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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보편과 보통 사이의 기억

윤이형 정소현 김금희의 최근 작품을 중심으로

 

 

이은지 李垠知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징후적 소설과 그 너머」 등이 있음. zzellystick@naver.com

 

 

1. 삶이라는 역사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은 바로 사라지는 것들을 아쉬워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어제는 있었으나 오늘은 없는 것을 ‘기억’하는 행위가 있기 때문이다. 어제는 있었으나 오늘은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histoire)하고픈 아쉬운 마음이야말로 역사(Histoire)의 존재이유가 아닐는지. 일찍이 키케로(Cicero)가 역사를 ‘기억된 삶(vita memoriae)’으로 풀이하였듯이, 사실들을 공평무사하게 새겨놓은 것이 곧장 역사가 되지는 않는다. 세계를 경험하고 감각한 것이 망각을 거쳐 어제로 묵혀졌다가 다시금 상기되며 오늘에 잇자국을 남기는 것이 기억인바, 역사 또한 그러한 주관적 행위와 떼려야 뗄 수 없다. 기억은 역사에 선행할 뿐 아니라 기억의 구조가 곧 “인간의 역사적 구조”1)이기도 하다.

오늘의 삶이 근거하는 역사적 구조를 읽는 작업이란 원시(遠視)를 앓는 눈이 코앞의 대상에 깜깜이듯이 요령부득이기만 하다. 우선 코앞의 대상을 전망한다는 것부터가 모순이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가 비록 상상적일지언정 개인을 집단으로 엮어주던 공통 감각(common sense)으로서의 ‘이념’을 잃은 지 오래라는 진단이 깜깜한 공백을 향해 안경을 빠뜨린 코를 들이미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일정부분 정당화해주고 있다.

함께 딛는 이념의 토대가 부재한 상황에서 ‘나’의 감각과 인식을 붙들고 늘어지며 내핍하는 주체들이 성황인 지도 오래되었다. 이념을 갓 탈각한 90년대 문학을 돌아보면 사회적 대의 상실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자아의 내면을 곧 미학적 토대로 축성하는 ‘나’의 해방적 움직임이 지배적이었고, 좀더 가까운 2000년대 문학은 무너져내리는 세계의 질곡이 자아의 존재근거마저도 집어삼키는 아찔한 체험으로부터 ‘나’의 새로운 존재근거가 돌출하는 현장이었다.

‘나’라는 최소단위의 주체들이 저마다 구심점이 되어 각기 다른 파문을 그리는 불안정한 매트릭스가 세계를 이루는 유일무이한 질료가 되었음은 2010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럼에도 모종의 진척이라 할 만한 것은 주체들이 그리는 파문이 외따로 생겨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근접한 주체들끼리 파문을 겹치면서 그 접점을 공유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SNS상에서 해시태그(#)라는 새로운 개념이 왜소한 주체들 간의 거리를 좁히고 좀더 빈번히 곁을 나누게 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해시태그를 통해 교접하고 명멸하기를 반복하는 저 무성한 역사들을 채우는 것은 이념에의 열정이 아니라 “미학화된 일상”과 그로부터 비롯하는 “개인적인 감성들”이다.1)

바야흐로 역사-이후(Post-histoire, 아르놀트 겔렌)의 역사는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 삶의 내부로부터 시시각각 피어오르고 있다.2) 역사-이후의 역사가 아이러니하게도 키케로의 표현 그대로 ‘기억된 삶’을 가리키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의 독해 여부는 총체적 서사에 대한 인식론적 판단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 대한 경험적 판단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상을 미학화하고 개인적인 감성에 가치를 부여하려 골몰하는 모습이 자신의 삶으로부터 오늘의 역사를 독해해보려는 대단한 시늉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여전히 심심찮게 호명되는 루카치(G. Lukács)의 ‘서사/묘사’의 개념쌍을 빌리자면 그것은 단지 삶의 묘사일 뿐이며, 삶의 뼈마디를 잠시 채웠다가 빠져나갈 물렁한 것들일 뿐이다. 단순히 삶이 아니라 ‘기억된’ 삶이 곧 역사라는 키케로의 말을 헤아려보면, 삶의 구조를 이루는 ‘기억’에 대한 성찰이 요청되었을 때 비로소 오늘의 삶과 역사의 뼈대를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기억에 대한 간단치 않은 통찰을 매개하여 삶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려 애쓰는 문학적 노력이 허투루 보이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보려는 몇편의 소설은 저마다 다른 음조를 띠고 있지만 어제와 오늘의 길항 속에서 보통의 삶(common life)에 대한 공통 감각을 건져올리려 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또한 주목할 것은 개개인의 삶이 다를지언정 항구적으로 작동하는 기억에 대한 성찰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기억 행위의 세 국면, 즉 기억, 망각, 회상을 각각 작품의 중요한 지평으로 삼고 있는 윤이형(尹異形) 중편 『개인적 기억』(은행나무 2015)과 정소현(鄭昭峴) 단편 「어제의 일들」(『제5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과지성사 2015), 김금희(金錦姬) 단편 「보통의 시절」(『작가세계』 2015년 여름호)을 차례로 살펴보려 한다.

