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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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호동 『한 역사학자가 쓴 성경 이야기』, 까치 2016

김기흥 『역사적 예수』, 창비 2016

역사학자의 눈으로 본 예수

 

 

이은선 李恩選

세종대 교수, 聖·性·誠 여성통합학문연구소장 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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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기독교 신앙인으로 살아온 두 역사학자의 기독교 연구서가 발간되었다. 하나는 ‘구약편’이라는 부제를 단 성경이야기(김호동)이고, 다른 하나는 신약편에 해당하는 ‘역사적 예수’ 연구서(김기흥)이다. 얼마 전에 발표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종교인구 통계가 보여주듯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한 기독교 인구가 무려 30%에 육박하니 신학자가 아닌 역사학자가 기독교 연구를 수행했다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그동안 한국사회에서의 기독교는 그 본래적 유일신적 특성에 강대국들에 대한 한국인의 숭배가 보태져서 매우 제국주의적이고 절대주의적인 모습으로 이루어져왔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하나님’ 이해와 그리스도 이해는 아주 배타적이었고, 그 초월성과 신성이 거의 독점적으로 주장되어왔다. 하지만 이번의 두 책으로 그러한 기존의 배타성과 신적 독점이 많이 완화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특히 한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미 깊어 보인다. 김호동(金浩東)은 먼저 이 연구를 한 기간이 자신에게 “큰 은혜의 시간”이었고, 자신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을 썼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성경이 “역사의 무대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과 인물들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기 때문에 역사학자로서 그것을 연구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거기서의 역사성과 비역사성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기도 하지만 “하나님, 인간, 역사”가 일반 역사서와는 다른 성경만의 고유한 주제이자 핵심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보통 서로 나누어져서 주창되는 두 시각을 함께 가지고서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약속’과 ‘믿음’의 역사,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대서사인 것인지를 「창세기」 11장의 바벨탑과 아브라함의 이야기로부터 풀어나간다.

유대계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도 인간의 가장 고유한 두 행위로서 ‘용서’와 ‘약속’을 들었듯이 저자는 먼저 창세기 15장 17절을 들어서 “여호와도 약속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3개의 유일신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가 자신들의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기원전 1900년경) 기원전 445년 이후 페르시아제국 시대까지를 약속과 배반, 다시 용서와 새로운 성취에의 소망 등의 파노라마로 그려나간다. 거기에는 크게 모세를 통한 출애굽의 이야기가 있었고(기원전 1267년경), 그 과정에서 “나 이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으로 그 믿음(약속)의 시험대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로 향하는 이야기가 있다. 기원전 1010년경 다윗의 즉위, 솔로몬 시대의 성전과 궁전 건설(기원전 967년), 그러나 결국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 북의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제국에게 망하고(기원전 722년), 남쪽 유다는 바빌론제국에게 망하면서(기원전 586년)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간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당시 근동 지역에서 명멸했던 거대 제국들(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떻게 당장은 결과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정의를 요구하고, 결코 상(像)을 그리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 믿음의 신 야훼와 씨름해나가는지를 추적한다. 거기서 역할을 하는 여러 예언자들, 북이스라엘의 엘리야와 엘리사, 남유다의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스겔과 느헤미야 등은 왕과 백성들에게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단지 ‘구약’의 이야기나 이스라엘만의 역사가 아니라 고대 세계사의 전개를 잘 정리된 형태로 살펴볼 수 있는데, 다만 아쉬운 점은 그 당시 동아시아나 한민족의 역사와의 관계에 대해 언급된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편 기원전 142년 마카비 항쟁으로 이스라엘은 다시 독립을 이루고자 처절한 투쟁을 벌였지만 로마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결국 예수의 탄생과 함께 “신약의 시대”로 넘어간다고 저자는 소개한다.

