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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낯익은 욕망의 폐허 너머
황석영 장편소설 『낯익은 세상』
정지아 鄭智我
소설가.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 소설집 『행복』 『봄빛』이 있음. jiajeong@hanmail.net
시골로 내려온 다음날부터, 내가 직면한 것은 온갖 종류의 쓰레기 처리였다. 재활용품은 재활용품대로, 음식물쓰레기는 또 그것대로, 가구며 전자제품은 제아무리 큰 것이라도 몇푼 처리비용만 내면 마음대로 갖다버릴 수 있었던 서울과는 전혀 달랐다. 어지간한 것들을 다 건져내고도 한무더기의 쓰레기가 남았고, 동네 이장이기도 한 주인아저씨가 한숨을 내쉬며 그것들을 트럭으로 날라 강변에서 태웠다. 냄새를 피해 멀찍이서 시꺼멓게 치솟는 연기를 바라보며 이 연기가 청정한 섬진강 주변의 대기를 얼마나 오염시키고 있는 것일까, 내 욕망의 잔해 앞에서 나는 조금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황석영(黃晳暎)의 『낯익은 세상』(문학동네 2011)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버린 쓰레기들이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서 냄새를 피우며 썩어가고, 세상에서 밀려나 그 쓰레기에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던 시대.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때도 욕망이라는 것이 바이러스처럼 퍼지고 있긴 했으나 그것을 거침없이 입에 담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가는 현실을 한탄하는 사람도 많았다. 마흔 넘은 내 또래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으리라. 타락한 서울의 배설물들이 모여들었던 난지도는 지난 2002년 하늘공원으로 바뀌었다.
이제 이곳은 바람개비를 이용해 전력을 생산하고, 쓰레기더미에서 발생하는 메탄가스를 정제해 주변지역에 연료를 공급하고 있다. 1202종의 동식물이 살고 있다는 서울의 대표적인 이 환경생태공원은 휴식을 찾아 나온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인다. 호숫가를 거닐거나 잘 다듬어진 풀밭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연인들 누구도 하늘공원의 과거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황석영이 자본주의의 보편적인 문제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으로 주목한 ‘쓰레기장’을, 자본주의는 이미 극복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 길로 가다가 모두 망쳐버렸다. 지름길인 줄 알고 갔지만 호되게 값을 치를 게다.”(207면) 쉰을 바라보는 나는 황석영이 만물상 김 노인의 입을 빌어 말한 이 경고를 늘 마음에 품고 살며, 삶이 곧 소비인 어린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똑같은 경고의 메씨지를 전하거나 최소한 내 마음속에 되새기곤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복잡하고 어지럽다. 더러운 쓰레기는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낸 낯익은 세상임이 분명하지만 요즘 사람들에게도 과연 낯익은 것일까? 낯익음과 낯설음이라는 구분조차 구태의연한 것이 아닐까? 요즘 사람들은 이미 그 이분법의 세계를 훌쩍 넘어서버린 것은 아닐까?
소비를 통해 구축한 자신을 진정한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혹 이것도 나이든 나의 오만이거나 고집 혹은 편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아직 완전히 지우지는 못하겠다) 요즘 아이들은 쓰레기장조차 본 적이 없다. 오늘날 쓰레기는 덮개가 가려진 트럭에 실려 서울 외곽의 매립지나 소각장으로 옮겨진다. 서울 사람들이 쓰레기의 적나라한 실체를 볼 수 있는 것은 아파트 단지마다 설치된 음식물 쓰레기통 앞에 수거트럭이 멈춰설 때뿐이다. 태운 쓰레기는 자원으로 재활용된다. 난지도의 쓰레기에서 나오는 메탄가스를 정제한 연료가 상암동 일대에 공급되고 최근 몇몇 구에서는 음식물쓰레기를 태워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 생산과 소비는 순환의 구조가 아니었다. 소비하고 나면 무언가 쓰레기가 되어 사라지는 것. 그래서 지난 시대에는 소비가 미덕일 수 없었다. 그러나 요즘 생산-소비는 물고 물리는 순환의 구조다. 자본주의가 소비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 순환의 구조가 영원할지, 아니면 조금씩 마이너스되는 구조여서 언젠가는 제로로 떨어질지 나는 아직 단언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나는 그 무엇의 영원성도 믿지는 않는다. 자신의 육체와 정신마저 소비의 대상이 되는 요즘 세상은 더욱 믿기지 않는다.
믿기지 않으나 세상은 실물로서 존재하고, 나는 그러한 세상 앞에서 무력하다. 한때 내 문학의 지표였던 황석영의 글이 나올 때마다 나와 세상 사이에 가로막힌 이 벽을 혹 그가 먼저 넘어주지 않을까, 눈을 빛낸다. 그리고 그때마다 확인한다. 그도 나와 같은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있음을.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는 안타까워하며 그러나 여전히 기대한다. 어쩌면 그는 나보다 더 먼 곳, 저 벽 너머의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여 아직은 넘을 수 없을지라도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두드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숭고와 겸허, 기다림과 절제를 알 수 없게 하는 이 질긴 욕망의 세계에서 이러한 가치를 요즘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듯한 그의 행보를, 적어도 나의 무기력보다는 아름답지 않은가 하고, 나는, 기대하며 기다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