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2015년 6월 11일 열린 신동엽창작기금 운영위원회에서는 강영숙 박성우 유희석 한기욱을 제33회 신동엽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위촉했다. 신동엽문학상은 등단 10년 이하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3년간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하며, 시·소설·평론 부문에서 2인에게 수상한다. 추천위원(창비의 시와 소설 분야 기획위원)들이 올린 9편과 심사위원이 추가한 1편(김금희 소설집) 등 아래와 같이 총 10편이 심사대상이 되었다.
박소란 『심장에 가까운 말』, 백상웅 『거인을 보았다』, 송승언 『철과 오크』, 신미나 『싱고, 라고 불렀다』,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이상 시), 김금희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김성중 『국경시장』, 박솔뫼 『도시의 시간』, 서유미 『끝의 시작』, 김선재 『내 이름은 술래』(이상 소설).
심사위원들은 7월 17일 모임에서 이상의 10권을 검토하면서 박소란 시집, 백상웅 시집, 송승언 시집, 신미나 시집, 이제니 시집, 김금희 소설집, 김성중 소설집, 박솔뫼 장편으로 대상으로 압축하고 장시간 토론을 펼쳤다. 그 결과 사회적 약자와 시대의 아픔을 개성적 어법으로 끌어안은 박소란 시집과 변두리 삶의 세목을 통해 장소성의 의미를 일깨운 김금희 소설집을 제33회 신동엽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 흔쾌히 합의했다.
심사평
강영숙(姜英淑) 소설가
박소란 백상웅 송승언의 시와 김금희 김성중 박솔뫼의 소설이 의미있게 다가왔다. 어떤 분이 상을 받아도 부족함이 없겠다고 느꼈다. 신동엽 문학정신의 열린 계승이라는 상의 취지가 있어서 서로의 작품을 비교하거나 깎아내리는 과정이라기보다, 모두가 지닌 장점의 빛깔을 찾아내는 과정의 비중이 더 컸다.
박소란의 시는 때로 시적 화자의 감상성이 도드라져, 살짝 피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내 그 불편함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고 오히려 그것이 더 빛났다. 『심장에 가까운 말』의 세계는 누구나 겪는다고 생각되는 청춘의 어떤 지점과 딱 붙어 있었다. “붉은 살 곳곳에 멍이 든 사과” 같은 일상 하나를 얻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살아가는 청춘들. 결국은 “아파요 중얼거리는 나는 엄살이 심하군요”(「아아,」)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어떤 시적 포즈보다 강렬하게 느껴지는 지평이 생겨났다고 할까. 「주소」라는 시에서 “늘//안간힘으로/바퀴를 굴”리지만 자신의 주소는 없거나, 주소가 생겼어도 이번엔 돌아갈 내가 없는 청춘의 세계를 본 것 같은 상실감이 오래도록 머리에 남았다.
김금희의 소설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은 오염된 사람에게는 사실 좀 소박한 세계였다. 그런데 인천이라는 장소성이 드러나는, 아버지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읽게 되었을 때, 자신을 둘러싼 기원에 대해서, 아버지에 대해서, 장소에 대해서 이렇게 순정한 자세로 다룰 수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김금희의 소설은 디테일이 뛰어났다. ‘신(神)은 세부사항에 존재한다’는 말을 긍정하게 하고, 그것이 결국 소설의 심층적인 지점과도 연결된다는 확신을 주는 데 손색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박성우(朴城佑) 시인
신미나의 『싱고, 라고 불렀다』는 근래에 단절된 서정을 단아하게 계승하고 있는 시집이다. 이미 익숙한 소재인 농촌과 도시 가장자리에 놓인 삶에서 새로운 지점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나 시인은 명민한 눈과 참신한 언어로 서정의 폭을 넓혀가며 자신만의 시세계를 능수능란하게 확장해냈다. 하지만 이러한 시작 태도는 시인이 새삼스레 넘어야 할 장벽이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묘사 하나까지도 정교하게 직조된 백상웅의 『거인을 보았다』는 시를 끌고 가는 힘이 예사롭지 않다. 특히, 시적 대상을 물고 늘어지며 상상의 진폭을 넓혀나가는 솜씨는 각별하다. 감각이 남다른 이제니의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는 짧은 호흡과 반복으로 만들어내는 독특한 리듬이 사뭇 경쾌하다. 언어를 다루는 테크닉이 각별한 송승언의 『철과 오크』는 낯선 공간으로 의식을 이동시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보여준다. 도시 변두리 사람들의 상처와 그늘을 응시하고 있는 박소란의 『심장에 가까운 말』은 몸으로 체득한 언어로 부조리한 사회와 도시 언저리에 놓인 시대의 아픔을 보듬는다. 서정에 서사를 더하며 가볍지 않은 생애의 무게를 자신만의 시각과 목소리로 가늠하고 있는 이 시집에는 유독 밥과 관련된 시가 많다. 「배가 고파요」 「노인」 「다음에」 「메리, 메리」 「김밥천국」 「향기로운 밥」 「지익」 등 시에 나오는 밥은 대체로 애달프고 구슬프나 때론 다정하기까지 하다. 아쉬운 점도 없진 않다. 체념과 절망 앞에 놓인 내면을 성찰할 때 좀더 객관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심사위원의 의견에 흔쾌히 동의했다.
