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초점

 

재난을 예감하는 무녀의 언어

허수경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이기성 李起聖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불쑥 내민 손』 『타일의 모든 것』, 평론집 『우리, 유쾌한 사전꾼들』이 있음. leekisung85@hanmail.net

 

 

3541스크린은 이국땅에서 발생한 재난의 광경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다. 굳건하게 존재한다고 믿었던 현실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그 난폭한 장면은, 우리를 둘러싼 견고한 씨스템의 붕괴를 가시화한다. 문명이라는 허구의 스크린 뒤에 봉합되었던 씨스템이 붕괴되면서 막무가내로 분출하는 실재의 흔적들. 현실의 구조를 초과하는 이 과잉의 풍경은 문명의 바벨탑을 순식간에 부숴버리는 상징적 처벌의 은유다. 허수경(許秀卿)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은 이 거대한 현실적 재난의 전조로 읽힌다. ‘나의 도시 나의 도시 잠기고 물에 들어가면서도 고무신 하나 남기지 않고/나의 도시 도시의 장벽마다 색소병을 들고 울던 아이들도 젖고’(「나의 도시」)에서 보듯, 광폭하게 몰려드는 물의 이미지 속에 이미 우리의 현실을 뒤덮은 재난과 붕괴가 예견되어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거대한 물은 안온한 일상에 대한 믿음을 붕괴시키면서, 재난에 직면한 문명의 왜소하고 처참한 모습을 폭로한다. 물의 재난은 역설적으로 생명의 물이 고갈된 황무지의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몰락의 공포를 증폭시킨다. 「오후」에서 증식하는 ‘황무지’는 생명이 거세되고 고갈된 현실의 풍경을 보여준다. “황무지는 (…) 이 우주에 흐르는 물기를 집어삼키기 위해/입을 이따만하게 다른 곳으로 벌렸다”에서, 거대하게 벌어진 황무지의 ‘입’은 삶과 존재를 집어삼키는 문명의 폭식성을 환기하고 있다. 또한 “하루에도 백 리 넘어 커지는” 황무지는 정주할 터전을 잃고 쫓기는 ‘난민’들의 곤혹한 삶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홍수와 황무지로 상징되는 재난의 풍경은 증식하는 문명에 탐닉함으로써 ‘고향’을 상실한 존재들이 맞닥뜨리는 참혹한 귀결을 보여준다.

이 시집을 지배하는 것은 몰락하는 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상실과 슬픔의 정조다. 시인은 도래한 현실의 재난을 응시하는 한편 상처입은 타자를 포용하고 소통하려는 욕망을 보여준다. 세계의 고통을 치유하려는 열망은 온몸의 감각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실감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때 시인의 신체는 닥쳐올 재난을 미리 감각하고 울려대는 예언자巫女의 감각으로 변용된다. ‘네가 바삐 겨울 양식을 위하여 도심의 찻길을 건너다 차에 치일 때/바라보던 내 눈 안에 경악하던 내 눈 안에’(「너의 눈 속에 나는 있다」)에서와 같이, 시인의 눈 내부에는 고통스런 타자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다. 세계의 고통을 응시하는 눈은 문명에 희생되고 부서지는 존재들의 상처와 전율을 그대로 감싸안는 환대의 눈이다.

허수경의 시에서 타자와 세계를 끌어안으려는 욕망은 온몸의 감각을 통한 접촉의 열망으로 확대된다. 이 시집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차가운 심장’에서 발현되는 냉감각이다. 그녀가 피부로 실감하는 차가움은 고향을 상실한 채 불모의 문명에 내던져진 자의 실존을 환기한다. 이러한 ‘추위’의 감각은 상실된 고향을 ‘건설’하고자 하는 노스탤지어의 언어로 치환된다. 허수경의 시에서 노스탤지어는 ‘고향’을 대신하는 실물성의 이미지들로 표출된다. 백석 시인이 기억 속의 음식과 풍속을 복원함으로써 상실된 고향을 상기하듯이, 그녀는 고향과 더불어 떠오르는 물질적 기호들, 예컨대 ‘취나물, 조갯살, 들기름, 시래기, 말린 굴비’ 등의 물질성에 탐닉한다. 그런데 여기서 불러오는 생생한 질감과 미감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고향의 부재만을 환기시킬 뿐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글로벌’의 흐름이 모든 대상의 고유성을 휘발시켜버리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이 글로벌한 시대에 ‘고향’이란 부재하는 기원을 은폐하는 허구적 상상물이며, 수시로 환기되는 음식의 이미지 역시 고향이라는 텅 빈 공백을 대신하는 씁쓸한 기호들로만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끝까지 고향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이 노스탤지어의 정조가 시인의 ‘떠돎’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발적 유배자’ 곧 이방인의 자리에 거처를 마련한다. 이 유배자-난민의 자리는 현실의 좌표에 정주하기를 거부하는 시인의 고유한 위상을 보여준다. 스스로 유배자-난민의 자리에 놓임으로써, 시인은 세계의 고통을 실감하는 견자(見者)가 된다. 이것이 고향에 대한 시인의 감각을 ‘그리움’이라는 회고적 정조에 머무르지 않게 하는 이유이다. 시인은 세계의 고통을 응시하고, 그 고통 속으로 자신의 육신과 내면을 온전히 내어주고 있다. 이 시집은 세계의 재난을 먼저 감지하고 그것을 발화하는 예언자의 언어로 씌어졌다. ‘차가운 심장’으로 가득 찬 불모의 세계에 던지는 뜨거운 호소와 열망의 언어. 이 재난의 시대에 그녀가 들려주는 어두운 예언 속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과 조우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