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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준관 李準冠
1949년생. 1974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황야』 『열 손가락에 달을 달고』, 동시집 『씀바귀꽃』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등이 있음. hambaknunjun@hanmail.net
비
어렸을 때는
내 머리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비를 맞으면
해바라기 줄기처럼 쭉쭉 자랄 것 같았다
사랑을 할 때는
우산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둘이 우산을 받고 가면
우산 위에서 귓속말로 소곤소곤거리는
빗소리의 길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처음으로 집을 가졌을 때는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이제 더 젖지 않아도 될 나의 생
전망 좋은 방처럼
지붕 아래 방이 나를 꼭 껴안아주었다
그리고 지금
딸과 함께 꽃씨를 심은
꽃밭에 내리는 비가 좋다
잠이 든 딸이
꽃씨처럼 자꾸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보는 일이 행복하다
여름 별자리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산음리에 가서
별을 보았다.
감자밭에서 돌아온 어머니 호미 같은
초승달이 서쪽 산자락으로 지고
감자꽃 같은 별들이 돋아났다.
어미곰과 아기곰이 뒹굴며 노는 큰곰, 작은곰별자리
은하수 물방울을 퉁기며 솟구치는 돌고래별자리
직녀가 거문고를 뜯고 있는 거문고별자리
나는 어렸을 때 배웠던 별자리 이름들을 다시 불러보았다.
그 이름에 대답하듯 별들이 온 하늘 가득
뽕나무 오디열매처럼 다닥다닥 열렸다.
별똥별 하나 저 멀리 밤나무숲으로 떨어졌다.
저 별똥별은 가을에 밤 아람으로 여물어
밤송이 같은 아이들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리라.
아내는 세상에나! 별이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여기 다 모여 있었네 하면서 별처럼 눈을 빤짝거렸다.
그리고 옥수수를 따서 담은 바구니를 머리에 이듯
별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서 있었다.
세상에나!
우리는 낮이나 밤이나 아름다운 별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살고 있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우리는 외양간이 딸린 민박집 방에서
별들과 하룻밤을 보냈다.
송아지를 낳은 지 얼마 안되는 어미소는
가끔 깨어 송아지를 혀로 핥아주고
그때마다 별들은 잠을 깨어
딸랑딸랑 워낭소리를 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