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논단
새로운 신자유주의
윌리엄 데이비스 William Davies
영국 골드스미스 런던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 국내 번역된 저서로 『행복산업』 등이 있음. w.davies@gold.ac.vk
* 이 글의 원제는 “The New Neoliberalism”이며, 『뉴레프트리뷰』(New Left Review) 2016년 9-10월호에 발표되었다. ⓒ William Davies 2016/한국어판 ⓒ 창비 2017
그리스의 전 재무장관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2015년 7월의 한 인터뷰에서 유럽연합의 재무장관 회의 중 채권국 대표들과 나눈 대화에 대한 통찰을 내놓은 바 있다. 돋보이는 것은 거의 초현실적인 수준의 불통에 대한 그의 묘사이다. “정말로 열심히 준비한 논리정연한 안을 내놓았는데 텅 빈 시선만을 마주하게 되었다. 마치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내 말은 그들의 말과 따로였다. 스웨덴 국가를 불렀어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1 이백년 이상 자유주의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성적인 숙의(熟議)로 묶인 유럽 공통의 공공영역이라는 전망은 깨진 것처럼 보인다. 공동시장을 핵심으로 하는, 그 기획에 대한 전후(戰後)의 복원 노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과거 그 기획에 열광했던 많은 이들도 이제 그런 사실을 인정한다. 바루파키스의 논평은 단순히 비판으로 분류될 수 없는, 새로운 정치적 반대 조류의 징후이다. 차라리 그의 말은, 지배적인 형식의 경제 규제가 명백히 증거나 평가 혹은 대안들의 장점에 구애받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는 당혹감의 표현이다. 일단 더이상 비판이 들리지 않거나 인식조차 안 된다면 비평가는 뭐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위로부터 보이는 이런 비합리성의 한 결과는 아래로부터의 몰이성(unreason)에 대한 옹호이다. ‘예술가 택시기사’로 잘 알려진 영국의 퍼포먼스 예술가 마크 맥고완(Mark McGowan)은 자신의 유튜브 영상에서 그 점을 잘 예시해준다. 맥고완은 얼굴에 딱 붙는 선글라스를 쓴 채 긴축재정 조치 및 정치 엘리트들과 탈세자들, 그리고 금융위기 이래 무분별하게 자행된 사회적 위해 사례들에 대한 분노를 쏟아낸다. 대시보드 위의 카메라를 향해 손짓할 때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인데, 절망했다기보다는 몹시 신이 난 모습이다. 그는 마치 ‘이런 일이 진짜로 벌어지고 있는 거야?’라고 묻는 듯하다. ‘예술가 택시기사’의 한 유튜브 영상은 “이것은 불황이 아니라 도둑질이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또한 불법폭력에 대한 주장은, 도처에 달려 있는 #이것은쿠데타다(#thisisacoup)라는 해시태그나 그리스의 채무조건을 “재정적 물고문”(fiscal waterboarding)으로 묘사한 바루파키스의 인상적인 표현들의 경우처럼 이 새로운 저항문화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미국에서 『어니언』(The Onion)이나 『데일리 쇼』(The Daily Show) 같은 매체들은 오랫동안 풍자적인 정치 보도의 모델 역할을 해왔다. 영국의 웹사이트인 『데일리 매시』(The Daily Mash)는 「법정 화폐가 되기 위한 ‘이름 알리기’」(‘Getting your name out there’ to become legal tender)나 「저렴한 추가 보유 주택을 수천채 짓는 토리들」(Tories to build thousand of affordable second homes) 같은 기사를 통해 특히 경제적인 부조리에 집중해왔다. 이런 제목의 글과 ‘진짜’ 뉴스가 나란히 배치되어 독자들에게 그중 하나를 고를 선택권을 효과적으로 제공하지만, 양쪽 다 부조리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통치권력의 비이성적 방향으로의 전환은, 2008년 이후에는 좀더 보복적인 종류의 정책결정이라는 특성을 띠게 되었다. 그러한 정책결정은 자주 정책평가, 증거수집, 대중에 대한 호소와 같은 규범들 바깥에서 작동한다. 과거 신자유주의는 ‘효율성’이나 ‘경쟁력’이라는 경제적 판단을 사회 정의와 관련된 도덕적 판단보다 우위에 둔다고 비판받아왔다. 그러나 적어도 공적 담론의 차원에서 각국 정부는 점점 더 아예 판단의 규범 밖에서 운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의 가장 좋은 예는 긴축정책 그 자체이다. 경기동행적인(pro-cyclical) 긴축재정 프로그램이 거시경제의 침체를 피하는 데 성공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거의 없다.2 2008년 이후 유럽의 다수 정치 지도자들이 열광적으로 인용한, 하바드대학의 경제학자 알베르토 알레시나(Alberto Alesina)의 ‘팽창적 긴축재정’ 가설은 그저 정부지출의 축소가 반드시 경제성장의 저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일 뿐이었다. 그러나 긴축재정의 실패에 대한 실증적인 증거가 아무리 많아도 그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을 저지하는 데 충분치 않아 보인다.
