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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제18회 창비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수 金樹
1981년 서울 출생. lahaine77@hanmail.net
젠가의 시간
아이는 거침없이 조각 하나를 거두어들였다. 탑 가장자리에 삐죽 튀어나온 나무토막이 목표물이었다. 영감에 의지한 무명 화가의 붓끝처럼, 아이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그가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는 시간, 겨우 그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의 차례는 매번 빠르게 다가왔다. 아이는 대담했고, 충동에 가깝다시피 팔을 뻗었고, 탑을 건드리는 바람 따위는 사소하게 여겼으며, 그런 무모함과 무심함이 이따금 절묘한 조화를 이뤄 아이의 일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승부사의 기질이랄지, 그저 운이 좋을 따름이랄지, 그는 쉽게 결론짓지 못했지만, 쉰네개의 나무토막으로 이루어진 어설픈 구조물을 전체적으로 관조하는 그와 다르게, 아이는 흘낏 보았고 생각에 잠기는 법이 없었다.
“할아버지 순서예요.”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들이 젠가를 시작한 지도 어느새 삼십분이 지났다. 젠가라는 게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직육면체의 나무토막을 세개씩 엇갈려 탑을 쌓은 뒤, 두 사람이 번갈아 제거한다. 맨 윗줄을 제외한 어느 나무토막을 건드려도 상관없다. 제한시간도 없다. 패자는 탑을 무너뜨린 자다.
첫판은 아이가 재채기하며 탑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그의 승리로 끝났다. 아이는 ‘무효’라고 우기지 않았다. 대신 턱에 힘을 꽉 주고 무서운 기세로 두번째, 세번째 판에서 연거푸 승리를 거머쥐었다. 아이는 만족을 몰랐다.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아이가 두 팔을 들며 환호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몇번이나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몇번이라도 져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뜨겁게 움켜쥔 주먹과 얇은 티셔츠 아래에 숨어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앙증맞은 배꼽, 승리의 만족감으로 가득한 눈빛에 그는 얼마나 오래 시선을 빼앗겼는지. 그 잔상이 머릿속에서 회오리치는 순간마다 그는 다짐했다. 게임에만 몰두해야 한다고.
그는 아래서부터 탑을 훑었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졌는가. 오른쪽, 아니면 왼쪽. 골격만 앙상하게 남은 탑의 구멍 너머로 아이의 부분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색 반바지. 허벅지에 얹은 자그마한 손. 아이는 초를 재듯 검지를 까딱거렸다. “빨리하세요.”
마침내 그의 거뭇거뭇하고 마른 오른손이 탑을 향해 다가갔다. 어느 조각이 안전하고 위험한지 더이상 판단할 수 없었다. 손끝이 나무토막을 건드리려는 찰나 낮은 중얼거림이 귀에 닿았다. 그를 불안으로 이끄는 예언 같은 한마디. “무너진다……”
그가 아이를 처음 만난 건 오월의 마지막 수요일이었다. 그날은 그의 예순다섯번째 생일이었다. 그는 아침밥을 거른 채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엑스레이와 MRI 촬영, 피 검사, 대장 내시경 등 각종 검사가 딸이 그에게 준 생일선물이었다.
작년 겨울, 그의 아내가 급성심근경색으로 수술 중에 죽자 딸은 노년의 질병에 관한 전문가가 되었다. 그때는 그도 그의 딸도 아내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다. 두시간 동안 닫혀 있어야 했던 수술실 문은 고작 삼십분 만에 열렸다. 고개 들어 수술팀의 표정을 살피지 않아도 그는 열린 문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후로 딸은 아침저녁마다 전화를 걸어 그의 건강상태를 체크했다. 아빠, 어지럼증은 있나요? 암기력은 요즘 어떠세요? 또 휴대폰 대신 TV 리모컨을 들고 나가셨나요? 기린, 치타, 물소, 제비, 고래. 순서대로 말씀해보세요. 딸은 뉴스에서 독거노인의 죽음을 접하고서는 그의 집 열쇠를 복사해갔다. 그는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건강 취조가 끝난 직후에 마음이 가장 편안했다. 베란다로 나가 딸이 금지한 인스턴트 커피를 홀짝이면 노년의 외로움은 손에 들린 종이컵만큼이나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때때로 그는 여덟살의 딸아이를 그리워했다. 당돌한 목소리로, 숙녀의 방에 들어올 때 신사는 노크를 하는 법이에요!라고 말하던.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고작 여덟살짜리에게 무슨 들키기 싫은 비밀이 있단 말인가. 지금은 딸이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예순다섯이나 먹은 노인에게 무슨 비밀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딸은 모든 걸 알아갔다. 그의 속옷 색깔과 식성을 꿰뚫었고, 이제는 그의 몸속, 간장과 췌장, 심장과 간, 핏줄에서 벌어지는 일들까지 속속들이 알고 싶어했다.
