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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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은형 韓銀炯

1979년 경기 수원 출생.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장편소설 『거짓말』 등이 있음. holypool@gmail.com

 

 

인간의 기쁨

 

 

이 사람을 보라. 여자는 남자를 보았을 때, 이 수상한 목소리를 들었다. 어디에서 들려오는 건지 누가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야자수가 요동쳤으므로 더 극적으로 느껴졌다. 남자는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공포영화에서의 점프컷처럼 남자가 돌연 여자의 눈앞에 솟아났기에. 여자가 자기 자신에게 골몰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끝없이 솟아나는 낙타의 혹과 닮은 굴곡진 지형 때문이기도 했다. 오르막길인가 하면 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내리막길인가 하면 어느새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마주 오는 서로를 볼 수 없었던 거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출몰이라고 해야 하나? 여자는 단어를 고르는 데 신중했다. 시인이기 때문이었다. 정식으로 등단했다는 의미에서의 시인은 아니었다. 여자가 다니는 시창작교실의 선생은, 꽤나 알려진 시인인데다 누군가에게는 미남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을 그 남자는, 그 어느 누구라도 시를 쓰기 시작한 순간 이미 시인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그 말을 들었을 때 픽 하고 웃어버렸는데, 시창작교실의 다른 멍청한 여자들도 시인이라는 게 기분 나빠서기도 했고, 그 말이 수강생들의 환심을 끌기 위한 그러니까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 같기도 해서 그랬다. 하지만 그 말은 그녀도 모르게 그녀의 안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여자는 변했다. 전체를 보기 전에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생각하자 별것도 아닌 것들이 별것이 되었다. 그날 남자와의 만남은 여자의 그 감각적 훈련에 어떤 전기를 마련해주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남자의 손이 먼저 보였다. 정확히 말한다면, 손끝에서 흔들리는 뭔가를 보았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윽고 여자는 남자의 하반신도 볼 수 있게 되었고, 남자가 생각보다 키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끝에서 흔들리고 있던 게 나비넥타이임을 알게 된 것도, 흔들리는 게 아니라 남자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흔들고 있음을 알게 된 것도 거의 동시였다. 남자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나비넥타이를 흔들지 않는 손으로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아주 천천히 풀었기 때문에 여자는 단추가 하나씩 풀리면서 남자의 가슴이 점점 더 드러나는 것을 이렇게 숫자를 세며 감상할 수 있었다. 그랬다. 여자는 감상하고 있었다. 남자에게는 여자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여자보다도 더 자기 자신에게 몰두해 있었고, 여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가 알고 있음을 여자에게 표내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그러고 있는 게 여자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여자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그 남자가 자신을 위해서 나타난 사람 같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의 머리, 애초에 숱이 많지 않았던데다 급격히 빠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머리는 뒤로 빗어 넘겨져 부풀려 있었다. 얼마나 단단하게 고정시켰는지 바람이 부는데도 꼼짝하지 않았다. 뭔가 예술적인 일을 하는 사람 같았다. 성악간가? 나비넥타이를 했으니까 틀림없어. 여자는 확신해버렸다. 여자가 스스로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꼭 예술가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예술가라고 해서 그녀의 관심을 끌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여자가 찾고 있던 그런 사람이었다.

“위로 가면 뭐가 있나요?”

그래서 여자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신라호텔이 있다는 것은 여자도 알고 있었다. 여자의 숙소였고, 제주에 올 때 이곳에 묵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그의 표현법이 궁금했다. 이 길에서, 더욱이 저런 차림을 했다면 남자는 신라호텔에서 오고 있는 것이 확실했기에, 그 이상이 궁금했다.

“네?”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런 상태를 보면서도 길 같은 걸 물을 수 있다니. 못 배웠다, 거칠다, 촌스럽다.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는 근시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를 봤다. 관광지로 유명한 곳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여자. 카메라를 목에 매달고 다니면서 뭔가 심오한 생각에 빠져 있다는 표정을 연출하고 그런 자신에게 ‘예술하시는 분이신가봐요’라며 누군가가 말 걸어주기를 원하는 시간이라면 많고 많은 여자. 외롭고 불쌍한 여자. 남자는 그런 여자들이라면 잘 알고 있었다.

“저 길 위에요.”

남자가 속마음을 표정에 다 드러낸 것은 아니었지만 여자는 기분이 상했고, 그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또 이렇게 말했다. 다시 묻지 않는다면, 그래서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않는다면, 기분이 더 나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흔히 ‘오기’라고 부르는 그런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네?”

