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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지리멸렬한 기술유토피아
4차산업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
서동진 徐東振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저서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변증법의 낮잠』 등이 있음. homopop@gmail.com
(불)가능한 유토피아
2016년 새해 벽두부터 우리는 주변에서 마치 주문처럼 울려 퍼지는 음산한 이데올로기적 송가에 홀린 듯 빠져들게 되었다. 그것은 4차산업혁명이라는 음험한 개념과 그것에 장착된 이데올로기적 서사였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기술유토피아적인 서사는—곧 보겠지만 실은 전연 유토피아적이지 않은—단호하게 미래에 찾아올 기술적·사회적 발전의 추세를 예언하였다. 기술이 미래라는 시간(성)과 결합되어 시간의 서사를 이끄는 주제로서 혹은 나아가 시간 자체를 추동하는 주역과도 같은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고급 학술 담론에서 선형적 시간, 뉴턴적 시간 관념이 낳은 끔찍한 사고의 산물로 미래라는 개념을 규탄하거나 말거나 미래라는 관념은 여전히 우리 주변을 배회한다. 과학과 기술이 존립해야 할 유일한 목적이 미래라는 시간을 위한 것인 양 기술의 성취를 예언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미래라는 낱말이 배회한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미래에 대한 꿈은 기술이 가져다줄 꿈이라는 서사를 통해 가장 생생하고 또 설득력 있게 드러나고 광채를 발한다. 그러나 그런 기술의 미래에 관한 대담한 예측임을 자처하는 4차산업혁명은, 기술과 미래를 잇는 유토피아적인 서사로서, 우리가 지금껏 마주했던 것 가운데 가장 형편없고 저속한 것처럼 보인다. 뒤에서 볼 것처럼 그것은 우리가 꾸는 행복과 자유의 꿈 속에 들어 있는 선물 가운데 어느 하나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이 약속하는 선물이란 행복을 망치는 데 더 쓸모있는 것처럼 보이기만 한다.
기술을 빌려 세계에 대한 꿈을 꾸는 일을 높이 사는 걸 두고 ‘기술결정론’이라는 죄목을 붙여 눈 흘기며 경계하거나 핀잔을 주는 것이, 오늘날 ‘비판적’인 체하는 이들의 불문율일 것이다. 그러나 기술결정론이 생각처럼 그렇게 추하고 사악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산력의 발전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또 생산력의 알파와 오메가는 다양한 기술적 혁신을 통해 가능하다. 이런 점을 헤아리자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자본주의에서 미래를 상상하는 서사적 씨줄이 될 수밖에 없다. 기술의 손에 의해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서사는 이데올로기적인 서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류나 허위의식으로 간단히 물리칠 수 있는 관념이 아니다. 맑스(K. Marx)가 말했듯이 마치 상품이나 화폐라는 것이 전적으로 물신주의적인 환영의 효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가짜라거나 오류라고 부정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는 그러한 상품과 화폐, 자본을 둘러싼 환상을 가리키기 위해 물신주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는 기술결정론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기술물신주의에 대해서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기술물신주의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한 간단히 제거할 수 없는 환상이다. 더욱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자본은 기술혁신을 추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술적 혁신을 통해 자본은 성장하고 축적한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진보와 발전이라는, 정치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이상(理想)을 통해 나타난다. 그런데 그러한 이상이 자라나고 터져 나오는 곳은 여러 곳일 수 있다. 예술일 수도 있고(알다시피 오늘날 예술은 더이상 미래엔 관심 없고 동시대성이라는 현재의 시간에 스스로를 감금하였다. 동시대 미술이나 동시대 무용이라는 개념이 정착한 것은 시사적이다), 사회운동이나 정치일 수도 있었다(지금은 희귀해졌지만 과거의 정치적 당파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보수주의자와 현재가 최선이라는 자유주의자와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급진주의자 사이의 삼파전 양상으로 움직였다. 오늘날 그 삼파전은 좌파자유주의, 우파자유주의, 중도자유주의라는 양상으로 대체되었다. 여기에서도 역시 현재만이 반복된다). 그러나 그러한 미래-이상이 오늘날 온전히 살아남은 곳은 과학과 기술뿐이다.
