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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우리 모두, 상순할 것이다
김현 金鉉
시인. 2009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글로리홀』이 있음. juda777@nate.com
1부
나 말고도 시인 박상순을 좋아하는 시인들 많음.
박상순 시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시인에 관하여 쓰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한 시인이 내게 말했다. 트위터에 올라와 있는 시인들 얘기만 써도 분량 채울 수 있을걸. 시인들의 얘기란 이런 것이다. 각색하였다.
‘한편, 그녀도 독자로 판명되었다.
아직 『슬픈 감자 200그램』을 읽기 전에, 그녀는 검은 포대를 열고 감자들을 신중히 지켜보았다. 그녀 앞에는 소형 저울이 놓였고, 그녀는 자루에서 감자를 하나씩 꺼내어 저울 위에 올렸다. 200그램의 감자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200그램의 감자를 찾아서 그것을 슬픔이라고 명명하고 싶었다. 그다음에 시집을 읽겠다고 어젯밤 그녀는 마음먹었다. 그것은 일종의 장난스러운 의식이었지만, 실제로 행하고 보니 장난이나 의식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저울 위로 끊임없이 감자를 올렸다. 밤이 되는지도, 아침이 되는지도 모르고 검은 포대에서 끝없이 감자를 꺼냈다. 도대체 이 감자들은 다 어디에서 왔을까? 누가 이 많은 감자를 넣어둔 것일까?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의 독자들은 그녀의 시를 어떻게 물질로 치환하는 것일까.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좀 이쁜 누나, 순수” 해욱님을 닮았다.’
그러니까 박상순 팬클럽의 일원으로 나는 박상순 시인을 만났다. 시인은 최근 네번째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난다)을 내려놓았다. 13년 만의 일이다. 시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종종 ‘박상순 신작 시 보았음?’ 서로에게 물으며 기대했다. 박상순 시인의 새 시집은 언제쯤 나올까. 누군가는 시집의 오랜 공백이 의도적인 것이라고 했고 그 공백으로 인해 여전히 ‘박상순 신비’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박상순 시인이 시보다는 책을 더 열심히 만드는 것 같다고 했고 그건 절반쯤 맞는 말 같다고 몇몇은 수긍하기도 했다. 박상순 시인을 실제로 한번도 본 적이 없던 나는 꾸준히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하였고, 동료들에게 물었다. 답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역시 박상순 신비. 시인을 만나기 전에 시인에 관하여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 있을 듯하여 온라인 포털 사이트로 검색해봤다. 시인의 인상에 관하여. 각색하였다.
‘슬픈 그의 눈동자는 그날 밤 자신의 사건이 아니라 타인의 사건을 보고 싶어하는 듯했다. 뼈대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뼈대에서 끝나는 사건을 원하는 것 같았고, 뼈대를 위해서라면 언젠가 어디선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한 개인이 적격이라고 그의 눈동자는 살피는 듯했다. 나 역시 그의 얼굴 속에서 열리고 닫히는 것들의 합이 200그램이라면, 오늘 밤 그가 짊어질 수 있는 최대치의 슬픔의 무게가 그것이라면, 그의 뼈대는 선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선한 삶은 200그램의 슬픔에 무너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으로 그의 삶은 구축된다.’
오후로 들어서자 비로소 봄날이었다.
시인을 만났다. 작은 체구. 웃는 얼굴. 첫번째 무표정. 실제로 보게 되었다. 기쁨 쪽에 한사코 붙어 있다가 돌연 슬프게 몰락하는 얼굴이었다. 시인의 눈동자는 그런 기원을 담고 있었다. 와이셔츠와 구두를 갖춘 시인은 첫눈에도 예절 바른 사람처럼 보였고 시인이 말을 시작하자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시인의 목소리는 자유로운 경청을, 요구하는, 소리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자세는 흐트러져도 괜찮아요, 대신 귀를 기울여야 할 겁니다. 시인과의 대화는 두어시간 남짓 이루어졌다. 대화가 거의 끝나갈 때쯤 시인은 내게 왜 자신과 이야기하려 했는지를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어서, 당신의 팬입니다, 당신은 이상한 시를 쓰는 사람이고 저도 이상한 시를 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지만 부정확한 대답이었다. 대화하는 내내 시를 쓰고 싶었습니다만,이라고 말했어야 했으리라. 대화가 끝나고 일어서며 시인이 천진난만하고 어른스럽게 물었다.
“이런 알맹이 없는 얘기로 쓸 게 있을까요?”
