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의 문학, 이제 어디로
표절·문학권력 논란이 한국문학에 던진 숙제
김경연・김남일・소영현・윤지관・강경석
강경석(사회) 우선 어려운 걸음 해주신 네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멀리 부산에서 와주신 김경연 선생님께는 특별히 더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오늘 대화는 지난여름부터 문단 안팎을 뜨겁게 달군 표절과 문학권력 논란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한국문학에 주어진 과제를 점검해보자는 취지입니다. 아시다시피 그 과정에서 주로 창비와 문학동네가 많은 비판을 받았고 그 가운데서도 빠르게 표절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한 문학동네에 비해 신경숙 작가의 ‘고의적 베껴쓰기를 단정하는 여론에 동참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 창비가 ‘반성 없는 문학권력’으로 더 큰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지난호에 충분한 이야기를 담지 못한 만큼 편집위원들이 개별적 경로로 각자의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는데 대상과 내용이 무엇이든 이러한 응답의 노력은 앞으로도 지속되어야겠지요.
여러 문예지 가을호들의 발간 이후 최근에는 좀더 차분하고 깊이있는 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 또한 높아지고 있는 게 사실이고 표절논란도 작가의 ‘의도’를 단죄하고 매도하던 데에서 ‘결과’를 어떻게 판단하고 해석할지의 문제로 초점이 이동한 듯합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출판상업주의, 비평제도와 문단권력, 한국문학의 전반적 침체 같은 문제도 함께 제기된 터라 숙제가 많습니다. 어쨌든 이 모든 논의가 궁극적으로는 앞으로 한국문학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라는 전망의 재구성 문제에 닿아 있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번 대화가 이를 위한 단초를 마련하는 데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다면 좋겠지요.
일단 논란과 관련해 나온 최근 논의 중 특별히 주목하신 게 있는지, 혹은 가을호 발간 이후에 대한 소회부터 편안하게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창비의 행보에 대한 솔직한 평가도 포함될 수 있겠습니다.
남겨진 물음들
김경연 창비의 좌담 제의를 받고 솔직히 고민이 됐습니다. 아마도 창비가 저를 초대한 것은 제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오늘의문예비평』이 지역에 거점을 둔 매체이니 지역에서 이번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한국문학에 대한 지역의 시각이나 전망은 무엇인지 듣고자 함일 텐데, 제가 그 기대에 온전히 부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고 지역에서도 이 문제를 보는 입장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부분 개인적 소견에 불과할 것이 지역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처럼 들릴지 몰라 염려가 됐습니다. 다른 하나는 창비에 대한 실망감이랄까요. 표절 논란 이후 창비는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실린, 의도적 표절은 아니었다는 백영서 편집주간의 언급이나 윤지관 선생님의 ‘신경숙을 위한 변론’ 외에는 공식적인 태도 표명이랄 만한 게 없지 않았습니까. 문학동네조차 애매한 사과를 하고 빠져나가는데요. 그래서 저를 포함한 많은 분이 창비의 제대로 된 입장 개진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일 텐데, 얼마 전 창비 편집위원인 김종엽, 황정아 선생님의 칼럼을 읽어보니 이전보다 진전된 논의가 없더라고요. 그분들의 글이 개인적 견해일 수도 있고 창비가 합의한 최종적 입장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느 경우라도 솔직히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창비에 대한 비판을 ‘비난’으로 여전히 오독하고 있는데다 신경숙을 옹호하는 논리들은 억지스럽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이번 좌담도 변함없는 창비의 입장을 피력하는 장은 아닌지, 이 동어반복의 장에 들러리 서는 게 아닌지 우려가 됐습니다. 그런데 강경석 선생님께서 창비의 행보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달라고 하시니 우선 안심이 됩니다.(웃음)
아실 테지만 『오늘의문예비평』도 가을호에서 ‘신경숙이 한국문학에 던진 질문들’이라는 제목으로 좌담을 진행했습니다. 제가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사태에 개입해야 하고 지역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점검해봐야 한다는 필요성에 편집위원들 모두 공감하면서 기획하게 됐죠. 신경숙 작가의 표절여부에 대한 토론도 있었지만 문학권력, 비평의 윤리, 매체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를 나누었고, 지역 문학과 문단에 대한 뼈아픈 성찰도 있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역문단은 이런 사태를 만들 수조차 없는 열악한 상황이라는 인식도 있었죠. 지역문학의 하향평준화를 막고 문학의 서울중심성을 벗어날 길이 무엇인지 고민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지역문예지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높았고요. 『오늘의문예비평』도 이런 비판에서 예외일 수는 없겠죠. 『오늘의문예비평』이 1991년에 창간됐으니까 내년 봄호로 100호가 됩니다. 비평의 윤리성을 회복하고 서울 중심의 문학구조를 벗어나 지역문화운동을 실천해간다는 것이 창간 당시의 목표였는데, 지난 20년 동안 과연 그 목표를 얼마나 성실히 수행해왔는지 되묻게 되기도 했고, 이 목표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우울하게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고민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가 저희에게는 나름 긍정적 계기를 제공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강경석 창비의 입장을 피력하는 장에 들러리를 세우겠다는 ‘음모’가 있었다면 아마 김경연 선생님을 모시진 않았을 겁니다.(웃음) 사태 초반부터 여론의 흐름에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하셨던 윤지관 선생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주시면 어떨까요.
윤지관 저는 초기에 아예 신경숙 작가의 변호사를 자처하고 나선 처지여서 오늘 이 자리가 그에 대한 심문의 자리일 수도 있겠네요.(웃음) 여러 계간지 가을호에서 긴급좌담을 비롯한 관련 기획을 했죠. 『오늘의문예비평』 경우는 이 사태를 도덕적인 비난으로 몰아갈 것이 아니라 발본적인 사유를 하는 계기로 삼자는 문제의식에서 기획된 좌담이라고 알고 있어요. 문학에서 표절 문제가 단순치 않다는 지적도 있었고 문학권력이 뒷배경에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오히려 비판적인 시각이 강했어요. 매체의 대화적이고 창조적인 활동 전체를 권력으로 몰아가면 감정대립이나 한풀이 수준밖에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나왔지요. 한마디로 이 사태에 대한 성찰이 두드러졌던 좌담인데, 이번 사태 내내 좀 그랬듯이 문제는 언론이에요. 이런 좌담이 언론에 보도될 때는 그런 성찰적인 내용은 거의 빠지고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것만 내보냅니다. 『오늘의문예비평』 좌담 경우는 왜곡이 좀 심했어요. 연합뉴스 기사를 보면 「부산문인들 “창비 신경숙 옹호글, 식견 의심스러워”」(2015.9.1)로 타이틀을 잡아서, 신경숙을 옹호한 윤모 평론가가 얼마나 그릇됐는지 좌담에서 반론이 어어졌다는 식인데(웃음), 정작 좌담에는 제 이야기가 한마디 정도밖에 나오지 않아요. 제가 작가회의 게시판에서 ‘변론’을 시작하기도 전에 한 좌담이라 당연한 건데, 그런 식입니다. 물론 문단에서 일종의 내부고발이 있었기 때문에 촉발된 사태지만 작가에 대한 과도한 도덕적 비난과 매도, 문단 전체를 타락한 집단으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형성된 데는 언론 탓이 크다고 봅니다.
김남일 우선 제 입장을 좀 말씀드려야 되겠습니다. 이번 토론에 참가해달라고 요청을 받고서 저는 『실천문학』 편집위원들과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특히 경영자로서 내야 될 목소리가 있을 것 같다고 봤어요. 실천문학은 경영과 편집이 분리돼 있습니다. 경영 쪽에서 편집에 간섭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표가 되고 첫째로 한 얘기가 계간 『실천문학』의 편집권은 철저히 보장한다는 거였어요. 처음에 편집위원들과 만나 전체 편집방향이나 원칙에 대해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그다음부터는 당연히 개입하지 않았고요. 물론 더러 어떤 작품이 좋더라는 식의 추천은 합니다만. 그런데 이번 사태는 달랐습니다. 저는 어떻게 생각을 했느냐면…… 제가 페이스북을 이번 일 때문에 하게 됐어요. 그게 의외로 기사화되면서 일부에서는 과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요. 방금 윤선생님께서 언론이 이 문제에 대해 본질을 제대로 읽지 않고 표피적으로 다루었다고 비판하셨는데 저는 오히려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다룸으로써 사태를 확실히 문제화했다고 평가합니다. 물론 세부적으로 보면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언론이 문학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작가에 대한 매도가 있었다는 식의 진단도 꼭 올바르다고만 생각하지 않거든요. 『실천문학』 얘기로 돌아가서 한마디 덧붙이면 처음부터 저는 이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양과 질 두루 이 문제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었지요. 편집위원들에게 강력히 제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특히 양적인 측면을 강조했죠. 불가피하게 편집에 간섭한 셈이지만, 당연히 합의를 거쳤습니다. 어쨌든 가을호 전면 특집으로 결정이 난 후 이번에는 제목이 문제가 되었는데요, 저는 특집 제목을 ‘죽은 문학의 시대’라는 식으로 부드럽고 은유적으로 하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내부에서 오히려 강하고 선명하게 나가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결국 이슈를 분명히 밝히는 방향으로 정해졌습니다. ‘표절, 문학권력, 대안’. 이렇게 해서, 말하자면 『실천문학』이 이번 사태 이후 전체 문학잡지들 가운데 자기 목소리를 가장 분명히 내게 되었습니다.
강경석 그에 비해 소영현 선생님께서 관여하시는 『21세기문학』은 이번에 표절이나 문학권력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는데요.
소영현 계간지 가을호가 발간되던 즈음인 8월 26일에 열린 토론회 참여를 위해 내부 논의를 하면서, 『21세기문학』 편집위원들은 이번 사태를 둘러싸고 서로 조금씩 의견이 다르다는 점을 확인했고, 그래서 각자의 방식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것으로 결정한 바 있습니다. 합의된 하나의 입장을 표명하기보다 비평의 열린 공론장 역할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겨울호에 실리는 글을 통해서도 드러나겠지만, 앞으로도 이런 기조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저도 이번 대화에 참여하는 소회를 좀 밝히자면, 다른 선생님들도 그러셨을 것 같지만, 사실 무거운 마음으로 왔어요. 그간 여러 차례의 토론회와 계간지를 통해 조금 더 침착하고 의미있는 논의를 시작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고 실제로 표절 시비, 문학권력 비판론, 문학장의 쇄신 등을 둘러싼 논의가 꽤 많이 이루어졌지요. 저 자신도 그렇거니와 그간의 쟁점들을 정리하면서, 여기서 진전된 논의를 덧붙일 수 있을까 우려의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최근에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태가 너무 심각하기도 해서 이 문제는 이렇게 지나가나 하던 참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최근에 김종엽, 황정아 선생님의 글도 그렇고,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차분하게 논의하자는 건 진영논리를 피하는 것인데요. 진영논리에서 서서히 벗어나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관계가 역전된 채로 재진영화되는 듯하달까요. 그것을 넘어서는 비평의 공론장을 회복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이 적극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왜 이런 식으로 논의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다시 얘기될 필요가 있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강경석 기본적으로 창비에 비판적인 분들이 하나의 진영이 아니고, 발언하시는 분들마다 관점 차이도 엄연하니 억지로 하려고 해도 어차피 진영구도가 성립되긴 어렵지 않을까요?
