모로 감동을 안기는 이인휘 소설집 『폐허를 보다』를 본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세월호 생존 학생과 유가족 중 형제자매가 상처를 딛고 분투·성장하는 과정을 저마다의 육성으로 여실히 기록한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생애와 사상을 저자 특유의 활달한 상상력과 유려한 필치로 그려냄으로써 또다른 민중문학의 성취에 도달한 『소태산 평전』을 특별상 공동수상작으로 뽑는 데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심사평

 

백낙청(白樂晴)_ 문학평론가

최종심 후보 중에 장철문 시집과 권여선 소설집에 애착이 많이 갔다. 하지만 이인휘 소설집 『폐허를 보다』가 특히 뛰어나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이인휘의 소설은 이야기의 내용이 감동적인 데 비해 형식은 낡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더러 그런 면이 없지는 않을 게다. 그러나 낡은 형식으로는 큰 감동을 주지 못하며 사무치는 이야기를 작가가 온몸으로 써낼 때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기법과 형식이 태어나게 마련이다. 예컨대 「공장의 불빛」은 일견 80년대의 노동소설들이 그리던 현장으로 돌아간 듯한 인상을 준다. 저임금과 열악한 작업환경에다 줄곧 해고의 위협에 시달리는 노동자들, 악덕 업주에 저항하여 자살하는 노동자 등 옛 풍경 그대로다. 그런데 수십년이 지나고도 이렇게 너무도 안 변했다는 인식이야말로 작품의 핵심이며 한동안 펜을 놓았던 작가를 창작으로 이끈 동력이다(“공장이 다시 글을 쓰라고 떠밉니다”). 그러나 글 자체는 옛날처럼 목청 높이 노동계급의 승리를 외치는 대신, 경어체를 곁들인 말투가 매우 차분하고 담담하다. 게다가 동료들에게 피해만 줄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가는 화자가 좌절의 술잔을 나누는 동료에게 해주고 싶었지만 입밖에는 내지 않은 말, “인간이 태어나서 존재에 대한 물음에 답해가며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지난날의 노동문학에서 듣기 힘들었던 고백이며, 「공장의 불빛」이 그러한 다짐을 실행하는 작품이기에 그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변하지 않은 현실’이 새삼 실감된다. 「시인, 강이산」에 이르면 형식상의 새로움이 한층 두드러진다. 주인공은 고 박영근 시인의 시들을 써낸 인물로 등장하고 박영근과 닮은 점도 많지만, 그 죽음의 정황을 포함해서 중요한 사건들이 박영근의 실제 생애와 일치하지 않는다. 화자 역시 저자의 생각과 감정을 적잖게 표현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저자와는 전혀 다른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렇게 픽션과 논픽션, 그리고 박영근의 시에 대한 훌륭한 문학비평이 자연스럽게 배합된 소설은 투박한 열정만으로 쓸 수도 없으려니와 처음부터 기법상의 실험만을 목표로 삼았어도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표제작 「폐허를 보다」도 일종의 후일담과 오늘의 노동현실 재현을 결합하면서 기존의 노동운동에서 곧잘 잊혀졌던 시야를 열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문학성’은 모호한 개념이고 시·소설·희곡 등 통상적인 의미의 문예물이 아닌 저술에 적용될 때 더욱이나 그렇다. 그렇더라도 만해문학상은 문학성을 중시함이 당연한데, 『소태산 평전』과 『다시 봄이 올 거예요』는 둘다 그 요건을 충분히 채웠다.

평전의 저자 김형수는 원불교 교도가 아니지만, 자신의 고향 산하와 저잣거리를 헤매던 끝에 대각을 이룬 성자에게 끌리고, 그에 앞서 영광 장터의 주모이면서 소태산의 대각 전에 이미 성자를 ‘발견’하여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한 ‘배랭이네’에 사로잡혀서, 시대적 배경과 전기적 사실들을 충실히 재현한 기록이자 자신의 사상과 혼이 담긴 문학을 생산했다. 한반도가 낳은 한 위인의 정직하고 감동적인 전기인 동시에 김형수의 문학세계에서도 우뚝한 성취라 할 만하다.