‘시인의 말’에 따르면 『슬픈 감자 200그램』은 이런 알맹이를 기대하고 있다.
“슬픈 도구가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봄날을 그리고 싶다. 나의 도구는 구체적이거나 실재적인 것을 통해 더 구체적이거나 더욱 실재적인 것으로 향할 것이다.”(123면)
시인은 자기의 슬픈 도구를 ‘언어’라고 밝히고 있지만, 궁금해졌다. 시인에게 슬픈 도구란 무엇일까. 시인이 가진 슬픈 도구를 철사라고 가정해본다. 철사로 알알이 만들어놓은 슬픈 감자 200그램을 상상한다. 겉은 있고 속은 텅 빈 듯 보이나 푸른 흐름으로 꽉 차 있는. 그것은 예술의 구체이다. 본질적인 것은 흐름을 구현하는 것이다. 대화를 나누며 나는 시인을 스스럼없이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상순느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서. 시인은 선생질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는 자였고 실제로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 아니라 가르쳐주는 자였다. 시인에게는 이상한 시가 든 헐렁한 양복, 눈을 찌르는 앞머리, 자르지 못한 손톱, 두번째와 세번째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 붉은색과 잎사귀 무늬에 든 에스프레소, 좀 귀여운 주름살 그리고 얼굴, 두개의 검은 가방이 든 얼굴이 있으므로.
시인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인의 오른쪽 가방과 왼쪽 가방 속에 든 것이 다시금 궁금하였다. 나는 보았다. 시인이 두어시간의 대화 동안 한번은 오른쪽 가방을 더 활짝 열고 다른 한번은 왼쪽 가방을 더 활짝 열어 꺼내어 보이던 것을.
2부
편집자 무무씨로부터 두개의 녹취파일을 전해 받았다. 첫번째 파일에는 ‘작가조명_박상순 1부’라는 이름이, 두번째 파일에는 ‘작가조명_박상순 2부’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1부와 2부 사이 담배를 태운 시간은 담겨 있지 않았다. 시인은 담배와 커피를 가까이한다.
시인과 함께 까페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시인의 곁에 서서 담배를 태우는 시인을 보았다. 시인의 담배는 길고 얇은 것으로 맛이나 건강을 고려했다기보다는 흡연의 분위기를 염두에 둔 것처럼 보였다. 시인에게 가 있는, 시인의 가는 손가락에 끼워진 사탕 막대기 같은 담배는, 일순 한 방향으로 몰려나왔다 유연하게 흩어지는 시인의 담배 연기는, 그의 성정을 기호화하는 문자처럼 느껴졌다. 시인은 안온하고 확신에 찬 사람이다. 시인의 담배는 공산품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담배를 한모금 빨고 연기를 내뱉고 다시 담배를 한모금 빨기 전에 내게 먹고사는 일에 관하여 물었고 나는 먹고사는 일에 관하여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시인이 편집자로서 오래 일했음을 알기에 시인은 사무실에서 과연 어떤 인간이었을지 나름 상상해보다가 그가 모 출판사의 수장으로 근무할 무렵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문제는 사랑이다. 출판인이 원고를 사랑으로 대하면 독자도 사랑의 힘으로…”라는 말이 떠올랐다.
사랑의 힘.
시인의 세번째 시집 제목은 ‘러브 아다지오’였다. 시인에게 사랑의 힘은 어떤 대결(세상)과의 접촉을 허락하는 에너지였을까. 사랑 ‘이후에’ 찾아온 에너지에 시인은 ‘슬픈 감자 200그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더 구체적이고 더 실재적이게도.