검사를 마치고 병원을 빠져나와 그는 빌딩이 늘어선 대로변을 걸었다. 비탈을 오르기 전에 습관적으로 길의 경사를 가늠한 뒤 숨을 내뱉었다. 반나절의 금식으로 위장은 텅 비어 있었고, 허기가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아무 식당에 들어가 배를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혀는 MRI실의 거대한 기계에 들어갔을 때부터 하나의 맛을 고집스레 요구했다. 그는 그 맛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육십이 넘으면 미각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어느 연구소의 발표를 그는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쓸데없는 연구였다. 어차피 나이가 저절로 확인시켜주는. 그것은 뇌가 아닌 혀에서 벌어지는 감각의 알츠하이머였다. 혀에 기쁨을 주지 못하는 음식이 늘어갔다. 그는 자신의 혀가 둔해지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 혀는 집요해지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이 감각도 곧 사라지리라는 걸 아는 것처럼.
내리막 끝에 쉴 만한 장소가 나왔다. 빌딩과 빌딩 사이에 낀 아담한 공원이었다. 구색을 갖추려는 듯 라일락 몇그루가 심겨 있었는데, 죽어가는 중인지 껍질과 잎사귀에 생기가 없었다. 바람이 불자 꽃송이가 맥없이 떨어졌다. 서로 마주 보는 두 벤치가 아니었더라면 길목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그늘이 드리운 벤치로 걸음을 옮겼다. 노란 블라우스에 반바지를 입은 여자아이가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그늘 밖으로 빠져나온 두 무릎에 햇살이 고르게 고여 있었다. 한껏 웅크린 자세 탓에 작고 마른 몸이 더 아담해 보였다. 뭉툭한 코끝과 살집이 남은 볼, 아홉살쯤 되었을까. 무언가 흥미로운 말을 건네서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그가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사이, 아이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자리를 떠났다. 가벼운 발걸음이 빌딩의 모퉁이로 사라진 뒤, 그는 옆에 놓인 연보라색 손가방을 발견했다. 아이가 두고 간 것이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망설이듯 가방을 품었다. 도둑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가방 속에는 동일한 크기의 나무토막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나무 표면을 어루만지며 갯수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
며칠 후 그는 검사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갔다가 다시 벤치를 찾았다. 기대에 보답하듯 라일락 그늘 아래에 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이는 구두코를 가지런히 맞추고 골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였다. 검은색 에나멜 구두. 그의 시선은 구두를 지나 하얀 스타킹이 꽉 조인 가느다란 종아리와 치마 밑으로 보이는 허벅지에 머물렀다. 맨살이 스타킹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하얬다. 이름이 뭐니? 그가 물었다. 알아서 뭐하시려고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넌 친절하지 않은 아이구나. 모르는 사람한테 왜 친절해야 하나요? 아이가 쏘아붙였는데도 그는 이상하게 짜증이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에게 줄 선물이 있단다. 가방을 본 아이의 표정이 우호적으로 변했다. 아이의 검은 눈동자는 잘 익은 열매 같았다. 그 속에 든 게 뭐니? 아이는 나무토막을 벤치에 흩어놓고 차곡차곡 탑을 만들어나갔다. 젠가 하실래요? 별로 어렵지 않아요. 아이가 말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 되지 않았니?”
“한 게임 정도는 더 할 수 있어요.”
아이는 귀밑에서 양 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을 귀찮다는 듯이 어깨 뒤로 넘겼다. 그가 단발머리로 자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자, 아이는 엄마의 취향이라 어쩔 수 없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둘 다 엄격한 보호자를 두고 있구나. 그의 말에 아이는 보호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의미가 명료한 단어임에도 아이가 물어본 순간 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여름이 오면 더 힘들겠죠?”
“뭐가?”
“짧게 자르고 싶어요. 남자애들처럼요.”
어떤 머리를 해도 잘 어울릴 거라고 그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농담을 던졌다. 나처럼 말이니? 아이는 웃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대신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땅바닥으로 시선을 피한 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직 어리잖아요. 할아버지처럼 대머리면 곤란해요.”