이렇게 말하고 보폭을 크게 해서 걷기 시작한 남자를, 여자는 보고 있었다. 기분이 나쁜 와중에도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또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 와중에도 성악가가 틀림없을 거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여자는 그 자리에 서서 남자가 멀어져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길의 굴곡에 남자는 또다시 파묻혀버렸다. 그래서 남자를 만난 건지 아닌 건지,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여자의 몽상 속에서 벌어진 일인지 여자는 확신할 수 없었고, 그 모호함에 여자는 가슴이 뛰었다.

이국적이고, 환상적이라는 느낌에 여자는 사로잡혔다. 바람은 더 세게 불기 시작했다. 가로수로 심긴 야자수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웅장하다고 생각했고, 이 세계가 흔들린다고 느꼈다. 거대한 신전(神殿) 안에 있는 것 같다고도. 초현실적이야!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을 기특해하면서 수첩을 꺼내 방금 느낀 감상들을 적었다. 여자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그렇게 여자의 스물세번째 사람이 되었다. 여자가 시창작교실에 나가기 전에 수업을 들었던 가죽공방에서 만든 염소가죽으로 된 여자의 보라색 수첩에는 스물두명의 사람이 들어 있었다. 옷차림을 묘사하는 건 기본이었고, 전화 통화를 받아 적기도 했으며(여자가 들을 수 없는 상대의 전화는 상상으로 채워 넣었다), 스쳐 지나가는 척하며 냄새를 맡기도 했다. 가장 대담한 짓은, 뒤를 밟은 것이었다. 열아홉번째 사람이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소리를 냈으므로 그 사람을 따라 자신의 발을 옮겨놓을 때마다 여자는 심장도 함께 옮겨놓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쓸 소재를 얻기 위해서 탐정 일을 하는, 어느 무명 소설가가 주인공인 미국 드라마를 보고 나서였다. 소설가의 책상에는 커트 보니것과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미국적이라고 여겨지는 소설가들의 책이 널려 있었는데, 여자는 그들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게으르거나 무신경해서는 아니었다. 탐정소설을, 탐정소설이라고 여겨지는 그 소설들을, 읽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런 것들은 여자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여자는 시를 쓰고 싶었다. 잘 쓰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가 하고 다니는 일은 시보다는 소설 쓰기에 적절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자는 그걸 잘 몰랐고, 자기 방식대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여자와 같은 마음으로 시창작교실에 등록한 수강생들에게 첫 수업에서 인상 좋은 그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가정을 버리세요. 강의실에는 동요가 일었고, 어느 정숙한 여자는 손수건을 꺼내 인중에 가져다 댄 후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으로 나가기도 했다. 여자는 ‘가정을 버리라’라는 그 말을 들으며 강사가 제법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말대로 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여자에게는 버릴 가정이 없었다. 웅성거림이 잦아들자 시인은 말했다. 가정을 버릴 수 없다면, 경험을 많이 해야 한다고. 그도 아니라면 감정을 깊게 느껴야 하고. 여자는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경험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깊이 느끼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을 테니까.

시창작교실의 여자들은 새로운 야생화를 볼 때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고, 흰뺨검둥오리 같은 새의 이름을 외웠고, 그런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강렬한 감정을 느끼기 위해 사랑 비슷한 것을 하려고 했다. 정숙한 여자들은,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여자는 정숙했지만, 스스로도 정숙하게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보이는 게 싫었다. 여자는 경험이나 사연이 많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녀는 결혼한 적이 없었는데, 결혼을 했던 것처럼 행세할 때가 있었다. 사장님은 출장 중이신가봐요? 잔디를 깎으러 온 사람이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말했다. 영원히 출장 중이시죠. 영원히요? 죽었거든요.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더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다음번 잔디를 깎을 때는 다른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다른 여자들처럼 그렇게까지 요란을 떨면서 시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간절한 것도 싫었다. 시창작교실에는 열망 어린 눈빛을 가졌다고 할 수밖에 없는 여자들이 있었다. 징그러워. 집에 돌아가는 길을 걸으면서 여자는 몸서리를 치곤 했다. 시창작교실의 반장이 정도가 제일 심했다. 관념적이거나 현학적인 말을 썼고, 그 말들을 발음할 때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인간은 매일같이 전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식의 문장을 스타카토로 끊어 읽는 식이었다. 외모의 약점을 잡아 성격과 연관 짓는 것처럼 격 떨어지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유난히 혈색이 좋고 입술이 두꺼울 뿐만 아니라 까뒤집어진 반장의 얼굴 때문에 더 반감이 들었다. 밤마다 남자를 타고 앉아 집요하게 요분질을 하며 그 점막이 다 드러난 입술로 교성을 지를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쳤다.