어떤 세계에 살 것인가를 꿈꾸는 일, 즉 미래라는 시간을 구성하고 그때 실현될 삶의 모습을 상상하는 유토피아 이미지는 어쨌든 미래라는 시간을 필수적으로 요청한다. 그러므로 기술과 과학에서 미래라는 시간을 상상하고 인식하고 싶어하는 자들을 기술결정론이라는 낙인을 붙여 오만하게 꾸짖는 것은, 기술의 발전이 자본주의가 재생산하기 위해 필연적인 것임을 무시한다. 나아가 적나라한 사회 대립과 투쟁 없이 인간들 외부에 놓인 객관적인 힘에 의해 완성되는 유토피아, 즉 계급투쟁 없는 유토피아, 혁명이 없는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데 기술과 과학이 이데올로기적 환상으로서 발휘하는 놀라운 힘을 간과한다.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혁명은 더이상 상상할 수 없지만 그 대신 우리 주변에 수많은 과학기술혁명 서사들이 증식하는 것은, 어쩌면 자리바꿈된 유토피아적인 꿈이 살아 숨 쉴 수 있는 곳이 그곳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축적이든 성장이든 발전이든 자본주의의 역사적 시간은 기술적 발전의 연대기를 통해 제시된다. 이는 무엇보다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역사를 재현하려는 수많은 서사의 원동력이 되어왔다. 오늘날 아주 고집 센 좌파 지식인이나 정치가가 아니라면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혁명을 거론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체계라는 믿음이 완승을 거둔 이후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또한 그렇게 유일하게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세계에도 엄청난 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유일하게 가능한 세계가 더이상 나아질 것이 없는 세계를 뜻한다면, 그 유일하게 가능한 세계에서 착취와 고통을 겪는 이들에겐 악몽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제아무리 가능한 유일한 세계라 할지라도 그 세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꿈을 제거한 채 유지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세계가 되고자 한다면 이 세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꿈, 즉 불가능성이 가능성이 될 수 있도록 하는 환상을 성공적으로 제조할 수 있어야 한다. 4차산업혁명은 그러한 유토피아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려는 최신의 시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기술의 마법을 통해 어떤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있을까.
이데올로기적 서사로서의 4차산업혁명
4차산업혁명은 다보스포럼으로 더 잘 알려진 세계경제포럼이 2016년 선택한 의제였다. 아마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가장 장수한 이데올로그로 기록될 클라우스 슈바프(Klaus Schwab)가 세계경제포럼을 창설한 해가 1971년이었다. 세계경제포럼은 초국가적 자본가계급(TCC, Transnational Capitalist Class)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라고 할 수 있을 다양한 ‘초국적 정책집단들’ 가운데 하나이다. 초국가적 자본가계급이란 2차대전 이후 본격화된 자본주의적 지구화, 상품과 노동력을 수출하는 것을 넘어 자본수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이러한 자본의 놀라운 이동성이 지리적 경계에 제약받지 않은 채 지구 전역으로 뻗어나가면서 형성된 새로운 자본가계급을 가리킨다.1 새로운 지구적 범위의 지배를 실현하게 된 자본가계급은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념을 마련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강제하고 혹은 설득하기 위해 자신을 조직화하게 된다.2 그리고 이를 위해 다양한 초국적 정책집단을 표방한 여러 기관들이 창설되어왔다. 세계경제포럼도 이러한 초국가적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 장치 가운데 하나이다. 