아이는 나무토막을 가지런히 모았다. 새로운 탑이 쌓여갔다. 이번에는 아이가 먼저였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아이는 차례를 잊지 않았다. 그는 작은 손가락 아래서 부드럽게 밀려나가는 나무토막을 바라보았다. 조각이 제거될 때마다 탑에 구멍이 늘어갔다. 그는 구멍 너머로 아이를 훔쳐봤다. 왠지 모르게 커튼 뒤에 숨은 관음증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모자를 쓰는 게 어때요?”
“모자?”
“저희 할아버지는 중절모를 쓰셨거든요.”
아이는 나무토막을 아랫입술에 지그시 대고 고개를 기울였다. 머리카락 한가닥이 뺨을 지나 콧잔등에 흘러내렸다. 아이는 나무토막 귀퉁이를 앞니로 꾹꾹 눌렀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그 모자를 저한테 물려주셨어요.”
그의 눈이 감겼다. 그는 라일락 향기가 감도는 복도에 서 있었다. 늘 보았던 초록색 방문이 복도 끝에서 그를 맞이했다. 손잡이를 돌리자 트램펄린에서 뛰노는 코끼리가 그려진 벽지가 보였다. 분홍색 이불은 침대에 단정히 정돈되어 있었고, 격자무늬 창에 햇살이 가득 밀려들었다. 수없이 머릿속으로 그려봤던 탓에 그가 아이의 방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늘 그 방에는 또 하나의 정물이 추가되었다. 중절모는 햇볕이 잘 드는 침대 머리맡에 올려져 있었다. 그는 모자를 얼굴 가까이 대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매일 밤 그 모자를 만지작거리는 아이를 상상하면서 둥근 챙을 쓰다듬었다.
탑의 구멍이 늘어갔다. 그와 아이 사이에는 침묵이 잦아졌다.
그는 삼십년 동안 교직에 몸담으며 여러 아이를 접했다. 그중에는 수다쟁이도 있었고, 또박또박 말대답을 즐기는 아이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아니요,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졸업할 때까지 이 세마디만 들려준 과묵한 꼬마도 있었다. 말이 많건 적건 아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적어도 어른만큼 침묵을 겁내지 않았다. 관심이 없는 화제에는 누구보다 무겁게 입을 닫을 줄 알았다. 그는 그 닫힌 입술의 부드러운 경계를 좋아했다.
“멍청이.” 아이가 입을 씰룩거렸다.
“방금 뭐라고 했니?”
“동희가 생각나서요. 우리는 피아노 학원에서 짝꿍이에요. 저는 요즘 걔를 울릴 만한 말을 공부하고 있어요.”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말을 좀 아세요?”
“나는 못된 말 쓰는 아이를 싫어한단다.” 그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아이는 검지의 거스러미를 물어뜯었다. 그는 자신의 말이 행여 꾸중으로 들렸을까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전에는 보지 못한 신선한 반응에 은밀한 즐거움을 느꼈다.
“너희는 거북이랑 붕어 사이구나. 수조에 그 둘을 같이 기르면 어떻게 될까?”
“수조?”
“어항 같은 거란다. 어항보다는 정교한. 공기 펌프도 있고 온도계도 있는. 결국은 붕어가 죽게 돼. 거북이 때문이란다. 붕어는 서서히 죽어가지. 왜 그럴까?”
“흐음.” 아이는 엇갈린 팔을 가슴에 붙였다.
“거북이가 붕어를 뜯어먹거든. 거북이는 소식가라 매일 조금씩 맛볼 뿐이지만, 그게 쌓이고 쌓이면 붕어가 죽을 만큼 치명적이 된단다. 그런데 붕어는 왜 그걸 모를까?”
교직에 있던 시절의 습관처럼 그는 말끝에 ‘왜’를 붙여가며 대화를 이었다.
“붕어는 아픔을 못 느껴. 통점이라는 게 없거든.”
“할아버지가 붕어 마음을 알아요?”
“아니.”
“근데 왜 아는 척해요.” 아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감정을 숨기지 않는 어린아이 특유의 노골적인 적대감이 묻어났다. “나는 그 말 안 믿어요. 텔레비전에 나온 내용이라 해도요.”
“너도 봤구나. 그런데 왜 말을 안했니.”
그는 아이와 같은 프로그램을 봤다는 뜻밖의 사실이 기뻤다.
“할아버지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아서요.”