 

 

2. 기억: 너와 나의 ‘commonplace

 

윤이형의 최근 작품세계는 보통의 정체성을 웃도는 주체들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주조되고 있다. 퀴어들의 사랑을 다루는 「루카」(『자음과모음』 2014년 여름호)가 그렇고, 허언증과 거식증에 시달리는 두 병리적 주체의 만남과 어긋남을 다루는 「러브 레플리카」(『문학동네』 2014년 여름호)가 그러하다. 세계와의 불협화음 속에서 달성되는 주체 간의 협화음을 통해 관계의 울림을 한층 깊게 하는 양상인데, 근작 『개인적 기억』에서는 그러한 과잉주체가 타자와의 교호(交互)를 통해 세계와의 화해를 가늠하는 노력으로 나아가고 있어 눈길을 끈다.

주인공 지율은 변형된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다. 글자나 숫자를 정확하게 외우거나 하는 이 증후군의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그는 오로지 “부모님이나 나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내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일들”에 한해서만 완벽에 가깝게 기억한다(39면). 자신의 삶에 대한 비범한 기억력이 얼핏 경험과 인식을 풍요하게 해줄 것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망각을 모르는 기억은 한낱 정보에 불과하며, 저장된 경험들이 망각과 조정의 과정을 거친 뒤 상기되는 기억이야말로 현재의 지평에서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변증법적 조정을 모르는 날것 그대로의 기억들은 회상의 단서에 불이 붙으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와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져버린다. 어제의 삶은 오늘의 삶에 장애가 되며, 어제는 매번 오늘을 압도한다. 벽돌 한장 빠지지 않고 무한히 쌓여만 가는 개인적 기억의 세계가 외부세계를 압도하여 지율의 현재는 언제나 자신의 과거에 짓눌려 있다.

모든 기억은 균질하게 보존됨으로써 역설적으로 각각의 고유한 색채와 질감을 잃는다. 이는 수많은 기억들과 동일한 한칸을 차지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현재의 경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요약되지 않은 과거의 무수한 칸들보다 현재의 한칸이 우위를 차지할 리 만무하다. 예컨대 먹고살기가 진즉 간단치 않았던 부모의 삶은 지율이 과잉기억증후군을 진단받은 뒤부터 심상치 않게 덜그럭거리다가 급기야는 엄마가 집을 박차고 나가기에 이르렀으나, 그 충격적인 날에 대한 지율의 기억은 보통 사람의 경우와 달리 심상하기 그지없다.

 

내 마음속에 있던 ‘어머니’라는 팔레트는 셀 수 없이 많은 칸으로 나뉘어 있었고, 거기에는 서로 다른 명도와 채도, 색깔을 지닌 기억들이 물감처럼 담겨 있었다. ‘나는 행복한 적이 없었어’라는 어머니의 말은 명백하게 새까만 빛깔이었고, 보통 사람이었다면 기억의 마지막에 칠해진 그 빛깔이 다른 많은 아름다운 빛깔들을 까맣게 삼켰겠지만, 내게 그건 단지 하루의 기억에 불과했고, 결코 그날의 칸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으므로 다른 어떤 것도 더럽히지 않았다.(70~71면)

 

