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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기획 | 표절 문제와 문학권력
한국문학의 ‘주니어 시스템’을 넘어
김대성 金大成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무한한 하나: 노동자들의 문서고」 「비평가의 시민권」 등이 있음. smellsound@empas.com
* 이 글은 지난 7월 15일 문화연대와 인문학협동조합이 공동으로 주최한 토론회 ‘신경숙 표절 사태와 한국문학의 미래’ 중 정문순의 「신경숙 표절 글쓰기, 누가 멍석을 깔아주었나」에 대해 쓴 토론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당시의 취지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고치고 더했다. 토론회의 발표 및 토론 전문은 『문화/과학』 뉴스레터 10호(http://cultural.jinbo.net/?p=1605)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평의 진지(陣地)
‘신경숙 표절 논란’이라는 ‘핫이슈’에 목소리를 더하기보다 이슈를 체감하는 발화 위치의 상이함에서 연유하는, 사태에 대한 온도 차이를 드러내며 다른 논의구조를 제안하는 데 집중해보고 싶다. ‘문학소녀’급 소설가를 향해 그간 한국문단이 행한 구애의 민낯을 밝히고 ‘상습적인 표절’이 신경숙 글쓰기에 내재한 태생적 한계라고 단호하게 규정하는 정문순의 발표문을 읽고 해당 논의에 대한 동의 여부에 앞서 ‘이 정도의 강도로 한 작가와 대면한 경험이 있는가’라는 자문을 하게 된다. 비평이 곧 매서운 비판인 것만은 아니겠지만 언제라도 싸움꾼(논객)의 자세로 전환 가능하다는 것이 ‘위험한 자리에 서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표지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비평행위가 가까스로 유지될 수 있는 기본 태도라 바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신경숙 표절 사태와 한국문학의 미래’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얼마간 당혹스러웠던 것은 등단 이후 단 한번도 ‘논쟁의 현장’에 참여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간 적지 않은 글을 써왔다는 것은 내가 가진 입장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도 발언할 수 있는 비교적 안전한 자리에 머물러왔음을 가리키는 표지가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는가. 써온 글의 이력만으로는 ‘긴박하지 않은 비평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형편인 터라 ‘신경숙’이라는 익숙한 이름에 관해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신경숙 사태’라는 생소한 상황 속에서 긴박하게 무언가를 (걸고) 말해야 하는 일은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다. 논쟁의 현장이 전쟁터와 다르지 않은 것은 죽고 죽이는 각축장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무엇을 지킬 것인가, 그러기 위해 무엇과 싸울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서만 비평의 진지가 성립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도리 없이 자문하게 된다. 신경숙 표절 논란에 대한 내 비평의 진지는 어디인가. 이 토론을 나는 이 물음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선고의 독점, 선고의 반복
내가 ‘신경숙 사태’에 대한 세간의 이례적이고 유별난 관심에 시큰둥해했던 것은 진작 터질 것이 기어이 터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태에 관한 비판의 목소리에서 어떤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과감하게 말해본다면 나는 이 논란에 대한 일련의 비판적인 목소리들이 동어반복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특히나 한국문학의 종말이나 해체에 관한 자성의 목소리는 십수년 전의 ‘문학권력’ 논쟁과 너무나 유사해서 그 반복이 오히려 더 놀라울 정도였다. 아울러 한국문학의 종말이나 끝장을 서둘러 선고해버리는 목소리에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위화감은 한국문학에 대한 순정에 가까운 믿음에서 비롯되는 거부감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선고를 내리는 발화자들의 위치가 독점적이라는 데서 연유한다. 누구나 선고를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발화를 할 수 있는 자리의 주인이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아무나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경숙 사태’를 둘러싼 기시감과 위화감 속에서 나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문학이 끝장나버렸다’는 전선 구축을 통해 소장 비평가(?)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대형 출판사와 유명 작가의 은밀한 결탁은 그야말로 추한 일이며 그 공모를 비평가들이 유려한 언어로 비호해왔다는 점은 졸렬하고 흉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거두절미하고 ‘한국문학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라고 앞다투어 ‘선고’하는 목소리에 대해서 몇마디 덧붙이고 싶다.