세계경제포럼은 국제상공회의소 같은 곳이 보수적인 자유방임주의의 입장에서 시장경제를 극력 옹호하는 반면, 어느 학자의 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적 구조주의자”(neoliberal structuralist)에 해당되는 이념을 선전하는 기관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주의란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시장경제의 폐단, 무엇보다 휘발성 강한 국제금융체제가 야기하는 부정적 효과를 규제하기 위해 시장에 대한 일정한 규제가 제도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즉 이는 제한된 범위에서 시장경제를 규율할 수 있는 정치적인 상부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입장이라 요약할 수 있다.3 물론 2008년의 금융위기와 기후변화를 둘러싼 강력한 규제의 요구에 직면하면서 이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그래봤자 눈곱만하긴 하지만 시장을 제어할 필요를 역설하는 정책집단들도 최근 부상해 활동하고 있다. 이를테면 세계지속가능발전 기업위원회(WBCSD, World Business Council for Sustainable Development)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프리메이슨단처럼 은밀한 방식으로 조직되거나 끊임없는 음모론의 주역으로 등장하곤 하던 빌더버그회의(Bilderberg Conference) 같은 주요 초국가적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 장치들에 비해 세계경제포럼은 매우 특기할 만한 모습을 선보였다. 팝스타나 영화배우 등은 물론 ‘세계적 오피니언리더’로 알려진 이들을 치어리더로 내세우며 세계경제포럼은 매년 초 글로벌한 대중문화축제(마치 음악축제나 비엔날레와 비슷한) 같은 형태로 초국가적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담론-이벤트를 생산해왔다. 여느 정책집단처럼 신자유주의의 핵심적인 주장들을 공격적으로 주장하던 세계경제포럼은 1990년대 후반 이후 지속된 경제 위기와 침체에 직면하면서 이른바 ‘사회적 이슈’를 적극 채택하고 그와 연관된 주제에 개입하는 입장을 취해왔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글로벌 기업 시민’(Global Corporate Citizenship)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기업도 여느 시민처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시장경제에 대한 규제를 도입하도록 하는, 한발 물러선 방어적인 입장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한 경제와 분리된 다른 영역 사이의 경계를 흐리도록 만들며 자본가계급 스스로 의제를 형성하고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주체로서 활동하도록 하는 변신을 가능케 한 공세적인 전환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4차산업혁명은 세계경제포럼이 진행한 이데올로기적 캠페인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익숙한 기술유토피아의 서사를 참조하고 동원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4차산업혁명의 어두운 면으로 알려진 일자리의 감소와 실업이라는 비전을 제시하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현실을 기술적 변화에 따른 자연적 사실인 듯 제시하는 데 더욱 고삐를 죈다. 그러나 4차산업혁명이 상기하는 기술유토피아의 이미지는 기술에 의지하여 장밋빛 미래를 그리려는 자신의 서사적 동기를 어이없으리만치 배반한다. 한편 4차산업혁명을 중계하는 국내 정부부처나 주요 국책연구기관의 발언 역시 어떤 이견도 내세우지 않고 그 유토피아 서사를 답습한다. 미래창조과학부의 미래준비위원회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및 한국과학기술원과 함께 발간한, 보고서 겸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선전책자로 발간한 어느 글에서, 4차산업혁명은 이렇게 요약된다. “2010년대 들어 여러 기기가 지능화되고, 만물이 집약적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문명사적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Big Data), 클라우드 컴퓨팅(Cloud Computing), 모바일(Mobile), 인공지능(AI) 등 지능정보기술이 다른 분야와 융합하며 변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또한, 인터넷이 등장하며 형성된 가상공간이 실제공간과 결합하며, 사람-사물-공간이 고도로 연결되고 단순한 정보 축적을 넘어 지능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세계경제포럼에서 논의된 ‘4차산업혁명’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기존에는 분리되어 있던 물리적·가상적·생물학적 영역들이 융합되면서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4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발간한 책에서도 내용은 다르지 않다. 그 역시 이렇게 전한다. “제4차산업혁명은 연결·지능·실감의 정보통신기술과 다양한 과학기술의 융합을 기반으로 한 차세대 산업혁명이다. 