그때, 그의 바지 주머니에 든 휴대폰이 울렸다. 딸이었다. 단조로운 기계음은 고요한 수면에 툭 떨어진 조약돌 같았다. 그는 양해를 구하듯 아이와 눈을 맞췄다. 아이는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휴대폰을 귀에 댄 채 그는 한동안 딸의 목소리를 묵묵히 들었다. 얼굴에는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시간을 방해받을 때 드러나는 불쾌감이 희미하게 번져갔다. 그는 두통을 느끼듯 미간을 찌푸렸다. “가지. 피망. 양파. 오이. 부추.” 그는 다섯 단어를 서둘러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게 뭐예요?” 아이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물었다.
“노인성 치매를 진단하는 테스트란다.”
상대방이 말한 다섯 단어를 틀린 순서 없이 되풀이하는 건, 딸이 그에게 알려준 간단한 치매 테스트였다. 어제 그는 다섯마리의 동물을 열거했다. 그제는 다섯 나라의 수도였다. 딸은 그가 알지도 못하는 다섯개의 이름을 외워보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그런 것까지 아이에게 말하진 않았다.
“치매?”
“기억을 잃어버리는 거야.”
“제가 저번에 이 가방을 잃어버렸던 것처럼요?” 아이는 마치 수수께끼의 답을 찾은 양 눈을 크게 뜨고, 젠가를 보관하는 가방을 들어 보였다.
그는 비슷하지만 다르다고 설명해주고 싶었다. 가방과 달리 기억은 되찾을 수 없을 터였다. 바람이 불어와 엷은 풀잎색 치마가 부풀어올랐다. 나뭇가지가 드리운 그늘이 아이의 얼굴 위에서 어지러이 움직였다.
공원에서 집까지는 지하철로 두 정거장이었다. 그의 걸음으로 삼십분쯤 걸리는 거리였지만, 아이와 주고받은 말과 표정을 생각하다보면 아이와 함께 걷는 기분이 들어 그는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하곤 했다. 그의 생각은 아이가 그날그날 무심코 던진 말들에 머물렀다. 형식과 예의를 따지지 않는 어린아이와의 대화는 동년배들에게서 느끼지 못한 풍부한 즐거움을 줬다.
그는 돌담길을 따라 노인들이 좌판을 벌인 시장으로 들어섰다. 계절과 상관없이 무더기로 쌓인 옷, 구식 축음기, 옛 가수들의 레코드판. 좌판이 벌어진 반대편은 단층 건물이 늘어섰는데, 마찬가지로 낡고 오래된 물건을 취급했다. 그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세월을 건너뛴 듯한 저 물건들이 어디서 출몰하는지 궁금했다.
청바지를 입은 이십대 커플이 일본 춘화 앞에서 번갈아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로 서로를 찍었다. 수염을 기른 사무라이가 게이샤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그림이었다. 갑옷과 기모노는 다다미 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막 떨어뜨린 듯 칼집에서 반쯤 빠져나온 칼이 시퍼런 날을 드러내며 긴박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지만, 그는 무사의 손이 생각보다 곱게 그려져서 그림에 현실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입 과자를 파는 가게로 갔다. 계산대에서 부채질하던 주인이 단골손님을 알아보고는 손인사를 했다. 그는 딸기맛 사탕과 마시멜로를 산 뒤, 한동안 진열대를 둘러보다가 초콜릿을 더 사고서야 만족스러운 듯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고향 친구가 운영하는 문방구로 들어갔다. 사다리에 오른 최씨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잘 왔네. 박스에 든 것 좀 건네주게.”
철제 책상에 커다란 박스가 놓여 있었다. 오늘이 그날임을 눈치챈 그는 괜한 발걸음을 했다며 가벼운 후회를 했다.
그는 최씨의 말을 무시한 채 진열대를 훑었다.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장난감은 매대 중간에 진열되어 있었다. 조립식 로봇과 인형, 퍼즐. 물건은 모두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으나 최씨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부수적으로 운영하는 문방구였다. 본업은 따로 있었다.
한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선글라스를 낀 육십대 남자였다. 남자는 괜스레 헛기침하고서 점잔 빼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새로운 거 없나?”
“몇년 산을 원해?” 최씨가 되물었다.
“24년 산으로. 입맛이 영 바뀌지 않는구먼.”
최씨가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이러한 대화를 처음 목격했을 때만 해도 그는 최씨가 양주를 파는 줄 알았다.
“구하느라 애 좀 먹었어. 희귀본이야. 카피도 몇번 안해서 화질이 좋아.”
최씨가 라벨 없는 비디오테이프를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는 돈을 낸 뒤 검은 비닐봉지에 테이프를 넣고 가게를 빠져나갔다.