『다시 봄이 올 거예요』는 또다른 장르에 속한다. 『소태산 평전』과의 공동수상이 어느 쪽에도 훼손이 되지 않으리라 자신할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세월호참사 이후 구성된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은 지난해 초 유가족들의 육성기록을 담은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낸 바 있는데, 이번에는 생존학생들과 유가족 중 형제자매의 이야기를 기록해서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냈다. 작가기록단의 솜씨가 한결 무르익은 것도 당연하지만, 젊은 세대의 생생하고도 다양한 육성을 재생한 점이 특이하다. 청소년들이 직접 쓴 글은 자칫 솜씨가 서툴러 미흡할 수 있고 전문작가의 청소년문학은 더러 청소년의 이야기라기보다 청소년에 관한 이야기에 그칠 위험이 없지 않은데, 『다시 봄이 올 거예요』는 몸소 겪은 당사자가 아니면 해줄 수 없는 이야기를 작가기록단의 숙련된 기술과 헌신적 노력으로 전해주고 있다. ‘잊지 않겠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약속을 이행하는 뜻깊은 실천인 동시에 만해문학상이 현양코자 하는 한국어 문학의 중요한 성취이다.

특별상의 공동시상에 따르는 재정부담에 창비 측이 동의함에 따라 본상과 특별상의 수상작을 순조롭게 합의할 수 있었다.

 

황현산(黃鉉産)_ 문학평론가

만해 선생은 높은 지혜의 체득을 희구한 선사였으며,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는 지사였으며, 이 희구와 염원을 진실한 사랑의 목소리에 담을 수 있었던 열렬한 연인이었다. 시집 『님의 침묵』 한권을 잘 이해하려 해도 이 염원과 희구와 열정의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애국시를 쓰려 했을 때도 선생은 여전히 연인이었으며, 오도시를 쓰는 선사로서도 민족의 암담한 현실에서 한치도 비껴서 있지 않았으며, 연애시의 어조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그는 정신의 자유자재한 경지를 구하는 수도자로 정진하였다. 만해문학상을 심사하는 일이 특별히 무거운 이유도 여기 있다. 그것은 단지 좋은 작품을 고르는 일을 넘어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성실한 보고서를 선생에게 올리는 일과 같다.

수상작으로 선정된 이인휘의 소설집 『폐허를 보다』는 198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노동운동의 이면을 다룬 중편소설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이면의 이야기들은 사실상 노동운동의 앞면이었거나 앞면이어야 할 것들이 그 본디 얼굴을 되찾는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이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들이 살았던 삶, 또는 살고 있는 삶이 이 소설들 속에 핍진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뜻이다. 노동운동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였다.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선현들의 생애와 그 자손들의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알려져 있지만, 거의 같은 일이 노동운동가들의 삶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거나 눈감고 있다. 역사는 실제 일어난 일들에 이데올로기와 형식과 숫자로 가면을 만들어 자주 본디 얼굴을 가리지만 감추어진 얼굴을 되찾는 것이 문학의 사명이기도 하다. 『폐허를 보다』는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판단된다. 이들 소설의 저자는 늘 현장에 서 있고 현장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후일담 소설이나 실패담 소설과 다르다. 작가는 여러 등장인물이 죽거나 몰락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지리멸렬한 현실을 지리멸렬하게 서술하는 방식으로 노동운동 소설의 궁지와 몰락을 그 자체로 예시한다. 그러나 이 몰락은 또한 그 자체로 새로운 서술법의 발견이며 그 실천이기도 하다.

만해문학상 특별상에는 『소태산평전』과 『다시 봄이 올 거예요』가 선정되었다.

김형수의 『소태산평전』은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일대기이다. 저자는 소태산과 불갑산을 사이에 둔 같은 고향 사람으로 그 지리와 풍속, 그 정서와 인심에 대해 체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수많은 자료를 섭렵하여 이 민족종교 지도자의 행적을 매우 성실하게 따라 걸었다. 저자는 원불교의 교도가 아니지만 그가 길러온 수행력이 이 어려운 작업을 가능하게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저술의 장점은 후천개벽 사상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인 해석이다. 저자는 이 해석을 통해 ‘영적 공동체’를 우리들 스스로 일으켜 세워야 할 당위를 발견한다.

