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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미국 기원 ‘정착형 식민주의’

과거와 현재

 

 

마흐무드 맘다니 Mahmood Mamdani

우간다 마케레레(Makerere) 대학 마케레레 사회조사연구소 소장, 미국 컬럼비아 허버트 레먼 정부학 석좌교수. 최근 저서로 『구원자와 생존자: 다푸르, 정치, 대테러전쟁』 『착한 무슬림, 나쁜 무슬림: 미국과 냉전 그리고 테러의 기원』 등이 있음.

 

* 이 글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열린 에드워드 사이드 강연(2012.12.6)의 원고를 수정한 것으로, 시카고대 출판부가 발행하는 Critical Inquiry(www.criticalinquiry.uchicago.edu) 2015년 봄호에 게재되었다. 원제는 “Settler Colonialism: Then and Now”이며, 필자는 원문에서 논평을 해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토머즈 마츠낵(Tomaz Mastnak)에게 감사를 표했다. Ⓒ Mahmood Mamdani / 한국어판 Ⓒ 창비 2015

 

 

정착형 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아프리카와 미국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두 전형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정착형 식민주의가 패퇴한 반면 미국에서 이 유형의 식민주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글의 관심사는 미국의 형성에 관한 미국의 담론을 검토하는 것인데, 나는 이 작업을 아프리카적 시각에서 수행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신세계에 당도한 유럽인들은 그 세계가 유럽과 어떻게 다른지 해명하고자 골몰했다.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미국예외주의로 통칭되는 일군의 저작이 산출되었다. 이 연구전통에서 기준으로 통용되는 텍스트는 19세기 중반 알렉시스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 내놓은 미국에 대한 성찰이다. 그 이래로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는 정치이론이나 미국정치를 가르치는 대부분의 교육과정에서 줄곧 필독서였다. 토크빌이 그 책에서 제출한 주장 중에는 미국을 유럽과 구분짓는 핵심적인 면모가 봉건제의 부재라는 것도 있었다. 미국은 물려받은 봉건적 전통에 구애받지 않았기에 댓가를 치르지 않고서도 혁명적 변화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내 관심사는 토크빌보다는 토크빌주의자들이 그를 이해한 방식에 있다.

토크빌 이래로 중요한 부류의 미국 사상가들은 유럽이라는 거울에 비친 미국의 자서전을 써왔다. 하나의 유럽중심적인 시각이 미국 정치이론의 주요 윤곽의 형태를 결정해왔다. 미국의 자서전은 정착민의 자서전으로 씌어진 것이다. 거기에 원주민의 자리는 없다. 공식적으로 그들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서 워싱턴D.C.에 세워진 박물관의 명칭은 미국원주민박물관이 아니라 미국인디언박물관이다. 대부분의 미국 원주민 부족은 스스로를 원주민이 아니라 인디언이라고 칭한다. 이처럼 자신이 미국 원주민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는 태도는, 그들이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미국에 속하지 않는다고 마음 깊이 느끼는 데서 비롯된다.

정착민의 자서전 쓰기는 유럽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시작되었다. 다음은 루이스 하츠(Louis Hartz)가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The Liberal Tradition in America)에서 그 자극에 대해 밝힌 내용이다. “토크빌이 미국인이 누린 ‘가장 큰 이점’이 ‘민주주의 혁명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는 데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미국의 삶에 대한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통찰 중 하나를 내놓았음에 틀림없다.”1) 봉건주의가 부재했던 탓에 혁명도 강력한 국가도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런 연관된 역사적 유산이 미국에 만연한 개인주의를 해명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츠는 제퍼슨(T. Jefferson, 대통령 재임 1801~1809) 시대와 잭슨(A. Jackson, 재임 1829~37) 시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유럽의 귀족, 농민,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존재하지 않으며 막 형성 중인 공장 노동자를 비롯해서 사실상 모든 이가 독립적인 사업가의 태도를 지닌 이 나라에서는 두가지 국민적 충동, 즉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향한 충동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LT 89면) 하츠에게 “전체 미국적 딜레마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사회혁명 경험의 부재”는 미국인이 “유럽의 ‘사회문제’”나 “아시아의 더욱 심원한 사회적 투쟁”을 “이해하는 것”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었다(LT 306면). 하츠가 볼 때 봉건주의를 거치지 않은 사회는 “진정한 혁명전통”도 “반동의 전통”도 모두 결여할 수밖에 없었다(LT 5면). 유럽과 달리 미국은 평등을 위해 투쟁할 필요 없이 그저 평등을 “상속받았다.”(LT 66면)

하츠는 이런 평등의 상속이 미국적 경험의 어두운 이면인 숨막히는 합의의 전통을 해명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윌리엄 애쉴리(William Ashley)를 인용하여 봉건제의 부재는 “봉건제를 해체할 강력한 중앙 권력기구가 불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LT 43면). 이렇듯 극복대상과 대의의 부재야말로 “우리의 정치적 사유의 빈곤”을 해명해준다(LT 141면). 미국의 문제는 실은 “미국인이 너무나도 고뇌했던 다수결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상 만장일치의 문제”였고, 이런 사정이 “왜 미국이 평화의 시기 동안 정치의 영역에서 단 하나의 위대한 철학전통도 내놓지 못했는지”를 설명해준다(LT 141, 176면).

미국이 평등을 “상속받았다”는 주장은 노예제의 역사에 친숙하거나 미국을 백인의 미국과 동일시하지 않는 어떤 이에게도 공허하게 들린다. 남부의 노예농장을 연구하면서 노예제와 봉건제 간의 연관관계를 탐구한 학자들 역시 미국이 뱀이 허물을 벗듯 봉건제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에 회의적이었다.2)

하츠가 공간적으로 분리된 유럽의 파편으로서의 미국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는 유럽의 비이민자 사회와 미국의 이민자 경험을 대조시키면서 이민이 문화와 영토 간의 근본적 단절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그런 단절을 불가피하게 만든 방식을 탐구했다. 다음은 왈저가 유럽과 미국의 차이를 이해한 방식이다. “고래로부터 자리잡은 다수세력이” 존재하는 유럽사회에서 “정치는 다수세력의 문화와 역사에 의거할 수밖에 없기에” “국가는 미국식으로 중립적일 수 없다.” 오히려 “다수세력을 이루는 민족이 있으면 항상 강력한 국가가 출현한다.”3) 그러나 구세계가 “확실한 다수세력(들)”이 존재하는 정치체제들로 구성된다는 가정은 인종청소의 사례들과 국가 형성기에 조직화된 폭력이 담당한 역할을 기록하고 있는 역사연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데,4) 미국에는 그런 다수세력이 구축된 적이 없다는 가정 또한 마찬가지다.

왈저는 미국이 정착민, 노예, 그리고 원주민 대신 다수의 유럽 이민자로 구성된 중립적인 국가라고 상상하고, 이런 미국의 다원주의가 제국이 아니라 이민자 사회의 표지라고 말한다. 왈저가 보기에 이런 다원주의는 미국, 캐나다, 이스라엘 같은 이민자 사회를 유럽국가들 같은 비이민자 사회와 구분한다.5) 유럽에서 국가 간 차이는 영토에 근거하는 반면 미국에서는 그런 근거가 부재한다. 왈저에게 유럽은 “종족적”인 반면 미국은 “다문화적”이다(W 15면). 유럽의 종족주의가 영토와 민족성을 결부시키며 정치적인 성격을 띠었다면 미국의 다문화주의는 영토와 민족성 간의 분리에 기반함으로써 문화적 속성을 띠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왈저가 미국의 다문화주의는 미국 원주민 종족들에 대한 정복과 대량학살에 의해 마련된 토양에서 꽃피웠다는 그 역사를 인정한다면 분리에 대한 그의 주장은 훨씬 더 이해될 만할 것이다. 그런 한줌의 역사적 정직성만으로도 미국, 캐나다, 이스라엘을 막론하고 이민자 사회가 실은 정착민 사회라는 사실이 명확해질 것이다.