소영현 창비진영이다 아니다 이런 얘긴 아니고요, 정의를 자처하면서 적을 상정하는 식으로 옳고 그른 편을 가르는 듯한 논의구조가 만들어지는 건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문학 논의에서 그런 구도가 반복적으로 만들어지는 상황이 아쉽다는 말이에요. 윤리나 도덕을 앞세우는 이런 현상이 문단과 비평장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고 순식간에 극단적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되는데, 최근 든 생각은, 표절 시비를 포함해서 이것이야말로 위험수위로 치닫는 한국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징후적 현상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이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지관 제가 보기에는 애초 문제제기가 인터넷언론을 통한 고발방식이었던 탓도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급격하게 사회문제화되고 문단 내에서도 호응하는 움직임이 일어난 일은 일찍이 없었는데, 그런 만큼 이 현상 자체를 징후적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합니다. 일종의 균열이랄까 하는 것들이 축적돼오다가 이걸 계기로 해서 터져나온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게 문학 내부의 균열일 수도 있고 문학의 장과 사회적인 영역 사이의 균열일 수도 있겠습니다. 구조적인 차원과 연관된, 문단 시스템이라거나 등단제도라거나 편집위원 제도, 또 자본과 출판의 관계 같은 것들이 다 이 현상과 결합돼 있기 때문인데, 우선은 문학장 내에서의 소통구조를 따져볼 필요가 있고 그와 함께 문학 바깥, 사회적 공론영역과 문학의 소통이 얼마나 원활했는지, 문학이 사회적 역할을 얼마나 제대로 했는지 등을 성찰할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표절, 독창성, 창조성 그리고 문학
강경석 귀담아 들어야 할 아픈 말씀도 많이 해주셨지만 이제는 한 사람의 작가 개인을 둘러싼 논란을 넘어 문학장 안팎의 여러 문제를 차분히 그리고 본격적으로 점검해볼 때가 되었다는 데에 다들 공감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도덕주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얘기를 해보자는 것이겠지요. 사태 초반 논의가 좀 지나쳤던 감이 있더라도 그것이 그렇게 된 현상을 징후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관점에도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고요. 그렇다면 논점을 좀더 압축하고 구체화해보는 건 어떨까요?
윤지관 이번 일로 우선 이 시대에 창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됐다고 봅니다. 독창성이 있어야 한다, 남의 표현을 허락 없이 빌리거나 표절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하는 입장이 많지만 이게 근대주의적인, 낭만주의적인 독창성 신화에 매몰된 관점일 수도 있거든요. 지금은 근대를 넘어서 탈근대에 접어들었다고들 하고, 갖가지 글이나 정보가 인터넷을 통해서 흘러다니는 ‘정보화사회’잖아요. 정보의 기원을 다 알기 어려운 국면으로 가고 있어서 많은 자료를 활용하고 가공할 수밖에 없는 작가들로서는 어디까지가 창작이고 어디까지가 차용이나 표절인지, 즉 문학표현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가 문제일 것 같고요. 둘째는 문학권력 비판에 대해서, 저는 문제가 많다고 보지만, 그래도 문학이 권력과 맺어진 양상이 있지 않습니까. 정치권력이든 자본이나 시장이든 그런 힘들과 문학이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위상을 가져야 하는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겠습니다.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역시 비평의 기능이라고 보는데요. 문학 전반도 그렇지만 특히 비평이 어떻게 실천적으로 사회에 개입하느냐 하는, 문학이나 비평의 공공적인 성격과 그 의미가 뭔지도 다시 따져볼 계기가 됐어요. 이것과 관련해서 문학의 방향, 특히 90년대 문학을 새로 평가하는 과제도 이번에 제출된 셈입니다. 90년대 문학이라는 것이 지금 국면에서도 여전히 주도적이거나 유효한지, 아니면 뭔가 이 추세를 돌파할 어떤 다른 형태의 문학을 지향해가야 할지 같은 물음을 환기시킨다고 할까요.
강경석 크게 세가지 논점을 제시해주셨는데 나머지 문제는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첫번째 화제부터 토론해보는 것이 좋겠네요.
김경연 그에 앞서 한가지는 다시 짚어봤으면 합니다. 소영현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진영논리를 피하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듯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일 거예요. 문제는 진영논리에 갇혀 있는 쪽이 오히려 창비가 아닌가 하는 건데요. 저는 표절논란을 이렇게 심각한 사태로 키운 상당한 책임이 창비에 있다고 봅니다. 신경숙 작가의 표절에 실망한 사람들보다 아마 창비의 태도에 절망한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요? 창비는 작가와 창비의 대응태도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을 ‘신경숙 죽이기’나 ‘창비와 백낙청 때리기’를 시도하는 불순한 진영의 음모론으로 몰고 가는 편협한 진영논리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그런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이 일부의 가능성에 집착하면서 대다수 정당한 비판자들을 최소한의 ‘자비의 원칙’조차 모르는 파렴치한 비난자로 단죄하려는 이해할 수 없는 욕망을 내보이는 거 같고요. 이번 사태와 관련한 글이나 좌담을 많이 읽었지만 상습적인 표절이나 일삼는 형편없는 작가로 폄훼하려는 의도가 읽히는 경우는, 저의 독해력으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신경숙 작가가 비록 애매한 화법이긴 하지만 표절 사실을 인정했고, 이 사태는 충분하지는 않아도 작가와 문단에 자성을 요구하는 선에서 마무리될 수도 있었다고 봐요. 저 역시 「전설」이 「우국」의 문장이나 서사구도를 상당부분 표절했다고 생각하지만 신경숙 문학 전체가 형편없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90년대 이후 신경숙 소설의 대중적 친화력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의미부여가 있어야 한다는 쪽이에요. 「전설」과 관련해서도 작가의 초창기 작품이고, 필사하면서 창작을 연마해온 과정에서 생긴 과오로 애써 납득하고 갈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작가를 과도하게 변호하고 보호하려는 창비의 과잉이 외려 작가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더 큰 곤경에 빠트리고 대중적 공분을 불러온 것이 아닌가 싶어요.
강경석 신경숙 작가를 “상습적인 표절이나 일삼는 형편없는 작가로 폄훼”한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밖의 말씀은 창비가 나름으로 견지해온 입장과 크게 다르진 않다고 봅니다. 물론 창비에 대한 비판의 말씀은 소중한 고언으로 새기겠습니다. 다시 토론주제로 돌아가면 어떨지요.
소영현 윤지관 선생님이 정리해주신 문제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 문제들을 더 깊이 논의해야 한다는 생각을 저도 하고 있고요. 처음에 표절 얘기가 막 나올 때 윤선생님은 적극적으로 표절을 옹호하신 분이고 저는 사실 표절 프레임이 문제라고 얘기한 사람입니다. 표절 시비에 휘말린 작가든 그것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비평가든 모두 ‘표절이냐 아니냐’ 이외에 다른 답변이 없는 프레임 내부에서 논의를 이어가는 게 문제라는 것인데, 특히나 작가의 윤리를 단죄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는 거였죠. 제기된 표절 시비는 이제 어느정도 일단락되었고, 특정 작품에 관한 것과 작가의 전체적 작품세계는 분리해서 다루어야 한다는 쪽으로 정리가 되고 있으니 이제야말로 한국문단에서 표절이 무엇이며,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두고 직접적이고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표절을 이야기할 때라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 윤선생님께서는 표절이란 없다고 말씀하신 것에 가깝지 않나 싶은데요. 다른 자리에서 얘기했다시피 저 역시 다양한 모방과 차용을 통한 영향관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모든 창작이 표절이다’라는 결론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경우도 그랬듯이 적어도 비평가들 중에는 모방과 차용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진 않아요. 창의적 아이디어가 모여 혁신을 이루는 테크놀로지 영역과 달리 문학의 진보는 개성적 세계의 다발이 만들어낸 효과 같은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창작과 표절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낭만적 작가 개념의 타파라는 시대적 진전에 대한 논의에서도 그 진전에 복합적 층위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창작과 표절을 구분한다 해도 표절의 정의나 범주를 획일적으로 설정할 수 없다는 거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경숙 작가의 사례와 박민규 작가의 사례는 달리 처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경숙 작가가 표절 시비에 자주 휘말리는 것은 이 작가의 문학이 기억, 진정성, 감정, 내면 등을 핵심어로 한다는 점과 연관되어 있는데요. 박민규 작가는 윤선생님이 말씀하신 포스트모던적 작업을 하는 데 가깝다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창작의 원리 차원에서 달리 논의될 수 있다는 거죠. 이렇게 표절의 층위와 갈래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한데, 획일적인 잣대로 표절 혐의를 제기하는 것이 타당하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습니다. 윤선생님은 「전설」에 대해 ‘표절의 혐의는 있지만, 표절로 볼 수는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셨는데, 여전히 이 소설을 두고 논의를 이어갈 필요는 없겠지만, 거기서도 전제될 수밖에 없는 표절의 정의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윤지관 말씀 중에 ‘표절을 옹호’한 사람이라는 말음 좀 어폐가 있고요.(웃음) 제 얘기는 문학에서 표절을 말할 때는 작품 전체를 보고 판단할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전설」에 부분표절이 있는 걸 부정한 적은 없어요. 의도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는 전제를 두고 말이죠. 문학 표절 논의에서 의도성 여부가 필요조건이라고 보는 관점도 꽤 있거든요. 표절혐의가 작가에게는 치명적이기 때문에, 게다가 윤리적인 지탄의 대상으로 삼을 때라면 명백하게 속일 목적으로 남의 문장을 제 것처럼 베꼈을 때로 한정해야 한다는 거죠. 하여간 결과적으로는 부분표절인 셈인데, 다만 저는 남의 문장을 일부 인용 없이 사용했다 해도 전체 작품을 표절작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겁니다. 다양한 변용이 가능한데 문학에서는 차용과 표절의 경계부터가 확실치가 않잖습니까. 의도니 기억이니 하는 애매한 영역을 떠나서 작품으로 「전설」을 보자면 저는 「우국」의 다시쓰기라고 볼 여지가 크지 않나 합니다. 일부 문장이 유사하게 된 것도 그 여파로 보이는데, 사실 작가 자신이 이게 「우국」을 다시쓰기한 거다, 이렇게 공표할 수 있었다면 그런 문자적인 유사성도 큰 문제가 아닌 수준이라는 거죠. 표절 부분도 언젠가의 독서체험이 바탕이 되어서 발상을 했고 작가 나름대로 여성적인 관점에서 전쟁도 재해석하고 남녀관계도 재해석하는 식으로 되받아쓰는 과정에서 나온 실수가 아닌가 합니다.