처음에는 심심풀이라고 했다. 한자리에서 삼십년째 문방구를 운영해온 최씨는 우연히 근방의 노인들에게 갖고 있던 포르노테이프를 처분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본업이 되었다. 최씨의 고객들이 대부분 그와 비슷한 또래라는 걸 들었을 때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는 오랫동안 성(性)을 처리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처리해야 할 만큼 곤란한 적도 없었다. 아내와의 관계는 아내가 죽기 훨씬 전부터 침대에서 나누는 가벼운 접촉으로 그쳤다. 종종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시선을 빼앗긴 적은 있으나 그의 몸은 누군가의 손길을 조를 만큼 다급하지 않았다.
“저질 비디오는 씨가 마를 날이 없군.”
평소 최씨의 비밀 장사를 마땅찮게 여기던 그가 결국 한마디 쏘아붙였다. 정년을 채우고 은퇴했을지언정 그는 선생이었다. 재직 당시에 그는 선생이라는 직함을 그리 내세우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편을 놓은 뒤로는 한때 선생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주길 은근히 바랐다. 최씨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사다리 치우는 것이나 거들게.” 최씨는 사다리의 머리를, 그는 다리를 잡았다.
다음날 오후, 그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공원에 도착했다. 아이가 올 때까지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는 근처 일식집으로 갔다. 앞치마에 얼룩을 묻힌 아르바이트생이 구석진 자리로 그를 안내했다.
그는 입구를 등지고 앉아 우동을 주문했다. 면발을 씹는 틈틈이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아르바이트생을 쳐다봤다. 그가 아는 얼굴 같았다. 아르바이트생은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테이블을 마른걸레로 닦았다. 그는 제자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안경에 낀 김 때문에 착각한 모양이었다.
문득 그는 오래전 아이들과 함께했던 야외수업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후문에서 조금 걸어가면 정상에 부드러운 잔디가 깔린 야트막한 언덕이 나왔다. 거기에는 세개의 수도가 있었는데, 서른명의 아이가 물통을 채우고 붓을 씻기에 충분했다. 아이들은 언제나 그의 주변을 행성처럼 동그랗게 둘러쌌다. 오늘은 무엇을 그려야 할지 기대하면서.
그는 언덕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에게 외치듯 말했다. 자, 뭐가 보이지? 아이들의 목소리도 따라 커졌다. 학교요, 장미요, 신호등, 풍뎅이. 악을 쓰며 소리치는 입들. 풍경화를 그리자. 하지만 조건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반드시 넣어 완성해야 한다. 어리둥절한 아이들의 표정. 선생님, 바람 같은 것이요? 그가 부드러운 미소로 끄덕이자, 아이들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마음에 드는 자리로 흩어졌다. 붓이며 빨레뜨며 각종 도구가 잔디에 깔렸다. 제자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붓을 적셨다. 절제를 모르는 어린 화가들의 붓끝이 도화지를 휩쓸었다. 그는 풍경에서 아이들이 저마다의 빈 공간을 발견하길 바랐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저곳에 존재했으면 하는 무언가.
미술에 재능을 가진 한 제자는 졸업하고도 매년 스승의 날에 학교로 그를 찾아왔다. 이곳은 변한 게 없네요. 제자는 한결같은 첫인사로 말을 띄웠다. 가죽이 닳은 소파에 마주 앉아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는 제자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첫사랑에서 대학 입시, 그림을 포기하고 흥미 없는 전공을 택한 것에 대한 후회, 취직, 결혼 생활에 관한 사소한 불평으로 바뀌었다. 제자를 배웅하고 그가 교무실로 돌아가면 동료 선생들은 부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어엿한 성인이 된 한 여성을 보며 제자의 성장에서 기쁨보다 슬픔을 느꼈다. 제자의 몸에서 풍기던 성숙의 냄새가 기억에 스며들어 어리고 풋풋한 제자의 향기를 지워버리는 듯했다.
그가 은퇴하던 해에 제자는 선물을 들고 왔다. 커다란 캔버스였다. 교정을 배경으로 그의 옆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는 액자 귀퉁이에 꽂힌 엽서를 읽고서야 그림의 의미를 파악했다. 엽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저 풍경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리라고 하셨죠. 이제 학교에는 선생님이 계시지 않아요. 이곳에서 다시는 선생님을 볼 수 없겠죠. 선생님,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그날, 집으로 돌아와 그는 서재의 문을 걸어잠그고 오랫동안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앞으로 잃어버릴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풍경과 도화지를 번갈아 보다가 창작의 충동에 빠져들며 서서히 웅크리던 자그마한 몸집들. 눈부신 햇살에 타들어가던 살결. 그는 이따금 골몰한 제자의 어깨에 손짓으로 말을 걸었다. 아이들의 어깨는 해변에 앉아 움켜쥔 모래처럼 따뜻했고 땀으로 조금 축축했다. 그 시절 그의 심장은 손바닥 아래에 있었다. 아이들의 살이 닿은 곳에서 그의 맥박이 뛰었고, 심장은 몸속에서 어린 온기를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부유물이었다.