나는 ‘신경숙 사태’로 한국문학이 그야말로 끝장나버렸다든가 반대로 이 사태에 대한 자성을 통해 한국문학이 회복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 따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 사태를 더 많은 목소리와 다른 목소리가 출현할 수 있는 동력으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국문학 붕괴나 해체라는 말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끝났다고, 이미 끝장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끝내버려도 되는가. 망해버렸다고 선고해도 되는가. 한국문학에 대한 절망적인 선고가 고지되는 방식의 독점성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끝장났다’는 선고는 조금 더 힘겹게, 할 수 있는 만큼 애쓰며 ‘함께’ 결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어째서 사오십대 중진 비평가들에게 선고의 권한이 독점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그보다 그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문학의 끝장을 향해 내달릴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신경숙 사태가 2000년대 초반 문학권력 논쟁의 반복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반복되는 건 신경숙과 대형 문학출판사의 공모만이 아니다.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까지 독점적인 방식으로 반복될 때 비평은 정체되고 고립될 수밖에 없다. 아울러 그렇게 서둘러 끝장을 선고해버리면 다른 (후속) 비평가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뒤따라 그 선고에 동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침묵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신경숙 사태에 대한 비평가들의 침묵이 일률적이고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단 한번도 ‘선언의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거나 선고 또한 내려본 경험이 없는 이삼십대 비평가들의 침묵은 ‘침묵의 카르텔’에 동조해서라기보다는 ‘침묵을 강요하는 구조’에 억눌려 있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발화의 자리를 내어주지도 않으면서 서둘러 ‘왜 이삼십대 젊은 비평가들은 침묵하는가’라고 힐난하는 목소리 또한 침묵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구조적 장치로 기능한다. 신경숙 사태에 대한 소장 비평가들의 입장을 폄훼할 의도는 없다. 다만 문학권력 논쟁이 ‘왕년의’ 방식으로 반복될 때, 다시 말해 한때 날렸던 싸움꾼의 이력으로 ‘문학동네’의 골목대장 역할을 자처하게 될 때 ‘한국문학은 끝장나버렸다’는 그 선고가 ‘적’들과 다를 바 없는 독점적인 것일 수 있음을, 그런 이유로 의도와 달리 되레 ‘다른 목소리들’을 억압하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을 언급해두고 싶다. 나는 제도의 호명에 대한 응답 말고는 목소리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 또한 한국문학이라는 제도 속에 구성원으로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수동적인 침묵이 ‘한국문학의 보람’은 아니겠지만 그 또한 한국문학의 어떤 표정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단 한번도 자신의 영토를 가져본 경험이 없다는 것을 그저 제도 탓으로, 구조 탓으로 넘겨서도 안될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짝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해서도 안될 일이다. ‘신경숙 사태’에 왜 침묵하는가라는 힐난에 앞서 묻게 된다. 지금 이삼십대 비평가들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들이 머물고 있는 장소는 어디인가. 고쳐 묻자. 누가 이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가. 누가 이들을 환대하는가.
‘주니어 시스템’: 보이지 않는 유연한 배제 장치
문예지들이 젊은 비평가들을 선별해 지면을 할애하고 기획에 참여시키는 일을 거두절미하고 비판할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이른바 ‘주니어 시스템’으로 가동될 때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숱한 비평가들 중에 ‘주니어’로 ‘지목(차출)’된 이들은 더 넓은 필드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미 조직화된 구조에 소속되는 터라 한층 폐쇄된 영역에 놓이게 된다고 봐야 하며 그런 이유로 비평적 자율성 또한 경색될 수밖에 없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동세대 비평가들 중 비교우위의 자리에 서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동료 비평가들과의 낙차로 인해 문단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무언가를 함께 도모할 수 있는 정서적 공감대 형성이 어렵게 된다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한층 세밀하게 나뉘어 분리되고 있는 등급과 그로 인한 차등의 구조를 떠올려보라. 예컨대 이미 아카데미 안에서는 BK(Brain Korea)나 HK(Humanities Korea) 사업 참여에서부터 각종 장학금의 수혜 여부에 이르기까지 ‘내부 지위의 세분화 및 위계화’로 인해 대학원생으로서의 공통정서가 구성될 수 없는 형편에 있다. 마찬가지로 문단 내의 주니어 시스템 또한 사람을 키우고 보살피며 자리를 나누고 생산하는 구조라기보다 사람들을 분리하고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유연한’ 배제 장치에 가깝다.