취약계층 길들이기가 목표인 사회정책들도 마찬가지로 믿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영국의 ‘복지제재’(benefit sanctions) 정권하에서 복지수당의 지급은 사소한 규정위반을 이유로 갑자기 한달이나 지체될 수도 있지만, 규정을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절차적 합리성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이는 면담장소로 가던 중에 심장마비가 왔지만, 그래도 제재를 받았다. 또다른 이는 형제의 장례식에 가면서 고용센터에 전화를 하려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아서 복지혜택을 상실했다. 영국에서는 백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제재를 받았다. 수천명은 근로연계복지(workfare) 수주회사로부터 ‘노동적격’ 판정을 받고 장애복지혜택이 줄어들면서 사망했다.3 이제 노동시장 정책은 신경-언어적인 프로그램이나 셀프마케팅 구호 같은, 의심스러운 행동 활성화 기술(behavioral activation technique)을 도입한다. 참가자들은 “나의 유일한 한계는 나 스스로 설정한 것뿐이다” 같은 ‘긍정의 말’들을 크게 읽어야만 한다. 그 구호는 저소득, 만성질환, 그리고 부양가족 같은 그들 삶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거의 희극적이다.
그런 정책들이 전적으로 합리성 너머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채권국가와 금융기관에는 확실히 긴축정책의 수혜자들이 존재한다. 복지 수급자들에 대한 가혹한 처사는 잘 알려진 선거의제에 부합한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공적인 통치이성 바깥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19세기에 자유주의 국가가 보복성의 과도한 징벌 형식을 중지하고, 그런 형식을 최적의 결과를 달성하는 방법에 대한 세밀한 통계적·심리적·경제적 지식에 바탕한 전문적인 규율 형식으로 대체했다는 푸꼬(M. Foucault)의 주장이 맞는다면, 작금의 긴축재정 정권들은 그런 변화의 어떤 측면을 뒤집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과학, 혹은 경제학이나 심리학이 규범적이고 방법론적이며 공개적으로 입증 가능한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는지는 더이상 확실치 않은 것이다. 대신 그런 학문분과들은 이제 진리를 발견하기보다는 진리를 주장하면서, 주권적 권력의 무기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죽었는데도 여전히 지배적이라고?
오늘날 우리가 신자유주의하에서 살고 있다면, 그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후반 혹은 1980년대 초반에 권력을 차지한 신자유주의와는 명백히 다르고, 1990년대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긴 호황기를 장악했던 신자유주의와도 다르다. 신자유주의라는 호칭은 언제나 논쟁적이었다. 그 용어는 너무나 많은, 이질적이거나 모순적인 정책 동학(動學)들을 지칭하기에 쓸모없다고 자주 시사된 바 있다. 물론 그 개념의 내적인 비일관성은, 그 개념으로 포착하고자 하는 체제의 어떤 실제적인 속성을 요약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2016년의 정부개입을 2001년 내지는 1985년의 정부개입 때와 동일한 포괄적인 합리성 혹은 목적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문제적인 부분이 있다. 확실히 신자유주의는, 체제와 권력의 관행은 존속하되 규범적이거나 민주적인 권위는 부재하는 일종의 헤게모니 이후 국면으로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닐 스미스의 말처럼 ‘죽었는데도 여전히 지배적이다.’4 그러나 만약 새로운 권력형식이 (위의 규정이 시사하는 것처럼) 위축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람시적인 윤리적 의미에서) 헤게모니에 대한 추구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나는 그렇게 등장한 것이 그저 또 하나의 ‘포스트적인’ 것이 아니라, 처벌의 에토스를 중심으로 조직된 새로운 국면의 신자유주의라고 제안하고 싶다. 그 처벌은 벤섬(J. Bentham)이 구상하고 푸꼬가 역사화한 유형, 즉 계산된 불쾌의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이성적인 담론을 대신하여 작동하면서, 헤게모니적인 합의의 필요성을 대체하는 가차없는 권력형식이다. 바로 그 점이 놀라움이나 못 믿겠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재정적인 물고문’이란 관념이 포착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 새로운 국면을 역사적으로 이해하자면, 그것이 2008년 이전 국면과 어떻게 다른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과거의) 신자유주의 또한 단 하나의 시기가 아니라 두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 명확하다. 첫번째로 1979년 무렵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확산기가 있었다. 그 시기는 신보수주의적인 우파 정당, 특히 레이건(R. Reagan)과 새처(M. Thatcher)가 주도했으며, (카터와 캘러헌이 첫번째 타격을 가하긴 했지만)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까지 대략 10년간 지속되었다. 두번째로 신자유주의의 적용기가 이어졌는데, 그 시기는 국가사회주의의 종식부터 전지구적인 금융위기까지 거의 20년간 지속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두번째 시기를 자유주의자들과 과거 사회주의 정당이었던 중도 좌파들이 선도했으며, 그 결과 그런 정당들 다수가 현재 혼돈 상태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규제 방식이나 정책의 종류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윤리적·철학적 지향에 따라 시기를 구분하고자 한다. 국가권력이 활용하는 동일한 정책수단이 역사의 다른 시점에서 다양한 의미를 띨 수 있다. 어떤 정책의 목적이나 선험적 원칙은 무형의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면서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상호이해되는 그들의 실천 속에 존재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나는 신자유주의적 국가에 지향점을 제공한 일련의 윤리철학에 대한 해석을 제시할 것이다. 2008년 이후 바뀐 것은 권력의 기술—기이할 정도로 일관적이었던—이 아니라 그 실행의 정신 혹은 의미였다.