멀리 반가운 모습이 보이자 그의 걸음이 자연스레 빨라졌다. 아이는 오늘 군청색 반바지에 리본이 달린 하늘색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아이는 안녕하세요,라는 상투적인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가 빌딩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면 아이는 팔을 높이 흔들었다. 때로는 몸을 숨겼다가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나 그를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가끔은 그가 아이의 장난을 따라 했다. 인사법 때문일까. 그는 아이와 더욱 친밀해지는 걸 느꼈다.
그는 들고 온 검은 봉지를 건넸다. 아이는 봉지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마시멜로를 꺼내 제일 먼저 맛봤다. 봉지 속에는 두번째 선택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초콜릿과 캐러멜도 있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과자 종류를 알아가는 건 그에게 작은 기쁨이었다.
아이는 입을 우물거리며 가방을 열어 나무토막을 꺼냈다. 탑을 쌓던 도중 그는 아이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걸 발견했다.
“신발은 어디로 갔니?”
“뺏겼어요.”
그는 동희라는 아이가 신발을 빼앗아갔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언짢은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보로통하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마시멜로를 꺼내 먹었다. 그러고는 피아노 학원에 가지 않는 이유와 동희가 학원에서 어떻게 괴롭히고 신발은 어떻게 빼앗았는지를 설명했다. 이야기에는 빈틈이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 말에서 동희라는 아이의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찾아온 매혹이 얼마나 명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또 그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행동으로 이어지는지를.
그는 골동품 시장 근처에 있는 마트를 떠올리고는 신발을 사러 가자고 말했다.
“젠가는요?”
“다른 곳에서도 둘 수 있단다.”
기억대로 사거리에 작은 마트가 있었다. 그는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식료품 코너를 지나 매장 구석의 잡화 코너로 갔다. 상품을 추천하는 점원은 따로 없었다. 아이는 옷과 어울리는 신발을 쉽게 고르지 못했다. 운동화는 겨우 세 종류였고, 구두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실망한 표정을 감추려 노력했다. 아이의 배려심 때문에 그는 더욱 미안해졌다. 결국 보라색 끈이 달린 운동화가 당첨됐다. 아이가 두번째로 좋아하는 색이었다.
그는 마트 입구의 벤치로 아이를 데려갔다. 벽에 붙은 금연이라는 스티커가 무색하게 바닥은 담배꽁초로 지저분했다. 아이는 벤치에 앉아 슬리퍼를 벗었다. 그는 무심결에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아 양말의 비닐 포장을 뜯었다. 아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다섯살 때부터 양치도 혼자서 하고 신발도 혼자 신었는데요.” 그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해도 자신의 행동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낯선 풍경을 앞에 두고 어떻게 그릴지 몰라 그저 붓을 꽉 쥐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은 뒤 “땅바닥이 더러워서……”라고 얼버무렸다. 곧 아이는 별생각 없이 이런 상황이 재미있는 듯 발가락을 꼬물거렸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조아리듯 자세를 낮췄다. 양손에 알맞게 담긴 앙증맞은 두 발은 막 물가에서 건진 물고기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발꿈치마저 부드러웠다. 실수로 손을 놓아버리면 팔딱거리며 물속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뼈마디가 도드라진 발등을 움켜쥐고 양말을 신겼다. 하지만 양말을 다 신기자 다시 벗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 순간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아이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아이는 새 신발이 만족스러운 듯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더니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쌌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저를 무척 예뻐해주셨어요.”
유모차를 끄는 젊은 여자가 힐끗 바라보며 지나갔다. 그는 이곳이 트였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몸을 풀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젠가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저를 초대하시는 건가요?”