자발적 이민자와 비자발적 비이민자의 차이는 단지 미국인과 유럽인의 차이만은 아니고 미국 내부집단 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포착한다. 왈저 역시 그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물론 인디언 부족들과 멕시코인들처럼 미국의 팽창을 가로막았다가 정복당하거나 합병당한 이들이 존재하며” 또 “강제로 옮겨온 집단들도 있는바 흑인들은 이 나라에 노예로 끌려와서 계속해서 가혹한 억압에 시달렸다.”(W 57면) 그러나 왈저는 그런 식민주의의 문제를 역사적 유물로 간주했다. “미국의 원주민과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같은 토착민들의” 권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마모되었다.”6) 왈저에 따르면 이렇듯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권리가 지워지고 역사적 기억이 흐려지는 것은 이스라엘 내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도 해당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고대 이스라엘 민족만은 예외다. 그는 그런 이스라엘 예외주의에 대해서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한편 두 민족의 미래 문제가 제기될 때면 왈저는 이스라엘 내 “아랍인 부락과 도시에 어떤 종류의 지역적 자치”를 부여할 것을 권하면서도 미국 인디언들의 자치는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치가 허용되더라도 그들의 삶의 방식이 자유주의적인 테두리 내에서 유지될 수 있을지가 전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역사적으로 볼 때 자유주의적이지 않았던 것이다.”7) 왈저는 (강요나 강제에 의한 집단에의 가입, 그리고 게토나 보호구역 같은 특정구역에 묶인 존재방식 같은) 정복이나 극단적 강제를 통해 소수집단에 강요된 속성들을 바로 그들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권리주장을 (종족적인) 구세계에 속하거나 (시간이 흐르면서 권리가 마모되었기에)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한다.

왈저는 인종과 정복의 역사를 자연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미국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이 신생국가의 경계는 여타 국가의 경계와 마찬가지로 전쟁과 외교에 의해서 결정되었고” “이민은 (…) 그 영토에 거주하는 이들의 성격을 결정했다.” 이런 논의과정에서 그는 두가지 두드러지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했다. 첫째는 정복이 미국의 경계뿐 아니라 몸통 자체를 결정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미국인이 이 몸통의 형성에 참여하거나 미국으로의 이민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왈저는 미국의 다원주의가 다수 인종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소수 인종들이 “정치적으로 무력하고 사회적으로 비가시적”이었음에도 미국 다원주의의 “형태”는 “그들의 존재나 그들에 대한 억압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소속집단에 배정되는) 구세계의 합의주의(corporatism)와 (소속집단을 스스로 결정하는) 미국의 자발주의(voluntarism)를 대비시키는 왈저의 입장은 백인이 아닌 인종집단들에는 해당되지 않고, 다수세력인 유럽 출신의 (백인) 정착민으로 구성된 종족집단들에만 유효하다(W 57~58면).

미국예외주의에 관한 글들을 얘기할 때 왈저가 자유주의적 우파에 속한다면 쎄이모어 마틴 립셋(Seymour Martin Lipset)은 학계의 자유주의적 좌파의 일원이다. 산업화된 국가들 가운데 왜 미국에서만 비중있는 사회주의운동이나 노동당이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단일한 문제에 몰두했던 립셋 역시 토크빌에 의지했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비중있던 일군의 좌파 지식인들이 동일한 질문을 제기해왔던 것을 알고 있었다. 예컨대 독일의 사회주의자인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부재하는가?』(Why Is There No Socialism in the United States?)에서, H. G. 웰스(Wells)는 『미국의 미래』(The Future of America)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Socialism Utopian and Scientific)에서, 그리고 안또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미국적 이념’(Americanism)을 탐구한 일련의 원고에서 같은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8) 모든 토크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좌파들 또한 미국에서 좌파적 정치전통이 약한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할 때 봉건적 과거의 부재를 단서로 삼았다. 웰스는 미국에는 사회주의뿐 아니라 토리적(Tory, 왕당파적 보수주의) 전통 또한 결핍되었다고 말하며, 이 결핍의 원인을 두 주요한 사회계급, 즉 토지에 묶인 농민과 귀족의 부재에서 찾았다. 그는 토크빌을 원용하여 전자를 굴종의 전통과, 후자를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연관시켰으며, 또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전체 사회에 대한 국가적 책임의 원천이 된다고 보았다. 엥겔스도 그런 의견에 동의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지속적인 지배는 봉건제가 알려져 있지 않고 시초부터 부르주아적 토대에서 출발한 미국 같은 사회에서만 가능했다.”9) 그람시에게 미국적 이념은 봉건제에서 연유한 엄격한 사회계급이라는 전통적 가치에 구애받지 않는 순수 합리주의의 한 형태였다. 립셋은 그람시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계급에 상관없이 미국인은 모든 이들의 근면의 가치와, 사람보다는 자연을 착취할 필요성을 강조한다.”(AE 87면)

립셋은 신세계 결사의 자발적 본질과 구세계 결사의 귀속적 성격 간의 대조적 면모에 대한 왈저의 논의에서 출발해, 미국정치에서 나타나는 자발주의의 기원을 문화와 영토 간의 분리에서 찾았다. 그는 이런 분석을 미국의 종교집단에 적용하면서 미국의 종교적 삶은 무엇보다도 자발적이고 신도중심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귀속적이고 위계적인 본질을 드러내는 유럽 교회와 분명하게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특권을 보장함으로써 반민주적인 지향이 두드러지게 되는 유럽 교회와 달리 미국 교회는 “신도들의 자치가 교회 운영의 주된 형태인 자발적 결사체라는 것”10)이었다. 세속적인 삶과 종교적 삶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자발주의는 종교와 세속적 영역의 가치체계가 표나게 유사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두 가치체계가 모두 개인의 책임을 강조했고, 모두 귀속적 지위를 부정했다.” 개신교의 두 지배적인 교파인 감리교와 침례교 모두 “‘반귀족주의적 경향’을 강화하는 종교적 교의를 강조했다.”11) 립셋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토크빌, 베버, 그람시와 그밖의 외국인 관찰자들에게 분명한 미국적 특성으로서 그토록 깊은 인상을 남긴 자발적 결사에 대한 강조는 ‘자발적 종교’라는 독특한 미국의 제도와 관련된다.”