‘세월호 생존학생과 형제자매의 이야기’인 『다시 봄이 올 거예요』는 세월호에서 생존한 학생 11명과 어린 나이에 유족이 된 희생자들의 형제자매 15명이 구술한, 사건 이후 2년여에 걸친 삶의 이야기를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이 기록하여 한데 묶은 책이다. ‘기억과도 싸우고 망각과도 싸우는 시간 속에서 주저앉기도 하고 일어나기도 해야 했던’ 구술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작가기록단은 서울과 안산을 수십차례 오가며 인터뷰하는 성실한 작업으로 집단저작의 한 개념을 실천했다. 이 특별한 작업은 삶의 수렁을 건너는 사람들의 생생한 육성과 진솔한 감정을 오롯이 담아내면서도 품격을 유지하고 있어서 기록문학의 한 전범이 될 만하다.

이번 만해문학상의 본상과 특별상을 수상하게 된 세 저작은 우리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와 기장 깊은 지혜의 자리에 모두 닿아 있다. 만해 선생에게 올릴 보고서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기욱(韓基煜)_ 문학평론가

최종심에 오른 송경동과 장철문의 시집이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빼어난 바 있지만 소설 쪽의 성과가 더 풍성하고 값지다고 판단했다. 그중에서도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은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와 이인휘의 『폐허를 보다』였다. 권여선 소설집에 수록된 「봄밤」 「이모」 「역광」 등의 단편들이 감동스런 것은 한 개인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겪게 되는 고통과 슬픔, 기쁨과 설렘, 비참함과 당당함, 심지어 형언하기 힘든 마음의 움직임까지 예리한 감각의 언어로 또렷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일찍부터 특정한 개인들 사이의 관계성과 그 속에서 발현되는 개체적 특이성에 민감했지만 이번 소설집에서는 관계성과 특이성을 사유하고 드러낼 때의 언어적 감각이 더욱 벼려져서 자유자재하다는 생각이다.

이인휘의 소설은 언어와 감각에서 거칠어 보이지만 요즘 소설들이 좀처럼 건드리지 않는 사회적·역사적 차원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사유한다. 그의 소설에서 타자는 개별적 존재인 동시에 집단적 타자로도 나타나는바 이때의 타자는 작금의 현실에서 체제적으로 억눌림과 착취를 당하는 사회적 타자들로서 이런 사회현실이 변하지 않는 한 삶다운 삶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정해진 미학적 경로 없이 오로지 노동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주어진 현실과 맞닥뜨림으로써 나아갈 길을 찾는 그의 소설은 특정한 사회주의 문예이론에 입각한 예전의 노동소설들과 달리 예측불허의 전개와 팽팽한 긴장감이 압권이다. 그의 최근 소설에는 80년대 노동문학에 흔했던 독선의 자취와 관념적인 허세도, 90년대 노동문학을 무기력하게 만든 자기위안의 후일담과 회한의 포즈도 없다. 경쟁과 착취의 방식은 달라졌어도 그 속도와 강도는 날로 더해가는 삶과 노동의 현장을 온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핍진하게 펼쳐져 있을 뿐이다.

형식 면에서도 「공장의 불빛」 「시인, 강이산」 「폐허를 보다」 등 그의 최근 소설은 과감한 전복적 실험은 없을지언정 예사롭지 않은 혁신을 보여준다. 이런 소설서사의 혁신이 서구의 첨단 문예이론에서 학습된 것이 아니라 삶에서 새 길을 찾으려는 문학적 절박함에 의해 개척된 것이라는 점이 놀랍다. 특히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작자 박영근을 모델로 삼은 「시인, 강이산」은 사실적인 기록과 허구를 결합하면서 평전과 소설의 경계를 넘나드는 특이한 형식으로서, 한 노동자 시인의 애절한 삶과 그 시대의 의미심장한 장면들을 오롯이 살려낸 역작이다. 권여선과 이인휘의 두 소설집 모두 수상작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심사위원들의 중의에 동참하여 『폐허를 보다』를 선정하는 데 흔쾌히 동의했다.