김성중의 『국경시장』은 기대 이상의 상상력과 욕망 구조에 압도되는 소설이고 박솔뫼의 장편소설 『도시의 시간』은 반복되는 시간 속에 놓인 청춘들의 일면을 잡아내는 감각이 남다른 소설이다. 김금희의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은 한마디로 자극적인 식재료를 쓰지 않고도 깊고 담백한 맛을 내는 요리 같았다.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김금희 소설의 가장 큰 강점은 무엇보다 자극적인 소재나 극단적인 전개 없이도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끌고 가는 기묘한 힘에 있는 것은 아닌지. 연작으로 읽히는 「너의 도큐먼트」 「아이들」 「장글숲을 헤쳐서 가면」은 보편적 아버지인 독자로서도 매우 인상 깊게 읽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아버지와 그를 바라보는 딸의 들뜨지 않은 시선에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삶에 대한 위로를 받기도 했다. 두분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유희석(柳熙錫) 문학평론가
소설의 경우 선택이 비교적 용이했다. 김성중의 『국경시장』은 심사대상작 가운데 가장 발상이 발랄했다. 소재의 다채로움도 빛났다. 하지만 현실에서 태어난 상상력이 어느 지점에서도 닻을 못 내리고 표류하는 모습을 거듭 확인하게 될 때 신동엽문학상의 취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핏 무미건조하게 보이는 박솔뫼의 『도시의 시간』에서도 요즘 젊은 세대의 고뇌를 실감했지만 이미 상당한 분량으로 존재하는 전작들의 무게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고 봤다. 남은 작품은 김금희의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이었다. ‘김애란 가락’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드는 순간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북(舍北)」까지 읽었을 때 어느 누구와도 구분되는 확실한 개성이라는 판단이 섰다. 김금희의 소설에는 우리 시대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풋풋한 육성과 숨죽인 위트가 살아 있다.
시에서는 신미나와 박소란이 끝까지 남았다. 이제니, 백상웅이 절대적으로 모자라거나 쳐져서는 물론 아니었다. 두 시인 모두 자기만의 색깔이 분명했고, 말을 다루는 데서 드러나는 솜씨와 활달함도 인상적이었다. 다만, 개인적으로 ‘신동엽 정신’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더 방불한 작품을 두고 고민했을 따름이다. 결국 엇비슷한 것처럼 보이나 ‘벽’에 가닿아 부딪치는 소리가 더 크고 집요하게 들리는 박소란에게 한표를 던졌다. 박소란의 시가 신미나의 시보다 ‘심장에 가까운 말’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시에서 돋보이는 서사성도 감정의 연출이라는 일면이 있다. 나로서는 박소란의 다음 시집에 기대를 건다는 의미가 컸다. 「체념을 위하여」 같은 시가 간직한 힘을 무럭무럭 키우면서 ‘체념’이 다채롭게 극화한 ‘벽’을 시원하게 돌파하기 바라는 마음이다. 문학을 빙자한 자들의 부박과 경박이 사무치는 때도 다시없을 요즘 같은 세월이기에 그런 마음이 한가득이다.
한기욱(韓基煜) 문학평론가
소설 부문은 수상작을 고르기가 어렵지 않았다. 판타지의 요소를 한껏 가동시켜 새로운 느낌의 소설을 선보이고자 한 김성중의 『국경시장』이나 단독성의 감옥에 갇힌 인간들의 관계를 특유의 문체로 그려낸 박솔뫼의 『도시의 시간』은 그 나름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예술적인 성취 면에서 전작보다 더 진전된 것 같지는 않다. 김금희의 첫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은 무엇보다 사람과 장소의 관계를 신실하게 사유하고 있는 점이 돋보였다. 별다른 수사도 세련된 장식도 없이 대도시 변두리 삶의 일상적 세목과 추락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찬찬히 짚고 있을 뿐인데도 구체적인 삶의 면면이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은 삶의 터전으로서의 장소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다수 인물들의 삶이 뿌리박은 고장 인천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가령 「사북(舍北)」이 빼어난 것은 한 인물의 망가진 인생을 구구절절 설명 없이 ‘사북’이라는 장소성을 통해서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김금희의 소설집을 수상작으로 정하는 데 흔쾌히 동의했다.
