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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도미야마 이치로 『유착의 사상』, 글항아리 2015

우리, 떠나온 자들

 

 

고병권 高秉權

unzeit@gmail.com

 

 

169촌평-고병권_fmt『유착의 사상: ‘오키나와 문제’의 계보학과 새로운 사유의 방법』(심정명 옮김)이 다루고 있는 ‘오끼나와(沖繩)’라는 시공간은 내게 무척 낯설다. 나는 그곳을 한번도 가본 적이 없고 그 역사를 공부한 적도 없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토미야마 이찌로오(富山一郞)가 부제에서 그 이름에 따옴표를 쳐서 제기한 문제는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다. ‘오끼나와 문제’가 ‘오끼나와의 문제’로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 느낌이 없다면 나는 오끼나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오끼나와 문제’를 말하는 이 짧은 글을 감히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6년 전쯤 나는 오끼나와의 운명을 월남의 이름으로 조선에 실어 보낸 독특한 텍스트 하나를 읽은 적이 있다. 그것은 ‘을사조약’(1905) 직후 조선에 번역된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라는 책이다. 이 책은 프랑스에 의한 월남의 패망과 식민화에 대한 이야기인데, 당시 일본에 의한 동일한 운명을 예감하던 조선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책을 쓴 월남인 판보이쩌우(潘佩珠)는 그에 앞서 일본에 의한 류우뀨우(, 오끼나와의 옛 이름)의 패망을 다룬 『류구혈루신서(琉球血淚新書)』를 펴낸 바 있다. 그는 류우뀨우인들이 어떻게 패망하고 식민화되었는지를 월남인들에게 전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류우뀨우의 패망은 월남인들에게 목격되었고, 월남인들의 패망은 조선인들에게 목격되었다. 류우뀨우인들을 바라보는 월남인들, 월남인들을 바라보는 조선인들. 동일한 운명을 예감했기에 한편으로 동정했고 다른 한편으로 도망치고 싶었던 목격자들. 이들에게 다른 어떤 역사의 꿈, 현실화된 것과는 다른 어떤 역사의 가능성이 있었을까. 이 책 『유착의 사상』을 읽으며 나는 예전의 이 물음을 다시 떠올렸다.

칸트(I. Kant)는 말년에 쓴 어느 글에서 혁명은 목격자들의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말하자면 프랑스혁명은 자기 일이 아닌데도 자기 일로 받아들였던 구경꾼들(프랑스의 일을 마치 제 나라의 일인 양 받아들이고 지지했던 이들)의 공감하는 열정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루쉰(魯迅)은 구경꾼들을 경멸했다. 그는 자기 일일 수 있는데도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구경꾼에게서 노예의 형상을 발견했다. 누가 옳은가. 칸트인가 루쉰인가. 물론 이 질문은 우스꽝스럽다. 사건의 순간 구경꾼들에게는, 이 책의 저자가 자주 쓰는 표현처럼, 일종의 ‘대전(帶電)’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휘말림과 밀쳐냄, 굳게 쥔 주먹과 식은땀, 양전하와 음전하가 동일 운명을 예감하는 목격자들에게 동시에 생겨난다. 그러니까 칸트의 구경꾼과 루쉰의 구경꾼은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118면)다.

나는 오끼나와인들에게서 그들을 보던 월남인들, 또 월남인들을 보던 조선인들을 본다. ‘오끼나와’는 이들 모두가 서 있거나 예감했던 어떤 장소, 세계 곳곳에 편재하는 어떤 독특한 시공간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닐까. 그것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제당업이 일거에 무너지면서 일어난 이른바 ‘소철지옥(蘇鐵地獄)’ 이후 고향을 떠나야 했던 오끼나와인들은 물론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고향이나 나라의 상실, 즉 식민화된 삶을 예감하거나 실감하는 사람들, 심지어 자기 나라에서조차 ‘나라 없는’ 삶, 어떤 내버림과 내쫓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시공간이 아닐까.