제4차산업혁명은 인류의 사회·경제·문화에 걸쳐 새로운 대분기를 초래할 변혁이다.”5 경영담론의 변화를 신속하고 또 대대적으로 매개하는 데 있어 괄목할 만한 역할을 수행해온 경제신문의 대표주자인 매일경제신문사에서 낸 세계경제포럼 보고서 역시 같은 내용을 전한다. “4차산업혁명은 단순히 기술적인 발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4차산업혁명은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 메가톤급 파장을 초래할 혁신적인 변화의 신호탄이자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회다. 그만큼 4차산업혁명의 본질을 꿰뚫고 이에 대비하는 게 국가나 사회 그리고 기업, 개인에게 중요하다.”6
그런데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클라우드 컴퓨팅, 모바일, 인공지능 등이 역사적인 대분기를 초래하고 경제를 넘어 모든 분야에 메가톤급 파장을 몰고 올 기술적 혁신이라 강변하는 수사에는 어쩐지 공허하고 자기 패배적인 기운이 드리워져 있다. 그것은 기술유토피아가 되기 위한 핵심적인 요건을 구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술적 유토피아가 꿈꾸는 미래의 행복은 4차산업혁명에서는 전연 등장하지 않는다. 지난 시기 산업혁명 때마다 다투어 등장했던 행복한 미래의 전경이 4차산업혁명 서사 속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있다. 증기기관의 발명과 기계제 생산을 통한 1차산업혁명이든, 전력화와 더불어 진행된 대량생산체제의 2차산업혁명이든 그 모두는 기술유토피아의 꿈 속에 사회적 유토피아의 꿈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획기적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가족드라마를 품고 있었다. 오랫동안 음식을 보관해도 부패하지 않는 신기한 기계가 만들어지고, 집 안에서 버튼을 누르면 뜨겁고 차가운 공기가 나와 냉난방을 해결하고, 스위치를 켜기만 하면 음식이 덥혀지며, 갖은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고, 상자의 화면에서 저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 온 소리와 이미지가 전달될 것이라는 등의 불가능한 듯 보이던 꿈을 기술유토피아는 약속했고 실현했다. 그것은 진짜 유토피아적인 꿈이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했던 꿈의 요체,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꿈을 실어 날랐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든 혹은 소금에 절인 고기와 과자, 치즈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이든, 이런 꿈들은 전근대 세계의 유토피아적 꿈부터 지속되어온 확고한 이미지였다. 전근대 세계에서 그러한 유토피아가 섭리와 마법의 힘에 기대려 했다면 적어도 자본주의적 근대에서 그것은 기술유토피아를 통해 계획되고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화려한 그림과 시각적 스펙터클, 노래와 전시회 등을 동원하며 대중의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기술유토피아는 사회유토피아의 꿈이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2차산업혁명의 유토피아적 꿈은 그런 행복에의 꿈 가운데 가장 진보된 버전을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달나라로의 여행과 마침내 화성이라는 별에 정착해 이상세계를 이루고 살겠다는, 언제부터인가 연기처럼 사라진 꿈이 바로 그것이다. 그 꿈은 구소련과 미국의 우주계획(space program)이라는 필사적 경쟁을 통해 지속되었고, 사회의 집합적인 꿈을 실행하는 기관으로서의 국가라는 사회적 꿈의 집행자를 통해 실현되었다. 두 나라를 필두로 많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연구개발에 엄청난 액수의 돈을 쏟아부었고 단기적인 가치실현에 연연하지 않은 채 꿈을 향한 무모한 기술적 투자와 연구를 증진시켰다. 그러나 이제 단기실적주의라는 지상명령이 횡행하면서 연구개발을 통한 기술혁신의 범위 자체가 제한되고 그나마 그를 통해 나타난 성과 자체도 신속하게 특허와 브랜드 등의 상품으로 둔갑한다. 비록 그것이 시장을 통해 계급에 따라 국가에 따라 차별적으로 분배되었어도 종래의 기술유토피아가 말을 건넸던 이는 인류였다. 그렇기에 기술유토피아를 가장 열정적으로 소비한 이들은 어린이거나 청소년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어린이 과학잡지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과학도서에서 미래의 아름다운 유토피아를 전하는 이야기는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반면 오늘날 기술유토피아는 계급적 특성이 적나라하다. 