아이는 선뜻 제안을 받아들였다. 집으로 가는 길에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졸랐다. 그는 편의점에 들러 기쁜 마음으로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아이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더니 그에게도 권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바라볼까봐 그는 호의를 거절했다. 사실 이상할 건 없었다. 사람들은 사이좋은 할아버지와 손녀라고 생각할 터였다. 그럼에도 그는 걸어가는 내내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에 흥미를 끄는 것이 없으면 아이는 곧잘 “아직 멀었어요?”라고 물었다. 그는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쉽게 마음을 돌리는지 알고 있었기에, 금방 도착한다고 달래면서도 아이가 집으로 돌아간다고 변덕을 부릴까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익숙한 돌담길이 나타나자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그는 이곳의 골동품들이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길 바랐다. 하지만 아이는 골목 끝에 다다르도록 아이스크림에만 관심을 가질 뿐 주변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별안간 아이가 걸음을 멈췄다. “아.” 짧고 맑은 탄성이 자그마한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아이 앞에는 수염을 기른 무사와 머리를 틀어올린 나신의 여자가 있었다. 그가 자주 보았던 그 춘화였다. 아이는 아이스크림의 막대를 입에 문 채 그림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흥밋거리를 발견한 듯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아이와 같은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결코 공존해서는 안되는 두 세계가 혼돈으로 엉킨 듯했다.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황급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아이는 그림이 신기한지 자꾸 고개를 돌렸다. 횡단보도 앞에서 그는 아이를 왜 초대했는지 돌이켜 생각했다. 그가 사는 빌라까지는 멀지 않았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주택가가 밀집한 저 골목길로 들어서면 그의 보금자리가 나올 터였다.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여기에서라니. 무엇을 여기에서 멈춘다는 말인가. 숨은 의미는 그를 두렵게 했다. 그는 여기까지라고 선을 그어버림으로써 여기가 아닌 저기에 그가 부정할 수 없는 강렬하고 불편한 그것이 존재한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그와 아이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는 아이를 인도 가장자리의 은행나무 옆으로 데려갔다. 그는 무릎을 꿇고 가늘고 연약해 보이는 양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는 조금 전 걸어왔던 길이 기억나느냐고 물었다.
“왜요?”
“이젠 젠가를 두지 못할 것 같구나.”
그는 아이의 얼굴이 놀람과 실망, 의문과 슬픔으로 번지는 것을 보았다. 아이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아이가 자신을 좋아하고, 또 자신에게서 죽은 할아버지를 종종 마주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이의 입장에서 이 갑작스러운 통보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한순간 아이의 입술이 무언가를 말했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한 게임만 더 해요, 할아버지. 마지막으로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아이스크림 막대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뒤돌아섰다. 그는 사라져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걷다가 시장 끝으로 힘껏 뛰어갔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벽에 달린 선풍기의 바람이 문방구 안을 고루 훑었다. 가게 문 너머로 보이는 거리는 환했다. 초여름의 햇살이 문턱에 걸려 있었다.
“이 아가씨도 지금쯤 할망구가 되었겠구먼.”
오래된 도색잡지를 들춰보던 최씨가 말했다. 최씨의 손에 쥐어진 캔커피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누드모델의 가슴 위로 툭 떨어졌다.
한동안 그는 벤치를 찾지 않았다. 발길이 공원으로 향할까 두려워 계절이 바뀌는 동안 외출마저 자제했다. 수많은 상념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면서 무의미한 시간들을 채웠다. 아이는 요즘도 벤치에 있을까. 게임할 상대도 없이 쓸쓸해하고 있을까. 또 신발을 빼앗겼을까. 그는 아이가 자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살아오면서 타인으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았을 때,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라고 자문했던 것처럼.
어느날, 그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벤치를 찾아갔다. 멀리서 바라보는 정도는 괜찮을 듯했다. 공원은 공사 중이었다. 깨진 보도블록을 교체하느라 한때 젠가로 시간을 보내던 자리는 철거되어 있었다.
그는 아이가 들고 다니던 피아노 학원의 가방을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공원을 중심으로 길을 헤매며 빌딩에 내걸린 간판들을 살폈다. 수많은 간판 중에서 낯익은 이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병원 후문과 인접한 빌딩에 ‘파랑새 피아노 학원’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그가 찾던 이름 같았다. 그는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가 따뜻한 녹차를 주문하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많은 아이가 학원을 들락거렸지만 젠가를 두던 아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학원을 착각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그는 매일 그 커피숍 창가 자리로 갔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여름이 오자 아이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졌다. 희고 건강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커피숍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그의 눈앞에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그는 점차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그 아이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는 저 무리 속으로 막연히 다가가고 싶었다. 아이들이 자신을 향해 장난을 걸어주길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어깨에 손을 얹을 수 있으리라. 어느 친절한 동네 할아버지처럼. 머리를 쓰다듬을 수도 있겠지. 다정한 말을 건네면서. 욕망은 그에게 점점 더 강렬한 것을 요구했다. 그는 아이들의 예측불가능한 몸짓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상상을 했다.