시창작교실에는 부유한 여자들이 있었고, 그런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여자는 전자 쪽이었다. 부모를 졸지에 사고로 여의면서, 소나무가 스무그루 넘는 정원이 딸린 주택과 세채의 상가가 여자의 몫이 되었다. 어떤 까닭에서인지 여자는 부모의 빈소에서 슬퍼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 자신을 종종 상상해왔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슬프지도,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척을 하지도 않았다. 저거, 저거, 독한 것 봐라. 쟨 어릴 때부터 그랬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여자가 괘씸해서인지 아니면 여자가 상속받게 될 유산이 언짢아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선지 친척들은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고 수군거렸다. 뭣하러 울어야 하는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죄다 쓰고 죽겠다는 게, 여자 부모의 말버릇이었다.

혼자 살던 작은 아파트를 세놓고 부모가 살던 집으로 이사를 했다는 것 말고는, 여자의 삶은 달라진 게 없었다. 일주일에 두번 장을 보았고, 장바구니에 넣어 들고 갈 수 있을 만큼만 샀고, 하루에 한끼는 외식을 했으며, 십년 된 회청색 SM5를 갖고 있었지만 자주 몰지는 않았고,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았다. 기부를 독려하는 그린피스 회원 같은 사람을 만날 때는 이렇게 말하는 식이었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하지만, 노인들에게는 약했다. 다시는 펴지지 않을 것 같은 허리로 리어카를 끄는 노인이나 손바닥만한 볕이 든 데 앉아 푸성귀를 늘어놓고 파는 노인. 마늘이든 동부콩이든 청경채든 가리지 않고, 노인이 가지고 나온 모든 것을 샀다.

나는 왜 이 집에서 살고 있는가. 이사까지 해가면서. 여자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모가 죽었다고 해서 갑자기 애틋해진 것도, 여자가 태어나고 자라서 독립하기 전까지 살던 이 집에 어떤 애착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작은 아파트가 좁아서 옮긴 것도 아니고. 동백?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이제 여자의 소유가 된 집에는 동백나무가 있었다. 통통한 초록색 잎을 하루 종일 볼 수 있었다. 해가 비치면 더 통통해지는 잎. 화분에 심긴 나무가 아니라 땅의 기운을 받고 자라는 진짜 나무의 잎을. 꽃은 거의 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백나무가 동백나무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시창작교실에 다니기로 한 것은 이 구절 때문이었다. 구독하는 신문에 끼어들어온 백화점 문화센터를 홍보하는 전단을 보다가 여자는 눈물을 쏟았다. 시창작교실의 시인이 하는 말을 듣다가도 그럴 때가 있었다. 눈물이 나지 않더라도 감정이 격렬해지면서 여자는 자기가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그건 정말이지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부끄러워지면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현기증이 일기도 하는 야릇한 상태. 여자가 보라색 수첩에 기록한 스물두명의 사람도 여자에게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하지만, 스물세번째 사람인 그 남자를 만났을 때처럼 강렬하지는 않았다.

 

남자는 성악가다. 성악가였다. 지금은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기 위해 제주도에 출장이나 오는 처지가 되었지만.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 날, 예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고, 수염을 깎았다. 콧수염은 남겨두고 턱수염만. 골라를 가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골라. 골라를 내려. 골라를 올려. 남자가 처음 노래라는 것을 시작할 때 레슨을 해주는 대학교수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목울대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골라를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고, 대개의 일이 그런 것처럼 노력보다는 재능이 요구되었다. 골라를 움직인다는 것은 목소리가 나오는 문을 열고, 닫을 수 있게 된다는 말이었다. 골라를 연다는 것의 느낌을 알게 된 날, 남자는 수문 안에 갇혀 있던 물이 방류되는 환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무엇인가가 빠져나갔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다시 남자에게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수염을 깎은 남자는, 울었다. 삼일을 울었다. 하지만 눈물이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억지울음을 울어야 했다. 남자는 재능도 있는데다 노력도 아끼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뭐라도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남몰래 흐르는 눈물」 같은 노래를 부를 때 남자는 특히 고양되었고, 이렇게 감정의 흐름에 휩싸이는 자신이 선택받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우나 프루띠바 라그리마, 네리 오끼 쑤오이 스뿐또, 꿸레 페스또오제 조반니, 인비디아아아르 브로. 남몰래 흘린 눈물이 두 뺨에 흐르네, 내게로 향하는 생각은 진정한 사랑이오.