시인이 마지막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고 돌아섰을 때 그의 뒷모습에서 희미한 것이 어른거렸다. 새의 깃털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미지의 것처럼 보였으나 그렇지는 않아서 그것은 쉬이 땅으로 내려앉았다. 나는 그것을 밟고 다시 지하로 내려가는 시인을 뒤따랐다.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늘은 어디에서 오셨나요? 묻고, “오전에 잠깐 일 좀 보다가 종로에서 왔는데, 날이 좋아서 버스를 타고 왔어요. 재미있었어요. 광화문 네거리나 이대 근처 지나오면서, 한 20년 전쯤에는 어떤 모습이었는데… 골목은 그대로 있고 건물들은 바뀌었네, 그러면서 과거와 현재를 오버랩하면서 왔어요” 답하고, 시를 쓰듯이 오셨군요, 대꾸한다. 이어진다. 13년 만에 새 시집이 나왔습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셨나요, 묻고 “제 시가 형편없어서 그렇죠, 뭐”라고 시인은 답한다. 놀랍게도 진지하게! 시인의 편에서 형편없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라 거의 사실에 가까운 말이다. 단정하건대 시(예술)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시인은 빈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책을 내기 위해서는 자신을 연마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러한 시간을 갖지 못했어요”라고 시인은 다시 덧붙이며 말을 잇는다. “그렇지만 그 역시도 핑계고 전자가 맞는 얘기예요.” 형편없는 시들을 썼다는 말을 고정하려는 시인을 앞에 두고 나는 쓰고 버리는 시가 많은지 묻는다. “뭐 쓸 때부터 엉터리가 많겠죠. 나중에 보니 엉터리인 게 아니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게 또 많았다고 한다면 그건 아니에요. 시를 많이 쓰지 못했어요”라고 시인은 답한다. 엉터리인 시와 엉터리가 아닌 시에 관하여 묻기. 그런데도 시집을 묶으셨어요, 시집에 들어갈 시들을 고른 기준이 있었겠죠. “기준은 뭐 평균점수가 있었겠지요.” 시인이 웃으며 말했다. 농담은 거짓보다는 진심의 근처에서 나온다.
불쑥 시인의 농담에 관하여 쓰고 싶어졌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농담』은 가벼운 마음으로 건넨 농담 한마디 때문에 순조로운 인생에서 이탈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시인이라면 농담 한마디 때문에 가벼운 마음이 되는 남자 ‘순조’에 관하여 적었을 것이다. 시인에게 가벼운 마음이란 기쁜 마음. 순조의 마음은 다음과 같은 마음이다.
“아직도 치료중인 내 봄날, 이번엔 고독의 할아버지가 부르셔도/환자용 침상 아래 이 끈적한, 납작한 의자엔/앉지 않겠음. 내 봄날은 고독하겠음. 누가 있겠음?”(「내 봄날은 고독하겠음」 부분)
시인은 농담을 즐기는 사람 같지는 않다.
농담할 때 시인의 눈가는 장막을 열고(주름지고) 입은 벌어지고 앞으로 나와 시인의 얼굴을 무대로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이다. 농담 이후에 시인의 얼굴에는 파장이 남지 않는다. 마치 다른 등장인물인 것처럼, 이후를 준비하는 것처럼 농담 뒤에 시인의 말은 늘 진담이다. 농담이 말해질 때가 아니라 말함이 지나갔을 때, 그러니까 언어—소리가 소거되고 비로소 비언어—침묵으로 완성되는 화술임을 고려할 때 그의 농담은 웃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웃었음을 위한 것.
시인은 농담이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 덧붙인다. 직관은 진담이다.
“이 시집에는 한 작가의 10년 넘는 시간 동안의 작업이 묶여 있어요. 하나의 시집은 단일한 분위기나 카테고리를 갖기 마련인데 이 시집은 시기별로 늘어져 있는 걸 꺼내놓은 거라서 여러 경향, 흐름들이 섞여 있죠. 안 섞을 수도 있었지만 섞이게 두었어요. 어떤 흐름은 최초의 시작점만 남겨둔 것도 있고 어떤 흐름은 중간 정도, 어떤 흐름은 내가 생각한 목표지점까지 간 것들도 있지요. 어떤 시들은 그것의 시도나 싹이 난 상태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넣었고, 어떤 것들은 충분하다고 생각되는데도 수록하지 않았어요. 저 스스로가 어떤 범주들을 정하고서 그 안에서 나름대로 여러가지 계산을 한 거죠. 어떤 시들은 5점을 훌륭한 것으로, 어떤 시들은 100점을 받고도 탈락. 선별의 기준은 하나가 아니라 경향마다 큰 차이를 가지고 있어요.”
1부 끝.
3부
두번째 파일은 시인이 참여한 바 있는 한불 시인 공동 번역 아뜰리에(2016)에 관해 묻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한불 시인 공동 번역 아뜰리에’는 어떠셨나요?”
(즐거운 시간. 유익한 시간. 새콤달콤한 시간.)
시인의 대답은 적힌 대로는 아니나 적힌 것과 다르지 않게 간단하였다.
모국과 이국의 언어를 넘나드는 시를 함께 읽으며 단어 하나하나에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묻고 답하는 과정은 시인의 말마따나 “논리적인 실험으로 생겨났다고는 말할 수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설명할 수 없는 연속의 합이 창조의 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겠냐고 시인에게 말했고 시인은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죠”라고 답하였다. 창조의 선상에서 시인에게 말했다.