시 부문에서 끝까지 붙든 것은 신미나의 『싱고, 라고 불렀다』와 박소란의 『심장에 가까운 말』이었다. 신미나의 시에서는 전통적인 서정의 리듬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 테크놀로지와 돈에 침윤된 도시적 감수성과는 대조를 이룬다. 고운 서정의 가락이 관습적 운율이 아닌 살아 있는 몸의 생동성으로 발화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신미나의 생동하는 감수성이 자본주의 상품화와 소비문화의 소용돌이를 어떻게 견뎌낼지 우려되는 바가 없지 않다. 박소란의 언어적 감수성은 단일하지 않고 도시적인 연출력과 세련된 어법이 돋보인다. 자의식적인 엄살과 연극의 기미도 살짝 느껴진다. 종점의 삶에 말을 부여하는 그의 시집 곳곳에는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으려고 고투한 흔적이 역력하다. 시의 화자는 울고 웃고 외치고 중얼거리는데, 자세히 들으면 거기에 노래도 있고 이야기도 있다. 변두리 사람들이 세상의 “바닥”을 훑고 “멍든 자리”를 매만지면서 토로하는 슬픈 노래, 아픈 이야기 들인 것이다. 고심 끝에 박소란의 시집을 수상작으로 선택하는 데 기꺼이 동의했다.
수상소감
이 울음을, 울음의 맹목을
박소란
마산에 계신 아버지께 전화가 왔습니다. 꿈을 꾸었다,고 하셨지요. 강보에 싸인 저를, 이제 막 세상에 나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핏덩이를 품에 안고 한참을 어디 먼 데로 달리셨다고 해요. 그곳은 어디였을까요. 저를 안고 달려가야만 했던 그곳. 말씀이 없으셨지요. 조금은 신묘한 꿈 뒤에 다만,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하여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요, 조심해야겠지요. 저는 내내 조심해야만 합니다.
시인의 이름이 박힌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주 찬란한 이름입니다. 여기에 박힌 이름 석자를 과연 제가 감당해낼 수 있을까요. 걱정이 앞섭니다. 어느 순간에는 잠시 가슴을 문질러 진정시켜야 할 만큼 기뻤다가, 또 이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묘한 기분에 휩싸입니다. 이 열띤 감정을 잘 다스려 먼 데로, 그 알 수 없는 곳으로 계속해서 저는 달려가야만 하겠지요. 매 순간 조심조심 신중한 자세를 잃지 않겠습니다.
『심장에 가까운 말』은 저를 쏙 빼닮은 오롯한 제 새끼입니다. 새끼에게 허물만을 물려준 저는 못난 어미입니다. 그저 펑펑 울고 싶었고, 지금이 아니면 어쩌지 못할 것만 같은 제 안의 응어리들을 모조리 털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을 과연 ‘시’라고 할 수 있을까. 시의 엄중함을 생각하면 저는 더 작아집니다. 시에게 다가가 조용히 용서를 빌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시는 이 울음을, 울음의 맹목을 한번쯤 눈감아줄까요.
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야기하건대, 울음의 힘을 저는 기어이 믿고 싶습니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토록 활활한 생명을. 이토록 비릿한 날것을. 이것이 궁극으로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세계의 또다른 끝으로 저를 데려다주지 않을까, 바라봅니다.
‘심장에 가까운 말’은 이제 제게 하나의 경구가 되었습니다. 심장처럼 펄떡이는 제 속의 가장 진짜배기 말을 꺼내어, 최선을 다해, 시에 다가가 보겠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아직은 많이 부족한 말입니다. 여기에 남 먼저 귀 기울여주시고 또 따뜻하게 격려해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朴笑蘭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남 마산에서 자랐다. 동국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심장에 가까운 말』이 있다.
수상소감
서가에서 다시 걸어나오며
김금희
제가 다녔던 대학 도서관의 한국문학 서가번호는 811.36이었습니다. 그 근처를 서성이면서 보낸 시간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읽고 싶은 책이 없는 날에도 그냥 가서 그 어둡고 습습하고 하지만 아주 비밀스러운, 어떤 위안의 세계를 뒤적이며 보냈습니다. 직장을 다니고 작가가 된 이후에도 그 811.36이라는 서가번호는 어쩐 일인지 영 잊히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성급하고 쉽게 비관적이 되며 두려움이 많지만 소설을 쓰며 그런 어려움과 마주쳤을 때에도 811.36, 때론 새롭게 꽂히고 때론 당당히 낡아가고 있던 책들의 면면을 떠올리면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수상소감을 쓰고 있는 여름밤에 저는 저를 작가로 만들어주었던 그 위대하게 아름답고 위대하게 고통스럽던 책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서가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제가 문학으로 만났던 한국의 작가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작가가 상을 받는다는 것은 문학이 모두의 공기(公器)임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격려의 의미를 떠올리며 지금보다 더 나은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金錦姬 1979년 부산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성장했다. 인하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