표절이 없다는 주장 아니냐 하시는데, 독창성 개념을 근대주의적 신화라고 보는 것이 꼭 그런 주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물론 바르뜨(R. Barthes)나 푸꼬(M. Foucault)가 말하는 ‘저자의 죽음’이라든가 모든 글이 이전 것들의 다시쓰기고 짜깁기라는 식의 포스트모더니즘 관점을 연상시키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저는 그런 입장과 다른 것이, 독창성(originality)이라는 것의 위상은 과거에 비해서 훨씬 문제적이지만 창조성(creativity)의 영역은 여전히 문학의 핵심이라고 보거든요. 포스트모더니즘은 창조성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독창성과 창조성을 구분해서 저는 어떤 작가가 자기가 오리진(origin)이라고 주장할 순 없지만 기존의 여러 언어나 자료를 종합하고 창조적으로 변용해내는 힘은 있어야 되고 그게 바로 재능이라고 봐요. 표절이 원래 없다는 말이 아니라 문학에서 무엇을 표절이라고 규정할 것인가 하는 정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문학과사회』 가을호 좌담에서 제가 표절 프레임에 빠져 있다고 김영찬씨 등 여러분이 지적하던데, 워낙이 ‘변론’을 하자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요?(웃음) 제가 주목하는 것은 오히려 표절 프레임의 이면에 일종의 표절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는 겁니다. 독창성에 대한 낭만적 신화와 자본주의사회의 소유권 의식이 혼합되어 있는 형태랄까요. 자본주의사회에서 지적재산권이 강조되면서 언어표현에조차 소유권 의식이 강화되어온 것이 아닌가, 그러다보니 한편으로는 작가란 순결해야지, 독창적이어야지 하는 예술의식 이면에 남의 재산을 훔치면 부도덕한 짓이고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하는 자본주의적 사유물 의식이 있는 거죠. 예술의식과 사적 소유권 의식은 좀 모순적인 것인데, 이번에 표절의혹을 제기한 사람들은 대개 이런 식의 관념에 빠져 있지 그 너머를 보는 시각이 없어요. 사실 언어라는 게 공유되는 속성이 있지 않습니까. 작가마다 자기 표현에 특허를 내면 아마도 문학은 존립하기 힘들 겁니다. 저는 좋은 표현은 공유되어야 한다고 봐요. 뛰어난 작가가 좋은 표현, 인간의 삶을 의미있게 해주는 표현을 만들어냈다면 그 표현은 그 사람 거니까 손대지 마라 할 것이 아니고 후대 작가들한테 활용할 권리를 활짝 열어놓아야 작가들의 표현영역도 넓어지고 사회 전체의 언어의 수준도 높아지는 게 아닐까요? 셰익스피어의 표현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면 영어가 지금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겠죠. 표절 프레임이나 그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이 시대 창작의 문제를 같이 고민해보자는 겁니다.
김남일 다시쓰기와 베껴쓰기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말씀이라면 이해는 하겠는데요, 제 기억으로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 처음 나올 때 이 얘기가 다 있었어요. 이인화씨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문제가 그랬잖아요. 제가 안 읽어봐서 정확히 모르지만, 짜깁기를 하고 페스티시(혼성모방), 뭐 이런 것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거였는데, 그것이 작가의 새로운 독창성으로 남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번 표절사태가 처음 터졌을 때 윤지관 선생님이 그걸 조금 더 문학적이고 깊이있게 다루자고 한 취지는 이해하지만 이 일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단순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얘기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저는 이번 사태에서 도덕적인 측면을 중요시하거든요. 제가 몇번을 읽어봤는데 이게 새롭게 다시쓰기로 간 차원은 분명 아닙니다. 그래서 그 작품이 좋아졌느냐 마느냐까지 제가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고, 해당 부분만 보더라도 표절이 명백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먼저 정리가 된 다음이라야 그다음 문제들이 조금 더 깊이있게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근데 나중에 작가가 인터뷰에서 사과를 표현한 것도 적절하진 않았어요. 작가로서 저는 2010년에 발표한 『천재토끼 차상문』이라는 장편소설 맨 뒤에 주를 얼마나 달았는지 몰라요. 참고문헌도 밝혔구요. 나는 심장이 약해요.(웃음) 지식과 정보의 출처가 점점 아리송해지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지적 재산권과 표현의 자유가 충돌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러고도 특히 한 장면에 대해서는 그게 진짜 내 생각인지 자신할 수 없어서 나중에 혹시 이게 누구 생각인지 밝혀지면 수정하겠다고, 옹졸하지만 그렇게까지 밝혔거든요. 이런 차원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을 단순히 문학적 깊이라는 것으로 덮을 수는 없다고 봐요. 포스트모던은 그다음 문제라는 거죠.
소영현 그 작품이 표절이냐 아니냐도 중요한데 신경숙 작가가 더 문제가 됐던 것은 혐의를 불러일으킨 작품이 많았기 때문이겠죠. 여기서 문제는 표절 여부가 아니라 출처를 밝히지 않은 문학적 영향관계를 어떤 의식을 가지고 다루고 있느냐는 것이고요. 이것은 개인적 윤리나 도덕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지만, 문단의 문화나 구조적 층위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간 출처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인용을 창작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합의나 그에 관한 논의를 한 적이 없잖아요. 이런 채로 표절 시비가 생기면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로 처리하면서 여기까지 왔죠. 실수다, 잘못했다 하는 식으로 고백하거나 사과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왜 이런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논의가 절실한 게 아닌가요. 윤선생님께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그럼에도 여전히 남는 문제는 특정 작가 한 사람을 구한다고 한국문학이 구해지느냐고 질문을 던지면 그렇진 않다는 거죠.
윤지관 이번 사태에 해당 작가나 출판사가 책임이 없지 않고 특히 초기 대응에서 그랬지요. 그것이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기여한 것이 사실이고, 언론이 선정적으로 다루다보니 짚어야 할 것이 제대로 짚어지지 않은 채로 비난과 공분으로 치달린 거죠. 해당 작가나 출판사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공론이 형성된 셈인데, 너무 일방적이고 치우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비단 해당 작가만이 아니라 한국문학 전체의 위상이 심각하게 흔들리지 않았나 합니다. 물론 이런 위기를 하나의 전기로 삼아야 하겠지만, 그걸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라도 그 악영향도 짚어봐야 하지 않나 싶어요. 무엇보다 이번 사태는 독자와 작가 모두에게 상당한 상처나 위축이랄까요, 이런 걸 준 해악이 있다고 봅니다. 문학계 전체가 문제집단이라는 식으로 여론의 지탄을 받은 자체도 타격이지만 더 큰 문제는 독자한테 일어난 일입니다. 작품을 읽어주는 독자들이 신뢰를 갖고 한국문학을 계속 찾게 하면서 그 영역을 넓혀가는 게 우리의 사명인데 이번 과정을 겪으면서 과연 독자들이, 가령 신경숙 작품을 읽은 독자들이 어떤 영향을 받았을지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상습표절 작가인데 당신들이 속은 거다, 이런 식으로 비치니까 독자들의 독서체험을 부정하는 꼴이 된 셈입니다. 동시에 작가들도 상당히 위축됐을 것 같아요. 만연된 표절을 조사해야 하고 검증위원회를 두자는 식으로 논의가 되었는데, 과연 그게 문학창작에 바람직할지는 의문입니다. 신경숙씨에 이어서 박민규 작가도 표절 시비에 휘말렸는데, 작가들로서는 억울할 것 같아요. 창작영역에서 표절의 범주가 그리 확실치도 않고 무슨 기준을 세우기도 힘들고…… 박민규가 그랬듯이 작가는 이런저런 정보나 글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데, 그걸 일일이 조사해서는, 표절이지?라고 들이대기 시작하면 작가들로서는 막막할 듯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말한 표절 이데올로기랄까 이런 걸 적어도 문단에서는 벗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표절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죠. 무엇을 수합하고 가공하든 작가 나름대로 창조성을 발휘해서 새로운 예술세계를 구축해내면 설혹 부분표절이 좀 발견되더라도 그걸 빌미로 그 성취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거죠. 그냥 베끼는 사람하고는 결과에서 차이가 난다고 봅니다. 자기 식으로 소화해서 다시쓰기가 됐든 패러디가 됐든 인유(引喩)가 됐든 어떤 형태로든 남의 것을 활용하는 정당한 사용,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허용폭이 넓어져야 되겠다는 겁니다.
김경연 윤지관 선생님께서 「전설」이 베껴쓰기가 아닌 다시쓰기로 봐야 하는 이런저런 근거를 말씀하셨고, 독창성에 대한 근대주의적 발상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하셨는데, 저도 유일무이한 창조성에 대한 믿음은 근대가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이나 상상력의 사적 소유권을 주장하고 자기 지분을 확보하려는 자본주의적 발상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고요. 하지만 이것이 「전설」을 다시쓰기나 창조적 변용으로 옹호하는 논리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시다시피 다시쓰기는 정전의 권위를 비틀거나 독창성에 대한 근대적 믿음을 공격하려는 전복성을 잠재하고 있고, 그래서 다시쓰기를 하는 작가들은 대상 작품의 출처를 밝히거나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의 정전을 택해서 그 의도성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요. 그런데 일본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제가 알기로 미시마 유끼오의 「우국」은 적어도 신경숙이 「전설」을 쓸 당시의 한국에서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이 아니었죠.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든 「우국」에 대한 언급 없이 원작을 인용하거나 참조한 「전설」을 과연 윤지관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다시쓰기로 볼 수 있는지, 심지어 창조적 변용에 성공한 경우라는 평가가 가능한지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김남일 예를 들어서 「흥부전」을 활용한다 했을 때 작가들이 나름의 방식이 있어요. 어떤 작가는 맨 앞에 편집자 주 형식으로 자기가 마치 새로운 편집자인 것처럼 해서 능청스럽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인용과 패러디를 하거든요. 나 스스로도 내가 이제부터 어떤 작가의 작품을 다시쓰기 하겠다고 하면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지 드러낼 수 있어요. 이것이 꼭 작가들을 위축시키고 독자를 위축시키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이번 사태는 일시적인 충격이죠. 작가들한테도 자기검열을 하게 하는 등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과정을 잘 거치면서 논의가 생산적으로 이루어지면 작가도 자기 스타일에서 약간의 노력, 예를 들어 그런 부분에 대해 한줄만 표시하면 되거든요. 여러가지 다양한 방식을 써서 문제를 능히 해결해나갈 수 있다고 봐요. 결국 일시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이 미치겠지만 이것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끌고 갈 여지가 많이 있다는 거죠.
윤지관 그러길 바라야지요. 그래서 이 현상의 긍정적인 측면과 우려하고 극복해야 될 측면을 모두 짚어야 된다는 얘기고요. 문학의 공공성 문제도 이런 각도에서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문학출판의 공공성과 상업성, 그리고 창비
강경석 마침 말이 나온 김에 화제를 옮겨보겠습니다. 문학의 공공성이 상업논리, 자본논리에 침윤되었다는 얘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진단해보죠. 어느 분이 먼저 말씀해주실까요?
소영현 공공성과 상업성 논의에 앞서, 우선 표절 시비는 어떻게 생각하면 반복적으로 있어왔던 것이기도 한데 왜 이번에 그런 영향력을 발휘했는가가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사회의 문제도 있겠지요. 사회 지도층의 부정적인 면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 그리고 지금 ‘헬조선’이라고 하는, 살기 힘든 한국사회에 차오르는 불만, 이런 것들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지만, 창비의 첫 보도자료가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까요. 또 문단에도 그런 문제제기가 폭발력을 갖게 하는 기름성분 같은 게 분명히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주목할 점은 문학동네보다 창비에 대해 훨씬 많은 사람들이 격분했다는 거죠. 창비가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반응은 말할 것도 없고 동일한 논의지평에 있지 않은 듯한 반응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이 창비에 거는 기대를 스스로 배반한 것처럼 보인 측면이 있었던 건데요. 창비에 대한 격분은 창비에 걸었던 공공성에 대한 기대에 배반당한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죠.