올해부터 만해문학상에 특별상이 신설된 덕분에 두권의 책을 수상작으로 더 올릴 수 있어서 참으로 기뻤다. 하나는 세월호 생존학생 11명과 그날 형제자매를 잃은 유가족 15명의 구술을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이 정리한 『다시 봄이 올 거예요』다. 이 책은 차마 펼치기 힘들지만 일단 펼치면 손에서 놓기도 어렵다. 26명의 구술자가 각자 처한 삶의 입장에서 참사의 현장을 응시하며 4·16의 의미를 되묻는 가운데 시대의 비극을 받아들이는 각기 다른 방식이 점차 또렷하게 나타난다. 마치 26명의 목소리로 기워낸 조각보처럼 각양각색의 무늬와 빛깔의 슬픈 이야기들이 사실적인 기록임에 불구하고 장편소설처럼 다성성의 효과를 자아낸다. 또 하나의 특별상 수상작은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의 일대기를 다룬 김형수의 『소태산 평전』이다. 저자는 객관적인 관찰자로만 머물지 않고 때론 활발한 상상력을 통해 소태산의 삶과 사상의 역정 속으로 자신을 투여하고 그렇게 물 흐르듯 연루된 가운데 ‘솥에서 난 성자’의 흔적을 되밟는다. 소태산의 생애와 사상은 물론 그와 인연을 맺은 인물들과 그의 족적이 남아 있는 고장들, 그리고 동학에서 태동한 후천개벽 사상이 강증산을 거쳐 소태산에 이르러 결실을 맺기까지의 과정이 이토록 실감나는 까닭은 사실기록에 근거하여 여러 일화를 적절하게 배치한 덕도 있지만 김형수 특유의 활달한 문학적 상상력에 힘입은 바 크다. 수상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황인숙(黃仁淑)_ 시인

시간은 힘이 세다. 세상사가 으레 그렇듯, 세월호참사의 기억도 시간의 힘에 마모돼 언젠가는 흐릿해질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시간에 기대어 기억이 닳기를 바라는 욕망의 가두리에는, 망각과 싸우며 이 참사를 공동체의 윤리적 계고로 삼으려는 욕망이 있다. 세월호 생존학생 11명과 형제자매를 잃은 15명이 구술한, ‘삶이 크게 흔들린’ 그날 이후의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모은 『다시 봄이 올 거예요』는 그 두번째 욕망의 소산이다. 이 책은 ‘잊으라!’고 강권하는 체제의 폭력에 맞서 ‘잊지 않기’를 실천하라고 우리를 부추긴다. 한창 예민한 나이의 청소년들이 제가끔 현실을 직시하고 대처해나가며 솔직히 드러내는, 때로 연약하고 때로 강단있는 태도는 독자의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멀쩡히’ 살고자 하는 정신의 결이 페이지마다 짙푸르게 생동하는 이 슬픈 이야기를 격조있게 정리한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에 경의를 표한다.

