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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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919일 회의를 열어 이 상의 의의를 한층 높이고 근래 우리 시의 성취를 성원하기 위해 상금을 1천만원에서 2천만으로 증액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제18회 백석문학상 예심위원으로 김해자 신용목 2인을, 본심위원으로 이시영 최정례 한기욱 3인을 위촉해 심사를 진행했다. 심사규정에 따라 최근 2년간 출간된 시집들을 예심에서 검토한 결과와 본심위원의 추천을 종합해 아래 총 9권의 시집이 본심에 올랐다.

김수우 『몰락경전』, 김용택 『울고 들어온 너에게』, 김혜순 『죽음의 자서전』, 문인수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박기영 『맹산식당 옻순비빔밥』, 손택수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이병초 『까치독사』, 이하석 『연애 』, 장철문 『비유의 바깥』(가나다순).

본심은 1029일에 진행되었는데, 대상작 모두가 저마다의 개성과 의미있는 시적 경지를 보여주어 한국시의 저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본심위원들은 우선 김혜순 문인수 박기영 손택수 장철문 시집으로 대상작을 압축해 논의를 거듭한 끝에 장철문 시집 『비유의 바깥』(문학동네 2016)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비유의 바깥』은 요란하지 않지만 치열하고 광범한 예술적 혁신의 고투로 시인의 시적 편력에서도 뚜렷한 진전을 보여주며 근래 한국시가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상회한다는 평가를 받아, 심사위원단은 이 시집을 제18회 백석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했다.

 

 

 

심사평

 

이시영(李時英)_ 시인

시를 시()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시가 아닌 경우가 있다. 장철문 시는 이 의외의 영역, 그의 말에 따르면 ‘비유의 바깥’에서 빛을 발한다. 이번 시집에서 심사자가 읽은 최고 명편 중의 하나인 「팔대산같이」를 예로 들면, 시인은 “주천 이백 요천에” 오는 팔대산 같은 눈을 그리고 있지만 정작 그가 닿고자 하는 곳은 “구룡계곡 눈발 너머/갈 수 없는/그곳”이다. 이 갈 수 없는 그곳으로 내리고자 하는 눈발 때문에 언어는 경계 밖으로 술렁이고 넘치면서 어떤 광활한 미지의 세계를 포함한다. 그리하여 그가

 

산동 번암 아영 인월에 눈이 온다

하동 산청까지

페이스북에 눈이 온다

 

할머니,

그쪽에도 영산홍 꽃눈 위에

미영꽃이 피나요

다른 하늘과도 카카오톡이 되나요

 

라고 표현했을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자욱이 덮으며 내리는 눈발이 다른 세상까지 열어젖히는 특이한 시적 경험을 하게 된다. 「강가 강에 와서」 「나무」 「소가 죽었다」 「수자타 마을에 가서」 「다시 바라나시에 와서」 등 ‘절대’에 직핍하고자 하는 그의 구도시편들과 「도토리는 싸가지가 없다」 「내가 사랑한 영토」 등 사물에 밀착하는 묘사시편들은 확실히 시인의 이제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시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들에서 작동하는 듯한 미적 완결성에 대한 집착은 ‘언어의 바깥’에서 득의의 시적 순간을 창출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와는 다른 형식주의자의 포즈를 연상케 한다. 좋은 시는 표현된 것 이상의 여백을 통해서 더 큰 울림을 창출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시의 바깥을 통해 문득 시에 이르고자 하는 시인 아닌가. 그러나 이 시집의 어떤 시들은 너무 잘 빚어져 있는 것이 오히려 흠이다.

장철문과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강렬한 체취를 보여주는 시집이 박기영의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이다. 표제작을 포함하여 「오소리술」 「꿩낚시」 「곰순대」 「길성이 조카님」 「빈대떡」 등을 통해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제는 재현 불가능한, 몰락한 한 시대의 구체적인 삶이다. 열네살 적부터 평안도 낭림산맥 포수였다가 한국전쟁 때 남으로 내려와 대도시 주변에 자신을 가의탁한 홀아비 사내의 육성이 내뿜는 것은 이 궁핍한 세계에 대한 거친 항의다.

 

“데데하게 두드리지 말라우.

이거이 무슨 화투장이가? 미련한 남쪽 아이들이래

전 부치며 두드리지. 우리는 아이 그랬음.”

 

송편 하나 빚지 않고

고향 하늘에 떠올랐던 숱한 달을 혼자 불러오며

담장 너머로 지글거리는 가슴의 신음소리 다스리던

어느 해 실향민의 추석.