이처럼 모든 기억이 동등한 질량으로 보존되기에 가치판단이나 의미부여는 애초에 불가능하므로, 지율의 기억들은 하나같이 ‘중립적’이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세상을 볼 수 있는”(27면) 이 중립의 중심은 다름 아닌 ‘나’이기에 세계와 무관한 균형은 오히려 세계와의 얽힘, 타인과의 관계맺음에 장애가 된다. 관계맺음이란 상대방의 면면에 고유한 가치를 부여하는 상호간 편파적인 운동의 결과물인바 이는 지율의 과잉기억이 수행하는 운동과 반목한다. 예컨대 좋아하는 소녀에게서 특정한 장점을 발견하는 순간 그와 비슷한 면모를 가진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동의어 사전을 펼쳐놓은 것처럼 주르르 떠올”라, 소녀의 장점은 더이상 소녀 고유의 것이 아닌 “평평하고 특징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78~79면). 혹은 누군가의 눈물을 보거나 울음소리를 들으면 “그때까지 내가 본 모든 눈물이 한꺼번에 떠올랐고, 이어서 그 모든 사람들을 울게 한 것이 나라는 생각이 떠올랐으며, 내가 그때까지 저지른 모든 실수와 오류와 악행이 거기서부터 끝없이 가지를 치며 이어지기 시작”(45면)한다.

주인공이 숙식을 해결하며 근무하는 게스트하우스 ‘스몰 월드’는 그 이름부터 상징적인 장소이다. 서울 북서쪽에 자리해 유럽의 유스호스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스몰 월드는 근처 광화문에서 사람들이 경찰 곤봉에 얻어맞는 시위로 왁자한 와중에도 따뜻한 조명 아래 이 도시와 무관한 사람들이 한가로이 맥주를 마시는 풍경이 연출되는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자잘한 일을 하며 손님들과 수시로 교류하지만 그 관계는 자못 피상적이며, 그들이 로비에서 늘어놓는 밝고 반짝이는 여행담은 “흘러넘쳐 질식을 일으킬 것 같은 내 기억을 눌러놓기 위한, ‘세계’의 대용품으로서의 정보”(102면)에 불과하다. 세계 안에 자리하지만 세계에 속하지 않는 스몰 월드는 “일종의 재활기관”이자 “내가 마음대로 세워놓은 ‘세계’와 ‘나’ 사이의 경계선”(103~104면)이다.

최초의 관계맺음은 스몰 월드에서 장기 투숙하는 은유와의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는 “사랑이란 현재를 존중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능하게 해준 은유야말로 “이상한 형태로 계속 나를 주저앉히려는 기억들 사이에서 미래로 통하는 길을 열어줄 유일한 사람”(96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딘지 사연이 많아 보이는 그녀는 매일 밤 나의 방으로 찾아오면서도 낮이면 말 한마디 붙이지 않고 홀연히 나가버리는가 하면, 왜 특별한 능력을 더 유용하게 사용하지 않느냐고 나를 질책하여 서운하게 하기도 한다. 은유의 태도는 지율의 과잉기억과 대칭을 이루는 그녀의 과소기억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 근거는 은유의 삶의 내막이 드러나는 결말 부분에 이르러 밝혀지지만 호소력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그런 아쉬움은 접어두고라도 은유와의 각별한 관계는 지율의 내면에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을 키우고, 날뛰는 기억을 길들여준다는 약물 오브(Ob)를 복용할 결심을 굳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약을 복용한 뒤 “기억이 끝없이 되살아나는 염증 같은 상태”(127면)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나는 그토록 원하던 보통의 존재가 되어간다. 그러나 특히 은유와 어떻게 헤어졌는지에 대한 기억이 “동그랗게 도려낸 것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져 있는데, 오브가 망각을 보조해주긴 하지만 어떤 것을 기억하고 망각할지 선별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는 약물과는 무관한 망각으로 추정된다. 약물의 존재조차 모르던 시절, 은유가 나의 방으로 찾아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던 날 밤의 기억 또한 마찬가지로 망실되어 있는 점이 추정에 근거를 실어준다. 그날의 기억은 은유와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에서 곧바로 다음날 아침의 기억으로 훌쩍 건너간다.