제도화된 위계라는 특징을 띠면서, 국가가 보장하는 특권에 의해 강화되는 유럽 교회의 통치방식은 예외인가 표준적 형태인가? 더 너른 세계 속에서의 종교적 삶을 배경으로 종교체험과 제도화된 종교를 이해하고자 했던 학자들은 유럽의 경우가 표준이 아니라 예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개의 분리된 질서즉 종교적 위계가 그 경계를 감시하는 제도종교의 질서와, 국가적 위계가 감독하는 세속 질서 그리고 전자가 후자에 종속되는 상황가 비서구 세계에는 근대의 식민지 기획의 일환으로 도래하지 않았던가?12)

이처럼 놀랍게도 토크빌주의자들의 사유에는 좌우파 할 것 없이 모두 유럽중심주의가 박혀 있었다. 정착민이 유럽의 타락과 전통적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명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연방주의자 논고』(The Federalist Papers)에 썼듯이, 그들은 “우연과 강제”라기보다 “성찰과 선택”에 기반한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정리는 이야기의 일부에 불과했다. 마이클 로긴(Michael Rogin)이 말했듯 “미국이 원초적 순수와 동의가 아니라 강제와 사기 행위에서 기원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 그런 역사를 지워버린다고 해서 죄 없는 시작이 가능해지지는 않았으며, 그 모든 것의 시초에 있는 죄가 드러났을 뿐이다.”13) 이 일군의 토크빌적 사유들은 시야를 봉건적 과거라는 한가지 역사적 부재에 고정시킴으로써 미국사의 압도적인 현존, 즉 미국의 형성과정에서 발생했던 결정적인 사회적·정치적 대면에 주의를 집중할 수 없었다. 그 대면이란 바로 미국의 정복으로서, 그로 인해 미국의 원주민 문제가 비롯된다.

하버드의 남성 동료들이 소수집단을 배제하고 백인의 경험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한 주디스 스클라(Judith Sklar)는 그 역사적인 배제양상에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시민권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이해를 시도했다. “나는 미국 정치사상사가들이 너무나 자주 무시했던 뭔가를 기억하려 했을 따름이다. 그것은 대다수 흑인과 남북전쟁 세대뿐 아니라 노예제 현실에 위협받지도, 그런 현실에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상상력과 공포에까지 미친 노예제의 지속적인 영향이었다.”14) 스클라는 인종과 성에 의거한, 미국 시민권에서의 두 주요한 배제가 가져온 사회운동의 대조적인 궤적을 비교한다. 그녀는 수정헌법 15조가 흑인과 여성에게 다르게 영향을 미친 양상에 초점을 맞췄다. 수정헌법 15조가 “흑인 유권자에게 충분치 않았다면”, “여성에게는 전혀 해준 게 없었다.” 그로 인한 “통렬한 분노”는 “여성참정권 운동의 불행한 시기”로 이어졌는데, 스클라는 그 시기가 “나의 서사에 특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시기는 지위(standing)로서의 시민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클라는 자신의 서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노예폐지론이 여성참정권 운동의 직접적인 기원이었지만, 투표권이 없는 여성들은 흑인 남성들이 여전히 자신은 갖지 못한 권리를 얻는 것을 보는 즉시 깊은 인종주의를 표출했고, 그들이 남부 여성의 지지를 촉구하면서 그런 인종주의는 더 악화되었다. (…) 웬델 필립스가 “한번에 한 문제씩만. 지금은 흑인의 시간이다”라고 외쳤을 때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은 그의 연설을 듣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들은 자신의 지위가 흑인보다 높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그것은 근시안적인 행동이었다.(AC 57~58면)

 

결국 단지 소수집단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배제하고 다수집단을 끌어안는 왈저의 미국찬양과 비교할 때 소수집단의 배제 역사를 대면하려는 스클라의 시도는 도덕적으로 강렬하면서 정치적인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스클라의 분석 역시 앞선 논자들과 마찬가지로 인디언 문제를 고려대상에서 제외했다. 종족, 인종, 성 같은 이전의 배제범주와 달리 원주민 문제는 미국 시민권에 대한 찬양에 훨씬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된다. 원주민 문제에 적극적으로 임하려면 미합중국 정체(政體) 자체의 윤리와 정치를 심문할 필요가 있다. 미합중국이라는 정치적 기획 자체를 새롭게 사유하고 다시금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미국 스스로 주창한 미국의 반식민주의적 정체성은 의문에 부쳐질 것이다. 미국이라는 정치적 기획의 식민주의적 성격을 부각하려면 미국을 이해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세계에서의 미국의 위상과 미래세대를 위한 미국의 정치개혁 과제를 철저히 사유하는 데 필요한 패러다임 말이다.

미국의 정치이론이 부재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경향이 있다면, 미국의 의미를 규정하고자 정치사를 썼던 이들에 대해서 같은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들은 독특한 미국적 경험—즉 부재하는 것보다 존재하는 것을 찾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 경험을 변경(邊境, frontier)으로 정의했다. 미국의 변경에 대한 글들은 서로 다른 두 노선, 즉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으로 갈렸다. 자연 노선에서 변경은 황야였고, 사회 노선에서 변경은 인디언이었다. 두 노선은 각기 독특하면서도 지배적인 미국의 정치운동인 인민주의적 농본주의(populist agrarianism)와 혁신주의(progressivism)에 역사적 근거를 제공했다.

황야로서의 변경이라는 관념은 1893년 프레드릭 잭슨 터너(Frederick Jackson Turner)가 미국역사학회에서 행했던 ‘미국사에서 변경의 의의’(The Significance of the Frontier in American History)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가장 훌륭하게 상술되었다. J. H. 엘리엇(Elliott)이 주장하듯이 터너는 변경이 “창의성과 강인한 개인주의를 고무하기에, 독특하게 ‘미국적인’ 성격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했다.15) 변경의 존재가 미국의 독특한 역사와 정치경제를 이해하는 열쇠라는 터너의 가정을 받아들인 유명한 역사가로는 찰스 비어드(Charles Beard)가 있다. 그에게 변경은 하나가 아니라 다수였고, 연이은 파도와 같았다. 대서양을 건너는 파도, 해안에서 앨러게니(미국 동부 펜실베니아 주옮긴이) 지역에 이르는 파도, 앨러게니 개척지를 가로지르는 파도 등등으로 이어졌다. 미국사를 구성한다고 간주되는 연쇄적인 단계에 대한 비유로서 변경의 호소력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 비유는 1960년 대통령 취임식에서 새로운 변경을 중심으로 힘을 모으자는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의 호소에도 등장했다. 각각의 변경은 밖으로 뻗어나갔고, 그런 움직임은 항상 혁신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많은 사람들에게 변경은 미국사의 결정적인 이데올로기적 경쟁, 즉 서부와 동일시되던 민중세력과 동부와 동일시되던 중앙집권적 세력과의 경쟁이 펼쳐지는 투쟁의 장소였다.16)