 

「빈대떡」 부분

 

처럼 거의 모든 시편이 증언하는 것은 분단된 남쪽 피난살이의 강제된 가난과 이로 인한 울분이다. 백석의 시에서 보았듯 ‘육포탕’ ‘어육장’ ‘꿩냉면’ ‘청국장반대기’ 등 온갖 음식 이름이 망라된 이 시집은 ‘낭림산맥을 그리다’라는 1부 부제처럼 한 시대의 ‘풍속시’로서도 손색이 전혀 없는 북녘 지방의 원체험을 담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모든 시제가 과거이며, 불행히도 시적 화자(특히 1, 2부)가 오늘날 부재로서만 자신을 증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 있는 ‘화자 부재’의 이 회고시편들의 강력한 현재성을 존중하여 백석문학상에 천거했으나 두 심사자의 의견에 따라 이를 접는다. 그렇다고 장철문의 「오월 낙엽」 「고막이 터지는 때」 「벚꽃, 그리고 낮달」 「호박잎을 따러 와서」의 담담한 듯 의연한 성취를 폄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유의 바깥』의 뛰어난 시들은 근래 한국시가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더 상회했다.

 

최정례(崔正禮)_ 시인

예심을 통과한 아홉권의 시집을 살펴보면서 특히 김혜순 박기영 장철문의 시집을 주목하여 읽었다. 문학상 심사가 곤혹스러운 자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전반적으로 좋은 시집들을 집중적으로 읽게 되는, 드물게 누릴 수 있는 배움의 자리였다.

김혜순의 『죽음의 자서전』은 육체를 벗고 떠도는 죽은 자의 시선으로 공동체의 폭력을 바라보며 사투를 벌이는 시집이다. 우리가 언젠가는 만나야 할 궁극적이고 필연적인 순간들을 미리 감지하고 경험하게 하는 이 광기의 에너지, 혼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자의 목소리로 다른 차원의 말을 하는 시들을 읽으며 뭉클했다. 우리 시에 이런 형식의 목소리가 이토록 유장하게 펼쳐진 적이 있었던가 싶다. 매우 특별하고 귀한 시집이기는 하나 이미 문단에서 탄탄한 성취를 이룬 시인으로서 다양한 상찬을 받은 바 있기에 그동안 상대적으로 지지를 덜 받은 분들의 시집을 선정할 필요가 있다는 다른 심사위원들의 말에 공감하며 이 시집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박기영의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은 매우 각별한 소재들을 다루고 있는 시집이다. 한 가족사를 관통하는 불후의 맛과 경험들, 예를 들어 옻순비빔밥, 어육계장, 육포탕, 곰순대, 꿩냉면, 토끼반대기 등 시집 전반에 걸친 음식 이야기,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북녘 고향의 맛과 고향 북방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가득하다. 이러한 요소들은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에 살았던 우리의 시인 백석의 전통적 소재나 시어를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백석의 정서와 평북 방언이라는 토속적 언어가 모더니스트로서 1930년대 식민지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던 특별한 시적 전략이었다면, 박기영의 옻 혹은 맛의 전수에 관한 숭고한 수용적 태도는 오늘의 우리 시단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특별한 소재의 낯설게 하기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무게중심을 장철문의 시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장철문의 『비유의 바깥』은 그의 이전 시들에 비하여 폭이 넓어졌다. 고투 끝에 일상적인 의식 속에서 어떻게 비일상적인 통로를 발견해낼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거기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언뜻 보면 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라고 생각하는 그런 형식의 시들을 무심히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느 구절의 꺾어지는 골목 어귀에서 슬쩍 우리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다. 예상을 배반하고 그가 숨겨놓은 이 덫에 걸려 넘어지는 기분이 괜찮다. 유쾌하기까지 하다. 그만이 발견한 이 특별한 길은 섬세하고 이상하고 때로는 우리를 알지 못하는 구덩이로 끌고 가기도 한다. 심사위원 두분과 함께 기쁘게 장철문의 시집에 박수를 보낸다. 제18회 백석문학상의 수상을 축하한다.

 

한기욱(韓基煜)_ 문학평론가

본심에 오른 시집들을 검토하면서 우리 시의 끊임없는 쇄신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서정시가 새로운 시적 활력을 성취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지금, 이 시집들은 그 오래된 형식과 어법을 혁신하려는 몸부림 끝에 저마다 근사한 언어의 성채를 꽃피웠다. 그 가운데서도 박기영의 『맹산식당 옻순비빔밥』과 장철문의 『비유의 바깥』이 돋보였다.

박기영의 시들이 풍기는 북방의 기운은 남녘에선 맛볼 수 없는 음식의 고유한 향취와 분단 실향민의 애절한 그리움이 곳곳에 배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세련된 시 쓰기를 외면한 듯 짐짓 대수롭지 않게 서술된 말들이 실은 어육장처럼 진한 세상살이의 고통과 길들지 않은 감성 속에 절여졌다 나온 것이다. 투박한 듯 맛깔스러운 산문적 언어가 시적 언어보다 더 시적으로 느껴지는 때도 있다. 하나 매편 번번이 빛나는 서정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거니와, 진귀한 음식들을 하나하나 실감나게 묘사하는 일이 거듭될수록 그 새로움의 효과가 덜해지는 아쉬움이 남는다.