1. 전투적 신자유주의: 1979~89년
독자적인 정치적·지적 기획으로서 신자유주의의 기원은 사회주의 계산(計算) 논쟁, 특히 루트비히 폰 미제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5 이런 근원은 이후에 등장하는 신자유주의적 비판이성의 특성에 대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말해준다. 하이에크(F. Hayek)와 그의 협력자들이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적극적 비전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하기 훨씬 이전에 미제스는 신자유주의적 지식인의, 주되게는 방해하는 성격을 띠지만 파괴적이기까지 한 야심을 보여주었다. 1920년대 미제스가 기고한 글들의 핵심에는 사회주의적 합리성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야 할 필요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합리적인’ 사회주의적 통치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불가능한 기준을 설정했다. 미제스는 상호주관적인 평가라는 철학적 문제에 집중하면서, 가격체제야말로 가치를 동일 단위의 계산지표로 변환해주는,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잘 알려진 주장을 폈다. 산업생산과 연관된 복잡성과 시간의 지평을 고려할 때 생산자본에 대한 투자는 그런 가격체제가 없고서는 비합리적이라는 것이었다. 미제스 자신은 필립 미로우스키가 명명한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사유집단’의 중심인물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는 사회주의와 케인즈주의의 정책결정을 비판적으로 해체하는 작업에서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6 그의 비판 스타일은 이후에 등장하는 비판들의 기조를 잡아주었다. 즉,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그 이외의 모든 것 간의, 단순명료해 보이는 이분법적인 선택에 대한 강조 말이다.
미로우스키가 주목하듯이 초기 신자유주의자들의 사유는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의 반민주적인 정치적 현실주의의 면모를 공유했다. ‘정치적인 것’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단기적인 포퓰리즘적 목표로부터 보호될 필요가 있는 행정적인 결정의 문제가 지배했는데, 이런 견해는 버지니아와 시카고 대학에서 부상했던 미국의 신자유주의 전통에서도 나타난다. 가격체제의 합리성을 보호하자면 필연적으로 합리적인 기술관료의 손에 행정권력을 쥐여주어야 했다. 신자유주의적 비판양식에는 고전적으로 슈미트적인 요소가 또 하나 관찰되는데, 시장경제와 그 이외의 모든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냉혹함은 경제정책 결정의 영역에 적-동지의 구분을 도입하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신자유주의가 하나의 정치적 정체로 결집하는 데 필수적인 적에 해당한다.
사회주의 계산논쟁과 1980년대 신우파의 승리 사이에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는 다른 곳에서 말해진 이야기이다. 다수의 논의들은 하이에크가 구축하고자 했던 적극적인 정책 플랫폼이 발전하는 데 싱크탱크가 맡았던 역할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이 비자본주의적인 정치적·지적 세력에 대한 저항정신을 동기이자 촉매로 삼아 규합했다는 것을 잊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좌파 쪽의 사례에 영감을 받은 자의식적 반란이자 사회운동으로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적들과 싸우고, 이상적으로는 그들을 괴멸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한때 노동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본 또한 사회적·정치적으로 재조직함으로써 1970년대 후반 좌파들 상당수를 놀라게 했다.7 그 노력이 구현된 전투적 신자유주의는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허물 목적으로 다양한 전술을 구사했다. 반노동적인 입법과, 가끔씩 벌어지는 (미국의 항공통제사나 영국의 광부) 노조와의 격렬한 대치가 그 주요한 전술이었다. 반(反)인플레이션 통화주의 정책과 높은 이자율은 실업률을 전례가 없는 수준으로 치솟게 하는 데 추가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새처의 경제자문 중 한명이었던 앨런 버드(Alan Budd)는 후에 그런 결과야말로 줄곧 통화주의 정책 저변의 한 목표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8 레이건 행정부의 군비 증강은 미국의 민간 부문의 성장 부족을 가리는 한편 소련 경제에 지속 불가능한 압박을 가했다.
