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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로렌조 피오라몬티 『숫자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 더좋은책 2015
숫자 뒤에 숨은 정치성을 파헤치다
이두갑 李斗甲
서울대 서양사학과·자연대 협동과정 교수 doogab@snu.ac.kr
통계학(statistics)은, 국가에 관한 학문(state+tics)이라는 어원에서 볼 수 있듯이, 19세기 자유주의 국가의 발전과 함께 등장했다. 그후 통계학은 국가의 통치영역을 확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국민의 출생과 죽음에서부터 그들의 경제적 활동과 세금, 그리고 질병과 범죄에 대한 통계에 이르기까지 통계학은 국가의 ‘현실’을 숫자로 표현했다. 19세기를 살았던 동시대인들은 ‘산사태와 같이’ 많은 수치와 통계들이 출현하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국가의 관료, 전문가 들은 이러한 숫자와 통계학적인 방식을 사용하며 새로운 통치집단으로 부상하면서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에 대한 개입을 확대해나갔다. 19세기 등장하기 시작했던 통계와 숫자로 무장된 관료와 전문가 집단의 놀랄 만한 성공과 성장에 기반해 새로운 국가의 거버넌스 방식 또한 이 시기에 등장했다.
로렌조 피오라몬티(Lorenzo Fioramonti)의 『숫자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How Numbers Rule the World, 한국어판 박지훈 옮김)는 21세기 세계화된 시대에 초국가적 기업과 전문가 집단이 숫자와 통계를 통해 국제 정치와 비즈니스를 관장하는 글로벌 거버넌스에 얼마나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이미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지표인 GDP(Gross Domestic Product, 국내총생산)에 대한 분석을 통해 국제 경제질서와 시장의 거버넌스에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논의한 바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GDP라는 수치는 국가의 경제체계와 그 기반이 되는 정치체계의 성공을 측정하는 국제적인 기준으로 사용된다. 그는 GDP 같은 숫자로 표현되는 일견 ‘객관적인’ 경제적 지표의 생산에 관여하는 경제학적 가정들 이면에는, 여러 정치적 이해관계와 의제가 내재되어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례로 GDP 측정 방법론에 따르면, 임금을 받는 노동활동은 생산적인 것이지만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생산적이지 않은 경제활동이다. 즉 GDP라는 지표 이면에는, 이미 어떤 노동이 생산적인 것인지, 어떤 종류의 일이 국가에 생산적으로 기여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매우 정치적인 방식의 구분이 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GDP에 대한 신뢰 때문에 노동에 대한 차별적 평가를 인식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서로 다르게 규정된 사회적 지위가 공고해진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렇게 숫자가 지배하는 사회, 즉 여러 경제적 지표에 기초해 국가의 통치활동과 공공정책이 확장되는 사회가 될수록, 관료와 전문가들에 의한 폐쇄적인 거버넌스 체제가 강화될 우려가 있음을 경고한다.
요컨대 이 책은 저자의 GDP에 대한 연구를 확장시켜, 숫자와 통계 이면에 있는 ‘숫자의 정치학’의 중요성을 국제적 차원에서, 즉 글로벌 거버넌스 차원에서 접근한 저서다. 숫자에 기반한 객관화를 통해 관료와 전문가들은 여러 공공정책사업에서의 비용-편익 분석을 행했으며, 이를 통해 사회의 여러 집단에 차별적 영향을 미치는 정책의 도입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숫자화가 신용평가(크레딧 레이팅) 같은 금융시스템부터 지구온난화에 대한 논의 및 환경과 자연보존, 나아가 국제원조 같은 영역에서의 정치적인 선택과 글로벌 거버넌스를 어떻게 시장가치에 기반을 둔 폐쇄적 시스템으로 변화시키는지를 하나하나 고발한다.