장철문의 『비유의 바깥』은 그 자신의 시적 편력에서도 뚜렷한 진전이요 한국 서정시의 역사에서도 괄목할 만한 이정표다. 이번 시들의 빼어남은 무엇보다 그 언어와 사유가 생물(生物)처럼 현재 우리 삶에 즉각 반응하고 마음의 작은 움직임까지 섬세하게 포착하는 데 있다. 시편들 대다수가 서정시의 형식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았음에도 해체와 난해로 달려가는 요즘의 실험적인 시들보다 오히려 더 참신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살아 있음’ 덕분일 것이다. 형식실험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요란하지 않지만 치열하고 광범한 예술적 혁신의 고투가 있었기에 서정시 내부로부터 새로움과 살아 있음을 벼려낸 것이리라. 그 결과 실로 다양한 사유와 감정, 감각과 어법, 구체적인 삶이 빼곡히 녹아 있는 한권의 시집을 만나게 되었다.

첫 시, 첫 구절 “아이는 새잎처럼 자라고, 나의 비유는 끝이 났다”에서 감지되듯 시집 전반부의 시들은 근본적인 깨달음에서 새로 출발하여 ‘비유의 바깥’에서 새 삶과 새 시를 구하는 수행자의 고백과 성찰처럼 읽힌다. 그러나 진지한 주제와 엄숙한 어조에 짓눌리지 않고 가끔은 장난기(「관입시작삼매」)가 삐져나오고 연인 간 싸움의 앙칼짐(「고막이 터지는 때」)도 감지된다. 중후반부 시들은 형식과 언어에서 더 자유롭다. 「콩나물을 다듬을 때」처럼 정통 서정시풍이 있는가 하면, 「희순이」 같은 단시와 「유홍준은 나쁜 놈이다」 「해모수의 다른 아들이 쓴 편지」 같은 이야기시도 그 나름으로는 실험이면서, 시인의 유년기 기억의 편린이나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애정 같은 응어리진 감정을 그 마음결대로 여실히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마지막 시 「창을 함께 닫다」에서는 딸아이와 함께 창밖으로 달을 내다보는 순수의 순간이 그만큼 맑고 군더더기 없는 언어로 포착된다. 오래된 서정시가 순정한 마음으로 미래를 향해 창을 여는 듯하다. 시인의 수상을 축하한다.

 

 

 

수상소감

 

이 모름을 밀고 가겠습니다

 

 

장철문 張喆文

1966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4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마른 풀잎의 노래」 외 6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바람의 서쪽』 『산벚나무의 저녁』 『무릎 위의 자작나무』가 있으며, 산문집 『진리의 꽃다발 법구경』 등이 있다.

 

 

첫 상입니다.

어깨에 손을 얹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제 시력의 시작인 창비, 이야기가 있는 문학상을 꽃피워온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눈에 띄는 시인도 아니고, 이렇다 할 질문을 낳은 시인도 아닙니다. 돌아보면, 그냥 고개를 쳐든 채 엎드려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서걱서걱 뜯어 삼킨 배 속의 말들을 끄집어내 우물거려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늘 뭘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습니다. 제 약력에 이마처럼 붙어다니는 “1994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마른 풀잎의 노래」 외 6편을 발표하”기 이전부터 늘 그랬습니다. 스무해를 넘기며 근근이 버텨왔지만, 쓰고 싶은 것은 바람처럼 건듯 불어오거나 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아서 포착하기 어려웠습니다. 어렵사리 끄집어낸 말들은 부실하거나 거칠기 짝이 없었습니다.

『비유의 바깥』에 엮인 시들 역시 그랬습니다. 시 같은 것을 만들어보려고 억지를 쓰거나 그저 중얼거려보았으나, 미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사()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바로 말하자면 『비유의 바깥』도 저에게는 지나간 것입니다만, 지금이라고 다를 바 없습니다. 지나간 것은 다시 불러올 수 없고, 오지 않은 것은 당겨 쓸 수 없습니다. 지금이 참 막막합니다.

모르겠습니다.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냥 이 모름을 밀고 가보겠습니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습니다. 써놓고 보면 늘 안심찮았고, 다음에 또 쓸 것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근근이 한권 엮고 나면 민망했고, 또 다음 시집을 낼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남의 시집처럼 『비유의 바깥』을 펼쳐보니, 가장 아쉬운 것이 이 모름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하고 어떻게든 시 같은 것을 만들어보려고 뻗대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을까, 바장이던 그 자리를 되짚어보겠습니다.

아전인수를 하나 해야겠습니다. 『비유의 바깥』을 대견히 보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서도, 거기서 한발 더 내디뎌봐, 지그시 어깨를 밀어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