김기흥(金基興)의 『역사적 예수』는 예수를 1세기 갈릴리 지역에서 살았던 한 사람의 “유대인 농부”로 파악하면서 시작하는 연구이다. 저자의 제일의 관심은 예수가 어떻게 “인간의 몸으로 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어졌고, 그로부터 어떻게 새로운 종교 기독교가 태동했는지를 “보다 사실성에 근거한 인과관계”를 통해서 알아보는 일이다. 즉 한 유대인 청년이었던 예수에 대한 “역사학적 탐구”라는 것인데, 여기서도 저자는 자신이 모태신앙인이고, 오랜 기간 신구약 성경을 20회 내외 통독했으며, 신화학과 종교학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함께 수많은 역사적 예수 탐구서를 읽었다고 밝힌다. 앞의 저술처럼 이 연구도 신앙과 학문이라는 두 시각을 통합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일을 위해서 저자는 먼저 바울서신과 복음서의 차이를 말하면서 예수의 신격화 과정을 추적한다. 그리고 예수의 가계와 출생의 이야기를 검토하면서 예수는 자신을 스스로 ‘그리스도’로 확신하거나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혈통상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는 결론은 내리기 어렵다고 말한다. 또한 동정녀 탄생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사생아’였을지 모른다는 가정은 거부한다. 예수는 그래도 반듯한 가정에서 “조작해내기 불가능할 정도로 시대를 초월한 지성과 영성, 탁월한 감화력을 지녔던 유대계의 한 역사적 존재”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남”이라는 표현을 쓴다. 즉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지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의 임박을 선포하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면서 “탁월한 감수성”으로 “성령이 임재함과 자신이 곧 하나님의 아들 됨을 인식”하는 “대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아들 중의 하나라고 여기며 민중을 종이 아닌 친구로, 미래의 천국이 아닌 지금 이 땅에서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나갈 것을 가르쳤는데,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변형시킨 사건이 바로 “예수 부활사건”이라고 말한다. 즉 예수 사후에 다양하게 경험된 부활사건으로 위대한 스승이요 선각자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 되었으며 그리스도(구세주)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삶과 언행이 이 부활사건의 체험으로 “그리스도론과 재림의 종말론에 입각해 곳곳에서 윤색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곧이어 밝히기를, 이렇게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간격(“괴리”)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이라고 말한다.(253면)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러한 언술은 저자가 역사적 연구를 통해서 예수 부활의 “실상”을 밝혀보려 한다고 하지만 다시 지금까지의 거의 모든 기독교 기독론들이 그러하듯이 또 하나의 자기폐쇄적 ‘가현설(假現說)’에 빠지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즉 그에게도 지금까지의 통상적 신학 연구처럼 “부활절 장벽을 깨뜨리는 일”이 쉽지 않음이 드러난다.1 김기흥은 예수 부활사건이 “객관적·공개적·일회적 사건”은 아니지만 그것을 통해서 추종자들이 ‘예수가 여전히 살아 있어서 자신과 함께한다’는 “확신을 가져온 사건이고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 하나의 현상이며 사건으로 인정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303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사에서 결코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415면)지만 “이 현상은 마땅히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303면)이라고 주장한다.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하려는 학자의 발언치고는 예상치 못한 논리다. 또한 저자는 복음서들이 한가지로 전하는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의 ‘빈 무덤’ 이야기를 “감수성 풍부한 여성 제자들”만의 상상이거나 베드로나 바울 등은 포함되지 않는 “민중 신도들의 상상의 산물”인 것으로 여긴다고 하는데, 이러한 결론은 나에게 남성중심적이고, 차별주의적 현학주의로 보인다.