변경론이 사회나 정치체제보다 자연에 집중하는 만큼, 그것은 치명적인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우선 (‘신의 피조물’로서) 자연은 보편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미국적 경험의 독특성을 설명할 수 없었다. 정착민이 정복한 땅은 다양한 정도로 이미 개간된 상태였기에, 그곳은 경작지이자 역사적 풍경이지 자연이 아니었다. 그래서 황야로서의 변경이라는 관념과 더불어, 뒤틀린 형태로나마 이같은 약점을 인식했던 또 하나의 변경론이 발전했다. 그것은 정치사가들의 작업으로서, 그들의 글은 성찰적이기보다는 통치의 도구적 성격이 강했다. 두 노선의 대조적인 면모는 이데올로기적인 경쟁으로 발전했는데, 각각의 노선이 지지하는 지배적인 정치적 입장은 인민주의와 혁신주의였다.17) 인민주의가 미국사에 대한 농본주의적 읽기를 부각했다면, 혁신주의의 미국사 읽기는 인디언 전쟁을 필터로 삼았다. 농본주의적 인민주의에서는 인디언 전쟁을 언급하더라도 그럴 때 그 전쟁은 일종의 전사(前史)였지 미국사의 진짜 알맹이는 아니었다. 진짜 행동은 민주적인 자작농(yeoman farmer)의 일이라고 서술되었으니, 그들 각자의 고된 노동 덕에 토지의 개간과 경작, 그리고 변경의 계속적인 확장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리처드 슬롯킨(Richard Slotkin)이 미국의 폭력에 관한 뛰어난 연구서에서 썼듯이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적인 정신을 꽤나 흡사하게 구현한) 이 집단적 영웅은 미국의 변경에서 민주화 과정을 전개시킨 공이 있었다. 미국에서 이런 농본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관념을 발전시킨 이들로는 토마스 제퍼슨과 앤드류 잭슨이 있다. 터너와 마찬가지로 이 농본적 인민주주의의 이데올로그들은 변경의 역사에서 폭력이 맡은 역할을 주변화했다.18)

인민주의가 터너로부터 영감을 받아 미국의 위대한 업적을 자연을 길들인 것으로 설명했다면, 혁신주의는 미국의 과거에 대한 자신들의 읽기에서 뻔뻔하게도 인디언 전쟁을 중심에 놓았다. 농본주의적 인민주의가 미국의 역사를 경제적 렌즈를 통해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세로보았다면, 혁신주의는 같은 역사를 정치적 렌즈를 통해 살폈다. 그들이 본 정치적 투쟁은 인종 간의 지배권 싸움이었다. 그 핵심에 자리한 정착민과 원주민의 투쟁은 문명과 야만 간의 역사적 대결로 그려졌다. 인디언을 몰아내는 일은 말하자면 “초장에 한꺼번에 이뤄지지 않으면서” “미국은 계속해서 변경에서 다시 시작했고, 미국은 그렇게 대륙으로 뻗어나가면서 인디언 부족들을 연달아서 죽이고 제거하며 멸절로 몰아갔다.”(F 3면)

이것이 미국의 기원신화로서의 역사인데, 그 서사는 19세기 후반에 출간된 서부에 관한 두 역사서에도 등장한다. 하나는 프랜시스 파크먼(Francis Parkman)의 저술이고, 또다른 책의 저자는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다. 1859년에서 1892년에 걸쳐 간행된, 식민지시대 인디언 전쟁에 관한 파크먼의 기념비적인 역사서는 부족 간 경쟁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고, 그 이야기는 역사적 정설로 자리잡게 된다. “파크먼의 생각은 인디언 간의 전쟁은 전형적으로 그 목표와 전략 면에서 상대 종족의 멸절과 몰살을 추구했다는 것이다.”19) 그런 규정은 인디언 전쟁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정착민의 교전방식을 인디언에게 투사한 것에 가까웠다. 파크먼은 “루즈벨트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명”이었을 뿐 아니라 “역사가로서 그의 모델”이었다.(G 35면) 그 영향은 『서부의 획득』(The Winning of the West)이라는 제목을 단 루즈벨트의 7권짜리 저서에 분명히 드러난다. 루즈벨트의 서부는 인간과 황야의 대결이 아니라 지배권을 둘러싼 인종들 간의 다윈주의적 경쟁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슬롯킨은 루즈벨트가 “힘과 폭력을 주로 대규모 사냥 이야기를 통해 재현함으로써 ‘자연화’한다”고 쓴다.(G 45면) 이 책에서 미국의 팽창을 주도하는 핵심 주체는 “인디언을 아는 남자”이다. 그런 존재로는 허구적인 호크아이(Hawkeye: 쿠퍼 James Fenimore Cooper 소설에서 인디언 칭가츠Chingachgook 친교를 나누는 백인 남자 주인공옮긴이)부터 역사적인 인물인 대니얼 분(Daniel Boone), 대비 크로킷(Davy Crocket), 무장 순찰대원인 로버트 로저스(Robert Rogers), 킷 카슨(Kit Karson), 쌤 휴스턴(Sam Houston), 그리고 특히 “세명의 사냥꾼대통령인 워싱턴과 잭슨, 그리고 링컨”을 꼽을 수 있다.(G 42면) 인디언 전쟁은 이런 역사를 끌어가는 동력이다. 그 전쟁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서 벌어지며, 그곳의 속성상 불가피한 것이며 최종적인 성격을 띤다. 루즈벨트의 말을 빌리자면, “변경에서의 삶의 핵심 면모는 정착민과 인디언 간의 끊임없는 전쟁이다. 평화는 야만인에게서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내거나 심지어 그들을 멸절시킬 때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평화는 “같은 정신을 느끼는” 존재들 사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G 52면) 이같은 말은 그 삶의 방식이 “역사적으로 볼 때 자유주의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로 미국 인디언의 자치에 반대한 왈저의 입장을 상기시킨다. 오늘날에는 동일한 명제가 평화는 오직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끼리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민주주의적 평화의 명제로 재정식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마치 무장한 마피아 조직이 다른 갱단과의 지속적인 대립상황을, 유일한 평화는 무장을 통한 평화라는 진부한 주장을 위한 근거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국예외주의의 주요 판본을 대표하는 이들은 봉건제의 부재로 말미암아 미국에서 중앙권력은 약한 반면 개인의 자유는 공고해졌다는 데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강력한 중앙권력이 발전했는데, 봉건제를 몰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예제를 폐지하고 이어서 식민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그 전쟁의 첫번째 상대는 인디언 부족이었고, 이어서 주변국가와, 그 이후에는 전세계가 적수로 등장했다. 에릭 포너(Eric Foner)는 개인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과 관련하여 중앙권력과 지방권력 형성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두 순간으로 미국혁명과 남북전쟁을 대비시킨다. 미국혁명이 개인의 권리에 중앙권력이 주요한 위협을 제기하리라는 염려에 의해 추동되었다면그런 가정이 수정헌법의 첫 10개 조항(Bill of Rights)을 낳았다, 남북전쟁 후에 그런 관점이 뒤집히면서 이제 자유는 중앙보다는 지역정부 때문에 위험에 처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재건기의 정책경향은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주()의 권력을 희생해 중앙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20)

수정헌법 제14조는 주의 권력을 제한하고 의회의 권한을 증대함으로써 남북전쟁으로부터 촉발된 새로운 국가건설 과정을 진전시켰다. 1867년의 재건법(Reconstruction Acts)은 (테네시 주를 제외한) 남부연방 소속 11개주를 5개의 군사구역으로 분할하고, 그 사령관들이 군대를 동원해서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도록 했다. 동시에 의회는 인신보호법(Habeas Corpus Act)을 통과시킴으로써 지역법정에서 연방법정으로 이송할 수 있는 시민의 권한이 크게 신장되었다.21) 4년 후 의회는 지역의 폭력을 제어하기 위해서 더욱 전면적인 조치를 담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1871년 제정된 쿠클럭스클랜법(Ku Klux Klan Act)은 개인이 자행한 특정 종류의 범죄를 지목해서 연방법에 의거해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즉 그 법령은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침해하는 폭력을 연방법상의 범죄로 규정했던 것이다. 그 법령은 주의 사안에 광범하게 개입하는 권한을 연방정부에 부여했다. 주 당국이 승인할 경우 “시민에게서 선거권이나 피선거권, 그리고 배심원으로 복무하거나 법의 평등한 보호를 누릴 권리를 박탈하려는 음모”는 해당 지역 연방검사의 기소대상이 될 수 있었다.22)