 

나는 습관적으로 내 마음의 안쪽을 살피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지난밤의 두려움과 불안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다만 아주 근사한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만이, 내가 비로소 한 인간으로 인정받았다는 분명한 자각만이 보드라운 토양처럼 거기 깔려 있다. 은유는 순한 아기 동물처럼 잠들어 있고, 나는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문을 닫고 방을 빠져나간다.(60~61면)

 

지율의 증세를 감안하면 연인을 처음으로 안은 날의 기억이 삭제될 리 만무한데도 기억은 어떠한 외부의 도움 없이 망각에 이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날의 따스함과 평온함을 극대화하여 간직하고픈 나의 마음이 기억을 수정한 것일 테다. 양적으로 압도하면서도 균질적인 기억의 무더기 속에서 “이상한 균형”(118면)에 시달려왔던 나의 머릿속이 왜곡되고 편향된 기억을 최초로 획득하는 순간이다. ‘나’라는 중립 외에 아무것도 세울 수 없을 정도로 포화상태였던 자전적 기억이 사랑의 관계를 통해 적당한 이기와 망각으로 윤색된 보통의 기억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중년에 이르러 은유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낸 지율은 하고 싶은 말들을 길게 써내려가다가 이를 모두 지운 뒤 ‘안녕, 나 지율이야. 잘 지내고 있어? 몸은 건강하니? 아픈 곳은 없어? 나를 기억해?’라는 상투적인 몇마디만을 전송한다. 누구나 흔히 주고받는 가장 보통의 문장들(commonplaces)이 마련하는 공통의 자리(common place)가 때로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자리들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준다는 것을 주인공은 부지불식간에 깨닫고 있는 것이다.

지율이 타인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보통의 기억을 배워가는 지난한 과정은, 주관에서 상호주관으로 둘레를 넓혀가며 새로이 형성되는 공통 감각을 통해 세계의 공백을 메워나가는 시대 경향에 대한 은유로 읽을 소이가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너와 나’라기보다 ‘너’를 통해 좀더 세계와 수월히 접속하게 된 ‘나’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양상은, 「루카」와 특히 「러브 레플리카」에서 쉬이 극복하지 못했던 ‘도구적 너’를 넘어서는 것이 윤이형의 당면 과제임을 짐작게 한다.

 

 

3. 망각: 화무십일홍의 불문율

 

윤이형의 『개인적 기억』이 기억에 망각이 스며들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정소현의 「어제의 일들」은 오래도록 망각된 기억의 재귀를 다룬다. 정소현은 등단작 「양장 제본서 전기」나 「실수하는 인간」(이상 『실수하는 인간』, 문학과지성사 2012 수록)에서 인상적으로 드러나듯이 사회로부터 소실되는 개인을 낯선 감각으로 재현하여 평범한 사건(fabula)을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syuzhet)로 탈바꿈하는 데 탁월한 작가다. 「어제의 일들」 또한 주인공의 이질적인 특성이 이야기 전체를 구조적으로 비트는 데 긴요한 역할을 한다. 주인공 상현은 어릴 적 학교에서의 따돌림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친 이후 신체적 장애와 더불어 일일이 메모를 해야 할 정도로 현저히 떨어진 기억력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어제의 기억은 “다음날 아침이 되면 머릿속에서 거의 지워져 있”어(290면) 노트의 기록을 통해서 간신히 복원된다. 매번 “어제는”으로 시작하는 6장으로 구성된 이야기는 고작 엿새치의 어제들을 묶은 노트인 셈이지만, 어제들에 담긴 더 오랜 어제들이 기록의 종잇장에 기억의 수심을 깊게 파고 있다.

손바닥만한 주차장 부스에서 일하는 상현을 어느날 찾아온 동창생 율희는 매일 출근도장을 찍다시피 와서 옛날의 일들을 이야기한다. 상현이 몇 반이었고 언제 반장을 했는지부터 학창시절 그렸던 풍경화에 대한 이야기 등 아주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기억하고 있는 율희는 “마치 내 기억을 되돌려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처럼 옛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 이야기들을 받아적었다”(291면). 그런 율희를 매번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기억력이 나쁜 상현은 그녀의 이름을 쓰고 얼굴을 그리고 이야기를 죄 받아적는 동안 두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의 이야기와 겹치는 자신의 기억 속에는 율희가 누락되어 있으며, 그녀가 일정부분 자신의 기억과 위배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기억과 율희의 기억을 비교한 끝에 상현이 도달한 결론은 사고 이전의 기억들에 숭숭 뚫려 있는 “그녀(율희)를 포함한 구멍들은 중요한 일들이 아니었기에 잊혔”으리라는 것과 “그것들은 이미 지나갔고, 나는 그것 없이도 잘 살아왔”기에 더는 궁금하지 않다는 것이다(292면). 그러나 율희의 악의적인 등장, 무심함을 가장한 공격적인 말들은 저 누락된 기억이야말로 상현의 의식 저변에 억압된 가장 중요한 기억임을 암시한다. 망각하기 위해서는 억압이 선행되어야 하기에.