이상한 노래였다. 내용을 알고 보면 슬픈 노래가 아니었는데 사람들은 이 노래를 슬프게 불렀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노래를 부르는 남자가 아니라 남자 혼자 사랑하던 여자고, 그녀가 흘리는 눈물이 남자에 대한 사랑의 증거임을 감지한 남자가 기쁨에 차 부르는 노래다. 남자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슬퍼졌는데, 처음에는 그런 자신의 슬픔을 의식하지 못했다. 이 노래를 부르는 빠바로띠나 까루조의 감정을 따라 하려고 애썼고, 어쩌면 그들은 그렇게 애절한가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그 노래를 듣는 사람에게 눈물을 흘리도록 명령했다. 부드러운 명령. 그렇게 남몰래 흐르는 눈물.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라며 남자는 제목을 자주 틀리곤 했다. 하지만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몰래 흐르는 눈물과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분명히 다르다. 달랐다. 눈물을 흘리려고 한다면 ‘흘리는 눈물’이 되는 것이고, 울지 않으려고 참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눈물은 ‘흐르는 눈물’이다. 남자는 생각했다. 아디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게 아니라, 아디나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고. 네모리노가 볼 수 있도록, 그의 사랑에 화답할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랑의 묘약」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오페라 같았다.

어느 순간 남자는 어쩌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기를 발견했다. 남자는 슬프면서 기뻤고, 기쁘면서도 슬펐다.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것은 기뻤지만, 눈물을 참으면서 노래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해야 진정한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남자는 또 생각했다. 눈물을 흘리는 것과 눈물이 흐르는 것이, 다르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고. 어떤 눈물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몇 계절을 보내자 목소리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어느 정도. 남자의 주치의가 어느 정도라는 말을 쓰면서 남자의 회복을 알렸다. 어느 정도? 남자는 이 말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어느 정도. 어느 정도. 다시는 제대로 노래하지 못할 거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모른 체한다면 어느 정도의 노래는 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 무대에서는 노래하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 그가 무대라고 생각하는 그런 무대에서는. 심장은 물론이고 온몸의 살아 있는 것들이 일제히 팽창하는 그런 느낌을 영원히 갖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며칠 내내 귓가를 따라다니며 찰싹이는 박수 소리도.

대학에서 클래식이나 오페라에 대해 강의하는 게 남자가 찾아낸 타협안이었다. 그의 강의는 꽤 평판이 좋아서, 다른 곳에서도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크고 작은 콘서트홀과 백화점의 문화센터에서도 강의를 했다. 남자는 다시 바빠졌는데, 강의는 많이 해도 벌 수 있는 수입이 한정되어 있었다.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백화점에서나 해외직구로 옷을 사고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바에 가서 위스키와 꼬냑을 마시던 소비 패턴을 유지했으므로 돈에 쪼들렸고, 빈번하게 통장의 잔고를 확인해야 했다.

길에서 여자를 만난 날, 남자의 운은 최악이었다. 피아노는 조율이 완벽하지 않았고, 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자의 하얀 새틴 블라우스에는 얼룩이 눈에 띄었고, 연주자는 몇군데를 틀리기까지 했다. 어려운 곡이어서가 아니라 거의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 같았는데 문제는 이 연주자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거였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느낌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 같았다. 뿌치니처럼 세속적인 기쁨을 찬미한 사람의 노래를 어쩌면 그렇게 염세적으로 연주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무대 아닌 무대에 저런 사람들과 함께 서 있는 자신이 딱하기도 했고, 바이올린 연주 또한 영향을 미쳤으므로 남자의 노래는 그저 그랬다. 잘 부르고 못 부르고를 떠나 슬픈 느낌으로 가득한 노래였다.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는 자가 그랬다는 말이다.

신라호텔은 십년 전에 남자가 결혼식을 올린 장소이기도 했다. 연주가 끝나고 도망쳐 나오는 남자의 팔을 누군가가 잡았다. 어어, 노래 좋던데. 아직 안 죽었어. 대학 동창이었다. 노래에 재능이 없는 걸 빨리 깨닫고, 예술의전당 앞에 악기상을 차려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작은 콘서트홀을 지은 친구였다. 동창은 자신의 콘서트홀 무대에 한번 서달라고 했다. 남자는 자신이 동정받고 있다고 느꼈다. 막다른 길에 와 있다는 느낌도. 그런 그가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을 타려다 방향을 틀어 충동적으로 걷기 시작했을 때 여자를 만났던 것이다. 이상하고 촌스럽고 막무가내인 여자를.