문학동네에 대해서는 상업성을 표방한 출판사라는 점에서 공공성을 요청하기 어렵다고들 말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일단 출판사의 공공성과 출판의 공공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삼성 같은 기업에도 기업 운용 원리의 공공성을 물을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동네에도 그런 요구가 가능하다는 거죠. 이것은 창비나 문학과지성사 같은 한국문단의 주요 출판사 모두에 해당하는 것일 텐데요. 기업으로서의 출판사가 갖추어야 할 공공성에 대한 질문, 가령 노조 존재 여부, 경영의 투명성 여부 등을 물을 수 있을 것이고요. 아울러 출판의 공공성 차원에서 문학장의 건강성을 위해 어떤 노력과 기여를 했는가를 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해를 줄이는 발언이 되어야 하겠지만 문학동네가 한국문단의 큰 자산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두고 말씀드리자면, 문학동네의 성장은 그 동력이자 지반으로서 신자유주의 확산과 긴밀한 상관성을 갖는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본의 화신이라는 말이 아니라 문학과 출판의 성격이 자유방임적으로, 문학성을 규정하지 않고 개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본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게 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죠. 창비를 포함해서 이러한 점을 두고 신자유주의에 의해 변화된 출판문화나 출간경향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김경연 아시다시피 창비, 문동, 문지에 대한 문학권력 비판에서 꾸준히 제기되는 것이 주례사 비평의 문제예요. 문동과 같은 급의 출판권력으로 지목되는 상황이 창비로서는 억울한 측면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낙청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창비는 ‘창비식 담론’을 생산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 담론에 부합하는 작품을 발굴하려는 나름의 노력도 했다고 봐요. 그런데 사실 90년대 이후 적어도 문학만큼은 창비, 문동, 문지의 색깔이라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고, 창비가 어떤 식으로든 주례사 비평을 생산하는 데 기여해왔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봅니다.
저는 문학의 당파성은 오히려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당파성은 이념적 지향이 분명하고 선명한 자기 색깔을 보유한다는 것이잖아요. 창비나 문지, 문동이 자신의 담론지향성에 부합하는 작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거나 가치평가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90년대 들어 창비나 문지는 메이저 출판권력의 위치를 점하면서 그들 각자의 문학적 색깔이라는 것을 사실상 상실했죠. 신경숙은 90년대 이후 창비나 문지의 문학적 정체성 실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작가가 아닐까 해요. 아시다시피 90년대 들어 문지가 『풍금이 있던 자리』로 눈여겨보기 시작했던 신경숙을 문동이 『외딴방』으로 본격적인 스타덤에 올렸고, 다시 창비가 이 신예에게 만해문학상을 수여하면서 신경숙은 그야말로 90년대 문학사가 인준한 정전 작가의 위치로 등극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창비, 문동, 문지가 문학동인 단체도 아니고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출판사이기도 한 만큼 작가를 발굴하고 좋은 작품을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스타 작가로 육성하는 일이 잘못은 아니죠. 신경숙의 문학 역시 90년대 문학의 일정한 경향을 대표할 만한 특장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태생이 90년대적인 문동은 차치하고, 신경숙을 통해 90년대 이후 문학의 생존 노하우를 터득한 창비나 문지가 스타시스템을 활용하는 데 지나치게 익숙해졌다는 겁니다.
윤지관 문학저널이 원래 역사적으로 공공영역의 주요 부분으로 탄생했고 우리 사회에서도 그런 역할을 해왔지 않습니까. 육칠십년대 이래 계간지들이 특히 그런 공론의 장 역할을 했어요. 공론이라는 것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담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데, 그만큼 시장과 국가의 논리에 휩쓸리지 않는 속성이 있죠. 한편으로 그런 여론형성 자체가 어떤 힘을 동반하게 되는 면도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저널에는 늘 공론형성과 권력이라는 양면이 공존한다고 봅니다. 저널이 공공성을 가지려면 그 힘을 잘 행사해서 진정한 공론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부단하게 노력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번 사태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공론장이 얼마나 흐트러져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라고 봅니다. 공론장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언론이지 않습니까. 언론이 사실 여론형성을 주도하죠. 문학저널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광범하고 힘이 있고요. 이번 경우 중요 문예지들이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해서 표절작가를 옹호하고 상업주의에 매몰되었다는 식의 비판이 비등했는데, 물론 문단 내부의 문학권력비판론자들이 주도한 것이지만 언론이라는 공론장의 선정성이 여기에 가세해서 문제를 악화시켰어요. 자유로운 의견교환과 토의라는 공론의 성격이 완전히 배제된, 사과요구와 비난 일색이었으니까요. 공론의 이름을 하고 있었지만 공론이 아닌 흑백단순논리가 지배했어요. 예컨대 언론에서 창비와 문학동네를 비교해서 창비는 분명하게 사과 안하니 나쁘고 문학동네는 사과하고 개전의 정을 보이니 좋다는 식의 논조가 지배했는데 사실 그런 단순논리와 선악이분법이 어디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문학동네가 인정한 것도 문제의 부분이 결과적 표절이라는 정도고 그 점에서는 창비도 마찬가지거든요. 어쨌든 창비에 그렇게 많은 비판이 가해진 것은 초기대응에서 창비가 잘못을 한 탓도 있겠지만, 공론장의 왜곡이 근본원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문단에서조차 창비에 자꾸 비판이 쏠린 밑바닥에는 역시 창비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던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문학저널의 공공적인 역할을 그래도 창비가 주도적으로 담당해왔는데 그 창비에서 이런 미흡한 대응을 한 데 대한 실망감이 많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김남일 사실 문학동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었을 거예요. 문학동네는 처음부터 문학적 다양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건 출판사였잖아요. 신자유주의 시장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지요. 이런 점에서는 전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하고 똑같아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은 거예요. 오대양 육대주 누비는 것처럼 열심히 일하잖아요. 행여 문학동네에 문제가 있다면 너무 열심히 일했다는 거예요. 작가들을 정말 열심히 만나서 술도 사주고 계약도 잘했어요. 놀라울 정도였죠. 작가들 입장에서 너무 기분 좋죠. 나도 받았거든요. 처음 시작 때부터 예전의 다른 출판사나 잡지에서 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계약도 선뜻 해주고 아예 다음 작품도 계약하자는 식으로 미래를 보장해주는 시스템이 새롭게 등장한 거예요. 90년대 후반부터 신자유주의가 왔잖아요. 과거 진영논리에 갇혀 있던 문지와 창비는 그사이에 다 깨져나가는 거죠. 그러면서 문학동네가 작가들을 더 입도선매 할 수 있게 됐고요. 이게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작가들은 거기 포섭될 수밖에 없었고 문학동네로서도 상업출판사로서 당연히 다양성, 그러니까 문지와 창비 사이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자부심을 느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창비의 대응이죠. 창비는 그래도 창비였잖아요. 시쳇말로 하면 ‘가오’가 있어야지요. 예를 들어서 문학에서 더이상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면 퇴각을 하더라도 위엄있게 퇴각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거든요. 90년대에 백낙청 선생님이,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이 염상섭의 『삼대』, 조세희의 ‘난쏘공’이랑 벽초의 『임꺽정』까지 뛰어넘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하셨다는데 이걸 내가 알았으면 가만 안 있었을 거예요.(웃음) 근데 그때는 몰랐어요. 신경숙씨가 만해문학상 받았을 때는 좀 충격이었지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결정을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저 역시 『외딴방』을 굉장히 잘 봤거든요. 우리가 가졌던 거의 꼴통적인 딱딱함, 처음을 알면 끝이 보이는 노동소설의 답답함을 일거에 깨뜨리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단 말이에요. 그 부분은 인정해요. 그렇다고 해서 이제까지의 모든 노동문학을 신경숙 문학이 다 무화시킨다든지 한다는 식이면 안되겠죠. 난 『임꺽정』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우리 서사문학의 어떤 자랑이라고도 보는데…… ‘난쏘공’이나 『삼대』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측면에서는 백선생님의 비교 진단이 심했다는 거죠. 이런 과정에서 바깥에서는 창비가 예전 창비가 아니라는 식으로 오해를 받는, 특히 문학 분야에서 그런 의견이 많이 생겼다고 봐요.
윤지관 표절 논란을 계기로 오히려 역설적으로 신경숙 문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한국문학의 방향이나 성격을 둘러싼 논의와 직결되는 문제가 된 것 같아요. 역시 중요한 것은 문학저널의 공공성, 특히 창비의 대응을 보는 시각일 텐데, 90년대 상황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90년대는 군사독재가 끝나고 문민정부가 수립된 시기 아닙니까? 공론장이 새롭게 열리고 형성되던 시점이기도 하고요. 그 무렵에 『노둣돌』 『노동해방문학』 같은 진보적인 새 매체가 창간되었고 『실천문학』과 『창작과비평』도 복간됐죠. 세계적으로는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지구화가 대두된 시점이라서 말하자면 일종의 세계사적인 변곡점이었는데, 이때 새로 등장했던 진보적인 저널들은 모두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대신 훨씬 더 많은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저널이 대세를 점하게 됐죠. 문학 공론장에서의 변화가 그렇게 나타나면서 문단에서 ‘신세대 문학론’이니 90년대 문학을 내세우고, 이전의 민중·민족적인 문학의 억압성을 비판하는 소리가 강해졌어요. 사회를 바꾼 힘이 오히려 억압적인 권력으로 치부되는 이런 담론상의 변화에 부응해서 등장하고 성공한 곳이 바로 문학동네입니다. 진보적인 문학매체는 『창비』와 『실천문학』 정도만 남았을 정도로 문학지형이 변한 거죠.
창비가 왜 과거처럼 못하느냐, 다른 저널하고 뭐가 다르냐 하는 불만도 나올 수 있겠습니다. 기업으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출판환경이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그렇지만 또 90년대 이후의 역사적 상황이나 문학지형상의 변화도 고려해야 하지 않나 합니다. 당시 포스트모더니즘이 도입되면서 다원주의가 부각되고 실제로 다양한 목소리가 쏟아지는 가운데서 창비는 우리 사회에서 ‘문화의 중심’ ‘담론의 중심’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던 거죠. 그 성과는 따져봐야겠지만, 이후에 분단체제론, 동아시아론, 87년체제론 등의 담론을 제시하면서 문학 논의를 사회변혁의 과제와 맺어가는 노선을 지켜온 것은 사실 아닙니까? 이번에 대표적인 문학권력으로 같이 꼽힌 문학동네하고는 분명히 다른, 말하자면 비평의 공공성을 살려나가려고 한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문학동네는 처음부터 어떤 이념도 내세우지 않고 그걸 다 포괄하겠다, 문학작품의 성취만 보겠다는 입장을 표명했기 때문에 훨씬 자유로웠죠. 말하자면 좋은 작가들이 찾아오는 문학의 동네를 만들겠다는 건데, 나름 취지는 좋지만, 그 순간 한계가 생기는 겁니다. 문학의 공공성의 면에서 보면 작품성을 통해서 도달하는 근원적인 공공성이라면 몰라도 사회변화에 실천적으로 개입하고 그것을 담론화해내고 지향점을 세우는 과제와는 거리를 두면서 성장한 집단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작가를 발굴해내고 키워내는 역할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밖에 없죠. 그것이 잘 풀리면 좋은 작가들의 산실 역할을 할 수 있고 실제로 그랬기도 하기 때문에 저는 상업주의라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걸 지속시키는 메커니즘이란 것이, 예컨대 하루끼의 신작소설을 10억씩 선인세를 주고 끌어온다거나 하는 식의…… 그런 투자 혹은 투기도 하는 가운데서 상업적으로 유지할 수밖에 없는 곤경이 있거든요. 사회적인 공론 역할이 미약해지다보니까 문학 내부로 영역이 좁혀질 수밖에 없죠. 바깥과의 교섭을 통해서 비롯되는, 소영현 선생이 주장하는 형태의 문학의 공공성에 얼마나 부합하냐 했을 때 그 부분에서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소영현 한국문학과 문학장을 키워온 창비나 문학동네의 기여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고요. 그렇다고 주요 출판사들만 한국문학을 키웠다고 말하는 것도 곤란하겠죠. 창비만 두고 말씀드리더라도, 산업의 차원에서도 문화의 차원에서도 그 기여를 고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데 제가 지적하고 싶은 건, 쭉 나름대로 문학잡지의 공공성 또는 시대가 요청하는 공공성에 호응해왔는데 그 태도가 언젠가부터 경화(硬化)된 게 아닌가 싶어요. 시대적 공공성의 요청에 응답하는 자세가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는 동력이었는데 어느 순간,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지도적인, 그러니까 잘 모르는 일반 독자대중을 위해서 이런 담론을 만들어서 이렇게 펼치겠다 하는……
김남일 윤지관 선생님이 창비처럼 그렇게 열심히 담론을 생산해온 저널이 어디 있느냐고 하시는데, 그건 당연합니다만, 그 담론을 생산하고 공유하는 방식이 말하자면 굉장히 꼰대적이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건방진 말씀이지만, 제가 문단에서 30년간 야전에서 살아온 사람인데 창비의 새로운 편집진을 몰라요. 만난 적이 없어요. 그러면 안돼요. 같이 어울려야 되거든요. 물론 그분들이 작품을 선별하고 평가하는 데 능력이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한 사람의 작가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밑바닥에서, 가령 문학동네 대표나 편집진처럼 함께 술 먹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단 말이에요. 예전에는 창비 문 앞에 항상 고(故) 박영근 시인이 ‘대기’하고 있으면 김이구씨라든지 이시영 선생이 보고는 들어와, 술 먹자 이렇게 했거든요. 지금도 똑같이 그런 방법으로 하라는 건 아니에요. 세월이 달라졌잖아요. 그럼에도 문학이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 가르치려고만 하는 자세는 문제가 있겠죠. 우리는 담론을 만든다, 너희는 따르라, 이렇게 느껴졌다는 거예요. 물론 좋은 작품을 선정하는 건 아주 중요해요. 기본이죠. 선택과 배제는 당연히 있어야 하지요. 그러면서도 함께 가는 방법이 있을 텐데 특히 21세기에 들어와서 창비는 이 점에서 좀 소홀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언젠가 김영하 소설가가 만해문학상을 받은 그해에 김정환 시인에게 백석문학상이 돌아갔는데, 그게 아마 김시인이 받은 첫 상이라는 점에서 함께 기뻐하기보다 오히려 우리 동료들에게는, 이제 상 줬으니 군말 없기다, 라는 식으로 마지막으로 입막음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뭐 어쩌겠어요. 지나간 얘기지만, 창비가 권위가 아니라 권력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게 아마 그 무렵부터일 겁니다.