“아뜰리에 낭독회에 참가했던 한 프랑스 여성 시인이 앞으로 자신이 쓸 시가 당신의 시 때문에 바뀌게 될 것 같다는 소감을 남겼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시 잘 읽었다는 소감 같은 것이겠지요, 뭐. 물론, 고맙고요.”
시인은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사람. 시인은 무심한 사람이라기보다는 평정한 사람이다. 그의 평정은 아마도 예술적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결과일 것이다. 사회화를 거친 시인의 예술은 늘 뼈대를 지향한다. 쓰는 것이 파헤치는 행위라면 번역은 파묻히는 행위이다. 우리 모두의 언어는 기록되면서 기록되지 않은 것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므로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은 드러난 언어의 안으로, 떠오른 언어의 속으로 계속해서 들어가는 일이다. 언어의 피부와 언어의 피와 살을 지나 언어의 뼈대로까지.
문득 시인에게 슬픔은 번역할 수 있습니까 묻고 싶었다. 시인은 “이야기를 해부하고 나면 구체적인 사건과 행위만 남는데 저는 그걸 통해서 세상을 조금 더 다른 관점에서 보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자, 시인은 자신의 오랜 친구가 슬픔이라고 말하는 사람. 슬픔을 친구로 삼는 자는 기쁨 역시 친구로 삼는 사람이다. 슬프기만 한 자는 슬픔을 친구 삼지 않고 기쁘기만 한 사람은 기쁨을 친구로 삼지 않는다. 슬픔의 노예나 기쁨의 노예는 친구—사이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슬픔의 노예는 슬픔을 물질로 치환하지 못하며 기쁨의 노예 역시 그렇다. 슬픔의 노예는 오로지 ‘나’만이 슬픔의 물질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슬픔은 번역되지 않는다. 슬픔은 치환된다. 슬픔은 만국공통어가 아닌가. 나는 공동 번역 작업에 관한 ‘시인의 소감’을 다음과 같은 시로 바꾸어두고 싶었다.
“밤은 좋겠다./점점 더 눈 속에 파묻히는 즐거운 사람을 가진/폭설의 겨울은 좋겠다.//파묻힌 사람을 가진 겨울은 좋겠다./파묻힌 사람을 가질 수 있는 겨울은 좋겠다. (…)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눈 덮인, 막막한,/추운,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안타까운, 밤새도록 바람만이 붕붕대는, 간절한,/눈 속에 다 묻혀버린,/저 먼 우주까지, 소리 없는,/겨울이 오면.”(「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부분)
시인에게 연이어 질문했다.
“예술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십니까?”
“예술가라는 말을 좋아하십니까?”
“언제부터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시인은 말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그것이 나에게 유일한 것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나는 예술가입니다. 저는 감상하는 사람보다는 창조하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이후에 나는 감상하는 자가 아니라 창조하는 자로서 시인의 말을 메모해두었다.
그려보았다. 찍어보았다.
‘그의 입을 통해서 듣는 예술은 추상이라기보다는 구체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관념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관념을 이야기할 때 그가 드는 예시들은 얼마나 적확한가.’
‘그날 그에게서 자주 들었던 말. 구체적으로 물어보면 대답할게요. 그렇다면 『슬픈 감자 200그램』은 얼마나 구체적인 시집인가.’
그러니까 나는 대화하는 도중에도 시인이 야기한 것들을 한 쇼트, 한 쇼트씩 이어붙였다 떼어놓았다 하고 있었다.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꼭 시인의 시 때문만은 아니며 바로 그 때문에, 또한 꼭 그 때문만은 아니게 몇편의 현존하지 않는 영화를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다. 가령, 에리끄 로메르(Eric Rohmer)의 도덕적인 감수성.
시인은 옛날 옛적에 자신에게 아날로그 필름 영사기가 있었노라고 말했다.