또한 이는 4차산업혁명이 기존 산업혁명의 이데올로기적 서사와 전연 비교할 만한 처지가 못 된다는 점을 증빙한다. 20세기 중반을 전후해 1990년대까지, 그러니까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고개를 내밀기 이전까지 기술유토피아는 결핍으로부터 벗어난 풍요로운 삶의 청사진을 제공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향한 꿈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을 비전을 예시하여주었다. 바로 그것이 생산의 자동화와 로봇화를 통한 일의 종말이라는 꿈이었다. 그것은 더이상 생존을 위한 고역에 희생당하지 않은 채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계에 대한 꿈이었다. 그러므로 유토피아적 꿈의 종결부가 바로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은 결정적이었다. 노동의 폐지와 종말이라는 꿈은 물론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넘어선 세계로 향하는 정치적, 사회적인 기획과 만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과 곧 이들의 대열에 합류한 우등생 발전국가들은 노동의 폐지라는 꿈에 박차를 가하는 대신 외주, 하청과 생산 재배치 그리고 현지에서의 유연화된 노동으로 그 꿈을 대체했다. 정보통신혁명은 운송의 컨테이너화와 컴퓨터화로 대표되는 수송 및 유통 혁명을 통해 생산을 보이지 않는 저 멀리로 감추었다. 그리고 우리는 경악스럽게도 일이 사라진 세계의 문명을 꿈꾸는 대신 일자리가 사라질 때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대비하라는 기술유토피아의 협박에 직면해 있다.
어떻게 유토피아를 만회할 것인가
4차산업혁명의 기술유토피아는 ‘유토피아 없는 유토피아’라는 점을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행복과 자유 가운데 어느 것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그것은 바로 오늘날 정보통신혁명 이후의 기술적 혁신과 진보, 신자유주의적 혁명 이후 나타난 기술적 성과의 초라한 성적표를 확인하는 보수적인 경제학자의 글에서도 씁쓸하게 확인된다. 혁신을 통해 경제발전을 가능케 하는 이상적인 경제질서로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고든(Robert Gordon)이 낸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그런 것이다. 그는 3차산업혁명과 이후의 기술혁신을 이전의 기술혁신 사례들, 즉 남북전쟁 이후 미국 자본주의의 장기적인 추세의 두 단계(첫번째는 1870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단계이고 두번째는 1940년에서 2015년에 이르는 단계이다)를 검토하면서 3차산업혁명이 거둔 성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3차산업혁명은 분명 혁명이었지만, 모든 것을 바꿔놓은 2차산업혁명과 달리 그 영향력의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ICT(정보통신기술—인용자)혁명으로부터 별다른 영향을 실감하지 못한 개인소비지출의 범주는 가정과 외식에서 소비되는 음식, 옷과 신발, 자동차와 연료, 가구, 살림 도구와 가전제품 등이었다. 2014년에 소비지출의 3분의 2는 집세, 교육, 의료비, 개인미용 등의 서비스로 흘러갔다. 태닝과 네일 살롱이 이발소와 미용실에 합류했지만, ICT혁명은 여기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페디큐어는 고객이 1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비치해놓은 잡지를 읽든 킨들로 책을 읽든 아니면 스마트폰으로 웹검색을 하든 상관없이 페디큐어다. (…) 우리는 컴퓨터를 먹거나 입을 수 없고, 컴퓨터를 타고 출근할 수 없으며, 컴퓨터더러 머리를 깎아달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1950년대처럼 이런저런 가전제품이 놓인 주택에 살고 있으며 편리함과 안전함에서는 조금 나아졌겠지만 1950년대와 같은 기능을 수행한 차를 몰고 다닌다.”7
그는 현재 미국인들의 소비지출이라는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변화를 조감하며 고작해야 지금껏 늘어난 새로운 행복의 작은 조각이 개인미용임을 비웃듯 언급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생산분야와 기술혁신이 만나 어떤 생산성 향상을 가져올까. 고든이 냉소적으로 말하듯 이는 고작해야 종이로 된 잡지를 대신해 킨들로 책을 보거나 스마트폰으로 웹검색을 하는 정도의 변화일 뿐이다. 그것은 행복을 추가하기는커녕 거꾸로 이전 시대의 행복을 갉아먹기에 바쁘다. 그리하여 이 보수적인 경제학자는 다음과 같이 침울하게 과거의 산업혁명과 오늘의 산업혁명을 대조한다. 그에게 4차산업혁명 따위란 있지도 않은 허깨비임은 물론이다.