이처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정치참여를 진작하는 조치들이 도입되던 때에 인디언은 동일한 정치공동체에서 오히려 결정적으로 배제되고 있었다. 두 변화 모두 확장된 연방권력에 의해 강제되었고, 그 변화들은 다시 그같은 권력확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거론되었다. 헌법 제21항과 마찬가지로 수정헌법 제14조는 명쾌하게도 “과세대상이 아닌 인디언”, 즉 보호구역에 살고 있는 부족 소속의 인디언을 국회의원을 선출하거나 국회의원으로 선출될 권리에서 배제했다.23) 아킬 리드 아마르(Akhil Reed Amar)가 지적했듯이, “이같은 인디언의 배제는 관련법인 1866년의 민권법(Civil Rights Act) 법령집 1427호에서 한층 명백한 언어로 표현되었다.”24) 그 법조문은 출생에 의한 시민권의 원칙을 법제화하면서도 인디언을 배제했다. “과세의 대상이 아닌 인디언을 제외하고, 미국에서 태어났고 외국 권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모든 사람은 이로써 합중국의 시민이라고 선포되는 바이다.”25) 인디언은 시민권을 부여받기는커녕 보호구역이라고 알려진 폐쇄지역에 무더기로 수용되어 반 감금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남북전쟁 이후 링컨이 시작했던 보호구역 건설은 1869년 율리시스 S. 그랜트(Ulysses S. Grant)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가속화되었다. 미국사에서 미국혁명 이후 최초의 위대한 민주적 개혁시대였던 재건기는 합중국이라 불리는 정치공동체에 인디언이 포함되리라는 희망을 확실히 봉쇄했다.

미국의 자서전 중에서 가장 통렬하면서도 면밀한 부류는 원주민 문제가 아니라 인종 문제를 다룬다. 다른 어떤 사안보다 인종이, 그리고 점차 젠더가 미국에서 개혁의 최전선에 자리하게 되었다. 하츠(L. Harts)가 주목했듯이 노예제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인종에 기반한 정치적 동원은 민주당 전체의 해체로 이어졌다.26) 최근의 이민법 개혁 투쟁의 동력이 거주권과 시민권을 얻기 위한 라티노의 싸움에서 나왔듯이, 과거 미국의 시민권 투쟁은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투쟁으로부터 활력을 끌어왔다. 미국의 가장 위대한 사회적 성취가 인종이라는 전선에서 거둔 것이라면, 식민주의라는 전선에 대해서는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인종 문제가 미국사회 개혁의 최첨단을 표시한다면 원주민 문제는 그 개혁의 한계를 선명히 보여준다. 미국의 정치투쟁 방향은 탈인종화하는 것이었지 탈식민화하는 것은 아니었다. 탈인종화한 미국은 여전히 정착민의 사회이자 정착민의 국가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미국 인디언 간에는 정치적·사회적 위치상의 중요한 차이가 존재할 뿐 아니라 이 차이는 또한 두 집단 간에 해방 및 해방전략에 관한 공통의 전망이 부재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정착민에게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노동을 뜻한 반면, 미국 인디언은 땅의 원천이었다. 정착민이 흑인노예를 개인으로서 지배하고자 했다면, 미국 인디언의 경우에는 종족 전체를 정복하려 했다. 법의 언어로 말하자면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길들일 수 있는 개와 같은 존재인 반면 미국 인디언은 야생의 존재로 남아 있는 고양이 같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아프리카로 돌아가거나 미국에 남아 평등한 시민권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양자택일의 상황—마커스 가비(Marcus Garvey)는 아프리카로의 귀환을, 두 보이스(W. E. B. Du Bois)는 평등한 시민권을 주창했다을 마주했다면, 미국 원주민에게 그런 구분되는 대안은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 원주민 집단들은 계속해서 종족별 주권확보를 통한, 외견상으로나마 독립을 요구했다. 그 관점에서 보자면 평등한 시민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은 최종적인 패배, 즉 전면적인 식민화의 수용을 가리는 것처럼 보인다. 평등한 시민권을 위해 투쟁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공감하는 미국인으로서는, 인종 문제를 논하는 것이 종종 원주민 문제를 회피하는 방편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경험은 예외적이면서 선구적이다. 미국이 예외적인 것은 미국에 무언가가 부재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곧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어떤 미국의 자서전은 이 나라를 근대 최초의 반식민주의혁명이 낳은 최초의 신생국가라고 여긴다. 오로지 이런 역사만을 칭송할 때 대중의 의식에서는 미국의 형성에 훨씬 본질적인 역사적 사실, 즉 미국 인디언의 정복과 학살이 감춰지게 된다. 미국은 그냥 최초의 새로운 국가가 아니라 근대 최초의 정착민 국가이기도 한 것이다. 미국이, 미합중국이 예외적인 것은 아직까지도 공적 영역에서 탈식민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이 사실의 중요성을 명확하게 인식한 것은 1993년 국가의 한 형태로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남아공의 백인우월주의적 인종차별정책으로, 1948년 공식화되었다가 1994년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면서 폐지옮긴이)를 연구하기 위해 처음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나는 아파르트헤이트의 기본적인 제도가 그 나라와 더불어 그런 명칭이 생기기 한참 전에 이미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아공에서 아프리카계 인구의 인종청소는, 원주민토지법(Native Land Act)이 제정되어 전체 국토의 83%를 백인 소유로 선포하고 원주민 인구에게 할당된 나머지 13%의 토지를 각 부족의 자치구역(homeland)으로 분할했던 1913년에 이미 시작되었다. 이 자치구역은 보호지(reserve)로 불렸다. 나는 그 명칭이 왜 그렇게 미국의 인디언 보호구역(reservation)과 기묘할 정도로 비슷하게 들리는지 궁금했다. 그 해답은 오싹한 역사적 진실을 밝혀주었다. 1910년 남아공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같은 해 이 정착민 국가의 신생정부는 북미, 더 구체적으로는 미국과 캐나다에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원주민 종족의 자치구역을 설립하는 법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시설은 북미에서 최초로 반세기 전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렇듯 미국의 보호구역은 남아공의 보호지가 되었다.

식민주의의 역사 속에 편입되었을 때 미국은 정착형 식민주의의 역사와 기술 면에서 예외라기보다는 선구자로 보인다. 정착형 식민주의의 그 모든 결정적인 제도들은 북미의 원주민을 통제하기 위한 기술로 만들어졌다. 그런 기술들 중에 최초는 종족별 자치구역에 원주민을 모아서 관리하는 것이었다. 나치에 영감을 준 원형적인 강제수용소는 보어전쟁 기간에 보어족을 감금하기 위해 영국인이 건설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링컨과 그랜트 대통령의 감독 아래 인디언 부족을 감금하기 위해 만들어진 보호구역이 그 원형이었다. 남아공의 보호지나 영국이 간접통치하는 식민지의 부족자치구역과 마찬가지로 인디언 보호구역은 다른 기본제도와 더불어 운영되었다. 그중 하나는 두 병렬되는 제도로 대변되는 분리된 통치체계였다. 한편에는 선출되지도 책임지지도 않는 원주민 권력이, 다른 한편에는 이 원주민 권력이 휘두르는, 역시 마찬가지로 책임을 묻지 않는 관습법 체계가 있다. 보호구역 형성에서 두번째 기본적인 제도는 통행권 제도(pass system)라고 알려진 기술이었다.