데이비드 하비의 경우처럼 고전적인 맑스주의 논의는 이같은 정치상황의 전개에 주목하고, 그것을 신자유주의 국가가 계급권력의 도구라는 증거로 삼는다.9 1970년대의 인플레이션 불황 이후 이윤율의 회복이야말로, 지속적으로 달성되진 못했지만 신자유주의의 일관된 목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비자본주의적인 정치적 희망의 길을 파괴하고자 하는, 전투적 신자유주의의 문화적·이데올로기적 지향을 포착하지 못한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그 점을 간명하게 말해준다. “자본주의를 유일하게 가능한 경제체제로 보이게끔 하는 선택지가 있고, 또다른 선택지는 자본주의를 실제로 더 유지 가능한 경제체제로 만드는 것이었을 때 신자유주의는 언제나 전자를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10 미제스가 처음 도입한, 가격체제의 합리성과 그밖의 모든 것의 비합리성이라는 극명한 이분법은 사회주의의 여러 체제와 문화들에 존재하는 모든 차이를 흐리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 이분법은 전후 호황기 동안 성공했던 혼합경제의 여러 유형을 묶어버리는 한편 더 효과적이거나 덜 효과적인 집단주의 형태들 중의 선택 가능성을 없애버린다.
따라서 특정한 비판적·정치적 실천형식으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오직 사회주의와의 전투적인 대립관계 속에서 발명되었으며, 국내외 모든 곳에서 사회주의의 파괴가 신자유주의에 활력을 주는 목적을 제공했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다수의 정책들은 어떤 측정 가능한 공리주의적 의미에서 통하지 않았다. 예컨대 이후 시기의 분석은 영국 노동시장 개혁이 일단 민영화 효과가 고갈되자 장기적 관점에서 민간 부문의 고용수준 증가에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1 그러나 그 정책들은 정치적 희망과 정체성을 비사회주의적인 경제형식에 묶어두는, 좀더 넓은 범위의 윤리적 의제 측면에서는 성공했다.
2. 규범적 신자유주의: 1989~2008년
사회주의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는 무엇인가? 즉, 무엇이 신자유주의에 그 지향이나 윤리적 일관성을 제공하는가?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가 미국의 전지구적 헤게모니의 호시절로 묘사한 1990년대, 즉 신자유주의의 황금기에 다른 양식의 정부가 출현했다. 일단 정치적 희망의 지평이 단일한 정치-경제 체제로 국한되자, 현대화 기획은 어떻게 그 체제를 ‘공정’하게 제시할지에 관한, 명시적으로 규범적인 것이 되었다. 신자유주의적 목적인(目的因)은, 시장에 기반한 지표와 수단을 시장 내에서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는 시장 외부에서조차 모든 인간적 가치의 측정수단으로 제시하는 구성주의적인 것이 되었던 것이다. 푸꼬는 신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이 미제스 식으로 계획경제에 대한 주장을 비판해서 허물어뜨릴 뿐 아니라 기업(enterprise)이라는 이상을 중심으로 주체성을 재구성하는 데 몰두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파악한 이들 중의 한명이었다.12 ‘인적자본’ 같은 개념은 비시장의 맥락에서 의사결정을 분석하고 측정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시장의 덕성은 그 경쟁적 속성에 있었고, 그로 인해 가치와 지식을 확정짓는 규범적인 절차가 마련되었다.13 이런 논리에 따르면, 가치있는 상품, 서비스, 인공물, 아이디어, 사람이 확실히 드러날 수 있도록 인간활동의 모든 영역은 경쟁이라는 기준을 중심으로 재구축되어야만 한다. 이제 정부의 역할은 ‘승자’가 ‘패자’와 분명히 구분되도록, 그리고 그 경쟁이 공정하게 인식되도록 보장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런 작업에는 행정·관리·회계의 계속적인 현대화가 수반되었다. 공공부문 관료제에 대한 개혁은 정부 자체에 기업정신을 주입하고자 했다. 1986년 영국에서는 그 나라의 모든 대학의 학과에 점수를 부여해서 최고부터 최악까지를 다 명시하는 연구수준 순위표를 내놓기 위해서 연구실적평가(Research Assessment Exercise) 제도가 도입되었다. 1990년대 동안 예술기관들은 가치를 포착하는 새로운 회계방식을 시행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비용편익분석은 ‘시장실패’라는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언어와 짝을 지어 공공지출의 정당성 여부를 평가하게 되었다. 국가, 지역, 도시의 ‘경쟁력’ 순위를 매기기 위한 전략적인 회계감사 기술이 고안되었다. 신고전주의 경제학과 회계감사가 사회정치적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는 것은 우울한 광경이었다. 그것은 비시장 영역의 자율적인 논리를 박탈했다.14 그로 말미암아 내가 신자유주의의, 경제를 통한 정치의 환멸이라고 묘사한 것이 달성되었다. 그러나 그같은 규범적인 절차나 제약이 정치권력의 행사를 통해 구축되었음을 인식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런 상황에서 신고전주의 경제학은 통치, 혹은 권력이 분할된 통치형식인 ‘협치’(governance)를 위한 연성(軟性)헌법이 된다. 공정성, 보상, 인정에 관한 규범적인 질문은 효율성에 대한 경제적 평가와 ‘수월성’의 비교로 유도된다. 이제 시장과 준시장적인 평가와 짝지은 능력주의(meritocracy)가, 즉 보상은 자의적으로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획득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상이 된 것이다.