율희의 등장 이후 찾아온 중학교 동창들이 들려주는 “아름답게 윤색”된 이야기 또한 상현의 머릿속에서 반사적으로 “사실 그대로 재생”(310면)되는 기억과 판이하다. 함께 사생대회를 나갔었다는 지영의 이야기는 그녀가 상현의 그림과 옷을 고의로 망가뜨렸던 기억을 떠오르게 하고, 미영과 예숙이 깔깔거리며 상현이 쌀집 앞에서 넘어져 콩과 팥이 뒤섞인 이야기를 하는 동안 상현의 머릿속에는 등을 떠밀던 예숙의 손과 자신만 혼자 남겨두고 떠나버린 매정한 둘의 모습이 재생된다. 윤색된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거칠게 되돌리는 회상의 과정에서 다른 아이들이 저질렀던 가혹한 일들은 “쭈뼛거리며 뒤따라 나와 내 앞에 널브러졌다”(311면).

상현의 억압된 기억들이 빗장을 푸는 계기는 번번이 율희로부터 온다. 한동안 발길이 뜸하다가 오랜만에 찾아온 율희는 상현을 다짜고짜 차에 태워 상현이 자살 미수로 의절당하기 전까지 조부모 및 고모와 함께 지냈던 아파트로 데려간다. 율희는 아파트를 가리켜 보이며 너희 집이 뛰어내려도 죽기에는 낮은 “5층이라는 건 생각 못했”(305면)는지 묻는가 하면, 의절당한 상현이 가족들의 근황을 모르는 줄 뻔히 알면서도 “너희 가족들은 아직 여기 사시”(306면)느냐고 묻는 등 배려와 친절을 가장한 악의적인 말들을 던진다. 율희의 말들은 창밖으로 뛰어내리던 날 아침의 기억, 병원에서 퇴원할 때 찾아온 고모가 집에서 나가라며 이민 가방을 건네준 기억 등 상현이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폭력적으로 환기한다.

율희의 등장 이후 “끝없이 몰아치는 감정과 기억의 파편”(318면)들은 상현의 망가진 몸만큼이나 마음을 망가뜨리는 충격과 고통 일색이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하루치 분량의 메모만을 남긴다. 모든 기억은 고통의 경중과 상관없이 공평하게 망각되어 고통의 누적을 막는다. 때문에 상현의 감정 기복은 비교적 평면적이고 담담하기만 하다.

가족들이 살던 아파트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돌아온 상현을 맞이하며 지금의 어머니상현의 간병인이었던는 이미 상현이 외우다시피 하는 당신의 곡절 많은 삶을 들려준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매번 “어떤 지점에서 시작을 하더라도 결국 모든 이야기를 다 풀어낸 뒤 원망과 후회, 슬픔이 뒤섞인 눈물을 조금 흘리고서야”(322면) 끝나지만, 여러번 받아적은 상현의 노트 속에 그 사연은 조금씩 덤덤해지고 대범해져 남 얘기에 가까운 무감한 빛깔로 바래가고 있다.

 

“모든 게 화무십일홍인 거라. 후회하고 원망하고 애끓이면 뭐해. 좋은 날도 더러운 날도 다 지나가. 어차피 관 뚜껑 닫고 들어가면 다 똑같아. 그게 얼마나 다행이냐.”

어머니는 밥을 먹고 있는 내 등을 쓰다듬었다. 밥이 가득한 입속으로 어머니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이 복잡했던 날들을 생각했다. 차마 다 기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것들은 명백히 지나가버렸고, 기세등등한 위력을 잃은 지 오래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다행이라 말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322면)

 

숱한 세월의 더께에 가려 희끗해져가는 어머니의 기억과 노트 한장의 기록만 남기고 망각되는 상현의 기억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논리를 공통의 감각으로 맞아들이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를 자못 몸서리치게 한다. 특수한 개인의 삶마저도 보통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삶의 불문율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은 그 불변의 법칙이 다행한 만큼이나 얼마나 섬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편으로 저 결말은 망각이라는 장애를 구실로 어제에 대한 해명을 유보한 채 오늘과 타협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화무십일홍이라는 깨달음은 “좋은 날도 더러운 날도” 공평하게 지나가고 잊힌다고 믿고 싶은 심리가 억압적으로 작용했을 때 비로소 도달 가능한 것은 아닐까. 어제의 일들이 오늘을 찢고 불쑥 돌출하며 입체감 넘치던 서사가 결말에 이르러 갈등을 봉합하듯이 황급히 마무리되는 듯한 아쉬운 모습은, 작가 스스로 설정한 서사의 전위적 구조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채 망각이라는 삶의 불가항력에 기대어 무마하는 것 때문이 아닐까.