시를 쓰지 않을 때는 주로 무엇을 하느냐는 나의 물음에, 예전에는 영화를 자주 보았으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는 싱거운 첫 대답을 끝내고 시인이 확고히 건넨 말이었다. 시인은 자신이 보는 사람보다는 만드는 사람에 가깝다는 말을 하며 자기가 렌즈를 사용하는 데에 용이한 자라는 것을 내게 각인시켰다. 찰나였지만, 나는 그 순간 시인의 모습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시인은 그 순간 가장 이질적이었고 그로써 가장 강렬했다. 그것은 혈기 같기도 했고 회한 같기도 했고 열정 같기도 했으며 냉정 같기도 했고 시인 자신을 앉으나 서나 예술 생각인 자로 목격하게끔 했다. 시인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과거 한국 시가 사진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는 방식이었다면 저는 이상한 자리에 렌즈를 클로즈업하거나 전개가 빠른 사건을 영화처럼 묶어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나게 해요.”(서울신문 2017.1.30)
시인의 시는 천연히 밀었다 당겼다 하는 시이며 커졌다 작아지는 시이다. 나는 언젠가 제목으로 쓰기 위해 ‘쇼트에의 환상’을 적어두었는데, 시인이 일으킨 것은 쇼트에의 환영이었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 적어두었다.
“허구처럼 보이는 사건들과 이미지로서의 환영을 교차하면서, 미미한 나의, 문제와, 절박하게, 침통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대면하고자 했지만, 더 즉물적으로 그것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어떠한 의미도 배제해야 한다. 문제들은 즉물적인 것들을 통해 마침내 미적으로 환상을 만들며 소멸한다.”(123~24면)
환상이 되기 이전의 환영들과 환상이 된 후의 환영들에 관하여 불현듯 감지되는 것이 있었다. 슬픔은 기쁨의 뼈대에 붙어 있습니까? 슬픔의 뼈대에 붙어 있습니까? 시가 뼈대—언어를 즉물로 삼아 끝나는 것이라면, 영화가 뼈대—쇼트를 즉물로 삼아 시작하는 것이라면, 시는 효과의 잔상이고 영상은 잔상의 효과이다.
시인은 어째서 환상이라는 효과의 결과를 나타남이 아니라 사라짐으로 선택한 것일까. 시인은 분명히 사실이 펑! 하고 터지며 환상의 연기로 변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 사람. 그런 것을 보는 슬픈 눈동자란 큰 스크린을 마주하고 앉아서도 또다른 스크린을 머릿속에 펼쳐두는 사람. 시인은 그 동시간적인 객체의 주체화, 주체의 객체화를 분명히 시로 쓰고자 하는 자이다. 즉물적인 것은 환영적인 것이며 객관적인 것은 주관적인 것이고 가까운 것은 가장 멀다(그리하여 영화는 암전. 자막으로 끝남).
진짜. 온종일. 슈슈슈.
그가 아날로그 필름을 넣는 카메라와 영사기를 어떻게 활용했을지 상상할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를 누벨바그의 기수처럼 그리곤 했다. 왜냐하면, 시인은 움직임이 없지만 움직임이 이는 사람이었다. 시인은 흐르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 흐름이란 게 뭐냐면 이런 것이다. 시인은 두어시간의 대부분을 소년으로 살았고 나머지는 어른으로 살았다. 소년이고자 할 때 시인은 움직였고 어른이고자 할 때 움직이지 않았다. 소년으로 움직일 때 시인은 자유를 추구하는 자였으나 어른으로 움직이지 않을 때 시인은 중용을 아는 자였고 공정하였다. 소년은 정신, 어른은 육체. 자유로운 자일 때 시인은 예술의 일환으로 시를 쓰고 공정한 자일 때 시인은 예술의 일환으로 책을 만들었으리라. 시인의 생활은, 삶은 늘 예술의 범주에 있었다. 그러니까 시인은 지금도 여전히 원 씬 원 컷 롱테이크.
지금 떠오르는 대로 『슬픈 감자 200그램』에서 영화화하고 싶은 작품.
「여름밤의 꿈이었을까」 「네가 나를 영원히 사랑한다 해도」.
여름밤의 꿈에서는 “발뒤꿈치에서 불쑥 튀어나온/녹슨 망치”를 절대 영상으로 구현해서는 안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 해도 “바닷물을 끌고 와/너를 덮어버”리는 것을 꼭 영상으로 구현해야 한다. 그리고 디졸브. 그리고 죽음과의 대화.
“나는 약해, 금세 기절하고 말 거야. 다 잠기고 말 거야. 약하다니까.”
“선생님, 때로는 참이, 거짓이나 침묵, 헛것들을 만나 진실이 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희극인가요, 격언인가요?”
2부 끝.
4부
시인은 시집 속에 다음과 같이 썼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의지나 욕망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떠돌거나 격동하는, 내 심장에 박힌 기억을 열고, 두려움을 감춘 채 세상의 맞은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들도 가볍게 날려 보내는, 그런 봄날뿐인 봄날을 만들 수 있을까.