그 여자를 지나쳐 걷기 시작한 남자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격정적이고 시끄러운 노래가 들리는 것 같았다. 슈베르트의 「마왕」 같은 음악. 번개가 꽝꽝 울리고 폭풍우가 쳐야 했다. 하지만 바람만 세차게 불 뿐 하늘은 말도 안 되게 깨끗했다. 모든 게 나를 조롱하는가? 남자는 주저앉았다. 길의 굴곡에 완벽하게 숨겨질 수 있었다. 그래서 여자는 그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남자는 울었다. 참았던 눈물을 더이상 참지 못했다.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었고,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었다.

남자는 궁금했다. 골라를 열게 되었던 그날 남자의 몸을 빠져나간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은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광필과 주영이 만난 곳은 제주였다. 각각 밀라노와 모스끄바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둘 다 성악을 공부하고 있었다. 광필은 한국에 2년에 한번꼴로 다녀가기로 마음먹었는데, 한국에 처음 다니러 왔다 간 제주에서 주영을 만났다.

신라호텔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 주류회사가 주최한 송년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서였다. 노래를 부르는 내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주영을 보면서 광필은 말을 걸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곳에 일을 하러 온 것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도 할 수 있구나. 샴페인 잔을 건네며, 주영은 반말로 말을 걸어왔다. 입술을 좀 지나치게 빨갛게 바른 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예쁜 여자가 예쁘지 않은 여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신선한 곡 해석이었다고 했다. 같이 웃었고,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았다. 그들은 제주에서 결혼했고, 결혼한 신라호텔의 정원에 동백나무를 심었다. 여름이었다.

그들이 유별나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신라호텔의 한쪽에는 동백나무로만 이루어진 숲이 있었는데, 모두 그곳에서 결혼한 부부들이 심은 나무였고, 그곳의 정식 명칭은 까멜리아 힐이었다. 실제로 땅을 파고 나무를 심은 사람은 호텔의 수목 담당자였지만, 부부들은 나무 심을 자리를 정했고, 자신들의 나무에 매달 표찰에 이름과 결혼한 날짜를 자신의 글씨로 적었기 때문에 ‘나무를 심었다’라고 누군가에게 말하곤 했다. 부부가 된 남녀들은 첫번째 결혼기념일에 나무를 보러 오자고 약속했다. 보나마나 그랬을 것이다. 주영과 광필도 그랬으니까.

주영과 광필의 경우로 한정해서 말한다면,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사랑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바빴고, 시간이 흘렀고, 그 약속보다 중요한 일들이 생기곤 했다. 그들이 동백나무를 보러 제주에 온 것은 단 한번이었는데,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나서였다. 주영이 우리의 동백나무를 보러 가자며 제주에 가자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할인권이 있으니 신라호텔에 묵자고 했고, 그들은 신라호텔에 춘설이 내린 것을 보았다.

“이것 봐. 눈이야. 봄눈에 동백이 파묻혔어.”

주영이 말했다.

“겨울에 피어 동백 아닌가?”

광필이 말했다.

“봄인데도 폈어. 대단하지 않아?”

주영이 말했다.

눈 사이로 빨간 빛을 발하고 있는 동백을 보며 광필은 무언가를 떠올렸다.

신혼부부들이 심은 나무들이 있는 동백정원까지 가지 않아도 신라호텔에는 동백이 많았다. 그때도 눈이 내렸었는데,라는 말은 누구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상대방이 눈 오는 겨울의 제주에서 이뤄졌던 그들의 첫만남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도 눈이 내렸고, 동백의 붉은 빛이 눈을 뚫고 번졌다. 주영은 양말을 벗어 운동화 위에 올려놓고 눈 위를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흉했다. 광필은 헤어지기로 한 사이에 하지 말아야 할 일 같은 것들이 있다면, 바로 이런 짓일 거라고 생각했다. 주영이 그런 짓을 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스타킹을 벗고 주영은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갔었다. 그날 그곳에는 빨간 스틸레토힐 위에 던져진 스타킹을 눈부시게 바라보던 남자가 있었다. 광필은 충동적인 여자에게 약했다.

“가만있어봐요.”

광필도 뭔가를 해야 했다. 질 수는 없었으니까.

“왜요?”

“냄새를 맡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영은 광필을 봤다.

“움직이니까 냄새를 맡을 수가 없잖아요.”

주영이 발작적으로 웃었다.

“쉿.”

광필이 주영을 제지했다.