 

 

4. 회상: 불행을 평준화하기

 

김금희의 「보통의 시절」은 기억 속에서 유년시절 불행의 기원으로 자리하고 있는 대상을 직접 찾아나서는 이야기인데, 이는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는 과정을 물질화하고 있어 흥미롭다. 「세실리아」(『한국문학』 2015년 봄호)에서 오세실리아가 과거 동아리 선배에게 받은 상처의 밑바닥까지 홀로 침잠하였다가 회복하는 과정을 바닥에 구덩이를 판 뒤 지루하게 덮는 예술작업을 통해 조형적으로 보여주었듯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형상화하는 작가의 남다른 재치가 엿보인다.

사년 만에 네 남매가 회합한 자리에서 큰오빠는 암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공표하고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됐나” 하는 생각 끝에 김대춘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는 결심을 밝힌다. 주인공 은지가 아직 갓난아기였던 시절, 김대춘이라는 작자는 보일러실에 불을 질러 부모님이 운영하던 목욕탕을 전소시켰을 뿐 아니라 남매들을 고아로 만들었고, 그 바람에 큰오빠는 열여섯에 가장이 되었던 것이다. 큰오빠의 기억 속에서 김대춘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결정적인 원인제공자이다. 그들은 엉겁결에 큰오빠를 따라 김대춘의 집을 함께 찾아간다.

큰오빠를 비롯한 남매들이 천애의 고아로 자란 불행한 유년시절을 공유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 불행의 기원에 있어서는 저마다 접점을 달리한다. 주인공이 어린시절 큰오빠를 “괴물이나 마귀, 악당”(140면)으로 기억하고 있듯이 언니 또한 그의 폭력에 시달리느라 “밥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발육이 늦어서” 열여덟에야 생리를 했다며, 그를 “인간 말종”(150면)이라며 이를 간다. 작은오빠도 큰오빠에게 하도 욕을 먹고 자라 평생 주눅이 들어 지금껏 홀아비로 산다. 은지가 엄마처럼 따르던 연주 이모도 말 한마디 없이 내쫓고 어린 동생들을 때리기도 많이 때렸기에 “우리의 원수는 큰오빠인가 싶은데 큰오빠는 김대춘이 원수라고 하고 사실 공식적으로도 그러니까 다시 원수는 김대춘이 된다”(152면).

원수의 주소지가 일산의 아파트라는 사실에 언니는 살인자가 말끔한 아파트에 살아도 되느냐며 분통을 터뜨리지만 막상 가보니 열다섯평도 안되는 작은 아파트라는 사실에 주춤한다. 집으로 쳐들어가 대면한 김대춘의 얼굴은 “한없이 쪼그라들고 골이 파인, 늙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누구나 생각할 만한”(156~57면) 늙은이의 그것이기에 또 한번 김이 빠진다. 더욱 놀랍고 황당한 사실은 왜 우리 부모를 죽였느냐는 형제들의 악다구니에 자신은 부모를 죽이거나 불을 지른 적 없이 보일러실에서 잠만 잤다는, 형()은 살라니까 그냥 살았을 뿐이라는 김대춘의 고백이다.

큰오빠에게 살인마로 기억되던 김대춘이 어디서나 흔히 있을 법한 보통의 노인으로 밝혀지고, 남매들에게 인간 말종으로 기억되던 큰오빠가 암에 걸려 시름시름 하며 인생을 푸념하는 보통의 중년남성으로 드러나면서 각자의 고유한 상처들은 ‘거기서 거기’가 된다. 유년시절 불행의 근원으로 낙인 찍은 대상은 저마다 다르지만, 낙인을 찍는 불행의 악력만은 동일한 것이다. 김대춘에 대한 큰오빠의 기억과 큰오빠에 대한 은지의 기억은 동일한 불행을 덮어 가리는 일종의 은폐기억(Deckerinnerung)이라 할 수 있다.

