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허수경 許秀卿
1964년 경남 진주 출생.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등이 있음. su-huh@hanmail.net
이 가을의 무늬
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 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 지난여름을 촘촘히 짜내렸던 빛은 이제 여름의 무늬를 풀어내리기 시작했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너는 아주 돌아올 듯 망설이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한다 낡은 외투를 그의 등에 슬쩍 올려준다 그는 네가 다녀간 걸 눈치챘을까? 그랬을 거야, 그랬을 거야 저렇게 툭툭, 털고 다시 가네
오무려진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윌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아사(餓死)
마지막 남은 것은 생후 4개월의 소였다
씨앗을 뿌리지 못한 밭은 미래의 지평선처럼 멀었고
지평선 뒤에 새로 시작되는 세계처럼 거짓이었다
아이는 겨우 소를 몰았다
소는 자꾸만 주저앉았다
아이의 얼굴이 태양 아래에서 검은 비닐처럼 구겨졌다
소의 다리가 태양 아래에서 삼각형으로 꼬꾸라졌다
인간의 눈은 태양신전에 점령당한 전쟁터 임시병원이었고
짐승의 눈은 지옥신전에 갇힌 포로였다
아이는 두 팔로 소를 밀었다
소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아이는 윗몸을 다 기대며 소를 밀었다
소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아이도 주저앉아 소를 밀었다
소는 빛 속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아이는 소를 제 품에 안았다
둘은 진흙으로 만든 좌상이 되어간다
빛의 섬이 되어간다
파리떼가 몰려온다
파리의 날개들이 빛의 섬 위에서
은철빛 폭풍으로 좌상을 파먹는다
하얗게 남은 인간과 짐승의 뼈가 널린 황무지
자연을 잡어먹는 것은 자연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