김형수씨는 이 시대 산문문학의 한 높다란 봉우리다. 그의 섬세하고 맛깔난 글쓰기는 『소태산 평전』에서도 여전하다.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삶을 통해 19세기 조선에서 발흥한 후천개벽 사상의 역사를 그린 이 작품은 작가의 노고와 재능 덕에 원불교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라 원불교 안팎의 풍속사적 상상력을 독자들에게 베푸는 데 성공했다. ‘혁명은 현실 안으로의 도피요, 신비주의는 현실 바깥으로의 도피’라고 설파하며 삶의 편을 든,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교주 소태산의 행장은 종교로서나 사상으로서나 원불교에 대한 호감과 흥미를 자아낸다. 그것은 영적 공동체로서 원불교가 지닌 내재적 매력에만이 아니라, 단순한 입담을 넘어서는 김형수씨의 산문정신에 힘입은 바 크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소태산이 꿈꾸었고 김형수씨가 기원하는 ‘후천개벽’은 쉬이 올 것 같지 않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나? 이인휘씨의 소설집 『폐허를 보다』에 실린 소설들의 등장인물들도 자주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인휘씨가 만들어낸 캐릭터들은 현실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실존인물들과 닮은 데가 많아, 이 책이 『소태산 평전』 이상의 논픽션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준다. 그러나 그 작품들이 픽션인 것은 엄연하다. 작가는 동시대인들의 실제 캐릭터를 등장인물들에게 나누어주거나 모아줌으로써, 자신이 살아온 시대와 자신이 교유한 인물들을 핍진하게 그려보려 한 듯하다. 우리에게는 이제 프롤레타리아가 보편계급이라는 믿음도, 역사가 진보한다는 믿음도, 혁명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믿음도 없다. 그러니, 『폐허를 보다』에 실린 「공장의 불빛」이나 「시인, 강이산」을 읽으면서 불현듯 “아아, 무정!”을 되뇌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 많던 혁명가들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새로운 사회를 향한 희망(의 전사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인휘씨의 소설들은 노동자나 노동운동가 들을 포함한 ‘진보의 사람들’이 고귀하면서도 비천하다는 것을 솜씨 좋게 드러낸다. 그 작품들은 이름없는 공장노동자들이나 ‘가장자리 인간’들의 ‘평전’이다. 선한 의지가 늘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아니, 선한 의지라고 여겨지는 것 깊은 속에는 흔히 이기심과 위선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강한 듯 약하고, 선한 듯 악한 것이 인간이다. 이인휘씨의 소설들이 주는 감동은 그런 ‘노동하는 인간’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1980년대와 90년대 초를 풍미했던 노동소설들과 『폐허를 보다』의 소설들을 구별하는 점일 것이다. 시간만큼 힘센 것이 자본이다. 그리고 그 자본에 맞서는 투사들은 늘 선하고 강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그러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나? 세월호참사는 우리에게 강력한 윤리적 계고가 될 수 있을까? 후천개벽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축복처럼 오는 것일까? 노동자들은 언젠가 자본으로부터, 궁극적으로는 노동 그 자체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인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세 책 모두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의 역할은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묻는 것이다. 뽑힌 분들에게 축하의 말씀을 건넨다.

 

 

 

수상소감

 

다시 세상 밖으로

 

 

이인휘 李仁徽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7년 『녹두꽃』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활화산』(전2권) 『문 밖의 사람들』 『그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전2권) 『내 생의 적들』 『날개 달린 물고기』 등이 있다.

 

 

어느날 창비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후보로 올라와 있던 만해문학상 본상을 수상하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운동하러 나간 아내에게 당선됐다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는 온통 감동의 물결로 일렁였습니다. 운동에서 돌아온 아내가 뜨겁게 안아주더군요.

수상의 기쁨을 돌려줘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입니다. 만해 한용운 선사를 비롯해 박영진, 박영근, 이용석, 이해민 등등이지요. 그들은 마치 나를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던 것처럼 여겨집니다. 결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그런 사람들이지요.

또다른 분들은 공장에서 만난 이들입니다. 합판공장 노동자들과 호떡공장 아주머니들이 내게 소설을 쓰라고 몸으로 소리쳤습니다. 나는 칠년 동안 아내의 병을 고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놨습니다. 소설쓰기도 사회운동도 중단하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단절한 채 살아왔습니다. 아내의 병이 나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살자고 했는데, 공장 안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을 글로 옮기면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삼십년이 흘렀어도 달라지지 않은 노동자들의 삶이 나에게 글을 쓰라고 등을 떠밀었습니다. 한편을 쓰고 나면 다른 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글을 쓰기도 전에 눈물을 흘리면서 그 소리들을 붙들었습니다. 토요일 휴무도 없이 하루 열시간씩 노동을 하며 일년 동안 다섯편의 중단편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몸은 수척해져갔지만 글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글을 쓰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뜰 수 있었습니다.