“이보게. 나도 오늘은 그걸 사볼까 하는데.”
“뭘 말인가?” 최씨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딴청을 피웠다.
“자네가 다락방에 모셔두는.”
“그거? 샌님인 줄 알았는데.” 잡지를 덮고 최씨가 공범자에게 보낼 법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 취향은 뭔가?”
“어렸으면 좋겠어.”
“어린 여자 싫어하는 남자도 있나?”
그는 진열대 앞에 섰다. 장난감을 차례로 훑다가 박스를 하나 골랐다. 그의 손바닥이 박스 표면을 훑고 지나가자 먼지에 가려졌던 글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한 이정도……”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가리켰다. 어린이 퍼즐 명화. 8~10세용.
최씨의 얼굴에는 딱딱한 미소가, 약간의 차가운 경멸에 섞여 번져나갔다. 그가 종종 최씨에게 짓던 그 표정이었다. 최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잠시 있다가 선풍기의 전원을 끄고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는 뺨을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턱에 맺히는 것을 느꼈다.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주인이 빠져나간 가게에 그대로 서 있었다. 모든 힘이 고갈된 느낌이었다. 가게는 후덥지근한 열기로 가득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싱크대의 수돗물 소리,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일상의 소음이 그를 깨웠다. 해 질 무렵의 불그스름한 빛이 방에 고루 퍼져 있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부엌 싱크대에서 설거지하는 딸의 뒷모습이 보였다.
“일어나셨어요?”
그가 잠든 사이에 딸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는지도 몰랐다. 딸이 그를 보더니 작게 웃었다. 딸의 웃는 모습은 아내와 많이 닮아 있었다.
그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비었던 층마다 반찬통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는 물을 꺼내 마셨다. 딸이 마지막 그릇을 헹구고 고무장갑을 벗었다.
딸은 그가 예상했던 질문을 꺼냈다. “아빠,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 잠든 모습이 지쳐 보여서요.”
그는 평소처럼 딸을 안심시키기 위해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딸은 그릇을 꺼내려고 찬장 문을 열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예요?”
딸은 찬장에서 과자 봉지를 꺼냈다. 아이에게 주려고 돌담길 시장에서 하나둘 사두었던 게 어느새 찬장 한쪽을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아직도 단 거 좋아하세요? 이런 거 드시지 마세요.”
식탁에 콩나물무침과 고사리, 애호박전이 자리를 잡아갔다. 딸은 마지막으로 밥과 된장국을 올린 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숟가락으로 국을 떠 입에 가져갔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그는 언젠가 아이에게 탑을 무너뜨리지 않는 비결을 물은 적이 있다. 아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겁내지 마세요. 어차피 이 게임은 무너지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요.
“무너진 다음에는……” 그의 입술이 들썩였다.
“네?”
딸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그의 손에 들린 숟가락이 기울어지고, 찌개 국물이 식탁 유리에 번졌다.
“아빠, 안색이 창백해요.”
딸이 자리를 옮겨 그의 두 손을 잡았다. 창으로 비쳐든 불그스름한 빛은 색을 바꾸어 부엌 바닥에 서서히 어둠을 깔았다. 그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지듯 어둠이 번져나갔다.
“불을 켜고 올게요.”
그는 식탁을 떠나려는 딸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 딸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는 딸의 얼굴에서 불안을 보았다. 이 순간 어떤 말이라도 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자기 안에서 어떤 말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는 고개를 숙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거실 창으로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활기로 가득한 그 목소리들은 거리에 남은 약간의 빛과 함께 곧 사라져버릴 것이다.
야외수업이 끝나면 그는 언제나 아이들이 먼저 언덕을 내려가게 한 후, 마지막으로 뒤따라갔다. 미술도구가 담긴 물통을 앞뒤로 흔들며 도화지를 옆구리에 낀 채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사랑스러운 무리를 바라볼 때마다 벅찬 감동이 차올랐다. 그는 되도록 오랫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아이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수시로 들춰보던 언덕의 풍경은 그가 살아오면서 슬픔에 굴복하거나 외로움에 빠질 때 빛이 되어준 유일한 기쁨이었다. 그런데 이 기쁨이 지금은 그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풍경은 이제 쾌감과 고통을 동반했고, 그가 일생동안 조심스럽게 쌓아온 탑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한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노년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수치로 물들이지 않기 위해서 그는 제거해야 할 조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끝까지 붙들고 싶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유일한 조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