‘오끼나와’가 이러한 시공간의 이름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국경’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내게 ‘오끼나와 문제’는 ‘국경 자체’를 사고하는 문제(오끼나와는 어떤 점에서 통째로 국경이다)이고, ‘국경에서의 삶’, 저자가 인용한 호미 바바(Homi K. Bhabha)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라(고향, 집)에서가 아닌 삶’(unhomely lives)을 사고하는 문제로 보인다. 주지하듯 국경은 ‘떠나 온’ 사람들의 시공간이다. 국경에 ‘온’ 사람들은 ‘홈(home)’을 ‘떠난’ 사람들이다. 이들의 머무름은 떠남에서 시작되었고, 이들의 정주는 이탈의 예감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런 삶의 형식을 저자는 ‘유착(流着)’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국경’을 사고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우리는 국경을 지도에 표시된 ‘국가와 국가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과 곧잘 혼동하기 때문이다. 국가 사이에 그어진 선()으로서의 국경은 국가 안에 존재하는 국경을 사고하지 못하게 하며, 무엇보다 국경 자체가 하나의 시공간이라는 생각을 못하게 한다. 마치 그것은 어떤 삶의 평면을 접어 넣고 꿰매버린 봉합선 같다. 그러므로 ‘국경’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경을 하나의 ‘면’으로서, 그것도 곳곳에 편재하는 삶의 일정한 시공간으로서 ‘확보’해야 한다.

언젠가 나는 남한에 온 탈북자들이 평균 3~4년, 길게는 10년 가까이의 시간을 중국 등에서 보낸다는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다. 남한으로 오기까지 탈북자에게는 중국이 통째로 국경일 것이다(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국경을 넘고서도, 말하자면 남한에서도 여전히 국경에서의 삶을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어떤 미등록이주자에게는 한국이 통째로 국경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국경은 사실상 모든 영토에서 모든 시간 동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모든 영토는 언제든 국경이기도 하다.

또한 국경은 ‘영토의 바깥’이지만, 영토(territory)가 법적 개념인 한에서 ‘법 바깥’, 즉 치외법권(extraterritorial) 지대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국경이 국가의 아무런 권력도 미치지 않는 자유지대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법의 효력이 정지된 계엄상황이 그렇듯이, 여기서는 국가권력의 초법적인 신문(訊問)이 이루어진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누구인지를 신문당할 수 있는 장소, 그곳이 국경이다. 여기서 신체들은 대전된 입자가 된다. 군인의 제복만 봐도 근육은 긴장되고 이마에는 땀이 맺힌다. 신체는 무언가를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 긴장된 근육은 신체의 앎이고 신체의 말이다. 이것은 개념 이전에 일어나는 정동(affect)의 흔들림이며(말 이전의 말), 정신의 사유 이전에 일어나는 신체의 사유이고(사유 이전의 사유), 신체가 운동하기 이전에 신체 안에서 일어나는 운동이다(운동 이전의 운동).

『유착의 사상』에서는 이러한 ‘말 이전의 말’ ‘사유 이전의 사유’ ‘운동 이전의 운동’ ‘앎 이전의 앎’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본래 서양어에서 동사(verb)는 말(라틴어 verbum)을 뜻한다. 그런데 내 생각에 이 책에서 목소리화하려는 것은 단순한 ‘말=동사’가 아니다. 비록 저자는 자기 글에 ‘동사’를 개념화한 것이 많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해서 확보하려는 말 자체는 부사(adverb)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말에 달라붙은 말’(ad-verb)이고, 더 엄밀히 말하자면, 말이 거기에 달라붙는 그런 말(“말의 존재론적 신체성”)이기 때문이다.

오끼나와인들, 다시 말해 ‘우리, 고향을 떠나온 자들’ ‘우리, 나라를 떠나온 자들’이 식민화된 삶을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때조차, 그 신체는 여전히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위화감을 표출하며 신체는 끊임없이 여기가 ‘고향이 아니’라고 말한다. 신체의 이러한 말은 니체(F. Nietzsche)가 ‘도래하는’ 철학자의 말로 생각했던 ‘어쩌면’(혹시, vielleicht)이라는 부사, ‘근거의 근거없음’을 의심하는 그 불온한 가정과 예감의 부사를 떠올리게 한다. 현재와는 다른 역사의 가능성을 미리 배제하는 어떤 불가능성 앞에서 의심과 물음의 장소를 확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장소가 저항과 각성, 정치와 사유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장소가 미래를 되찾는 일, 미래로 귀향하는 일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가 오끼나와다. 나는 이렇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