두가지 이유 때문에 중도좌파 정부가 규범적 신자유주의, 혹은 ‘제3의 길’이라고 불렸던 것을 추구하는 데 더 적합했다. 첫째, 그것은 공공기관을 현대화하고 사회적 삶에 개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통치방식이고, 그러자면 전통적으로 보수주의보다는 사회민주주의와 관련이 있는 기술, 제도, 그리고 전문성이 필요했다.15 그것은 문화나 전통의 제약에 구애받지 않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는 개혁주의적 열망이 추동한, 의식적으로 진보적인 기획이었다. 둘째, 한층 늘어난 공공지출은 자주 그 새로운 경제학의 헤게모니 확대에 수반되었다. 중도좌파는 경제적 평가의 확산을 포스트 사회민주주의 시대에 공공 서비스·프로그램의 가치를 달성하는 필수적인 수단으로 보았다.16 고등교육이나 예술 부문 같은 경우에 전문가들은 회계감사가 단지 징벌적이거나 철저하게 감시적인 성격을 띠는 것만은 아니고 정당하게 더 많은 기금을 확보하는 근거이기도 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규범적 신자유주의에서 경쟁의 ‘입헌적인’ 중요성으로 인해 그 정당성을 불평등 그 자체가 위협했던 적은 결코 없었다. 규범적 신자유주의의 도덕적 비전은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에 걸쳐 여러 기관이 가치를 평가하고 측정하기 위해 사용했던 여러 방법 및 회계감사와 경제적 평가의 권위에 달려 있었다. 규범적 신자유주의가 유지되려면 이런 평가들이 어느 정도의 선험적인 지위를 보유해야만 했다. 그런 특별한 지위는, 금융위기 동안에 회계감사 및 경제 모델링 시스템이 기득권의 정치적·경제적 이해에 봉사할 수도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사라졌다. 회계감사와 신용평가 또한 경제적 유인책에 따라 행해진다는 발견으로 인해 규범적 신자유주의는 그 이데올로기적 일관성이 박탈되었다. 그렇게 정당한 불평등에 대한 평가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자 1980년대부터 북반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증가해왔던 불평등이 주요한 문제로 귀환했다.
3. 징벌적 신자유주의: 2008~?년
신자유주의의 이전 두 국면을 되돌아보면, 대개의 비판적 이론가들과 사회과학자들이 그 가장 결정적인 경제적 특성, 즉 부채의 증대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의아하다. 볼프강 슈트레크(Wolfgang Streeck)가 『시간 벌기』(Buying Time)에서 보여주듯이, 공공부채가 증가하는 국면이 있었고 이어서 개인부채가 증가하는 국면이 왔다. 그 국면들은 각각 내가 전투적 신자유주의와 규범적 신자유주의라고 명명한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두 국면 중 어느 쪽에라도 상당한 비판적 혹은 분석적 관심이 나타난 것은 부채에 관한 사실이 드러난 이후였다. 금융화가 상승세였을 때, 그것은 대개 ‘창조성’이나 ‘지식’ 같은 다른 형태의 비물질적인 가치로 오인되었다.17 그리하여 전투적 신자유주의와 규범적 신자유주의 시기 동안 부채의 정치적인 논리는 숨겨졌다가, 전지구적인 금융위기 이후에야 극적으로 부각되었다.