 

큰오빠는 우리 원수이지만 우리 가장이고 우리 가장은 인간 말종이지만 지금은 죽음과 신 앞에 선 가엾은 단독자이며 원수를 갚으려는 전직 샐러리맨이다. 그렇게 몽상하다 멈추고 몽상하고 몽상하다 보면 그런 일들이 다 맨송맨송해지면서 그냥 그런 보통의 일이 된다. 샐러리맨도 보통이고 마귀도 보통이다. 인간 말종도 원수도 가엾은 단독자도 다 보통의 것, 그냥 심상한 것, 아무렇지 않은 것, 잊으면 그만인 것, 거기서 거기인 것들이다.(152면)

 

모든 것을 다 거기서 거기로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를 작가는 ‘몽상’에서 찾고 있다. 암을 선고받은 중년의 쌜러리맨에 불과한 현재의 큰오빠와 원수 같고 마귀 같은 어린시절 기억 속의 큰오빠가 몽상에 몽상을 거쳐 화해한 끝에 범상한 보통에 도달한다. 여기서 몽상이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대상에 대한 인상의 평균치를 구하는 통시적인 작업인바,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고 이를 통해 기억을 다시금 조정하는 행위와 같다.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가 ‘끈질기고 한결같이’ 불행한 세상을 통과하며 신이 되었듯이, 삶의 평균이 곧 불행인 “미천한 목욕탕집 네 남매”의 삶이야말로 신이 되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역설적 셈법은 우리의 삶과 더불어 인류의 역사까지 다 거기서 거기로 치환하는 저 ‘보통’의 위력을 실감케 한다. 그렇게 ‘목욕탕집 네 남매’가 애매한 푸닥거리 끝에 김대춘의 집을 나서며 그날의 크고 작은 충격들을 데면데면 넘겨버리려 하는 데 반해, 이 일과 무관하지만 그들을 덜컥 따라나섰던 상준은 보통으로 치환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소회를 밝힌다.

 

“잊기는 어떻게 잊어요? 이미 봤는데 어떻게 잊어요? 이미 들었는데 어떻게 잊어요?”

상준이가 그렇게 말하자 우리 넷은 천천히 웃음을 거뒀다.

“잊지는 못하고요, 선생님. 그렇다고 이 일이 왜 이렇게 됐나. 누가 어떻게 하다가 사람들이 죽었다, 누가 제일 나쁜 놈인가 그런 생각은 안 할게요. 그냥 이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고 난 머리가 나쁘니까 보통도 안되는 놈이니까 지금은 생각해서 뭘 해요.”(158~59면)

 

상준처럼 남매들의 불행한 기억과 무관하여 이 일을 몽상할 수 없는 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일은 사실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 일이 아닌 것’을 쉬이 잊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상준은 ‘보통도 안되는 놈’이 생각해서 무얼 하느냐며 남매와 마찬가지로 이 일을 더 생각하지 않고 흘려보내기로 한다. ‘보통 이상의 일’과 ‘보통 이하의 놈’이 만나 이 심상치 않은 일을 다시금 보통의 것으로 상쇄해버리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세상사 전부를 거기서 거기로 평준화해버릴 논리가 엿보이는 것 같아 자칫 위험천만해 보이기도 한다. 아울러 다 잊고 보통의 생활에 정주하자는 큰오빠의 말에 순응하는 은지의 논리, 즉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고 공부하는 사람은 순진무구한 아기 같은 사람이니까,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알 수 없고 답도 못 찾는다”(158면)는 논리는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들을 거기서 거기로 덮어 가리는 공모 없이는 보통에 도달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5. 보통에서 보편으로

 

개인적인 기억으로부터 삶의 보편성을 읽어내려는 위의 소설들은 주관적인 것의 편린으로부터 공통 감각을 구하는 나름의 셈법에 골몰하고 있다. 윤이형의 『개인적 기억』이 자전적 기억에 매몰된 자폐적 세계가 사랑의 관계를 겪으며 타인과 나눌 수 있는 공통의 자리를 마련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정소현의 「어제의 일들」은 고통스러운 기억의 회귀도 망각을 통해 껴안고 견딜 만한 것으로 상쇄시키는 삶의 불가항력을 읊조리고 있다. 김금희의 「보통의 시절」에는 불행한 기억의 근원을 물리적으로 회상하는 과정에서 저마다 평균치의 불행을 머금고 있는 고만고만한 존재임을 확인하는 담담한 모습이 담겨 있다. 기억이 단순히 서사를 풍염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억의 기제가 삶의 보편적인 논리를 절로 드러내게끔 유도하고 있는 부분은 특기할 만하다. 이처럼 주관으로부터 객관을 향해 역진하는 움직임은 “외부 없는 현실의 정직한 껴안음”3)이자 “세계 바깥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탐구가 절실”4)함을 직감하는 본능적인 몸짓일 것이다.