통행권 제도는 미국 남부의 노예농장에서 최초로 생겨났고, 농장 밖으로 나가는 노예의 이동을 규제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다수의 노예들은 (여러 다른 농장에 흩어져 사는 배우자와 자식을 포함하여)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농장 방문은 인근 도시 방문과 마찬가지로 통행권 제도를 통해 감시되었다. 통행권 제도는 노예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흑인 통제의 결정적인 수단이 되었다. 이 제도로 말미암아 흑인은—그 사람이 법을 어겼건 어기지 않았건—심문, 신체수색, 매질, 폭행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의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27) 미국의 보호구역과 남아공의 보호지에 관해서 말하자면 통행권 제도는 식민화된 아프리카인에게 시행되기 훨씬 이전에 아파치족과 그밖의 여러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에게 먼저 강제로 시행되었다.

19세기 중반 보호구역체계가 만들어지고 있던 무렵 미국 대법원장 존 마샬(John Marshall)이 내놓은 세건의 역사적 판결은 미국의 한복판에서 식민화된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미국 인디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마샬은 미국 인디언을 자율적이되 자유롭지는 않는 국가 내부의 의존적인 민족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그들은 연방정부의 보호를 받는 피보호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샬의 판결은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미국 인디언에 대한 연방정부의 (실상 감시와 관리에 다름 아닌) 통치에 기본적인 법률적 틀을 제공하고 있다.

독립선언서에서 ‘야만인’으로 악마화되었고, 헌법에서는 권리를 가진 미국인의 정치공동체에 결코 포함되지 않았던 미국의 인디언은 연방 대법원으로부터 미합중국 정부의 피보호자로 취급당해왔다. 1924년 미국 인디언은 시민으로 인정받았지만, 보호구역에 살면서 그 고유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는 한 피보호자이기도 한 유일한 성인 시민이었다. 시민이면서 피보호자이기도 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했다. 보호구역에 사는 인디언은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 즉 연방 대법원의 사법심사가 적용되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 그들은 정치적 권리는 소유하고 있지만 시민적 권리는 없었다. 그들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지만, 하나의 인구집단으로서는 자신의 대표가 부재한 정치기구인 의회가 통과시킨 법령에 지배를 받는 유일한 미국의 성인 시민이었다. 그들이 누리는 어떤 자유도 의회가 허가한 것이니, 그 정치기구는 그런 법조항을 넣고 뺄 권한이 있다. 1964년 제정된 민권법(Civil Rights Act)은 보호구역에 사는 인디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4년이 지나 1968년에 인디언 민권법(Indian Civil Rights Act)이라는, 보호구역에 적용되는 별개의 법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그 법안이 발효한 권리는, 헌법의 보장을 받지 못하고 오직 보호구역 내 원주민 당국에 권고하는 의미를 띨 뿐이다. 미국 인디언의 관점에서 보자면 1776년의 미국혁명은 백인 정착민 인구의 독립으로 이어졌을 따름이다. 그 사건은 혁명보다는 반란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더 잘 이해된다. 미국혁명은 1847년의 라이베리아, 1910년의 백인 남아공, 1948년의 이스라엘 독립과 유사했으며, 가장 최근에 일어났지만 그 의미는 작지 않은 1974년 이언 스미스(Ian Smith)가 주도한 백인국가 로디지아(Rhodesia)의 일방적 독립선언과도 유사했다. 사실 오늘날 미국혁명으로 경축되는 그 사건은 발발 후 150년이 지나도록 독립전쟁이라고 불렸다.28)

남아공, 라이베리아, 이스라엘, 로디지아의 원주민 문제가 근대 세계의 식민지배 역사에 속하듯이, 미국 연방정부와 미국 원주민 관계의 역사 또한 그러하다. 만약 미국예외주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정부기구에 의해 영속적으로 식민화된 인구집단으로 취급당해온 미국 원주민의 운명은 세계 최초의 정착형 식민주의 국가였던 미국이 계속 그런 국가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런 정착경험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은 미국적 상상력의 맹점실상 원주민을 문명화하겠다는 강박에 다름 아닌, 차이와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능력의 결핍을 해명해준다. 미국의 코스모폴리터니즘은 정착자의 시각으로 주조되었으며, 미국의 감수성은 중요한 측면에서 여전히 정착민의 감수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5년 나는 이스라엘의 웨스트뱅크에 위치한 비르자이트(Bir Zeit) 대학을 방문했고, 이어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다른 지역을 여행했다. 그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인종분리정책의 남아공이 이스라엘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렌즈가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식민주의자들이 정착한 미국이야말로 사태를 밝혀주는 데 도움이 되는 유사 사례라고 생각했다. 북미에서처럼 이스라엘의 정착민 또한 노동력의 원천으로서의 팔레스타인 원주민에 관심이 없는데, 그들이 원한 것 역시 땅이다.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자들은 오랫동안 미국인이 인디언을 그들의 땅에서 몰아낸 방식으로부터 영감을 끌어냈다. 최근인 20131222일자 『예루살렘포스트』(The Jerusalem Post)는 네게브 지역의 베두인(Beduin, 아랍 유목민) 정착촌을 규제할 법안을 두고 이스라엘 국회의 해당 소위원회 의장과 한 이스라엘 국회의원이 나눈 대화를 보도했다. 평화와 평등을 위한 민주전선(Hadash) 소속 의원인 한나 스웨이드(Hanna Swaid)가 “당신은 베두인족 전부를 이주시키고 싶은 것이지요”라고 말하자, 리쿠드당 소속의 위원장인 미리 레게브(Miri Regev) 여성의원은 “맞습니다. 미국인이 인디언에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라고 답했다.29) 여기서 탄자니아 대통령이었던, 음왈리무 줄리어스 니에레레(Mwalimu Julius Nyerere)가 1960년대에 팔레스타인 방문단에게 했던 발언, 즉 팔레스타인 사람은 남아공 사람보다 훨씬 가혹한 운명을 겪었다는 진술은 떠올릴 만한 가치가 있다. 니에레레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우리는 주권을 잃었지만, 당신들은 나라를 잃어버렸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의 본질을 밝혀줄 유사한 사례로 남아공보다는 미국을 봐야 한다. 1924년 미국에서 제정된 인디언 시민권법(Indian Citizenship Act)은 일방적으로 “미국의 영토 안에서 태어난 모든 비시민 인디언을 (…) 미국 시민”으로 “선포했다”(‘강제했다’는 뜻이다).30) 그 당시에도 인디언은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으로서 출생에 의한 시민권자가 아니라 귀화한 시민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법적 지위의 구분은 팔레스타인인과 유대계 이스라엘인의 차이에도 적용함직하다. 귀환권(right of return)이라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이스라엘 시민권은 유대인에게만 생득권이지 귀화한 시민과 비슷한 팔레스타인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입증된다. 인디언은 미국에서 시민으로 선포된 이후에도 개별 주에 의해 종종 선거권을 부정당했다. 이런 상황은 이후 수십년간 지속되었다. 오늘날, 보호구역에 사는 미국 원주민과 다른 미국인의 진정한 차이는 정치적 권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권에 있다. 이스라엘에서도 국가는 유대계와 팔레스타인계 시민 모두에게 동일한 정치적 권리를 보장한다. 그러나 평등한 대접은 거기서 끝난다. 보호구역에 사는 인디언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인은 선거권은 물론 피선거권까지 누릴 수 있지만, 동시에 그들은 헌법이 보장하는 시민권이 부정되는 예외상태에서 살고 있다.