「폐허를 보다」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작품입니다. 진정 내가 본 것이 폐허라면 그 폐허에 꽃을 심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요즘은 삼년 동안의 공장생활을 정리하고 글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심사위원들께 힘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그분들 도움으로 민중이라는 말을, 노동자라는 말을 더 멀리 전할 수 있게 됐습니다. 모든 소설에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현실 문제를 직시하라고 할 순 없지만 그 부분은 대단히 중요한 소설의 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돼 다행입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해야 할 것은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백성 중에서도 호민(豪民)이 있는데, 그들은 세상을 날카롭게 흘겨보고 있다가 어떤 기회가 오면 세상을 바꿔내는 힘을 발휘한다고 했습니다. 나도 호민이 되고 싶습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서 누려야 하는 자유와 평등의 길을 찾아가는 호민이 되고 싶습니다. 내가 쓰는 글 또한 그 길 위에서 그 뜻을 함께하는 데 이바지하고 싶습니다.

보이지 않게 늘 뒤에서 따뜻한 손길을 전해주었던 많은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수상소감

 

과거를 버리고 미래를 얻는 끝없는 사유

 

 

김형수 金炯洙

1959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1985년 『민중시2』에 시를, 1996년 『문학동네』에 소설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빗방울에 대한 추억』, 장편소설 『나의 트로트 시대』 『조드: 가난한 성자들』(전2권),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평론집 『반응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문익환 평전』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등이 있다.

 

 

얼마나 황송했는지 모릅니다. 상극 투쟁의 잔해들이 가득 찬 땅에서 기뻐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소태산의 제자들은 가을비 속에서 사드 반대투쟁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습니다. 제게는 오랫동안 결여돼 있던 일들입니다. 거룩한 것은 늘 멀리 있고 저는 언제나 저잣거리에 위치했습니다. 교회도, 절간도, 선영도, 당산나무도 없는 삶. 그래서 자주 ‘주막집 아들!’을 자처했는데, 공교롭게도 제가 쓴 두편의 전기는 모두 종교인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정신은 문익환의 사상적 반려(伴侶)였다.” “소태산은 후천개벽의 성자였다.” 하지만 기독교를 의식했다면 ‘문익환’을 알은척하지 못했을 것이고, 원불교를 알았다면 ‘소태산’을 붙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영성의 궁핍을 무릅쓰고 감히 ‘진리’가 아니라 ‘매혹’을 추적한 발걸음이 여기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스물두살 때의 상처 때문이었어요. 19805월 총소리를 들으며 경험한 ‘자아파괴’의 맥락 때문이었습니다. 거리의 나무들이 선 채로 죽어 있고,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백년의 세월이 지나가버리는 이승의 몰락에 대하여, 마을이 부서지자 들숨 날숨을 유지하기가 곤란했던 그 무거운 시간들에 대하여 인간은 왜 이토록 오래 연민해야 하는 겁니까? ‘의식화 과정’도 없이 사회변혁운동에 뛰어들고, 그 길에서 만난 사람과 서적과 공기에 따라 NL이니 PDND니 하는 노선들로 분화하고, ‘대동세상’을 위해 일하자고 만난 사람들도 천갈래 만갈래 갈라서고……

인간의 목숨은 빈부귀천을 떠나서 모두 출생과 이별, 적막과 소란, 사랑과 권태와 죽음의 심연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습니다. 한번 솟구친 샘물처럼 생명은 장애물을 넘지 못하면 어디로도 흐를 수 없습니다. 방향감을 놓치면 사랑도 상처도 길을 잃습니다. 절망도 위기도 헤치고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끝없이 사유해 과거를 버리고 미래를 얻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육신의 낱낱을 작동시킬 사상의 동력이자 ‘미래 표상’이자 ‘운명을 구성할 기준이 되는 틀’을 고민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저는 한국사회의 질곡 속에서 19세기를 엿보았고, 변혁운동의 낱말로써 후천개벽을 접했습니다. 황석영의 『장길산』 때문에 미륵신앙을, 송기숙의 『녹두장군』 때문에 동학의 농민들을, 김지하의 『남녘땅 뱃노래』 때문에 수운과 해월과 증산을 동냥할 수 있었던 사실에 얼마나 감사하는지 모릅니다. 캄캄한 후학들에게 한 세계를 보여주고, 죽고 병들고 떠나버린 자리에서 저는 “폭력은 현실 안으로의 도피요 신비주의는 현실 밖으로의 도피”라는 생각으로 소태산의 생애를 읽었습니다.