저자가 매우 다방면으로 수행한 부활사건 연구를 토대로, 너무 많은 것을 모두 다루려고 해서 오히려 신뢰성이 떨어지는데, 결론적으로 “심리적·종교적 현상”이고, “원론적으로 신앙의 문제”라고 보는 부활의 사건이 오직 기독교의 예수 한 사람에게서만 일어난 것으로 주장하는지의 여부는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설왕설래는 결국 예수 부활사건의 이야기가 기독교 전통 안에만 머물러서는 어떤 진전된 이해나 해석으로 나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이 해왔던 “부활에 특권을 부여해왔던 것”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웃종교 전통과의 대화가 긴요함을 말해왔는데, 예를 들어 유교 전통에서의 영과 혼의 이야기이며 또다른 부활 이야기가 되는 ‘제사감격(祭祀感激)’의 이야기나 불교 수행법에서의 ‘칠채화신(七彩化身, 죽을 때 자신의 육신을 빛 속으로 흡수시켜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법)’의 이야기 등과 견주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2 이러한 다른 종교 전통에서의 삶과 죽음의 이해, 몸의 끝과 그 이후의 이야기들과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가 지금까지 자신의 배타적 그리스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강조해온 예수의 유일회적인 몸의 부활 이야기가 실은 그렇게 유일하지 않은 것임이 드러날 수 있다. 부활은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명멸하는 복수적인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지금까지 예수의 부활사건에 기대어서 주창해온 기독교 내지는 예수의 신성 독점이 더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를 더 지적하고 싶은데, 두 저자 모두 기독교 신앙을 여전히 그 역사적 뿌리인 유대교와의 이분법적 길항관계 속에서 성찰하는 것에 대해서다. 그래서 김호동은 유대교의 성경을 여전히 “구약”이라고 칭하고, 김기흥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유대민족의 역사를 “승리를 꿈꾸는 약자”의 역사라고 언급하면서 예수의 신성화 과정은 “예수에 대한 신앙이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다시 유대교를 부정적으로 끌어들이면서 비판한다.(249면) 하지만 이미 1970년대에 신학자 로즈매리 류서(Rosemary Ruether)는 어떻게 기독교 신앙이 이미 초기 발생 때부터 그 역사적 뿌리에 있어서 형제인 유대교와 유대적 메시아 신앙을 자신의 절대성과 유일회성을 위해서 왜곡해왔는지를 잘 지적해주었다. 그 일을 통해서 유대교의 야훼 신앙과 그 메시아적 기대가 ‘살해’되고 부정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정체성도 한없이 왜곡되었다고 하는데, 즉 기독교 신앙 스스로가 제국주의적 가현설의 신화에 사로잡혀서 점점 고사되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3 나는 한국 기독교도 이제 이러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주에 대한 믿음을 그 폐쇄적 유아독존성으로부터 건져내서 크게 새롭게 해야 하는데, 그 일을 위해서 우리의 이웃종교 및 형제적 유대 전통과 대화하는 일이 큰 도움을 준다. 두 책은 시대(역사과학)와 기독론과의 대화로 우리의 신앙적 언어를 훨씬 더 유의미하게 만들어줄 수 있지만 거기서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 교회와 신학은 인류가 지금까지 일구어놓은 다양한 종교전통을 매우 가깝게 이웃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위해서 매우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 자신의 이웃종교뿐 아니라 같은 뿌리를 가진 형제인 유대교나 이슬람교와의 열린 대화를 통해 얻어진 새로운 신앙과 믿음의 언어야말로 바로 세계 교회가 한국 교회와 신학으로부터 기대하는 21세기 제2의 종교개혁의 목소리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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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버트 펑크 『예수에게 솔직히』, 김준우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1999, 460면; 졸고 「페미니즘 몸담론과 역사적 예수 그리고 다원주의적 여성 그리스도론」, 『한국 여성조직신학 탐구: 聖·性·誠의 여성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04, 120면.
  2. 졸고 「삶의 신학의 한 주제로서의 죽음, 죽음에 대한 종교다원적 성찰」, 류승국 외 『삶의 신학 콜로기움: 생로병사 관혼상제』, 대화문화아카데미 2007, 172~206면; 졸저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 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모시는사람들 2009.
  3. 로즈마리 류터 『신앙과 형제 살인: 반유대주의의 신학적 뿌리』, 장춘식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1, 318면.

이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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