‘내(우리) 사람’이라는 정서적으로 밀착된 관계망 속에서 맺게 되는 문단 선후배 관계는 겉으로는 의결권을 민주적으로 나눈 수평적인 양식처럼 보이지만 실은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의 구조에 가깝다고 말해도 좋다. 답은 윗세대 혹은 선배들이 정해두고 후배(후속세대)들은 그것을 찾아내거나 따르는 방법 외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대학원 내에서 지도교수와 제자가 맺는 일반적인 관계구조와 상당부분 닮아 있다. ‘선배’ 편집위원들이 대개가 어느 대학의 교수인 상황에서 젊은 비평가들 또한 대부분이 대학원 출신이어서 이들의 문단활동이나 편집회의 참여는 단순히 글을 기고하거나 잡지를 만드는 데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생계와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문예지를 만드는 인적 구성이 대학과 연계되어 있는 탓에 젊은 비평가들의 물질적인 삶의 조건, 바꿔 말해 ‘생사여탈권’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 또한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1) 열정을 다해 기획하고 필자를 발굴·추천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른바 문단인맥이라는 것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디 사람’ ‘누구 사람’의 표지를 가지게 되는 일이기도 한 탓에 사실상 활동범위가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인맥에 고착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것은 주니어 시스템을 이탈하거나 거부할 때 동료-선배 등과의 교류가 불가능한 상태에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정이 그러할 때 주니어 시스템 아래에서 자율적인 비평활동이 가능할 리 만무하다.
선택받은 ‘주니어’는 내부를 비판할 수 없으며 해당 단체나 집단의 논의구조에 반하는 의견을 개진하는 것도 어렵다. 대학 강의가 문서상으론 강사 초빙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는 정규직 교수가 ‘나눠주는 것’으로 관습화되어 있듯이 편집위원이라는 직책 또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잠시 ‘할당’되는 것에 가깝다(거의 모든 비정규직의 형편이 이와 다르지 않으니 문학판의 열악한 구조를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뒤늦게라도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선뜻 바깥으로 나가 독립을 선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곳의 편집위원이기 때문에, 누구의 사람이기 때문에, 어디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부터 배제되는 구조. 이러한 독점적이고 폐쇄적인 주니어 시스템 속에서 젊은 비평가들은 ‘부품’처럼 남김없이 활용되면서 거덜난다. 주니어 시스템은 오직 두가지의 길만을 허락하는 듯하다. 조로(早老)하거나 추방당하는 것. 주니어 시스템 아래에선 바깥을 상상하거나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반경을 구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동료를 가질 수 있는 구조까지 모짝 거덜난다는 것은 문단 시스템이 ‘다단계’ 구조와 닮아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다단계라는 규정이 과한 수사로 읽힐 수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이를 한국문학 시스템의 일반론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위치에서는 문단구조가 다단계와 다르지 않을 만큼 한 개인이 일구어놓은 세계를 완전히 거덜낼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해두고 싶다.2) 어떤 이들에게 ‘편집위원’이라는 직책은 ‘무기한 인턴’과 다르지 않은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낡고 오래된 반론이 주니어 시스템에 대해서도 반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체’가 있느냐는 물음 말이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실체를 말할 수 없다는 점이야말로 주니어 시스템이 은밀하고 내밀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다. 