소태산은 만해 선생보다 열두살 어립니다. 강증산의 후학이었지만, 만해 정신으로 불교혁신운동을 하던 백학명 스님과 연합전선을 꾀하다 제도화된 절간을 박차고 거룩한 세속으로 출가(?)하여 불법연구회를 시작한 것이 오늘날 원불교에 이릅니다. 저는 감히 영광을 누릴 주제가 못되지만, 만해 선생은 독서대중에게 관측되지 않은 이 고요한 성자를 결코 지나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상에 만해가 소태산에게 전하는 뜻이 담겨 있음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상소감

 

말하기가 시작되는 자리, 존엄이 회복되는 자리

 

 

배경내(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은 한 사회의 구성원이자 한명의 인간으로서 세월호참사를 어떻게 겪어내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모였다. 흩어지는 고통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고자 세월호의 목소리들을 듣고 기록해왔다. 『금요일엔 돌아오렴: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을 함께 썼다. 수상작 『다시 봄이 올 거예요』에는 참사 당시 세월호에서 생존했고 올해 스무살이 된 단원고 학생 11명과 형제자매를 잃고 어린 나이에 유가족이 된 15명이 구술자이자 책의 공저자로 참여했다.

 

 

올봄의 끝자락, 『빅이슈』 판매노동자들과 인권교육을 통해 만난 적 있다. 최근까지 거리에서 노숙생활을 했던, 지금은 잡지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분들이었다. 거리에서 누군가 생수병을 건네도 걸 왜 줄까 생각하게 되고, 똑바로 살라는 느닷없는 충고를 들어야 하고, 내 돈 주고 밥 사 먹는 것도 눈치 보인다는 사람들. 모욕감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존엄한 존재임을 말해준다고, 말하기가 시작되는 자리가 존엄이 회복되는 자리라고,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 노숙인이 아니라 노숙인을 만든 사회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날. 나는 함께 나눈 이야기의 힘으로 그분들이 조금은 다른 향기와 기운을 품고 거리로 나설 수 있기를 바랐다.

그날의 대화는 작가기록단이 세월호의 10대들을 만나 기록하는 과정과 참 닮아 있다. 맹골수도 바다 밑 가라앉은 세월호에서 한분 한분의 시신 귀히 끌어안아 가족의 품으로 모시고 나온 잠수사들처럼, 우리는 생존학생과 희생학생의 형제자매가 차마 하지 못한 이야기를 힘껏 길어올려 세상에 전하고 싶었다. 애들이라서 차마 못 묻겠고, 애들이니까 이미 안다고 짐작되었기에, 제대로 된 물음 앞에 서본 적 없는 참사 속의 10대들. 그들은 각자 조금씩 다르게 참사가 빚어낸 시간을 겪어냈다. 재난이 들이닥친 삶의 위기 속에서도 어떤 이들은 더 나은 가치로 삶을 재건하고 타인의 삶을 맞잡는다. 세월호의 10대들 역시 깊은 슬픔과 뜨거운 분노와 날카로운 죄책감 속에서도 사랑과 통찰과 다짐을 쏘아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외려 듣는 우리가 위로받았고, 인간의 고통을 더 깊이 사유하게 되었으며, 세월호가 또다른 ‘세월호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시대의 진실을 비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10대들의 ‘곁’에 선다는 것의 의미를 뜨겁게 질문하게 되었다. 책과 독자들의 만남도 그러하리라 믿는다.

세월호는 왜 침몰했고 사람들은 왜 구조되지 못했는가. 참사 이후 두 해의 봄을 보내고서도 여전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잔혹사회에서, 지진이 이어지던 그날에도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 앞에 교실에 묶여야 했던 10대들의 세상에서, 여전히 말하기에 초대받지 못한 수많은 아픔들의 세상에서, 이 책의 수상 소식이 세월호의 10대들은 물론, 진실과 존엄의 문을 여느라 노독(路)에 지친 이들과 어떤 말하기와 또다른 말하기 사이에 노둣돌을 놓는 이들에게 햇살 한줌 되면 좋겠다. 구술자이자 책의 공저자인 세월호 생존학생과 형제자매가 전해온 바람이 더 많은 이들의 마음에 가닿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