그들은 동백의 향기에 취했다. 이미 진 동백들, 여전히 지지 않은 동백들 사이를 헤치고 걸어 다녔다. 광필은 동백이 향기가 없는 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주영이 모른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다고 하더라도 모른 척해주길 바랐다.

광필이 주영의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것처럼 주영도 광필이 원하는 여자는 아니었다. 주영은 아는 게 너무 많았고,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을 참지 못했다. 자신이 아는 것들을 광필에게 가르치려 했고, 자신이 모르는 것들에 대해 광필에게 캐묻는 일이 반복되었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높은 여자처럼 굴었지만 열등감 또한 상당한 여자였다. 의심했고, 추궁했고, 화를 냈다. 십년 동안 그랬다.

주영이 잠든 것을 확인하자 광필은 밖으로 나왔다. 자신들의 동백나무를 보기 위해서. 주영이 여기까지 와서 그들의 동백나무를 보러 가기를 거부한 데 대한 반감에서만은 아니었다. 광필이 객실을 두개 얻으려고 하자 주영은 말했다. 날 만지지도 않을 거면서 꼭 그래야겠어? 광필은 자신들의 동백나무가 보고 싶었다.

밤이라 일부러 그렇게 해놓은 것이겠지만 가로등의 조도는 충분하지 않았고, 핸드폰의 빛으로 한참을 비춰보고 나서야 그들의 나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그들의 나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광필의 글씨인 것 같기는 했지만 그의 이름 가운데 글자가 지워져 ‘김○필’로 되어 있었다. 시간이 십년이나 흘렀으므로 훼손되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하필이면 이름의 가운데만 지워졌다는 게 이상했다. 문제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들의 결혼기념일이 631일로 적혀 있는 것이었다. 631일? 그런 날은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주영의 이름 석자는 온전했고, 그 표찰의 글씨는 광필 자신의 것이 맞았다. 광필의 이름이 지워진 건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의 결혼기념일이 잘못 적힌 건 이해할 수 없었다. 광필은 꼼꼼한 사람이었고 더욱이 이런 걸 하면서 대강 할 리 없었다.

“뽑을래. 난 꼭 그래야겠어.”

아침에 일어난 주영이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십년 동안이나 뿌리 내린 동백나무를 뽑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충동적인 것처럼 말했지만, 주영의 캐릭터를 보건대 분명히 오래 생각하고 뱉은 말임에 틀림없었다. 어떻게 하면 광필의 화를 돋울 수 있는지 최대한 궁리해 짜낸 전략적 멘트라는 걸 광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광필은 저따위 말을 궁리하고 있는 주영이라는 여자와, 그런 여자와 십년이라는 세월을 부부로 보낸 자신을 증오했다.

“안 된다고 할까?”라고 말한 뒤 “안 된다면 당신이 해줘”라고 주영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혼 선물로 말이야.” 그러고는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광필을 바라보았다.

“지랄한다.”

광필이 말했다.

“지금 뭐라고 그랬어?”

주영의 말에 광필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그랬냐고?”

주영은 얼굴이 빨개지도록 소리를 질러 말했다. 침묵이 이어지자 주영은 스탠드를 화장대에 내리쳤다.

이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주영이 좋을 때도 패악질은 예쁘지 않았다. 광필은 팔짱을 낀 채로 주영을 노려보았다.

“곧 다른 사람이랑 살지도 모르는데…… 우리 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거……”

“뭐?”

“너무 끔찍하지 않니?”

“뭐가?”

“기괴해.”

더이상 광필은 대답하지 않았다. 광필을 노려보다 주영은 말했다.

“싫단 말이야. 난 싫어.”

광필은 주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주영은 광필의 귀에 가까이 입술을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

“싫다고. 정말 싫어. 싫어.”

“쌍년.”

광필은 등을 돌려 주영을 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등을 돌렸다. 뒤에서 “싫어, 싫거든”이라는 말이 들렸다. 광필은 주영을 방에 놓고 나와버렸다. 그렇게 하고 나와도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웃음이 터졌다. 목소리를 잃더라도, 이 여자를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겠다고 맹세했던 순간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에게 목소리가 가장 소중한 것이기도 했지만, 주영을 사랑하던 당시 그에게는 그것 말고는 내줄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디 목소리뿐인가. 주영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하늘이시여! 그래요. 나는 죽을 수 있어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부를 때 이 부분에서 진심을 다해 불렀다.

그들은 겨울에 만났고, 여름에 결혼했고, 봄에 헤어졌다.