은행의 부채가 정부 재정으로 전가되어 긴축재정의 정당화 논리가 마련되면서 세번째 국면의 신자유주의가 촉발되었다. 새로운 신자유주의는 공리주의적 처벌과 대조되는, 상당히 도덕주의적인 처벌의 에토스와 더불어 작동한다. 그 처벌의 정신을 구분짓는 것은, 포스트 법률적인(post-jure) 논리, 즉 판결의 순간은 이미 지나갔으며 가치나 죄의 문제는 더이상 숙고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포스트 비판적이기도 하다. 징벌적 신자유주의하에서 경제적 의존과 도덕적 실패는 부채의 형태로 서로 얽히게 되며, 정부와 사회는 자신들이 속한 인구집단의 구성원들에게 분노와 폭력을 쏟아내는 우울한 상황을 야기한다. 정치적인 힘이 약한데다 부채까지 지게 되는 상황은 추가적인 처벌의 조건이 된다. 연구를 통해, 부채 문제를 안고 빈곤하게 사는 이들에게 우울증적인 심리상태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부채가 자책감과 추가적인 처벌에 대한 예상을 강화하는 그런 심리상태 말이다.18 긴축재정을 둘러싼 대중의 태도에 대한 연구도 그와 유사한, 신용이 동력이 되는 경제성장을 위해 우리는 고통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낳는 재정적 도덕의 내면화를 확인해준다.19
징벌적 신자유주의의 정책수단과 관행은 신자유주의의 이전 두 국면에서 선전되었던 것들과 강한 가족유사성을 띤다. 영국의 보수당은 새처 시절의 정책들을 되살렸다. 그 예로는—이제서야 비영리 주택조합의 세입자들에게까지 적용되는—공공주택을 ‘살 수 있는 권리’의 확대와, 피켓시위시 경찰에 사전고지해야 하는 의무나 노조원들의 온라인 파업결정투표 금지 같은 반노조 입법들이 있다. 이런 정책들은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조차도 ‘과도한’ 것으로 보도했다.20 그런 조치들이 달성하려는 바가 당장은 명확하지 않다. 정통적인 경제적 평가의 대다수 기준에 비추어볼 때 그런 조치들은 자기파괴적이다. 영국의 과열된 주택시장은 이미 영국 경제의 심층적인 구조적 문제의 한 근원이고, 2008년 이래로 연간 파업일수는 1900년부터 1990년 사이의 어떤 해보다도 적었다. 노조조직률이 높아지고 협상력이 커지면 임금이 상승하고 불평등이 줄어들 공산이 매우 큰데, 그럼으로써 지속 가능한 성장이 더욱 진작될 것이다.21
규범적 신자유주의와 연관된 기술 또한 새로운 징벌적 속성을 띠게 된다. 호황기 동안 공공부문과 문화부문으로 퍼져나간 회계감사는 좀더 많은 기금을 배분하기 위한 준합의적 토대로 경험되었다. 긴축재정 시기 동안은 같은 기술이 기금을 다시 거둬들이는 수단이 되고 그 과정에서 여러 겹의 피해를 낳는다. “썰물일 때만 누가 벌거벗은 채 수영하는지 알 수 있다”는,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의 유명한 말은 이제 공공영역과 문화영역에까지 강압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정부가 공공부문의 생산성이 긴축재정과 연관된 손실을 경감시킬 수 있다고 기대한 탓에, 공공부문 노동자의 정신적·육체적 건강의 손상은 이제 재정삭감의 가장 의미심장한 지표가 된다. 2015년 초에 실시된 한 조사에 따르면, 영국의 교사 중에서 거의 절반이 스트레스와 관련된 이유로 진료를 받은 적이 있으며, 3분의 2 이상이 사직을 고려하고 있었다.22 마찬가지로 수련의의 70%가 무급의 연장근무 때문에 NHS(National Health Service, 국가의료보험)에서 사직을 고려하고 있다. 런던 임페리얼대학에서 근무하던 독일의 과학자 슈테판 그림의 자살은, 기금이 줄어드는 시대에 징벌적인 연구비 수주 목표가 야기할 수 있는 부담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갈수록 치열해지는 연구비 경쟁 상황에서 연구비 수주목표액을 부여받았다. 신자유주의는 점차 신체 영역에서 갈등과 위해를 초래하고 있다. 긴축재정의 한계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주장을 펼치는 이들은 장애인권 운동가들과 파업하는 의사들이다. 그들은 보수정권에 대해 진심으로 우려하는 대중의 지지를 상당한 정도로 확보했다.
그러나 현재의 신자유주의와 이전 국면들과의 표면적인 유사성은 심대한 차이를 가린다. 현재 국면에서 어떤 형식의 보복을 가하고자 하는 욕망을 제외하면 그런 조치들이 도입되어야 하는 이유는 전혀 명확하지 않다.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모든 종류의 비자본주의 체제와 대립시켰던, 신자유주의 창시자들의 슈미트적인 세계관은 편집증적이고 또 그만큼 단순하며, 이제는 자기파괴적으로까지 보이는 어떤 것으로 변형되었다. 사회주의에 대한 공세 때와는 대조적으로, 이제 표적으로 삼은 ‘적’들은 대체로 무력하며 신자유주의 체제 자체에 내재한다. 빈곤과 부채, 붕괴 중인 사회안전망에 발목 잡힌 사람들과 같은 그 적들은 대개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서는 이미 붕괴되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런 사정은 그들을 더 가혹하게 처벌하려는 충동을 강화하고 있다.
재현인가 반복인가?
