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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서동욱‧진태원 엮음 『스피노자의 귀환』, 민음사 2017
왜 오늘 다시 스피노자인가
황수영 黃洙瑩
홍익대 교양과 교수 suyounghwang@hanmail.net
국내 스피노자(B. Spinoza)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저서를 기대해도 좋을 정도로 무르익은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 그 연구활동의 일부를 이 책 『스피노자의 귀환: 현대철학과 함께 돌아온 사유의 혁명가』(서동욱·진태원 엮음)의 출판으로 엿볼 수 있게 되어 반갑기 그지없다. 이 책은 국내 스피노자 연구가들이 약 10여년간 공들인 진지한 노력의 결실이다. 일부 글은 엄정한 학술논문을 목적으로 씌어진 것도 있지만 전체 구성은 개인연구와 별도로 몇가지 문제의식 아래 연결되어 하나의 완성된 저작을 선보인다. 학술논문이 그렇듯이 이 책이 스피노자에 관해 다루는 철학적・정치학적・문헌학적 연구는 내용의 깊이와 표현의 형식에 있어서 매우 난이도가 높고 독자를 추상성의 극점까지 인도하는 면이 있다. 이런 연유로 해서 이 책은 숨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읽어야 한다.
이런 평가는 처음부터 독자에게 감히 접근하기 어렵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귀환』이 가진 미덕은 그러한 어려움을 충분히 뛰어넘으리라 본다. 우선 이 책은 오로지 스피노자에 대한 내용으로만 채워진 것이 아니라 각 꼭지마다 우리에게 친숙한 현대철학자들과 스피노자를 대면시킴으로써 철학자들의 사상을 비교하여 독자의 관심의 폭을 넓혀준다. 스피노자에 대해 전문적 지식이 부족하다 해도 이들 현대철학자에 대한 관심과 호감이 있다면 독서에 도전해볼 만하다. 또한 각각의 글은 어느 정도는 독립적 구성을 가지고 있어서 읽는 데 일정한 순서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특히 4개 장으로 이루어진 목차를 보면 각 장 내에서는 유기적인 연결이 가능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장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독립성이 있어서 원하는 장을 먼저 읽어도 상관이 없다. 1장은 현대철학의 여명기, 즉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활동한 학자들,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를 각각 백승영, 김은주, 김문수가 분석하고 문제의식을 소개하면서 스피노자 철학과의 연관성을 매우 상세하게 보여준다.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적 읽기와 생산적 읽기가 균형을 이루는 모범적인 독해이다.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는 스피노자와 어떤 맥락에서 조우하는 것일까. 저자들은 풍부한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독자의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2장부터 4장까지는 주로 현대 프랑스철학자들과 스피노자의 영향관계 또는 유사성과 차이를 통해 생산적 담론을 이끌어낸다. 이는 스피노자의 귀환에 현대 프랑스철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공히 스피노자 사상의 역사가 오인에 기반한 평가절하의 역사였다고 진단한다. 당대 보수세력과의 갈등, 독일 관념론의 자의적 해석(범신론)이 그 대표적 원인이며 20세기 들어서는 의식철학의 개화로 인해 침잠하게 되어 스피노자는 “잊힌 적은 없으나 올바로 알려질 기회 역시 정당하게 가져보지 못”한 철학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 프랑스철학의 지적 모험은 스피노자라는 보물창고로부터 그 영감을 길어내기 시작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스피노자는 “진보적인 현대철학자들이 자신의 무기를 주조해내기 위한 거대한 대장간”(서문)의 구실을 한 것이다.
2장은 프랑스 현대철학 중에서도 인간학과 존재론, 진리론 등 철학의 중추적 분야에서 스피노자가 기여한 쇄신이 무엇인가를 다룬다. 김은주, 서동욱, 진태원, 박기순이 각각 라깡, 들뢰즈, 푸꼬, 바디우에게서 스피노자는 어떤 의미인가를 탐구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을 욕망의 존재로 보고 상상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일깨운 데서 라깡 철학의 선구자인 측면이 있다. 들뢰즈에게 스피노자는 존재의 일의성이라는 근본적 입장을 확보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주춧돌의 역할을 한다. 한편 푸꼬는 스피노자를 언급한 적이 없지만 진태원의 해석에 의하면 그가 권력을 실체가 아니라 관계로 사유한 점에서 스피노자의 관계론적 사유와 맞닿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스피노자와 바디우는 필연성의 철학, 사건의 철학이라는 근본적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태도에서 조우한다. 사실은 유사성이나 차이 그리고 문헌학적 의미에서 영향관계가 핵심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유의 궤적의 비교는 사상가들의 사유의 역량과 범위 그리고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고 저자들은 이런 시도를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다.
3장은 ‘현대 정치철학의 실험실 스피노자’라는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정치철학의 새로운 시도들에서 스피노자가 기여한 바를 보여준다. 이 책이 스피노자의 역사적 명예회복을 기도한다면 그 가장 야심찬 내용을 선보이는 지점이 여기가 아닐까 한다. 진태원의 알뛰세르, 조정환의 네그리, 최원의 발리바르 연구는 스피노자 철학이 시대를 앞지르는 존재론적 입장과 인간학을 선보였다면 그 궁극 목표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영감은 이들 현대철학자들에게서 일정한 성과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스피노자가 히브리 신정국가의 사례연구를 중심으로 하여 ‘신학정치론’에서 ‘정치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서양사에서 나타난 짧지만은 않은 민주주의 실험이 계약론적이고 법적인 전통만으로는 한계를 노정한다는 것, 대중(또는 다중, multitudo)의 정념적 삶을 조절하고 조직화할 수 있는 별도의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4장은 아마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주어진 선물 혹은 ‘꿀팁’이라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김은주는 현존하는 프랑스의 스피노자 해석가, 모로(P.-F. Moreau)와 또젤(A. Tosel)과의 대담을 번역하여 실었다. 이들의 육성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는 자끄, 게루, 들뢰즈, 마트롱에 의해 이루어진 현대 프랑스의 스피노자 르네상스를 직접 증언한다. 이들은 현대 프랑스철학이 왜, 어떤 맥락에서 스피노자를 우리 시대로 불러왔는지, 스피노자의 철학이 왜 더이상 ‘직관이나 멋진 경구들의 모음 혹은 지혜’가 아니라 엄밀한 개념적 연쇄로 이루어진 논변들, 결국 과학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철학인지를 힘있게 설득한다. 여기에는 김은주의 명료한 질문들과 유려한 번역도 분명 한몫을 하고 있다.
일정한 역량을 가지고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은 그 자체가 퍼텐셜의 자격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에티카』)라는 주장은 특별히 자신의 철학의 운명을 겨냥한 것이라 해도 과장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사실 근대적 수학주의, 결정론, 평행론, 범신론이라는 다양한 규정들을 통해서 이해되어왔으며 이 규정들은 그의 철학을 데까르뜨(R. Descartes)라는 거대한 행성의 주위를 회전하는 위성의 위치로 제한하고 그 잠재력을 부정해온 측면이 있다. 스피노자는 근대의 아들인 동시에 여러 측면에서 근대라는 아버지를 심층적으로 전복하는 정신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거인의 귀환은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소환한 자들에게 앞으로도 무한한 생산성이 함께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