 

남자는 화가 나 있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여자는 뒤늦게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또 그럴 것이고, 뒤늦게 후회할 것이다. 여자는 눈치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여자는 그 말에 상처받지 않았다. 자신의 세계에 깊이 매혹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의 기분을 재빨리 파악해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게 인간적 결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수줍음이나 체면이 호기심에 지고 마는 것도. 화가 나서 남자가 그녀의 말을 무시했던 거라고 생각하자 기분을 좀 풀 수 있었다. 남자와 헤어진 이후에도 여자의 눈에는 남자가 남았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도. 이 사람을 보라.

여자는 마음이 쓰였다. 마음을 썼다. 이미 말했듯이, 여자에게는 시간이 많았고 시간을 보내는 데 몽상처럼 좋은 게 없다는 것을, 그로 인한 몽상의 기쁨을, 알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의 행적을 더듬기 시작했다. 남자는 신라호텔에서 나온 게 틀림없다. 틀림없었다.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노래를 불렀을 것이고, 뭔가에 화가 났을 것이고, 충동적으로 거리를 걷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때, 여자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그게 다였다. 남자에 대해 생각하자 흥분 물질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앞으로 알게 될 일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욱신거렸다. 여자는 누군가의 뒤를 따라간 적은 있어도 그가 이미 지나간 길을, 지나갔을 것 같은 길을 따라간 적은 없었다.

신라호텔은 사흘째 그녀가 머물고 있는 곳이자, 제주에서 가장 잘 아는 곳이기도 했다. 중문이 아닌 다른 동네에 새로 생긴 프라이빗 빌라에도 머문 적이 있지만, 불편한 일들이 생기곤 했다. 신라호텔은 언제 와도 한결같았고, 그 한결같음이 지루함으로 연결되지 않는 게 여자는 좋았다. 호텔 외벽에 있는 아라베스끄 문양은 마드리드나 튀니스 근처의 해변 도시를 연상시켰는데, 지중해 인근에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이 실제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물찻오름과 비자림에도 갔다. 서귀포 밖으로 나가본 건 처음이었다. 사려니숲길을 걸을 때는 말을 보았다. 말이 다가오자 갈기가 예쁘다고 생각하면서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올레길은 조금 걷다 말았다. 성폭행범이 기승을 부린다는 뉴스도 뉴스였지만 올레꾼들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너무 무례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생각이란 것을 하고 사는 자들일까? 기괴하고, 무례하고, 촌스러웠다. 그들은 틀어놓은 음악에 맞춰 팔꿈치를 세차게 흔들며 걸었는데 타인과 스쳐지나갈 때 그 팔꿈치를 오므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성악간데 왜 턱수염이 없는 거지? 자신이 상상한 남자의 동선을 따라 걸으며 여자는 의아해했다. 그녀는 상식이 좀 없는 편이었다. 이언 보스트리지나 롤란도 빌라존 같은 스타일의 성악가는 알지 못했다. 여자는 서둘러 호텔로 돌아와 결혼식이 열리곤 하는 연회장으로 갔다. 그날의 결혼식은 모두 끝나 있었다. 회색 정장을 입은 호텔 직원들이 화환을 치우고 있었다. 여자는 화환과 혼주와 혼주에게 인사하는 하객들을 상상해보았다. 결혼식이 시작된다는 안내가 나오고, 긴 베일을 끌며 신부가 지나간다. 그러고는 남자가 등장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테너일까, 아니면 바리톤일까? 무슨 노래를 부르게 해야 적당할까?

홀에서 나온 여자는 걷다가 동백정원에 이른다. 부부가 된 이들이 심은 동백나무로만 이루어진 숲에. 그녀가 이 호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꽃은 피지 않았다. 가을이니까. 나무들에 매달린 이름표를 읽기 시작한다. 눈으로 읽다가 입으로도 읽는다. 손글씨로 적힌 이름표와 금속에 인쇄된 이름표가 섞여 있다. 금속 이름표가 비교적 최근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름표에 적힌 결혼기념일을 읽다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훼손된 이름표들이 있었다. 훼손된 건지 훼손한 건지 알 수 없는 이름표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름표가 없는 나무도 있었다. 관계가 파탄 난 누군가가 이름표를 떼어내버린 건가? 여기까지 와서? 하긴, 나무를 뽑을 수는 없을 테니까. 이름표가 사라진 나무의 주인들은 헤어진 건가? 영원히?

남자는 이곳에서 결혼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오늘 이 남자는 자기가 결혼했던 곳으로, 자신의 파탄 난 결혼이 시작되었던 곳으로, 누군가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르러 왔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다. 그는 지금 비행기를 탔을까? 아니면 걷고 있을까? 여전히?