1970년대의 포드주의적 케인즈주의의 위기는, 토머스 쿤(Thomas Kuhn)의 패러다임 전환 모델에 들어맞는 고전적으로 근대적인 위기의 리듬에 따라 전개되었다. 경제의 비상상황은 이론과 규제의 정설들에 위기를 불러왔고, 그로 인해 인식적·정치적 불확실성의 시기가 야기되었는데, 그러자 이론과 정책 아이디어들이 신뢰를 얻기 위해서 경쟁하는 공간이 창출되었다. “위기는 정확히 낡은 것이 죽었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는 사실에 있다”라는, 『옥중수고』에 실린 그람시(A. Gramsci)의 유명한 말이 신자유주의 부상 전 1970년대 중반기를 잘 설명해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낡은 것은 죽지 않고 부활하고 있다.
역사적 위기의 구조는 비판의 문법에도 반영된다. 비판에서 현실을 재현하는 기호의 능력은 그 현실의 변혁을 가속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재현은 현재 상황에 잠재하는 고통을 부각하거나 교착상태의 모순적이고 지속 불가능한 본질을 입증하는 데 동원될 수도 있다. 그러나 비판과 위기 간의 이런 상호작용은 최소한 모든 진영이 신뢰할 만한 기호적 재현을 지지할 것을 전제한다. 설사 그런 상황이 새로운 헤게모니에 봉사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이 바로 바루파키스가 “마치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라고 말했을 때 부각되었던 문제이다. 징벌적 신자유주의의 명백하게 부조리한 폭력을 해석하는 한가지 방식은, 그것을 위기를 우회하는 동시에 비판을 회피하는 한 전략으로 보는 것이다. 현재의 결핍을 불가피하게 재현할 수밖에 없는 비판적 형식의 지식 대신 공허한 긍정의 형식들이 제공되고 의식(儀式)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 말들은 현실을 재현하려는 어떠한 인식적이거나 기호적인 열망도 결하고 있으며, 그저 현실을 강화하는 수단일 뿐이다. 정치 지도자들이 긴축재정이 경제성장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할 때 그런 발화행위의 목적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지 수급자들이 “나의 한계는 스스로 정한 것일 뿐이다” 같은 구호를 읊어대도록 강요받을 때 그 말들이 진실이나 사실의 진술이 아니란 것은 명백하다. 그 구호들은 뤽 볼땅스끼(Luc Boltanski)가 ‘긍정의 체제’라고 명명한 수행적 발화로서, 그것들이 없었다면 현실의 본질에 관한 실증적이거나 경험적인 질문들로 채워질 수 있는 담론공간을 차지하고 현상(現狀)을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이제 권력은 비판이성의 제약을 피하기 위해서 공공영역을 우회하고자 하는데, 이는 그람시가 관찰한 포드주의적 사회와는 대조되는 양상이다. 점차 소프트웨어, 재무, 인간생물학 같은 비재현적인 코드가 과거, 현재, 미래를 중재함으로써 사회가 결집하도록 해준다. 예컨대 문화적 혹은 심리적인 수단을 통해 고용인들의 열의를 확보하지 못할 때 회사는 점차 신체착용기술(wearable technology) 같은 해결책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런 기술은 노동자를 고용해야 하는 인적자본이라기보다는 물리적으로 관측해야 하는 고정자본의 한 항목으로 취급한다. 그럴 때 핵심적인 인간의 특성은 걸음, 야간수면, 호흡, 심장박동 같은 준기계적인 방식으로 반복되는 것들이다. 이런 규칙적인 박자와 같은 삶의 면모들은 삶의 매순간을 또 하나의 동일한 순간으로 재현하게 된다.