 

나는 정치사에 대한 논평으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인디언 부족들과 연방정부 간에 맺은 몇몇 초기 조약을 읽으면 정착민이 처음에는 인디언에게 단일국가 해법(one-state solution)을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일국가 해법의 시기는, 연방이 인디언 부족에게 (말썽을 피우지 않는다면!) 그들이 직접 선출하는 의석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시작됐고, 1830년 앤드류 잭슨이 발의한 인디언 제거법(Indian Removal Act)이 통과되고 미시시피 주 동쪽으로부터 인디언에 대한 인종청소가 개시되면서 끝났다. 잭슨 시대는 학살과 감금의 이중정책을 구사했다. 백인들은 약자의 대량학살이 진보의 불가피한 결과라는 잭슨의 주장에 동의했다. 잭슨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오하이오와 인디애나 주의 아주 작은 두 부족을 제외하고 미시시피 주 동쪽과 미시간 호 남쪽의 모든 인디언 부족은 정부의 제거정책을 따라야 했다.” 1844년까지 “그 정책은 7만명의 남부 인디언을 고향을 잃은 뿌리 뽑힌 존재로 만들었고 (…) 늪과 산악 지역에 흩어져 사는 2천명 남짓의 인디언만 그곳에 남게 되었다.”(F 206면) 다음은 잭슨이 인디언 학살을 정당화한 논리이다.

 

인류는 자주 이 나라의 원주민에게 닥친 운명에 슬퍼했고, 자선단체들은 그 운명을 피할 수단을 찾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진보는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고, 강력한 인디언 부족은 차례로 지상에서 사라졌다. 한 인종의 마지막 생존자를 땅끝까지 추적하고 그 멸종한 민족의 무덤을 밟는 것은 우울한 상념을 자극한다. 그러나 진정한 자선은 이런 운명의 성쇠와 우리의 마음을 화해시킨다. 진정한 자선이 다음 세대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주는 앞 세대의 소멸에 대해 그러듯이 말이다.(F 248면)

 

인종학살의 두번째 폭력 물결은 1850년의 대타협 이후 캘리포니아가 자유 주로서 연방에 가입한 이후에 벌어졌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피터 H. 버넷(Peter H. Burnett)은 캘리포니아 인디언에 대한 대규모 사냥과 살해에 대해 ‘후회하기’를 거부했다. 로긴의 말을 빌리자면, 그 결과는 “인디언 몰아내기라는 잭슨적 기획을 시간, 공간, 잔인성 면에서 압축시킨 인종학살”이었다. 주지사 버넷은 1851년의 연두교서에서 “이 완전한 파괴를 위한 전쟁은 인디언이라는 인종이 멸절할 때까지 두 인종 간에 계속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F xxvi면)

새로 등장한 약속은 미시시피 동쪽의 백인 국가와 그 서쪽의 인디언 국가가 병존하는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이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두 국가 해법이 약속한 인디언 국가는 오클라호마라는 작은 주로 바뀌었다. 그 주는, 주 의회가 연방에서 임명된 주지사 휘하에 있고 주지사는 법령으로 다스린다는 점에서 여타 주와 달랐다. 이런 상황은 더이상 두 국가 해법이 아니었고, 한 백인 주가 법령에 의해 인디언 자치구를 통치하는 형국이었다. 이어서 보호구역이라고 불렸지만 실은 강제수용소의 전신이라 할 만한 것이 등장했다.

보호구역체제는 온정주의의 언어로 치장한 채 나타났다. 식민지시대 이래로 백인 당국은 인디언이 자신들을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대통령부터 변경 주의 주지사, 인디언 보호관, 조약의 협상대표, 장군, 국방부장관, 인디언 감독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디언을 자신의 아이로 칭했다. 잭슨은 1817년 체결되는 체로키족과의 조약을 위한 협상 중에 부모-자식 비유를 쓰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고, 1820년 체결되는 촉타우족과의 조약을 위한 협상과정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붉은 피부색 자녀의 수호자로 내세우는 발언을 기록으로 남겼다. 잭슨은 자신이 (조약에 서명하도록 뇌물을 주었던) 인디언 족장들과 대비되는 “진정한 인디언”의 수호자라고 주장했다.(F 174면) 동시에 그는 의회에 인디언 종족의 “후견인”이 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F 144면). 잭슨의 언어에서 인디언은 (헌법에 등장하는 “야만인”처럼) “야만적인 블러드하운드”(사냥견의 일종옮긴이)에서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 사이를 오갔다. 살아남은 인디언을 아이로 취급하는 어법은, 연방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인디언은 필시 멸절할 것이라는 좀더 포괄적인 주장의 일환이었다. 그런 주장을 거부한 인디언도 많았음에 틀림없다. 그중 기록으로 전해지는 한 사례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William Henry Harrison)과 쇼니족의 족장 테쿰세(Tecumseh) 간의 협상 중에 일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통역자가 테쿰세에게 “너의 아버지가 너보고 의자에 앉으라고 청하신다”고 말하자 그 족장은 “내 아버지라고! 태양이 내 아버지고 대지가 내 어머니다. 나는 어머니의 품에 누울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F 209면)31)

대서양을 건너와 충원되는 정착민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그들은 연이은 물결처럼 인디언에 대한 살육을 감행했다. 인디언들은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어떤 이는 백인들과의 동화를, 다른 이는 저항을 주장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부족들이 잇따라 저항세력과 동화세력으로 나뉘면서 인디언 공동체 내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어떤 경우에는 10년 사이에 다섯차례나 내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양쪽 모두 패배했다. 인디언은 모두 보호구역에 강제 수용되었다. 누구도 미래를 내다볼 수가 없었다. 고립은 절망을 키웠고, 이런 상황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을 낳았다.

이 비극적인 역사에도 저항의 불꽃이 일어난 순간들이 있었다. 가장 장렬한 인디언의 저항, 희망의 불씨를 계속 깜박거리게 했던 저항은 적들이 분열했을 때, 즉 영국과 프랑스가, 정착민과 영국이, 남과 북이 싸웠을 때 일어났다. 그때를 제외하면 인디언은 고립되었고, 봉쇄되었으며, 무력화되었고, 패배했으며, 사기가 꺾였다.

이 지점에서 팔레스타인과의 유비는 끝난다. 인디언은 서구라고 알려진 근대적 힘의 구성체이자 그 인종과 제국이 득세하던 세계와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고 있다. 밥 딜런(Bob Dylan)의 인상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시대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the times they are a-changing!). 지금 우리는 1492년에 시작되어 5세기에 걸쳐 지속되었던 서구지배 시대의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 또한 과거 미국 인디언이 그랬던 것처럼 고립되고 강제 수용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랍의 봄이라고 알려진 격렬한 정치적 소요를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여전히 상황은 오리무중이며 평가 또한 엇갈리지만 한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중동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고립은 점차 과거의 일이 되고 있다. 나는 어떤 완결된 상황이 아니라 하나의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필연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무언가가 가능해졌다. 이제 자유로운 팔레스타인과 민주적인 이스라엘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최종결과가 하나의 국가인지 두개의 국가인지 아니면 다수의 국가인지는 실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문제는 이 국가들이 민주적으로 형성되느냐이다.