1970년 이후로 측정된 생산성 증가율이 둔화되었다는 사실은 컴퓨터나 디지털화와 연관된 3차산업혁명이 2차산업혁명만큼 중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중요한 사례다. 또한 측정된 성장의 기록뿐 아니라, 측정되지 않은 생활수준의 향상도 2차산업혁명의 그것만큼 크지 않다. 1970년 이후에도 혁신은 계속되었지만, 그 범위는 엔터테인먼트와 정보통신기술에 집중되어 예전만큼 전면적이지 않았고, 음식·의복·주택·운송·건강·가전제품·근로조건과 관련된 여러 차원에서의 생활수준의 향상도 1970년 이전보다 그 속도가 느렸다.8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주장은 간명하다. 행복과 자유의 유토피아를 향한 꿈을 지탱하던 변화의 실질, 즉 “음식·의복·주택·운송·건강·가전제품·근로조건과 관련된 여러 차원에서의 생활수준의 향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생산성의 변화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대, 그가 자본주의의 건강상태를 진단하기 위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총요소생산성’이 침체된 시대란, 다른 말로 기술유토피아의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더이상 발휘되기 어려워진 시대임을 뜻한다. 총요소생산성이란 고용된 노동력의 생산성뿐만 아니라 혁신으로 이룬 생산성도 측정하기 위해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도입한 측정지표 가운데 하나다. 그 척도값은 실질국내총생산과 노동 및 ‘자본’ 투입물의 생산성 간 차이에서 얻은 나머지이다. 3차산업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는 새로운 기술혁신을 꾀하고 앞서의 산업혁명이 보여주었듯이 다시 적어도 반세기 정도는 이어지는 성장과 생활수준의 상승을 꾀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의 답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에 한정해 말하자면 1990년대 후반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10년 정도의 일시적 붐을 끝으로 더이상 과거의 산업혁명과 같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 입증되었다고 그는 단언한다. 다시 말해 이는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인 서사였던 기술유토피아가 더이상 전과 같은 위력과 효험을 유지하기 어려운 처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4차산업혁명이라는 기술유토피아 서사가 귀환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위기가 만들어낸 상처를 가리기 위한 일회용 반창고의 구실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역사 내내 기술이라는 등장인물에게 부여했던 계급투쟁 없는 유토피아, 기술적 구원을 통한 행복이라는 꿈을 운반하는 능력을, 기술에서 박탈하였다. 기술은 이제 자유와 행복의 유토피아로 데려다줄 꿈의 전령이 아니라 불길한 고통의 터널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고하는 불운의 사자(使者)가 된 것처럼 보인다. 더욱 놀라운 점은 기술을 통한 변화의 비전 안에 행복과 자유의 세계가 동화처럼 구가되는 일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아무리 희극적인 가족드라마의 형태를 띤다고 해도 과거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기술유토피아 속에는, 앞의 고든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활수준의 향상’이라는 약속이 깃들어 있었다. 신기한 전기전자제품으로 가득 찬 쾌적하고 풍요로운 가족생활의 풍경은 기술유토피아의 청사진이 투사되는 한결같은 배경막이었다. 이때 가족생활이란 당연히 전체 공동체를 은유하는 알레고리였음은 물론이다.