강경석 아까 김남일 선생님은 백낙청 선생이 『외딴방』을 두고 염상섭의 『삼대』, 조세희의 ‘난쏘공’, 벽초의 『임꺽정』까지 ‘뛰어넘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했다고 하셨는데 제가 읽은 바로는 그런 정도의 주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영하와 김정환에게 같은 해에 상을 준 것이 의문스러웠다거나 실제로 창비가 그간 문학생산의 현장과 소통이 부족했다는 비판은 여러가지 다른 문제와 함께 내부에서도 제기되었지요. 그 외에도 민주화 시기의 담론지형 변화에 따른 창비식 대응의 적실성 여부를 비롯해서 ‘소수 작가의 스타 만들기’가 결과적으로 초래한 문제들을 두루 지적해주셨고, 전체 사회운동의 이완 속에서 창비가 문학현장과의 접점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피력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민중적 현실이랄까요, 삶의 현장은 날로 어려워져가는데 창비를 포함한 문학적 실천, 운동성 이런 부분들은 전만 못하다는 말씀으로 압축할 수 있겠습니다. 공론장 자체가 흐트러진 사정도 여기에 한몫했겠지요. 주로 창비의 사례를 들어 문학출판에 있어서의 공공성 문제를 진단해주셨는데 항간에 많이 얘기된 것처럼 상업주의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보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운동성, 현장성의 약화나 비평의 역할에 대한 견해가 주로 거론된 것 같은데 문학권력 문제도 좀 짚어보죠.
김경연 창비나 문지, 문동 같은 메이저 출판권력이 키우고 후원하려는 작가나 작품에 대한 서평 청탁이 들어올 때 어떤 배짱 좋은 평론가가 속된 말로 까고 싶어도 제대로 깔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양심은 팔지 못하니 아주 에둘러 비판하거나 성실하지만 무의미한 ‘작품해설’ 정도의 비평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거죠. 주례사 비평이 꼭 대놓고 상찬하는 방식만은 아니잖아요. 외려 상찬이나 극찬은 나이브한 방식일 거예요. 비평가와 출판사의 영리한 타협인 해설비평쯤으로 적당한 광고효과를 유발하는 것이 대다수 주례사 비평의 형식이 아닐까요? 안타깝지만 이러한 상업주의의 혐의로부터 ‘저항의 보루’였던 창비도 면제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창비가 90년대 이후 변화된 물적 조건들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면서 문학의 복수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상당히 약화됐다고 생각해요. 다시 말해 주류 문학의 흐름과는 거리가 있는 비주류적인 문학, 혹은 주변부 문학을 적극 발굴하고 조명하려는 의지는 점점 더 희박해지는 상황이죠. 물론 창비는 문동이나 문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 부분에 대한 실천적 노력을 해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또 창비의 그런 노력을 알기 때문에 더욱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역문학과 관련해 말씀드리더라도, 창비는 다른 메이저 매체가 전혀 무관심한 지역 작가들의 작품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온 건 사실이에요. 가령 부산지역에서 주로 활동해온 최영철 시인이 백석문학상을 받고 조갑상 소설가가 『밤의 눈』으로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창비의 이러한 의지가 동반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최영철 시인이나 조갑상 소설가는 최량의 역량을 가진 작가이고 수상작 역시 충분히 수상할 만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서울에 소속되지 않은 작가들은 아예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고 유행하는 문학 흐름을 따라가지 않는 작품은 일단 배제하는 서울집중적이고 유행추수적인 문단 풍토에서 아무리 우수한 작가, 작품이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거죠. 그래서 창비의 역할에 더더욱 기대가 큰지 모르겠습니다. 몇몇 중견작가들뿐 아니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에 대한 고른 관심을 가지고 기량 있는 작가들에게 지면을 제공하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지역의 문학을 위한 자선행위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지역문학이 튼실해지는 것이 한국문학이 중심과 주변의 위계를 허물고 단수성과 폐쇄성을 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지역문학뿐 아니라 주류와 거리를 둔 주변부 문학들이 잠재하고 있는 가능성이기도 할 텐데, 이 잠재적 가능성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조력하고 후원하는 것 역시 매체가 공공성을 보유하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윤지관 중심의 역설이랄까 하는 게 있는 거죠. 창비가 중심을 구축하겠다는 뜻도 표명하고 실천도 한 셈인데, 동시에 글쓰기 기율, 문학뿐 아니라 어떤 글이든 글쓰기 기율을 강조하기도 했어요. 창비의 기준이 높다고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필요한 부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무슨 장벽으로 여겨지기 십상인 면도 있을 겁니다. 중심과 주변 문제가 그렇듯이, 중심을 자임하려면 오히려 주변과 더욱 활발하게 소통해야 하는데, 그것이 미진했던 것이 이번 사태로 드러나게 된 셈이죠. 그렇지만 한편으로 다른 저널들의 노력도 중요한데 그게 잘 안되고 있는 것도 문젭니다. 저도 『실천문학』 편집위원을 오래 했지만 어려움이 많아요. 다른 진보매체들이 대부분 사라진 가운데 『실천문학』이 지금 20년 가까이 지탱하고 있는 것도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과연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느냐 자문해봅니다. 애초부터 실천문학은 민중성을 표방했고 문학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했죠. 90년대 들어서 그런 걸 억압으로 보는 분위기가 문단에 형성되면서 어려움을 겪은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실천문학의 역할이 있으니까요. 『창작과비평』은 범박하게 말해 시민적인 영역과 민중적인 영역을 결합시켜서 사고하려고 하는 저널이라고 할 수 있고, 현장성보다는 전체 사회의 방향을 중시하고 시민사회가 획득한 요소들도 보듬고 나가야 된다는, 중도개혁 내지 진보적인 관점에서 문학담론을 형성하고 작품도 읽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90년대 후반에 가서 『외딴방』을 높이 평가한 것도 시민적인, 개인적인, 감각적인 체험과 민중적인 현실을 접목시키려고 하는 뛰어난 시도로 보았기 때문인데, 실천문학은 다르지 않습니까. 민중성과 현장성에 토대를 두고 있고 르뽀르따주 같은 걸 많이 개발하려 했는데 이후 그 역할을 얼마나 견결하게 해왔느냐? 전 못했다고 보거든요. 저 자신도 책임이 적지 않지만 말이죠. 이번 사태를 겪는 과정에서 창비 아닌 다른 매체들에 주목하자는 소리도 많이 나왔는데, 그렇습니다. 창비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고 다른 저널들도 살아나서 각자의 역할을 해야 창비도 오히려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김남일 실천문학에 대한 비판은 정당합니다. 창비를 제가 비판하지만 실천문학은 당당하냐, 그렇지 않거든요. 실천문학과 창비가, 예를 들어서 채광석 형님이 민중적 민족문학론을 내세우고 백낙청 선생님이 민족문학론 또는 시민문학론을 내세우면서 창조적 긴장관계가 유지된 게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까지였거든요. 이게 신자유주의 국면 속에서 둘 다 자기 길 찾기에 일정하게 실패한 부분이 있죠. 실천문학이 조금 더 강고하게 능력을 발휘했으면 당연히 창비도 긴장을 해서 더 나아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노력은 했지만 굉장히 어려웠다는 걸 말씀드리고요. 근데 그 과정에서 제가 얘기할 수 있는 건, 어느 집단이나 그룹이 다른 쪽에 대해서 이른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잖아요. 창비가 담론을 계속 생산한다고 했는데 사실 담론은 곳곳에 널려 있다고 생각해요. 한군데서, 중앙에서 만들어서 일사분란하게 베풀어주는 게 아니고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새롭게 형성되어야 된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창비가 실수했던 점은, 이왕 말 나온 김에 하면, 제3세계문학론을 포기한 거예요. 창비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했던 게 ‘제3세계총서’였는데 어느 순간 아마 장사가 안된다고 포기해버렸어요. 돈이 안되더라도 그걸 버텨나가주면 창비가 스스로 얘기했던 제3세계문학론, 중심과 주변의 창조적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뒤늦게 방현석이 『아시아』를 하고 김재용이 『지구적 세계문학』을 하고 고명철이 『바리마』를 하면서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지만,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창비가 주도성을 잃은 것이죠.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받아들이고 서로 대화하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노력이 부족했지 않나 싶어요.
소영현 말씀들 들으면서 공감하면서도, 창비나 실천문학이 지금껏 잘 못한 점들을 제대로 분석하고 그걸 극복하면 한국문학이 갑자기 활성화되나? 문학잡지가 뭘 잘하고 못하고가 지금의 사태에 직접적 해결책을 제공해주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종이잡지 수요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문학의 공공성, 출판 혹은 문단의 공공성이 종이로 된 문학잡지의 문제로 축소될 수는 없겠다 싶고요, 오히려 그런 미망에서 우리가 벗어나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문학이 지금 처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로 논의가 모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말씀들이 있었는데, 스타 작가에 대해 저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저는 그런 작가도 필요하다고 보거든요. 예를 들면 무라까미 하루끼나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한국에서도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작가의 발굴을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고 보고요. 동시에 김남일 선생님이 말씀하신 제3세계문학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텐데, 창비의 경우에 그 중간 어디쯤에 서 있으면서 양자를 다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기도 하고, 이런 상황이 창비가 전면에 내세우는 담론들과는 모순적이거나 혹은 기이하게 공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시대의 비평, 무엇이 문제인가
강경석 창비의 숙제를 비롯해 토론거리가 굉장히 많이 나왔습니다만 갈 길이 멉니다.(웃음) 이쯤에서 다른 화제를 논의해볼까 싶은데요. 앞서 창비에 대한 평가 속에서도 담론중심성 같은 얘기가 거론되었고 90년대 문학 또는 문학지형에 대한 인식 문제도 나왔던 만큼 비평 얘기를 해보죠. 이미 제기된 많은 문제가 비롯된 곳도 비평이고 아마도 그것을 극복할 거처도 비평일 듯합니다.