정부 관료와 전문가들은 점차 광범위한 영역에서 측정, 평가, 비용-편익분석, 표준화된 평가, 투자이익, 가격모델을 체계적으로 적용하면서 시장경제적 메커니즘을 통해 현실을 이해했다. 국가와 통치집단은 이러한 이해에 기반을 둔 각종 제도를 제정하고 기관을 설치하면서, 사회를 특정한 방향으로 재조직하고 통치했다. 그리고 이렇게 “숫자를 사회적 삶에 체계적으로 적용하면서” “숫자가 진실이 될 수”(274면) 있었다. 나아가 20세기 후반 이후에 나타난 이같은 숫자화와 시장경제적 기준의 결합은, 시장 기반의 거버넌스 체제가 한층 공고하게 고착되고 전세계적으로 확장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제 한 국가의 정치·경제체계의 우월성에 대한 평가는 그 나라의 채권에 대한 신용평가로 대치되었으며, 그에 따라 S&P나 무디스 같은 신용평가기관은 국가에 시장친화적 정책을 강제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지구온난화로 인한 변화를 탄소배출권 거래 등의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나면서 환경오염권 거래가 확대되었다. 2008년 BBC의 「대자연 주식회사」(Nature Inc.)라는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듯, 자연자본의 상품화를 통해 천연자원이 관리되고, 자연보존에 대한 비용-편익분석을 통해 제3세계의 환경조차 시장화를 통해 관리·보존되게 되었다. 이러한 광범위한 ‘자연의 금융화’와 더불어 국제원조 등의 사회문제에 대한 접근 역시 빌 게이츠 같은 비즈니스맨이 주창하듯이, 경제학적 비용과 편익이라는 기준에 의해 시장주의적으로 재편된 것이다. 이 모든 영역에서의 숫자화 과정이 금융화·시장화와 함께 진행되면서, 정치와 거버넌스 체계가 전지구적 차원에서 표준화된 기준에 의해 획일화되었다.
저자는 GDP, 주가지수, 신용등급, 자연의 금융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가격’을 정하려는 시도가 시장을 중심으로 한 계산 가능한 기준을 강제함으로써 한 사회는 물론 전지구적 차원에서의 사회적·정치적 이해와 선택을 제약한다고 비판한다. 일례로 그는 비용-편익 분석이 미래 자원가치의 할인율을 지나치게 높게 정하는 등 현실의 이득에 큰 가치를 두는 문제가 있으며, 환경보존과 자연개발에 대한 경제적 분석이 누가 비용을 지불하고 누가 이득을 얻는지를 묻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정의에 무감하다고 꼬집는다. “숫자는 상이한 가치, 원칙, 사상을 측정으로 단순화하면서” 국가, 시장, 시민사회 간의 상호작용을 협소한 기준으로 폐쇄화시켰으며, “시장이 수치적 추론의 이상적인 공간으로 간주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시장지배를 부추겼다”는 것이다(284면). 하지만 이러한 ‘숫자의 정치화’에 대한 분석은 미비한데, 저자에 따르면 그 이유는 통계와 숫자의 객관성에 대한 신뢰가 거버넌스의 탈정치화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즉, 숫자는 권력의 작동과 이해관계를 제거하지 않고 숨긴다는 것이다.
이 책은 어떤 종류의 숫자를 원하는지에 대한 대중의 토론과, 여러 공공정책적 이슈를 숫자화화는 데 대한 개입이 21세기 민주주의적 거버넌스의 핵심이라 주장한다. 저자는 숫자와 통계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어떤 종류의 숫자와 통계를 원하는지를 논의하는 ‘숫자의 정치학’을 복원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실제로 ‘거버넌스 혁신연구센터’를 운영하면서 사회적 가치와 정치적 선택을 반영하는 새로운 종류의 숫자와 통계를 산출하고 이에 기반한 대안적 거버넌스 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행하고 있다. 거버넌스의 기술인 통계학과 숫자화에 대한 정치적 독해를 시도하는 이 책은 빅데이터 등 정보통신기술에 대한 찬양과 틀에 박힌 경제학적 기준에 입각해 점차 획일화되고 폐쇄적으로 되어가는 거버넌스 체계에 대한 정치적 개입의 필요성과 새로운 정치적 대안의 설계 가능성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저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