무엇보다 주니어 시스템의 실체 없음은 당사자들의 부인(否認) 속에서 더 공고해진다. ‘누가 주니어인가’라는 물음에 대부분은 ‘나는 주니어가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이 부정논법은 독립과 자립에 대한 자의식의 표현이라기보다 ‘아직’ 이너 써클(inner circle)은 아니라는 인정논리의 변주에 불과하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 주니어 시스템이 여전히 온건한 장치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주니어 시스템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출입증의 위력 또한 바로 이 ‘실체 없음의 구조’ 속에서 그 힘을 더해간다. 주니어 시스템에 대한 이같은 진술이 궤변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크고 작은 문학출판사에서 내고 있는 문예지로부터 호명된 이들, 아니 ‘차출’된 이들과 긴밀한 교류가 있는 것도 아니니 증언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내부적인 관계망의 바깥에 서 있다는 것이 외려 암묵적인 동의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은밀한 공모에 대한 비판적이고 생산적인 발화장소를 구축할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나는 증언과 기록이야말로 다른 발화를 가능케 하는 장소에 또다른 누군가가 들어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환대의 기초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궁극적인 목적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3)
백년의 건축, 백년의 해체
모든 것을 구조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 충분한가,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이러한 태도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제기 또한 정당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무릅쓰고 ‘주니어 시스템’이라는 선정적일 수 있는 프레임을 도입한 것은 이 문제를 개별자들의 선택이나 판단, 혹은 개인적 윤리성에 대한 논의가 아닌 한국문학판의 공통 문제로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다. 만약 한국문학의 해체를 이야기해야 한다면 나는 우선 사적·공적 관계망을 독점함으로써 개별자들을 엿장수 마음대로, 입맛 따라 선별하며 거덜내고 있는 문단의 다단계적 구조의 해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연한 배제 장치인 ‘주니어 시스템’이 아닌 자생과 연대의 생태를 구축할 방안에 대한 논의가 적어도 종말과 죽음 선고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경숙 사태’ 속에서 내가 체감하는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삼십대 비평가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구조의 강압에 있다. 오늘의 한국문학판은 ‘다른 목소리’가 도착할 수 있는 영토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둘러 고지하는 죽음 선고로 시스템을 한번에 갈아엎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망치로 하나하나 함께 때려 부숴야 한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요구된다고 해도 부수면서 똑똑히 들여다보고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 백년 동안 지어야 하는 구조물이 있듯이 백년 동안 부숴야 하는 해체도 있어야 한다. 속속들이 만지고 확인해가며 해체할 때, 한땀 한땀 부수는 일 속에서 ‘다른 건축술’을 발견하고 또 배양할 영토(장소)가 마련될 수 있지 않겠는가. 각자의 망치를 들고 단절과 고립을 종용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를 하나하나 함께 해체해나갈 때 ‘침묵을 강요하는 오늘의 구조’(주니어 시스템)와 ‘논의를 묵살하는 어제의 구조’(2000년대 문학권력 논쟁)의 교류 또한 시작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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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단과 아카데미의 근친적인 공모구조야말로 가장 문제적인 사안이며 비판적인 논의가 필요한 부분임이 틀림없다. 다만 여기서는 지면 제약으로 자세히 다룰 수 없기에 다른 지면을 기약하고자 한다.