반면 강박적으로 새로운 기술의 종류를 일일이 열거하는 오늘날 4차산업혁명 선전가들의 말버릇에는 심상찮은 초조함이 묻어난다. 이는 그들이 예상하는 유토피아가 총체적인 사회변화를 이루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함을 애써 감추려는 방어적 몸짓일지도 모른다.9 그들은 이제 급진적 유토피아 상상에 대적하는 자본주의적 유토피아의 보루였던 기술유토피아에서 기술이 지닌 유토피아적 잠재성이 최종적으로 소진되었음을 발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유토피아와 기술유토피아 사이의 대결은 구 동구권 현실사회주의국가의 몰락을 끝으로 후자의 압승으로 끝난 듯 보였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사회유토피아에 맞서 자신 나름의 유토피아로 스스로에게도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역설해왔다. 역사적으로 연속된 산업혁명과 그것이 만들어낸 기술혁신과 생산성 향상, 무엇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보장한 듯 보였던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향한 꿈을 버무리며 자본주의에 미래라는 시간을 수혈해주었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서사는 그러한 유토피아 이데올로기의 주인공으로서의 기술에 현란한 역할과 비중을 맡기고자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그것은 차마 떠들지 않는 것이 나았을 법한 우울한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4차산업혁명은 기술과 과학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짓이 어떤 막다른 길에 이르는지 보여준다. 기술과 과학은 많은 생태학적 기술비판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연을 향한 고압적이고 정복자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만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에 더해 기술과 과학을 조율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행복하고 자유로운 세계에 관한 사회적 상상이었음을 부인한 것이 더 큰 문제라고 고발하는 용기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백년도 더 전에 출판된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붉은 별』(1908)을 오늘 다시 읽은 이들은 비통한 심정에 젖을 것이다. 우리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 미친 듯한 속도로 달리는 강철 마차, 밤을 밝히는 전기, 시공간을 동시에 연결하는 이미지와 사운드, 체외수정, 시험관아기, 인공심장, 생명복제 등 기술유토피아의 거의 모든 것을 실현했다. 그렇지만 그 공산주의적 기술유토피아가 꾸었던 가장 오랜 꿈 가운데 하나를 아직도 유예하고 있다.
몇백명의 노동자들이 자신감 있는 태도로 기계 사이에서 움직였고, 이들의 발소리는 소리의 바다 속에 묻혔다. 일에 집중해 있는 그들의 얼굴에서 불안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실제적으로 크게 관여되어 있지 않은 호기심 어린, 숙련된 관찰자처럼 보였다. 그 광경은 마치 이들이 이 거대한 쇳덩어리들이 어떻게, 움직이는 플랫폼 위의 투명한 돔 아래를 지나가며 괴물들의 강철 같은 포옹 속에 떨어지는지 재미있게 구경하는 것 같았다. (…) ‘통계기관은 재고부터 상품의 흐름을 추적하고 모든 산업의 생산성과 노동력의 변화를 모니터하는 기관을 모든 곳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방식으로 주어진 시간 안에 무엇이 얼마나 생산될 수 있는지, 그리고 과업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낼 수 있게 되지요. 통계기관은 이후 각 직업 영역에 존재하고 요구되는 상황들 간의 차이를 계산하고 그 결과는 모든 직장에 보냅니다. 지원자들로 인해 곧 평형 상태가 만들어지지요.’ (…) ‘하지만 새로운 발명들은 통계적 문제를 낳기도 했지만 주된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각 개인이 자신의 직업을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하게 해준 발명처럼 말이죠. 먼저 노동일수가 줄어들었고, 모든 분야에 잉여분이 발생하자 의무는 확 줄었죠. 다양한 산업에 명시된 노동부족분이 거의 무시할 만한 양인 걸 고려해주세요.’ (…) ‘평균 노동시간은 얼마나 되나요? 가령 이 공장에서는요?’ ‘한시간 반에서 두시간 반 정도 됩니다.’10