여자는 그러다 손글씨로 적힌 그 표찰을 발견한다. 631일? 어느 표찰에 결혼기념일이 이렇게 적혀 있던 것이다. 세상에는 결혼기념일을 잘못 적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것도 존재하지 않는 날로. 그리고 그 표찰에는 심지어 신랑의 이름 가운데 글자가 지워져 있었다. 여자는 그 남녀가 걸었을 길을 걷는다. 그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서. 그렇다고 나태한 건 아니다. 한순간도 놓칠 수 없다. 웃음소리가 들린다. 누군가의 행복한 시절에 대해 생각하자 여자도 행복했다. 행복해졌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한 시절에 대해 생각했다.

있었나? 처음에 여자의 부모는 자신의 딸을 사랑했다. 결혼한 지 칠년 만에 얻은 자식이었고, 자신들의 장점만을 조합해 만들어진 아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가 자신들의 장점을 닮은 것 같지 않게 자라더라도 계속해서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자가 변한 건 없었다. 그들이 변했다.

여자는 간신히 생각해냈다. 마당에 있던 그네. 그네에서 책을 읽던 어린 그녀가 떨어지자 여자의 아버지는 벤치처럼 등받이가 있는 그네를 다시 매달아주었다. 모래 장난을 혼자서 하고 싶다고 하자 아버지는 또 곧바로 포클레인을 불러 모래밭을 만들어주었다. 정원의 잔디를 뽑아내고서 말이다.

그리고 어제도 그랬다. 여자는 멜국과 각재기국 중에서 고민하다 멜국을 주문했다. 먹어보지 않은 음식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여자는 멜국이 나오자 안도했다. 된장을 푼 배춧국에 큰 멸치가 들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말리지 않은 멸치를 여자는 처음 보았다. 여자가 웃자 주인 할머니가 고함을 쳤다. 왜 웃어? 실성했어? 뭐라 뭐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또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할머니는 귀가 잘 안 들리는 것 같았다. 여자는 조금 울었고, 할머니는 또 왜 우느냐고 고함을 쳤다. 여자는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아직 제주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도 자신이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시절을 두고서 어떻게 미련 없이 떠난단 말인가. 시간은 흘러가버렸고, 곁에 있던 사람은 없어졌지만, 행복감을 느끼던 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주인이 없는 집에서 그네는 혼자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급해진 마음에 여자는 보폭을 크게 해서 걷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잠시 멈춘 후, 방향을 틀어 걸었고, 계단에 이르렀다. 여자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언덕이 나오고, 그 언덕에서 중문 바다가 보인다는 것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또 그 언덕에서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는 것도. 언덕에 이르자 바다가 보였다. 다시 계단을 내려가면 바다로 갈 수 있을 것이었다.

 

광필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주영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꿈이 꽤 달콤해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볼에 입을 맞추었다는 것만은 기억이 났다. 그게 꿈에서 일어난 일인지 꿈 밖에서 일어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감았다 떴다 하는 눈꺼풀 사이로 주영이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 했다. 일어나봐요. 주영이 광필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래도 광필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자 주영은 모래에 그를 파묻기 시작했다. 여름의 볕에 달궈진 모래의 촉감은 기분이 좋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주영은 광필의 볼에 입 맞췄다. 그러고는 광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뭐라고?

주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달싹였고, 그 입술의 움직임이 광필의 귀에 느껴지기는 했어도 말이 되기 이전의 말이었다. 그러므로 광필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계속 눈을 감은 채로 있고 싶었다. 주영의 얼굴 차양 아래 좀더 있고 싶었다. 그들은 작년 겨울에 처음 만난 후, 오개월 만에 다시 만났고, 사흘째 같이 보내는 중이었다. 광필은 생각했다. 목소리를 잃더라도 이 여자 옆에 있고 싶다고.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래요, 나는 죽을 수 있어요. 죽을 수 있어요. 사랑을 위해서. 그가 연습하고 있는 오페라의 아리아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었다. 광필은 이번 여름이 끝나기 전에 청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광필은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았고,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었다.

바다로 내려오는 계단이 있는 언덕 위에서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광필은 고개를 뒤로 힘껏 젖혀 그곳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뿌연 무언가가 빛을 뚫고 들어와 그들 가까이로 오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들의 기쁨을 가릴 만한 정도에는 미치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웃고 또 웃었다. 어디로부터 온 빛인지 알 수 없는 빛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