소영현 문학지형이나 문학장, 비평장, 비평의 존재론 등을 메타적으로 지적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형식의 비평이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번 사태의 원인 중 하나가 비평의 무능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그런가 싶어요. 평론가들은 각자 나름대로 최선의 비평작업을 하는데, 그럼에도 왜 비평의 무능이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검토해봐야겠죠. 저는 그게 비평의 상이 너무 획일화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인데 이게 역사적 맥락과 그것이 만들어낸 구조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지금 비평이라고 생각하는 건 육칠십년대 만들어진 형식이고 그게 지금 완미(完美)한 형태를 이룬 건데요. 이 역사는 『창작과비평』의 50년, 『문학과지성』-『문학과사회』의 40년에 달하는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죠. 이 과정에서 형성된 비평을 유일하고도 가장 고급한 형식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고착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육칠십년대 당시에 김현 선생님이나 백낙청 선생님은 문학비평이라는 게 굉장히 위태위태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회와 문학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게 비평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지금 우리는 비평을 곧 문학비평으로 여기고, 문학을 섬세하게 잘 읽어내고 이론으로 재기술할 때 좋은 비평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실은 어떻게 보자면 이건 서평이잖아요. 현재 문학장에서 전문 독자만을 위한 고급한 의미의 서평을 문학비평으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비평의 서평화 자체가 문제는 아닐 수 있지만, 그 작업만 하더라도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이냐에 대한 평가기준이 필요한 거고,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 시대가 요청하는 좋은 문학이나 문학사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고, 이런 개별작품에 대한 해설을 한국문학의 문학성의 특질로 이론화할 수 있는 지점이 뭔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죠. 그러니까 비평이라는 영역 안에 이론도 있고 문학사 연구도 있고 해설 혹은 서평도 있는데 지금 우리는 서평 형식에만 집중하고 있진 않나 싶습니다. 구조적으로 이런 비평만을 요구하는 문단의 상황, 출판문화의 결과이기도 하겠지만요. 말씀드린 육칠십년대만 하더라도 사회와 문학 사이에서 비평 영역을 만들어낼 때는 외국문학 전공자의 참여가 두드러졌거든요.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국문학 전공자들만 문학연구와 비평작업을 하게 됐죠. 비평의 쇄신을 위해 외국문학 전공자들과의 협업에 대한 상상이 좀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연구와 비평이 공존할 수 없다는 듯이 논의되는 것도 여전히 문제입니다. 양쪽이 넓은 의미의 비평 범주 내부의 영역을 나눠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총괄적 시선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윤지관 원래 비평이란 것이 문학적 감각이나 창조적인 성취를 토대로 삶과 사회에 대해서, 또 그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서 발언하는 것, 말하자면 문학을 공적인 영역에 연결해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비평의 본령은 그런 것인데 방금 소영현 선생이 얘기한 것처럼, 과연 우리 비평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느냐 물어보아야 할 것 같아요. 해설 비평이니 주례사 비평이니 하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고요. 저는 문학에 해설도 필요하고 심지어 주례사도 필요할 때가 있다고는 보지만 그런 유형이 대종을 이룬다면 그게 곧 비평의 위기, 비평의 빈곤이 아니겠어요? 지금 상황이 그런 것 같습니다. 해설이 강해지면서 비평이 약해진 거죠. 그러다보니 작품에 대한 가치평가는 기피하고 듣기 좋은 소리로 의미를 사주는 식의 글들이 비평의 이름을 하고 나오는 겁니다. 최근에 쏟아진 비난에서 문학권력이 문학주의에 빠졌다고도 하고 상업주의에 빠졌다고도 하는데, 얼핏 모순으로 들리지만, 잘 팔리는 작가를 문학적으로 높이 치는 식으로 비평이 공적인 성격을 망실했다는 것이 그 요점 같습니다. 그런 면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문학적 성취를 강조한다고 해서 비평이 사회적이거나 공적인 역할에서 떠나는 것은 아니고, 문학권력으로 지칭되는 곳들도 차이가 있잖습니까? 창비 경우는 사회의 변화방향에 대한 모색을 문학 읽기나 평가를 통한 어떤 인문적 인식과 결합하려고 해온 셈인데, 문학주의라고 일괄 비판해버리면 그런 차이를 볼 수 없어요. 예컨대 과거 창비-문지 대립구도가 형성되던 시기와는 달리 『문학과사회』만 하더라도 사실상 좁은 의미의 문학주의라고 해도 무방한 쪽으로 후퇴한 듯 보입니다. 비단 문지 그룹만이 아니라 평론이 공적 역할을 할 수 있는 회로가 막혀 있고,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구조적으로도 문학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나 한국문학 전공자들이 평론을 무슨 학자의 자격요건처럼 쓰는 풍토도 있어서 비평 본래의 의식을 가지고, 문학지식인으로서 공적 영역에 개입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임하는 경우가 점점 더 줄어드는 그런 비평의 빈곤이 깊어지고 있지 않은가 합니다.
소영현 문학 개념도 사실 계속 재구성되는 거잖아요. 문학이란 어떻게 생각하면 텍스트화된 사회 혹은 현실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시대현실의 변화는 문학 개념의 변화를 이끌게 되는 것이죠. 더구나 점차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경계 설정이 어려워지고 있어요. 영화나 드라마, 만화, 광고 연구 같은 것이 문학연구장 안으로 다 들어오고 있기도 하구요. 서사든 뭐든 간에 문학 범주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비평만 유독 이전의 문학 개념에 한정된 것을 작업의 대상으로 삼는 건 곤란하다는 생각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문학을 주의화하는 게 문제라고 보는 편이고요. 서평의 경우, 저는 해설과 함께 최근 창간된 문예지 『악스트』가 하는 작업이 의미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서평이 개인의 감성 토로에 그쳐서는 곤란하다고 봐요. 독자가 읽을 만한 서평이 되어야 한다는 건데 우리한테 서평 형식 혹은 적당한 해설 형식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상까지 만들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마치 특정 비평이 유일한 비평의 상인 것처럼 생각하는 건 문제고, 근본적으로는 바뀌고 있는 현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형식의 획일화와 경화가 지속되고 있는 것도 문제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어요.
강경석 소영현 선생님은 그러니까 비평이 공적 영역과의 연결이 부실해진 것이 오늘날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데는 공감을 하시면서, 보태시는 건 비평의 양식이나 형식이 너무 틀에 박혀 있어서 더 많은 새로운 형식이나 스타일이 창출되어야 한다는 거죠?
소영현 그렇죠. 누구를 위해 쓰느냐는 문제를 의식하면서 고민할 필요가 있는 거죠.
윤지관 전 솔직히 각주 너무 많이 달린 비평은 마음에 안 들어요.(웃음) 아무튼 비평은 문학작품의 성취를 읽어내고 그런 읽기를 통한 생생한 인식을 사회로 확산해가는 작업인데, 그러려면 평론 나름의 문체도 중요하죠. 지금은 평론들이 무슨 학술논문과 흡사하게 입증하고 증거 대고 하는 식으로 너무 가 있어서 비평의 창의적인 요소가 공적 영역에서 작용하는 부분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아요.
강경석 지나친 전문화 경향 이런 것도 문제인 것 같다?
소영현 전문화 경향을 포함해서 구조적으로 지금의 비평 형식을 지속하면서 사회비평을 불가능하게 하는 출판문화가 있다고 생각해요. 판단하고 평가하는 비평에 대한 거부감이 비평장에 있기도 하지만, 지금의 계간지 시스템은 평론가에게 자유로운 의견을 표현하기 어렵게 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분량이나 글쓰기 방식 등 형식적인 면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측면이 있어요. 평론가들이 지속적으로 출간되는 소설을 따라 읽으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일만으로도 벅찬 경우가 많고. 그러다보니 문단의 구조적 문제를 사유하기 어려워지게 되는 거죠. 아니 사실 계간지 시스템에 매몰됐다가 어느 순간 모두가 구조적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는데, 그런 문제제기를 외화하기가 쉽지 않기도 하죠. 여담인데, 저한테 비평과 한국문학을 그렇게 비판하면서 글쓰기를 왜 지속하느냐는 질문을 많이들 하시는데요. 이건 문학에 대한 개인의 환멸이 아니라 이 장에 대한 애정이라고 해야 할 거 같고, 역설적으로 이런 비판을 할 수 없는 장이 지금 되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아요.
강경석 지금 이 자리가 바로 그런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장입니다. 김경연 선생님 말씀 듣고 유일한 창작자인 김남일 선생님께 총정리를 맡기겠습니다.(웃음)
김경연 비평의 공공성에 대한 얘기는 앞에서 드린 것 같아 최근 ‘비평의 무능’에 대한 좀 다른 얘기를 해볼까 해요. 『오늘의문예비평』 좌담에서도 얘기가 나왔지만 90년대 이후 문학 창작 시스템은 이전과는 확실히 다르잖아요. 이미 많은 분들이 지적했듯이, 가령 80년대가 현장감각이 충만한 역사와 경험에 의한 글쓰기였다면 90년대 이후는 대개 독서와 자료수집을 통한 글쓰기, 문예창작과에서 조련되고 학습된 글쓰기가 주류가 되었죠. 이게 뭐가 문제인가 싶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문창과적 글쓰기가 지배적인 경향이 되면서 한국문학이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협소해지는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일반적으로 문창과에서는 교수진의 성향에 따라 범례가 되는 문학이 결정되거나 문단의 주류로 부상한 몇몇 작가들의 주제, 스타일을 지속적으로 연마하지 않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래야 신춘문예나 공모전에 먹히기 때문이겠죠. 그러니 요즘 신예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보면 가령 박민규류, 김애란류, 김연수류, 황정은류 등으로 일정하게 분류할 수 있을 만큼 스타일이나 내용이 서로 유사하고 천편일률적인 경향이 있다고 봐요.