2) ‘다단계 구조’를 언급하면서 내가 염두에 두었던 작품은 김애란의 「서른」(『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이다. 한 개인이 사회 속에서 맺을 수 있는 가장 사소한 관계망까지 남김없이 파괴하고 거덜내버리는 참혹한 관계의 지옥도를 이처럼 처연하게 그려낸 작품도 드물다. 여기서 말하는 다단계란 물건을 파는 일이 아니라 결국 사람을 파는 일이며, 그런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함정에 빠뜨리고도 그 누구도 구해내지 못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서른」은 구조 요청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하고 ‘겨우, 고작 나’라는 세계에 고립되어 미래까지 저당잡혀버린 채 침몰하는 오늘의 어떤 세계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3) ‘주니어 시스템’과 관련해 내가 겪고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간략하게 요약하여 이 지면에 ‘기록’해두고자 한다. 2008년부터 나는 시 전문 계간지인 『신생』의 편집장을 거쳐 편집위원으로 활동해온 바 있다. 그러나 지난 7월 1일 발행인으로부터 돌연 편집위원직에서 물러나줄 것을 사적인 자리에서 강요받았다. 나와 또다른 편집위원(김만석)을 배제한 자리에서 편집인, 발행인, 편집주간, 편집위원들이 두 사람의 편집위원 권한을 강제로 박탈하기로 공모한 것이다. ‘마음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면서 말이다. 이해하기 힘든 이 촌극이 황당무계하기보단 슬프고 처참했던 것은 매 계절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애를 써가며 잡지를 만들어온 그간의 시간이 고작 이런 터무니없는 통보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는 가난함과 대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우리 두 사람은 비민주적으로 편집위원의 권리를 박탈한 공모를 인정할 수 없으며 그에 대한 해명과 사과를 『신생』 측에 요구했으나 묵살당했다. 어째서 이런 황당하고 무례한 일이 가능할 수 있는가 자문하며 알게 된 명징한 사실이 있다면 이런 일을 겪은 것이 우리가 처음은 아니며 이후에도 뻔뻔한 방식으로 반복될 것이라는 점이다. 평판을 중시하는 지역의 논리 속에서 ‘선배 세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유례없는 이 일이 위험한 것임을 모르지 않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로 결심하고 ‘한국작가회의’의 지회인 부산작가회의라는 공적 기구에 이 사안을 안건으로 다루어줄 것을 요청했다. 공모에 가담한 『신생』의 구성원 모두가 부산작가회의에 회원으로 소속되어 있었고, 1999년에 창간된 이 잡지가 특정 개인의 사적 소유물이 아니라 공적 매체의 지위 또한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문학판에서 벌어진 이러한 비민주적인 권리 박탈을 그저 황망하고 비참한 일을 당했다는 수동적인 경험이나 사적인 일로 묻으면서 공적인 문제로 옮겨두지 않는다면 이런 일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발생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산작가회의의 현재 회장이 『신생』의 발행인이기도 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사무국은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개입할 수 없음’을 통보해왔을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조적인 폭력이 문학판에 국한되는 일이 아니라 지역 문화예술계 전반에 만연한 일이라 판단하고 ‘로컬데모’(local culture democracy)라는 협의기구를 조직하여 연속 간담회를 기획했다. 이에 대해서는 『문화/과학』 2015년 겨울호에서 보다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다만 이곳에 사태의 경과를 기록해두는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다를지라도 이 또한 ‘주니어 시스템’이라는 구조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주니어 시스템 아래에서 구성원은 언제라도 권리를 강제로 박탈당할 수 있으며 인격성까지 부정당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다름 아닌 내가 바로 오랜 시간 허울뿐인 ‘지역 엘리트’라는 이름의 ‘주니어’로, 언제라도 애써 일구어왔던 장소에서 추방당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오늘 그 장소에서 추방당한 자다. 이 경험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모욕이라는 폭력’과 다르지 않았으며 이때 무엇보다 중요하고 간절하게 요구되었던 것은 ‘모욕을 두껍게 기술하는 언어’(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와 사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폭력을 공적인 것으로 전환할 수 있는 동력, 다름 아닌 동료였다. 말하자면 ‘주니어 시스템’ 속엔 바로 이 두 요소가 부재하다. 차마 본문에서 다루지 못하고 각주의 형식을 빌려 모욕의 경험을 여기에 어렵사리 기록하는 것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특정 집단을 고발하거나 폭로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이 기록이 주니어 시스템 안에서 시스템 바깥으로 걸어나오는 ‘따로 또 같이’ 걷는 시작의 걸음이 되었으면 한다. 각자의 경험을 두텁게 기술하는 언어와 곁의 동료 없이 자립과 연대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