동시에 저 몸짓은 시대 불문하고 모든 인간을 만유인력처럼 끌어당기는 보통의 삶에 대한 감각 외에는 더이상 타인과 공유할 것이 없는, 즉 주관적인 것 없이는 한뼘 디딜 지반조차 없는 황폐한 현실을 방증한다. 상투어의 자리와 화무십일홍의 법칙, 거기서 거기로 평준화되는 불행과 같은 것들이 가리키는 보편성이란 “평면적이지만 안심이 되는”(『개인적 기억』 11면) 즉석우동의 국물 맛이나 “공짜로 줘도 먹을까 말까 한”(「보통의 시절」 141면) 추로스의 무료한 맛처럼 이도저도 아닌 사소한 것들의 정수이자 총합이기도 하다.

서사의 시야를 삶으로 좁혔을 때 저 마지막 장면들은 분명 보편적인 감각에 근접해 있다. 그러나 시야를 세계로 넓혔을 때 그 감각은 한없이 평범하고 진부한, 보통의 그것에 불과하다.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으며 내일도 여전히 있을 ‘삶’의 항구 불변하는 법칙을 가까스로 확인하는 데 그치는 모습은 보편으로 갈음하기에는 다소 모자라는 형국이다. 보편적인 감각이란 “무한한 가변성을 지닌 ‘주위 사정’(Umstände)을 파악”5)하는 가운데, 즉 시시각각 변화하는 과정의 세계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기반으로 삼았을 때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감각을 길러내기를 포기하는 문학이란 삶의 외양을 치장하고 조탁(彫琢)하기에만 몰두하며 세계와 점차 무관해져가는 SNS의 미학화된 일상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보편이 아닌 보통을 옹호하는 문학이 세계와 무관한 균형에 매몰될 위험을 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삶을 구조적으로 틀 지우는 기억 행위가 곧 서사의 도구로서 탁월하게 운신하고 있는 모습은, 서사의 외연을 확장하기만 한다면 물렁한 것들로 덮여 있어 가늠할 수 없는 오늘의 사회적 형해를 충분히 읽어낼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점쳐보게 한다. 외연 넓히기는 결국 삶의 굴레를, 그리고 너와 나 사이에 짓눌린 시야를 비집고 나올 때, 예컨대 지율이 스몰 월드를, 상현이 주차장 부스를, 은지가 순진무구한 배우는 사람의 태도를 벗어날 때 비로소 성사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 저 보통의 논리에 안주하기에는 문학의 영토가 너무 좁다, 너무너무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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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지희 「일상의 미학화와 미니멀리즘」, 『문학동네』 2015년 여름호 327면.

2) 이는 역사를 소재로 하는 최근 장편소설들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저마다 그 겹과 결이 다르긴 하지만 근래의 역사소설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은 크게 ‘역사의 사사화(私事化)’와 ‘증언으로서의 역사’를 들 수 있다. 예컨대 군사독재 시대의 역사적 의미 사슬이 일개인의 삶의 자장에 달라붙는 것들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일정부분 와해되는 장면이나(이기호 『차남들의 세계사』), 역사의 폭력에 가장 밀착된 피해자들의 증언이 불가피하게 실제의 재현을 수행하고는 있으나 그 사적인 고통의 둘레가 역사라는 객관의 이름을 감히 붙이기 저어될 만큼 실존적 고통의 특이성(singularity)을 뿜어내는 장면(한강 『소년이 온다』)이 그러하다. 여기서 특이성이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독특성을 가리킨다.

3) 정홍수 「‘이념의 시대’로부터 ‘2000년대 소설’까지」, 『문학과사회』 2012년 겨울호 397면.

4) 소영현 「그나마 남은 비평의 작은 의무: 자본, 정념, 비평」, 『문학과사회』 2015년 봄호 430면.

5)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진리와 방법』 1, 이길우 외 옮김, 문학동네 2012, 4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