주어진 기회라고는 단지 예술밖에 모르는 미미한 크기의 나는…” (124~25면)
나는 시인의 인상을 다시 그려보았다. 또다른 기회가 주어진다면 시인에게 물을 것도 같았다.
최근 당신이 가장 욕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최근 당신의 의지가 향하는 사람, 곳, 것은 무엇입니까.
사적 얘기를 꺼리는 그와의 대화에서 사적으로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의지와 욕망이 아니었을까 나는 뒤늦게 자문해보았다. ‘시인의 말’에 조금 더 열중했다면 그와의 대화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
까페에서 나와 시인과 저녁식사를 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시인은 변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시인은 대화의 시작과 끝이 거의 같은 사람. 시인이 「슬픈 감자 200그램」으로 시집을 열고 「여름밤의 꿈이었을까」로 시집을 닫은 연유가 궁금했다. 묻지 않았다. 다만, 슬픈 감자를 옮기는 사람과 자신의 발뒤꿈치에서 불쑥 튀어나온 녹슨 망치를 보는 사람이 같은 사람일까, 같지 않은 사람이라면 둘 중에 누가 더 ‘슬픔밖에 남지 않은’ 사람일까를 궁리해보았다. 누가 더 인생을 탕진한 걸까.
‘그렇게 만나게 되는 접점에서 우리는 시대정신에 관한 그림을 그리고, 문학적 형식을 만들고 의미나 가치의 변화 또는 재정립을 시도하며 인생의 시간을 소진합니다. 그러나 나의 삶은. 모든 것을 헛되이 다 써버리는 ‘탕진’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시인의 말.
나는 시인의 탕진을, 자신의 예술적 생애를 감히 탕진하는 것으로 기대하는 예술가에 관하여, 예술가의 탕진이란 어떤 이들에게는 희극이, 어떤 이들에게는 격언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를 생각했다. 봄날이었으므로. 식사하는 와중에, 걷는 와중에, 담배를 태우는 와중에. 시인에게 사람들을 가르쳐볼 생각은 없는지 물었다. 시인은 주저 없이 있음이라고 했고, 그러고는 수줍고 당당하게! 덧붙였다. “내가 학생들을 가르친다면… 내가 써온 대로 알려주게 되겠지요. 자유.” 방탕한 예술가와 탕진하는 예술가는 얼마나 다른가.
시인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격언을 옮겨 적었다. 처음에는 순서대로, 다음에는 규칙적으로, 그다음에는 변주했다. 내용보다는 순서를 중요히 여겼다. 분명한 것은 시인과 시인의 시를 탕진하면서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시적 대상들이 항상 움직이고,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서 어떤 접점을 만난다고 하였다. 시인의 에너지는 비극적이지 않다. 비극적인 에너지는 시금치를 키워내지 못한다.
시인은 잠자코 “…저도 이상한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라는 나의 말을 듣고 있다가 말했다.
“살다보면 어떤 체제 안에 안주하게 되는데, 안주 자체가 나쁜 건 아니나, 자기 혁신과 갱신, 그런 것을 해야 하는 (예술) 본연의 신선함을 잃을 수는 있지요. ‘이상하다’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런 신선함으로서의 예술적 가치를 잊지 않으려는 염원의 하나로 이상함이라는 표현을 했을 거예요. 정말 이상해져야 하는 게 내 염원일 텐데, 그냥 짝퉁인 이상함으로 남게 되는 게 아닐까…”
시인을 만나고 시를 한편 썼다. 시의 제목은 ‘밝은 제목’이다. ‘우리 모두, 상순할 것이다’일 수도 있다.
녹취 파일을 다 듣고 조명을 끄고 앉아 시인과의 대화를 분산해보았다. 분산은 다른 곳으로 보냈고, 다시 시인과의 대화를 종합해보았다. 어두운 것을 밝게, 밝은 것을 어둡게 두기 위해 나는 이 텍스트에 추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다만, 지금 추가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은 신비 상순님의 말이다. 각색하지 않았다.
“이상한 뒷골목을 왔다 갔다 하는데 거기에 어떤 형 같은 사람이 있어서 반가웠구나.”
3부 시작.
박상순 시인의 자필 서명이 적힌 『슬픈 감자 200그램』 받았음. 그의 자필 서명 시집을 처음으로 받은 주인공은 아마도 김상혁 시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