그런데 90년대 이후의 비평 역시 창작과는 또다른 획일화 현상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이념지향적이고 가치평가가 분명했던 80년대 비평과는 달리, 90년대 이후 비평은 가치판단이 부재하고 작품에 대한 정교한 분석을 천착하는 해석비평 혹은 해설비평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시대적 상황 변화에 맞춤한 비평의 변태(變態)가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창작과 마찬가지로 ‘쏠림’인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해석의 기능이 강화된 90년대 이후 비평은 난해한 서구이론들을 학습하고 이를 해석의 틀로 가져오는 이론주의적 경향에 쏠렸죠. 그러니 90년대 이후 해독이 쉽지 않은 암호 같은 비평이 양산되고, 현실과 삼투하지 못하고 독자와 교감하지 못하는 자폐적인 비평이 너무 많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론에 입각한 비평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이론이 마치 텍스트를 점령해버린 것 같은 비평이 문제라는 거죠. 80년대까지야 비평이 문학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되었지만 90년대 이후는 다르지 않습니까. 비평은 작품을 선택하는 허다한 기준 중에 하나일 뿐이고 게다가 대중의 관심 밖에 있는 기준에 불과한 형편이죠. 거기에 난해하기까지 하니 수수께끼 같은 비평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은 갈수록 심화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비평이 대중의 눈높이에 스스로를 맞출 필요는 없겠지만, 독자들이 범접할 수 없는 아카데믹한 비평 안에서 자폐를 유희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요즘 비평은 논문의 처지와 비슷해지거나 오히려 더한 거 같아요. 논문은 독자가 저자와 심사자 최소한 서너명은 되지만, 비평은 저자와 편집자 달랑 두명만 독자가 될 수도 있죠. 물론 90년대 이후 문학장이 급격하게 축소되고 문학의 위상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추락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비평의 왜소화는 평단이 자초한 지점도 분명 있는 것 같습니다. 비평이 대중과 조우하지 못하는 상황이 나날이 심화된다면 비평의 공공성을 얘기하는 자체도 별반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지역에 거점을 둔 비평전문지를 만들고 있으니 지역매체나 지역비평의 역할에 대한 얘기도 좀 드리고 싶어요. 윤지관 선생님께서 창비가 중심의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실천문학』을 포함한 여타 문학매체들의 책임도 크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윤선생님의 지적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아요. 『오늘의문예비평』이나 『실천문학』을 포함한 진보적 매체들은 매체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90년대 이후의 변화된 문학/문화의 장 속에 개입하려는 분투를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를 묻는다면 솔직히 자신있는 답을 드리지는 못할 것 같아요. 대화를 시작할 때도 말씀드렸지만 『오늘의문예비평』의 창간목표 중 하나는 ‘서울 중심의 문학구조로부터 탈중심화를 지향하는 지역문화운동’을 시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20여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오히려 그 당시보다 더 악화된 거 같아요. 문학구조의 탈중심화는 여전히 요원한데 우리는 과연 이 상황에 책임이 없는가를 묻곤 합니다. 헌데 그 물음에는 늘 자신이 없어요. 과연 『오늘의문예비평』이 지역의 관점을 담보한 비평담론을 적극적으로 생산해왔는가, 지역 문학/문화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비평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가, 탈중심화의 포즈 속에서 외려 중심을 욕망하지는 않았는가, 지역문화운동의 진전을 위한 비평의 책임을 다해왔는가, 『오늘의문예비평』은 지역적 혹은 주변주적 관점에서 비평의 공공성을 실천해왔는가, 이런 질문들을 현재 『오늘의문예비평』을 만들고 있는 저희 스스로에게 다시 던져봅니다.
강경석 김경연 선생님께서 『오늘의문예비평』 사례를 들어 지역문예지의 역할과 거기서 자성할 부분들까지 짚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역사와 상징성으로 볼 때 『오늘의문예비평』은 달리 봐야 할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김경연 물론 그렇습니다. 그 부분은 척박한 상황에서 『오늘의문예비평』을 일궈온 선배들의 노고가 컸죠.
강경석 이른바 중앙이라고 말하는, 그러니까 서울 중심으로 활동하는 문예지들도 사실 사정이 다 좋은 것은 아니고 지역문예지들 사이에서도 영향력이나 위상뿐 아니라 여건의 차가 큰 것 같아요. 단순히 중앙과 지역, 이렇게 볼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서조차 자꾸 3대 문예지니 『실천문학』이니 그렇게만 얘기하는 것도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제가 인천에 살기 때문에 예로 드는 거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문예지로는 인천작가회에서 만드는 『작가들』이 있고 진보정론지로는 새얼문화재단이라는 민간공익재단에서 만드는 『황해문화』가 있지요. 이런 매체들이 사실은 창비나 실천문학이 못 해온 역할을 감당하거나 더 훌륭하게 성취를 하는 부분도 있어요. 진보적 매체들의 전체 지형을 논하고 평가한다면서 창비나 실천문학만 얘기하는 건 곤란할 것 같아요. 문예지만 보더라도 광주에서 내는 『문학들』의 존재감도 여실하고 부산의 『오늘의문예비평』은 두말할 것도 없지요. 그리고 사실관계 확인 차원에서 한가지만 더 짚자면 김경연 선생님 말씀 중에 문창과 얘기가 좀 있었고 여러군데서 그런 주장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그냥 넘어가버리면 안될 것 같아요. 정말로 문창과 때문에 천편일률적인 작품들이 양산되고 있는 걸까요?
김경연 원인은 항상 중층적이라 문창과를 전적인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봅니다. 앞서 제가 드린 얘기도 같은 맥락이고요. 그런데 90년대 이후 대학마다 문창과가 생기고 문학창작이 학교 시스템 안으로 대거 들어오면서 생긴 변화는 적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80년대까지는 한국이 역사적 격동기가 아닌 적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시대가 만들어낸 소재들이 풍부했고 날것의 현실과 박투하면서 글을 쓸 수 있었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글쓰기에는 나쁘지 않은 환경이랄까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90년대 이후는 역사의 자리를 일상이 점령했고 전 시대에 비해 작품의 소재는 빈곤해지고 경험도 협소해지는 상황이 도래한 거죠. 문창과가 작가 탄생의 제도적 기원이 되고 문창과적 글쓰기가 90년대 이후 문학의 주류적 경향이 된 것은 이런 상황들이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경험하기보다 경험을 학습하고, 문창과 커리큘럼 안에서 문학 관련 이론들을 섭렵하고, 시류적인 문학경향을 분석하면서 학습을 통해 글쓰기를 숙련해가는 거죠. 그러니 최근의 문학판에서 통하는 주류적인 글쓰기를 좇게 되면서 문학은 과거에 비해서 뭔가 대동소이해지는 경향이 발생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문창과도 그렇지만 요즘은 또 메이저 출판사에서 주관하는 공모전에 입상하는 것이 작가가 되는 정례화된 코스가 된 거 같더라고요.
강선생님께서 지역매체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언급하셔서 약간 부연하고 싶습니다. 『오늘의문예비평』 좌담 때도 얘기가 나왔지만, 지역의 문학매체들이 지역문학에 대해 보다 엄격하고 객관적인 비평태도를 가져야 할 것 같아요. 주례사 비평은 사실 지역에도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거 같아요. 문학권력에 의한 주례사 비평이 아니라 외려 문학권력이 부재하기 때문에 주례사 비평의 유혹을 받게 된다고 할까요. 지역이라는 레떼르를 달고 문학활동을 한다는 것은 불합리하게 감수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의미고, 그런 곤혹스런 현실을 알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지역의 문학을 지지하고 독려하는 차원의 주례사 비평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유혹을 청산하지 못하면, 좌담에 참석하셨던 구모룡 선생님 말씀처럼 지역문학의 하향평준화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겠죠. 그러니 『오늘의문예비평』을 포함한 지역문예지들이 엄정한 비평태도로 지역문학을 벼리는 역할을 방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김남일 요즘 제 입장에서, 창작자이자 잡지를 만들고 있는 입장에서 마지막으로 악역을 더 맡아야 하겠습니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창비는 나무인데 점점 너무 커져서 굳어져버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편집진들이 최소한 비평가의 자세에 대해서 스스로 반성을 해야 된다는 거죠. 평가하고 나누고 진단하고 등급 매기는 일만 하지, 아까도 얘기했지만 한국문학을 함께 만들어간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야전에 같이 있었는데 이제 아니라는 거죠. 술을 먹든지 안 먹든지 상관없이 아무튼 그런 노력은 다 사라져버리고 등급을 매겨서 좋은 작가들만 싹 모아서 왔잖아요. 대개 그 좋은 작가들이 잘 팔리는 작가들이었던 게 현실이었고요. 그 과정에서 문학의 또다른 다양성도 해쳤어요. 장르에 대한 탄력성 같은. 수필도 있고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알렉시예비치 작품처럼 기록문학도 있는데 이런 것들은 다 포기하고 자기도 모르게 점점 문학주의적으로 간 거죠. 그러다보니까 대중은 다양해서 트위터로도 글 쓰고 이러는데 근엄한 모습만 보이다가 이번에 한방 맞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 지난해 실천문학사의 대표가 되자마자 저도 똑같은 방식을 좇았던 게 사실이에요. 어느새 우리 문학이 다 그런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는 말이죠.
강경석 문학주의적으로 경사되었다는 말씀과 잘 팔리는 작가만 모아왔다는 말씀은 얼핏 모순이지 않은가 싶습니다만……
소영현 이상하게 창비 발전방안 대책위원회가 된 것 같은데,(웃음) 덧붙이고 싶은 것은 문학교육 문제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작가나 비평가도 독자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문학교육이 중요한데요. 어릴 때는 국경을 넘나드는 독서경험을 쌓아오다가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제도교육에서 외국문학을 접하기 어려워지잖아요. 이런 문학과 독서 교육 속에서 문학에 대한 균형 잡힌 안목을 마련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 과정에서 정전과 베스트셀러 사이에 놓인 외국의 동시대 의미있는 문학은 누락되는 것이죠. 어쩌면 더 큰 문제는 입시와 스펙 쌓기에 대한 압박으로 학창시절에도 책을 읽을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문학에 대한 안목을 마련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문학의 깊은 감흥을 느낄 수 있는 독자가 등장하기 어려운 거죠. 이런 경향은 문학이 감정교육이라는 차원에서 갖는 의미로 볼 때도 적극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교육문제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이런 정도로 하고요. 관련해서 『악스트』를 보면서도 생각하는 건데, 한국문학이 아닌 문학에 대해서도 서평을 해주거나 열린, 넓은 의미에서의 좋은 문학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장을 펼쳐주면 좋겠습니다. 문학이라면 한국문학, 비평도 한국문학만 대상으로 해야 된다고 여기는 건 큰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여러번 언급한 바 있듯이, 가령 한국문학에서 하루끼의 영향을 빼고 얘기하기가 어려운 시대가 있는데요, 그런 영향을 다 제거한 채 숨겨야 할 치부로 다루거나 혹은 한국문학이 순수하고 순혈적인 것처럼 접근하는 일도 비현실적인 감각이 아닐까 해요.
윤지관 전체적으로는 독자와의 소통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공론의 장에서 비평가들 사이의 논쟁이나 담화도 지속되어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독자야말로 전체 문학을 지탱하는 토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번 표절 논란을 겪으면서 그런 생각이 더 절실해졌어요. 실제로 독자들 중에는 왜 문단이나 언론이 그렇게 과도하게 사태를 몰아가는지 불편하고 착잡해하는 분들도 많은 것으로 압니다. 물론 논쟁하고 다툴 때는 다투더라도 어떻게 우리가 독서대중과 접촉하고 그걸 유지하느냐, 또 그런 일을 우리가 어떻게 문학 전체 차원에서 해내느냐 하는 문제는 비단 문학의 이익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공공성을 실현하는 관건이라는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인문적인 토양을 확장하는 일이죠. 우리 사회에 기반이 아주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경숙씨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평가야 다양하겠고 극단적으로 폄하하는 시각도 있습니다만, 하여간 대중문학도 아닌 진지한 작품이 수십만부씩 팔리는 사례 자체는 의미있는 현상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독자들 혹은 잠재적인 독자들을 소중히 여기는 방향으로 이번 사태도 정리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대학 문창과가 문제라는 식의 이런저런 논란도 있었는데, 더 큰 맥락에서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거기서 뛰어난 작가가 얼마나 나오느냐고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런 기계공학적인 시대에 문학인구를 넓히는 원천이 되고 인문적 토대를 쌓는 일이거든요. 그걸 어떤 식으로 잘 운영하느냐는 문제는 남겠지만 말이죠. 대학이 지금 난리 아닙니까. 산업수요에 맞춘다고 인문학을 집중적으로 구조조정하는데 문예창작과도 그 대상이죠. 효율 중심으로 인간을 도구화하는 추세에 맞서는 힘 가운데 하나가 문학인 만큼 대학에서 문학 영역은 지켜야 하지 않나 합니다.