이 ‘공상과학소설’에는 인용한 대목이 등장한다. 이야기 속에는 오늘 우리가 가진 모든 기술적 수단이 예고되어 있다. 심지어 화성에 세워진 미래사회에서는 빅데이터와 사물인터넷의 흐릿한 버전까지 등장한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1세기 뒤 이르게 될 기술적 성취를 예언처럼 전시한다. 여기에서 그려진 세계는 오늘날 우리가 도착한 세계와 거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단 한가지만 빼고 말이다. 한시간 반에서 두시간 반 정도 일하는 노동시간! 자, 이제 다시 셈을 거꾸로 세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기술의 시간적 태엽을 다시 감아 기술의 상상과 미래의 상상을 다시 조립해야 한다. 기술과 과학이 꾸는 꿈은 바로 유토피아의 정수인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세계가 아니라 일이 사라진 세계. 일 대신 자유로운 활동을 하며 풍족한 삶을 기꺼이 누리는 세계. 그런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헛된 약속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산업혁명 나부랭이도 아니고 기술혁신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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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국가적 자본가계급은 1990년대에 접어들며 널리 연구된 주제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중요한 연구로 다음의 글을 참조할 수 있다. Kees van der Pijl, The making of an Atlantic ruling class, London: Verso 1984; Kees van der Pijl, Transnational Classes and International Relations, London: Routledge 1998.↩
- 초국가적 자본가계급이 즉자적 계급(class-in-itself)이라면, 초국적 정책집단은 대자적 계급(class-for-itself)이라는 흥미로운 입장에서 국제상공회의소와 세계경제포럼을 비롯한 기관들을 분석하는 것으로 다음의 글을 보라. W. K. Carroll and J. P. Sapinski, “Neoliberalism and the transnational capitalist class,” The Handbook of Neoliberalism, S. Springer, K. Birch & J. MacLeavy eds., New York: Routledge 2016.↩
- W. K. Carroll and C. Carson, “Neoliberalism, capitalist class formation and the global network of corporations and policy groups,” Neoliberal Hegemony: A Global Critique, D. Plehwe et al. eds., London: Routledge 2006, 54~55면.↩
- 미래창조과학부 미래준비위원회 외 『10년 후 대한민국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생산과 소비: 미래전략 보고서』, 지식공감 2017, 26~27면.↩
- 심진보 외 『대한민국 제4차 산업혁명: 새로운 미래를 위한 전략과 통찰, IDX』, 콘텐츠하다 2017, 50면.↩
- 김정욱 외 『2016 다보스 리포트: 인공지능발 4차 산업혁명』, 매일경제신문사 2016, 22면.↩
- 로버트 J. 고든 『미국의 성장은 끝났는가: 경제 혁명 100년의 회고와 인공지능 시대의 전망』, 이경남 옮김, 생각의힘 2017, 818면.↩
- 같은책 801~802면.↩
- 이를테면 4차산업혁명을 주창한 슈바프가 만든 미래의 청사진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그는 이렇게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강변한다. “4차산업혁명은, 그에 앞선 혁명들처럼, 전세계의 소득수준을 끌어올리고 세계 전역 인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그로부터 가장 큰 이득을 본 이들은 디지털세계에 다가설 여력이 되고 또 접근할 수 있었던 소비자들이었다. 기술은 우리 개인생활의 효율성과 쾌락을 증대시키는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가능케 해왔다. 택시를 부르고 항공권을 예약하고 지불을 처리하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며 게임을 즐기는 것, 이 모두는 지금 원격으로 행해질 수 있다.” Klaus Schwab,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what it means, how to respond,” World Economic Forum 2016 (https://www.weforum.org/agenda/2016/01/the-fourth-industrial-revolution-what-it-means-and-how-to-respond). 택시 호출과 항공권 예약이 조금 더 간편해지고 음악과 영화, 게임을 더 편히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 가운데 우리가 전에 가지고 있지 않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빅데이터든 사물인터넷이든 자율주행자동차든 그것은 이미 있던 것을 재탕할 뿐이다.↩
-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붉은 별: 어떤 유토피아』, 김수연 옮김, 아고라 2016, 79~8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