탈식민화되는 것은 세계 최초의 정착형 식민지인 미국에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인디언 학살이 이미 자행되었고 소수의 인디언만이 살아남은 마당에 그런 질문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은 충분히 가치있다. 유대인의 학살이 자행된 이후에 독일을 탈나치화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그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유대인 생존자에게, 그리고 그들과 독일의 관계에 협소하게 초점을 맞추는 태도를 넘어서 그런 학살에 의해 가능해지고 강화된 제도들과 사고방식을 폭넓게 주목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 제도들과 사고방식이야말로 학살 이후 독일사회의 이데올로기적·제도적 구성 자체와 대외관계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미국의 저명한 인디언 관련법 전문가이자, 다른 미래를 생각하도록 자극했던 펠릭스 코헨(Felix Cohen)의 말을 떠올려봐도 좋겠다. 그는 홀로코스트 이후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몹시 긴장된 상황에서 저술활동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남겼다.

 

인디언은 우리 미국사회에서 유대인이 독일에서 맡았던 것과 흡사한 역할을 하고 있다. 광부의 카나리아처럼 인디언은 우리의 정치적 환경이 신선한 공기에서 독가스로 바뀔 때 그 변화를 알려준다. 더불어 인디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 우리의 민주적 신념이 부침하는 양상을 반영한다.32)

 

우리는 이 말을 덧붙일 수 있겠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현재 이스라엘 사회에서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고.

번역 | 이정진(李廷進)·서울대 영문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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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ouis Hartz, The Liberal Tradition in America: An Interpretation of American Political Thought since the Revolution, New York, 1991, 35면. 앞으로는 LT로 줄여 표기한다. 토크빌의 미국에 대한 설명은 다채로워서 다수의 전제(專制)부터 맹렬한 개인주의, 그리고 예술의 부재까지 여러 주제를 포괄한다. Alexis de Tocqueville, Democracy in America, trans Arthur Goldhammer, 1835; New York, 2004.

2) 남부의 농장제도와 유럽의 봉건제 간의 연관관계를 지적해준 하운 쏘시(Haun Saussy)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3) Michael Walzer, What It Means to Be an American: Essays on the American Experience, New York, 1996, 14면. 앞으로는 W로 줄여 표기한다.

4)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New York, 2006, Eugen Weber, Peasants into Frenchmen: The Modernization of Rural France, 1870-1914, Stanford, Calif., 2006을 참조하라.

5) 이 나라에서는 “민족성과 종족성이 안정적인 영토적 근거를 확보한 적이 결코 없기에” “민족자결에 대한 구세계의 요청이 이곳에서는 전혀 호소력이 없었다.”(W 58면)

6) Walzer, Thick and Thin: Moral Argument at Home and Abroad, Notre Dame, Ind, 1994, 72면.

7) Walzer, On Toleration, New Haven, Conn, 1997, 43, 46면.

8) Seymour Martin Lipset, American Exceptionalism: A Double-Edged Sword, New York, 1996, 87면에서 재인용. 이후 AE로 줄여 표기함.

9) Neil Davidson, How Revolutionary Were the Bourgeois Revolutions?, Chicago, 2012, 159면에서 재인용.

10) Lipset, The First New Nation: The United States in Historical and Comparative Perspective, New Brunswick, N.J., 2003, 159면.

11) 같은 책 162면.

12) Talal Asad, Genealogies of Religion: Discipline and Reasons of Power in Christianity and Islam, Baltimore, 1993과 Formations of the Secular: Christianity, Islam, Modernity, Stanford, Calif, 2003을 보라.

13) Michael Paul Rogin, Fathers and Children: Andrew Jackson and the Subjugation of the American Indian, New Brunswick, N.J., 2009. 이후로는 F로 줄여 표기함.

14) Judith N. Sklar, American Citizenship: The Quest for Inclusion, Cambridge, Mass., 1991, 22면. 이후로는 AC로 줄여 표기함.

15) J. H. Elliott, Empires of the Atlantic World: Britain and Spain in America 1492-1830, New Haven, Conn, 2006, xiv면.

16) Richar Slotkin, The Fatal Environment: The Myth of the Frontier in the Age of Industrialization, 1800-1890, Norman, Okla.,1985, 37~39, 41, 283면.

17) 그밖에도 “비인민주의적 농본주의처럼 주류가 되지 못하고 거부당한 대안적 입장들”도 다수 존재했으며, “그런 입장들은 주류정당에서 갈라져 나온 소수당(splinter-party)과 당내의 소수분파를 통해 살아남았다.” 하운 쏘시가 필자에게 보낸 이메일(2013.11.21)에서 인용.

18) Slotkin, 앞의 책 52, 55면을 참조하라.

19) Slotkin, Gunfighter Nation: The Myth of Frontier in Twentieth-Century America, Norman, Okla., 1992, 35면. 앞으로는 G로 줄여 표기한다.

20) 1865년에 반노예제 운동가들이 창간한 『네이션』(The Nation)은 이미 2호에서 연방정부의 권력과 단일한 시민권 간의 연관관계를 분명히 밝혔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민주적인 형식 아래 국민적 결속이 강화되는 새 시대가 열리게 된다. (…) 이 전쟁의 최대 사안은 나눌 수 없는 단일한 국민과, 독립적인 주들의 느슨하고 변화 가능한 연방 간의 관계였다.” Eric Forner, Reconstruction: Americas Unfinished Revolution, 1863-1877, New York, 1988, 24~25면에서 재인용.

21) 같은 책 276~77면을 보라.

22) 같은 책 454~55면.

23) 미국 수정헌법 제14조 2항.

24) Akhil Reed Amar, Americas Constitution: A Biography, New York, 2005, 439면 각주.

25) 민권법 법령집 14권 27호, 1866.

26) Lewis Harts, The Founding of New Societies: Studies in th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Latin America, South Africa, Canada, and Austrailia, New York, 1964, 94~95면을 보라.

27) Sally E. Hadden, Slave Patrols: Law and Violence in Virginia and the Carolinas, Cambridge, Mass., 2001과 Stanley W. Campbell, The Slave Catchers: Enforcement of the Fugitive Slave Law, 1850-1860, Chapel Hill, N.C., 1970을 보라.

28) 쏘시가 필자에게 보낸 이메일.

29) Ariel Ben Solomon, “MKs Learn Beduin Did Not See, Agree to Resettlement Plan Threating Bills Passage,” The Jerusalem Post, 2013.12.10(www.jpost.com/Diplomacy-and-Politics/MKs-learn-Beduin-were-in-the-dark-over-resettlement-plan-threatening-bills-Knesset-passage-334502).

30) 인디언 시민권법(Indian Citizen Act), 1924. 필자의 강조.

31) 붉은 피부색의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에 대해서는 F 185, 188면을, 아이 취급하는 어법은 208, 292면을 보라. 가난한 인디언들을 “타락하고 전제적인” 부족의 통치에서 “해방하는” 것에 대해서는 292면을, 온정주의에 대한 테쿰세의 도전에 대해서는 209면을 보라.

32) Rennard Strickland, “Genocide-at-Law: An Historic and Contemporary View of the Native American Experience,” University of Kansas Law Review 34 (Summer 1986) 719면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