비판적인 형식의 지식을 회피하려는 새로운 신자유주의의 행태 저변에는, 새로운 신자유주의가 그토록 외면하고자 애쓰는 진실이 버티고 있다. 그것은 바로—신자유주의가 지탱하고자 애쓰는—현재의 망가진 자본주의적 축적 모델을 대체할 수익성 좋은 대안이 없다는 사실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발달은 바로 그 자체의 성공으로 인해 교란되고 있다. 제조업 부문에 막대한 과잉 설비가 초래되면서 생산과잉으로 이윤이 떨어졌고, 그와 더불어 막대한 노동의 과잉공급으로 인해 임금이 하락하면서 수요도 감소한 것이다. 영광의 30년(trente glorieuses)이 끝난 이래로 짧은 호황기가 가끔씩 등장했을 뿐 경기순환이 반복될수록 이윤율은 떨어질 뿐이었다. 이런 현상의 저변에는 포드주의적 케인즈주의의 종식 이후 유지 가능하고 수익성이 있는 자본주의 모델을 창출하지 못한 심각한 실패가 자리하고 있다. 슈트레크가 보여주듯이, 한때는 암묵적이었지만 이제는 공공연해진, 공공·민간 부문의 증가하는 부채에 대한 신자유주의 모델의 의존은 40년간 지속된 ‘깡통차기’ 놀이23였다. 작금의 신자유주의에서 나타나는 비합리적인 징후는 궁극적으로 그러한 인식을 감추거나 회피하는 기능을 한다.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신자유주의의 근본 발상은, 인간의 욕구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불가능하며, 오직 소비자의 선호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존재할 뿐이라는 미제스의 주장이다. 이런 교조가 역사적 경험에 의해 논박당할 때까지 장애와 보건 정책의 쟁점을 둘러싼 저항과 갈등의 확산은 불가피해 보인다. 인간 신체의 유한성과 오류 가능성은, 어쩌면 전적으로 다른 헤게모니에 기여할 수도 있지만, 미제스 독트린에 대한 가장 단순한 반증이 된다. 신자유주의는 신뢰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신자유주의가 더이상 과거의 헤게모니가 그랬던 것처럼 얼마간의 문화적 혹은 규범적인 합의를 통해 신뢰를 추구하지 않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주권 권력은 항상 순환적인 논리를 따랐는데, 권력이 행사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권력이 행사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주권의 속성은 기술적이고 기술관료적인 영역들에서 발견된다. 정책, 처벌, 삭감, 계산은 그저 반복될 뿐인데, 그런 모습이야말로 그런 영역들의 유일한 현실적 조건인 것이다. 2008년 이후 나타나는 정책의 강제는, 합리적인 공공담론의 이데올로기와 현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인식론적 제약 모두에서 벗어난 체제의 것이다. 우리는 정교한 경제적 비판을 제시할 수도, 한 국가의 거대한 군중을 동원할 수도, 또는 스웨덴 국가를 부를 수도, 고함을 지르거나 조롱할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반대의 형식들은 모두 똑같이 취급받을 것이다. 최소한 그런 사실은 풍자가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다.
번역: 이정진(李廷進)/영문학 박사
--
- Yanis Varoufakis, “My five-month battle to save Greece,” New Statesman 2015.7.16.↩
- 다음을 참고하라. Mark Blyth, Austerity: The History of a Dangerous Idea, New York 2013.↩
- Patrick Butler, “Thousands have died after being found fit for work, DWP figures show,” Guardian 2015.8.27.↩
- Neil Smith, “The Revolutionary Imperative,” Antipode, vol. 41, no. S1, 2010.↩
- Ludwig von Mises, “Economic Calculation in the Socialist Commonwealth,” in Socialism: An Economic and Sociological Analysis (1922), Auburn, AL 2009.↩
- Philip Mirowski and Dieter Plehwe, eds, The Road from Mont Pèlerin: The Making of the Neoliberal Thought Collective, Cambridge, MA 2009.↩
- Wolfgang Streeck, Buying Time, London and New York 2014.↩
- Daniel Trilling, “A ‘nightmare’ experience?,” New Statesman, 2010.3.8.↩
- David Harvey, A Brief History of Neoliberalism, London and New York 2013.↩
- David Graeber, “A Practical Utopian’s Guide to the Coming Collapse,” The Baffler, no. 22, 2013.↩
- Ewald Engelen et al., After the Great Complacence: Financial Crisis and the Politics of Reform, Oxford 2011.↩
- Michel Foucault, The Birth of Biopolitics: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78–79, London 2008.↩
- F. A. Hayek, “Competition as a Discovery Procedure” (1968), Quarterly Journal of Austrian Economics, vol. 5, no. 2, 2002.↩
- 다음을 참고하라. Wendy Brown, Undoing the Demos: Neoliberalism’s Stealth Revolution, Cambridge, MA 2015.↩
- 이런 논점은 다음 책이 주장하는 바이다. Pierre Dardo and Christian Laval, The New Way of the World: On Neoliberal Society, London and New York 2014.↩
- 다음을 참고하라. Michael Power, The Audit Society: Rituals of Verification, Oxford 1997.↩
- 다음은 이 문제에 관한 흥미로운 참회의 기록이다. Maurizio Lazzarato, The Making of the Indebted Man, Cambridge, MA 2012, pp. 50–I.↩
- William Davies et al., “Financial Melancholia: Mental Health and Indebtedness,” Political Economy Research Centre, Goldsmiths, London 2015.↩
- Liam Stanley, “‘We’re Reaping What We Sowed’: Everyday Crisis Narratives and Acquiescence to the Age of Austerity,” New Political Economy, vol. 19, no. 6, 2014.↩
- “UK government crosses the road to pick a fight,” Financial Times 2015.9.14.↩
- Florence Jaumotte and Carolina Osorio Buitron, “Union Power and Inequality,” VoxEU.org, Centre for Economic Policy Research 2015.10.22.↩
- Matt Precey, “Teacher stress levels in England ‘soaring’, data shows,” BBC News 2015.3.17; Denis Campbell, “Junior doctors: 7 in 10 to leave NHS if Hunt pushes through new contract,” Guardian 2015.10.20.↩
- 단기미봉책으로 어려운 쟁점을 직시하길 회피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연기한다는 뜻—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