강경석 요즘 비평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여러가지로 짚어주셨습니다. 비평적 글쓰기의 몰개성화나 지나친 전문화 경향부터 한국문학 편향이나 문학주의적 경사, 지역문학에 대한 뿌리깊은 무관심과 지역문학 내부의 타성, 그리고 독서대중의 형성에 있어 비평의 역할과 문학교육의 부실문제까지 다양한 논점이 포착되었습니다. 어느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지점들인 것 같습니다.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할 시간인데요. 앞으로의 한국문학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가 주제로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좀 아까도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이번 사태가 큰 반향을 일으킨 것도 우리 사회에 문학의 역할을 기대하는 독자공동체가 아직까지 건재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것이 어떤 규모이든 말이지요. 그렇다면 문학비평 혹은 문학이 그 독자공동체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그 활로를 어떻게 재구축해낼 것인지가 관건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국문학의 미래를 찾아서
김남일 저는 한국문학이 굉장히 화려하고 세계적인 수준인 줄 알았어요. 이번 사태가 나기 전까지는. 왜냐면 문동 같은 데서 나오는 책을 보면 나는 저렇게 못 쓰는데, 하면서 주눅도 들고 그랬거든요. 80년대와 90년대 초반에 내가 했던 문학은 진짜 다 쓰레기장으로 가야 되는 건가 이런 생각도 들었고요. 근데 이번 사태가 터지고 나서 많이 생각해보고 읽어본 결과 과연 그런가 싶어졌어요. 이인휘라고 노동자 출신 작가가 있는데 지금도 노동을 해요. 내 나이가 됐는데 공장에 다니면서 저녁에 퇴근해서는 글을 써요. 그렇게 달라붙어서 생생한 이야기를 쓰거든요. 이런 사람들의 노력처럼 하나의 좋은 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바탕이 필요하고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는 거지요. 제 결론은 현재 한국문학이 부딪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게 아니라 자본과의 싸움입니다. 문학동네에다가는 자본의 외부를 생각하라, 자본의 바깥에 대해서 사유하라, 그리고 성채를 구축하라 이렇게 주문하지 못해요. 창비에 대해서는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자본 바깥으로 빠져나오라는 게 아니에요. 사유하라는 거죠. 사유하고서 할 수 있는 한 어떤 신선한 충격이나 작은 노력들을 보여줘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매몰되어 있었다는 거죠. 창비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거든요. 창비는 백선생님만의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같이 만들어왔던 거라는 말이에요, 나의 입장에선. 물론 당연히 바깥에서도 잘해야 되지만, 오늘은 창비 좌담이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솔직히 50주년을 맞은 이 시점에서 약간 회의적이긴 해요. 자본이라는 건 워낙 강고하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에 싸웠던 독재정권과는 달라요. 자본과의 싸움은 그야말로 존재를 건 결단 같은 거예요. 누구 말처럼, 문학동네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요구는 양보하라는 거예요. 창비는 대안을 만들어야 되는 거죠. 신자유주의 시장 바깥에 작은 형태로라도 대안을 만들면서 가야 해요. 그걸 많은 작가들, 그리고 많은 독자와 함께 해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강경석 그래도 창비는 일관되게 자본주의 세계체제 극복을 주장하고 그것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안고 씨름해온 집단이라고 생각하는데, 평가는 다를 수 있겠지만 아예 안한 것처럼 말씀하시면.(웃음)
김남일 적어도 문학적으로는 그러지 못했다는 거죠.
강경석 문학적으로 그걸 어떻게 구현할지, 실제 창작의 현장과는 어떻게 연결할지에 대해서는 기대보다 미숙했다는 평가로 알아듣고 성찰할 부분이겠습니다.
소영현 문학동네 20년, 90년대 이후 창비의 변화, 또 나머지 모든 문학잡지를 포괄해서 이야기해보자면 한국문학이 나아가야 할 상이나, 좋은 문학이라는 전범을 어느 잡지나 어느 문인도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하나의 상을 제시하는 게 옳으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겠지만, 지향이 없을 수는 없잖아요. 이건 어떻게 생각하면 잡지 관련자들이나 비평가들의 무능이라기보다는 뭐 하나를 전범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지금의 현실상황을 오히려 반영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한국문학의 미래 전반에 대해서는, 소소하게 어떤 작품의 미래나 운명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 거대한 흐름을 전망하기는 어렵고, 설사 어떤 식으로 전망한다 해도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 같아요. 문학 자체의 미래로 우회해서 얘기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문학은 어떤 식으로든 시대의 요청에 따라 맞춤한 장르나 형식을 마련해가면서 미래를 열어가겠죠. 문학이란 게 텍스트화한 사회이고 결국 삶에 기반한 것인 만큼 인간이 자기 삶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그걸 이야기로 만드는 한 문학은 앞으로도 지속될 테니까요. 오히려 여기서 저는 제가 한국문학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은 창작열에 들끓는 문학지망생도 독서를 하지 않은 채 쓰기만 하는 경우가 많아서 독자와의 소통의 거점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현재의 창작, 비평, 계간지, 문학상 등을 둘러싼 제도 개선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겠죠. 또 긴급한 개선안을 제출한다고 해도, 제도가 곧 문화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고요. 해결의 단서는 결국 지금 이곳의 현상이 어디로부터 발원했는지로 돌아가서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가령 90년대 당시 신경숙 문학의 성격, 혹은 그것을 평가한 비평을 두고 지금의 관점에서 역사적 타당성을 검토하는 일, 다시 말해 90년대 문학작품을 포함해서 과거 비평작업에 대해서 재평가하고 그 여파가 가져온 효과를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90년대 문학이 2000년대 접어들면서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를 짚어봐야죠. 단지 과거 비평의 오류를 수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비평의 현장성을 역사적 문맥 속에서 조정하고 되살리려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이런 일이야말로 비평의 현장성에 값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연구와 비평을 통해 이 작업을 하면서 비평의 미래를 그려보려고 합니다.
윤지관 작가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신경숙 같은 경우에 창비만 하더라도 가령 『엄마를 부탁해』를 『외딴방』의 성과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해온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저 자신도 90년대 문학의 한계랄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초지일관 비판적으로 지적해온 사람이고, 신경숙과 관련해서도 2000년대에 나온 『기차는 일곱시에 떠나네』나 『바이올렛』 에 대해서는 꽤 혹평을 한 셈이라서, 제가 변호인을 자처했지만 사실 무슨 주례사는 한마디도 한 적이 없습니다.(웃음) 그렇지만 90년대 문학이 의미없느냐? 그렇게는 보지 않습니다. 제가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일할 때 태국 문단과 교류한 적이 있는데, 태국 문단에서 가장 존경받는다는 한 원로작가의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과거 민주화투쟁 시기에 태국문학도 저항적이고 활발했는데 지금은 다 죽었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진지한 문학을 읽는 독자가 다 사라졌다는 거예요. 청년들이 한류를 포함한 대중문화로 휩쓸려서 도저히 회복불능이라고 한탄하더군요. 그때 제가 느낀 건 이렇습니다. 나 자신 90년대 문학에 대해서 많이 비판해온 사람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태국문학 꼴이 안되고 그런 위기를 이겨내면서 새로운 문학의 영역을 개척한 공이 있지 않은가. 90년대 문학 말입니다만. 그 공과를 따지면서 문학을 한국사회 전체 변혁방향과 맺어나가는 건 비평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작가는 자기의 사적인 체험이나 경험, 감각에 따라서 작품을 쓸 뿐이고, 그걸 어떻게 해석해서 공적인 의미와 결합시킬지는 비평의 몫이지요. 물론 이번 사태에서도 그렇듯이 문학에 대해서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관점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럴 수 없는 거죠. 우리가 문학을 죽었다고 단정하고 끝내버릴 일은 아니니까 어떻게든 길을 찾기 위한 모색을 멈출 수 없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김경연 최근에 천정환 교수가 『역사비평』에 쓴 글을 읽었습니다. ‘신경숙’을 통해서 90년대 문학장의 변화와 여성문학의 부상을 읽어낸 흥미로운 글이었어요. 90년대를 전후로 여성주의, 여성지성, 여성문학이 부상한 상황에서 90년대 문학판이 ‘여성’을 내면이나 사랑과 협소하게 결부시켰다는 비판적 지적인데, 본격적인 논의가 없었던 것이 아쉬웠습니다. 80년대 문학이 역사·집단·이념에 몰두했다면 90년대 문학은 일상·개인·감정을 천착했는데 특히 여성작가들이 90년대 문학의 사사화(私事化)를 주도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잖아요. 이러한 ‘문학의 90년대 체제’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거고요. 틀린 지적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에는 문학의 사사화를 정치가 소거된 ‘사소화’로 곧장 환원하거나, 90년대 여성문학 전체를 문학의 사소화를 유발한 주요 원인으로 판단하는 시각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아 문제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90년대 여성작가들의 문학을 단수의 ‘여성문학’으로 규정하고 내부의 복수적 층위들을 독해하지 않는다고 할까요. 신경숙 문학을 마치 90년대 여성문학 전체를 대표하는 경향으로 읽는 것이나, 신경숙 문학의 다층적 층위를 놓치는 것 역시 문제라 생각하고요. 한국문학의 미래를 얘기하는 것은 저의 역량 밖인 것 같습니다만 90년대 문학의 공과에 대한 학계와 평단의 논의가 필요한 때라고는 생각합니다.
여기 오기 전에 『오늘의문예비평』 창간호를 펼쳐봤습니다. 거기 실린 좌담 제목이 ‘오늘의 비평과 지역문학의 전망’이더라고요. 그 당시 선배들의 고민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 지난 20여년 동안 과연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좌담에서 80년대의 성과 중 하나로 지역과 지역문학에 대한 관심이 발아했다는 점을 꼽았습니다. 지역에 대한 자각을 90년대에 제대로 이어갈 수 있을지에 불안도 엿보이고, 자본에 휘둘리지 말자는 선언 같은 결기도 읽혔습니다. 『오늘의문예비평』이 20여년 동안 자본으로부터는 독립했고 상업주의와는 확실히 담을 쌓은 것 같은데, 그래서 늘 한호 한호 낼 때마다 폐간의 위기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언제까지 이 잡지가 이어질 수 있을까 불안하고요. 그 불안을 견디면서,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끝나는 날까지 지역의 시좌(視座)를 놓치지 않고 대항·대안 담론을 만들어내는 데 진력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비평의 본래정신을 회복한다’는 창간의 초심을 지켜나가는 일이겠지요.
강경석 한국문학의 앞날과 관련해서는 80년대와 90년대가 분기를 이루었던 당시로 돌아가 그 지나온 과정을 사회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재평가해볼 필요가 있다는 데에 많이들 공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현재의 위치와 미래의 방향이 좀더 뚜렷해지겠지요. 다음으로는 지역에 대한 관심의 확산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문예지나 출판사, 또한 비평이 각자의 고유한 역할을 사회적·문학적 요청 속에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선생님들의 활약에 기대가 큽니다.
내년으로 창간 50주년을 맞게 되는 창비에도 역시 많은 과제를 던져주셨습니다. 현재 편집인의 퇴임을 위시한 편집위원회 개편을 앞두고 있고 출판기획 시스템을 개선하거나, 한반도평화, 생태-인권, 사회혁신 분야 등 인문사회 강좌를 통해 독자대중과 직접소통을 도모하는 ‘창비학당’도 개관을 준비 중입니다. 계간지의 혁신은 물론 포함되겠고 아직은 말씀드리기 어려운 그밖의 다른 쇄신안도 준비하고 있지요. 여러 선생님의 고언과 제언이 큰 힘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문학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려는 분투와 협동이 더욱 절실해진 것 같습니다. 긴 시간 애 많이 쓰셨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10.30.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