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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엄마의 풍경
윤영수 소설집 『귀가도』
백지은 白志恩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소설과 살다: 독자 k씨의 스타일을 중심으로」 「탈성장의 정치적 상상력」 「다시 쓰다: 문학과 사랑 2011」 등이 있음. jienbaik@hotmail.com
윤영수(尹英秀)가 지난 20여년간 조감한 세상은 비교적 뚜렷한 이미지를 지닌다. 출구 없는 적자생존의 요지경이거나 자본주의사회의 분열상이 운명이 된 살풍경. 요지경과 살풍경은 우리 세태의 급소에 다름아니었으니, 우리는 그를 세태소설가라 부르는 데 주저 없기도 하였다. 세속적 현실, 섬세한 관찰, 생생한 묘사, 풍속과 도덕 등이 다 거기에 어울리는 말들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곱번째 소설집 귀가도(문학동네 2011)를 읽으면서 과연 윤영수 소설의 특별한 점이 세태소설을 규정하는 이런 헐렁한 말들과 얼마나 부합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대략 셋으로 정리해본다.
첫째, 윤영수의 소설은 충실한 ‘관찰’의 기록인가? 그의 소설에는 기억이 아니라 현상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의 문장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보이는 것을 보았다’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알려준다’에 가깝다. 도시순환선 열차의 자잘한 해프닝을 통해 인간사의 오해와 진실을 풀어내는 「귀가도 2—도시철도999」를 보자. 한정된 공간에 모인 별의별 사람들이 저마다 추측, 판단, 행동함으로써 얽히고설키는 진실들의 모자이크에서, 화자는 승객들의 동작 하나 표정 하나를 놓치지 않는 기민한 관찰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각각의 사태와 맥락을 조리 닿게 짐작하고 유머러스하게 묘사하는 재담가다. 그의 관찰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하고 그의 묘사는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게 한다.
둘째, 윤영수의 소설은 ‘사실적인’ 소설인가? 그가 기록하는 사물, 대화, 분위기 등은 꾸며내지 않은 경험 현실의 파편들과 같은 실감을 준다. 그러나 그 모든 부분들은 파편적 사실의 표상이 아니라 어떤 현실의 구도 안에 사실로서 인용된 이미지에 가깝다. 딸의 죽음 이후 심신이 피폐해진 쉰두살의 여자가 버스 옆자리에 앉은 딸 또래 아가씨와의 대화로부터 위안을 얻는 이야기(「귀가도 3—아직은 밤」)나, 불안과 우울에 젖은 주인공이 밝은 성격의 옆집 여자에게서 용기를 얻는 이야기(「바닷속의 거대한 산맥」)를 읽자면, 사실적인 디테일들이 모여 마침내 어떻게 방향을 트는지 알 것 같다. 연약하고 뒤틀린 인생사들이 그의 소설에서 주목될 때, 그 너절하고 서글픈 현장에 그는 당황하고 분노하지만 그런 미움과 냉소는 끝내 힘을 잃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낙관, 혹은 반드시 지금보다는 더 나아져야 한다는 당위일지도 모르는, 어떤 가능성을 향한 시선이 거기에는 있다. 당위가 사실을 대체한다는 뜻이 아니다. 섬광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실의 파편들을 비출 한줄기 빛이 윤영수의 소설에서 새어나온다는 뜻이다.
셋째, 윤영수의 소설에서 상기되는 윤리적 문제는 우리시대의 일상적 풍속을 통해 숙고할 만한 것인가? 그는 인간의 이기심과 도덕성을 ‘생태’처럼 관찰하여 그 표출과 은폐의 드라마를 통해 선악에 관한 물음을 유발한다. 그러나 거기엔 공동체의 습속 일반을 대변하려는 사명감이나, 공동체의 모럴 일반을 강요하는 계몽의식 같은 것이 없다. 귀가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에는, 자기 집에 낯선 자가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는 어이없는 상황에서도 말끝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를 달고 사는 희한한 인물 유순봉씨가 나온다. 선인이자 멍청이면서 동시에 선인도 멍청이도 아닌 그의 진술을 듣고 있자면 착한 자의 평상적 서글픔이 아니라 약한 자의 병리적 우울함이 느껴진다. 현실을 현실로 감지하지 못/안하면서도 매번 사태를 전면적으로 감당하는 이런 정황, 말하자면 비상상태를 일상으로 수용하는 유순봉의 사고방식은, 역으로 우리의 세속적 삶이란 이미 항구적 비상상태임을 반증한다. 이 소설에서 선악의 구별 혹은 도덕성의 탐구는 세계의 일상적 조건을 통해 이뤄진다기보다 세계가 일정한 법-도덕에 의해 굴러가지 않는다는 인식에 의해 매번 다시 물어져야 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세상은 잉어를 가둔 수조처럼 답답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약육강식의 사슬에 매인 채 불통중이다. 이 허무한 현장에서 윤영수의 소설은 흩어진 삶의 조각들을 다시 모아보고자 한다. 책 표지에 그려진 ‘귀가하는 엄마’, 크게 뜬 두 눈은 반짝이고 입은 조금 벌어져 있으며 두손엔 큼지막한 장바구니가 들려 있다. 여기서 파울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가 연상됐다면? 벤야민이 거기에 부쳐, 파국의 현장에서 새로운 데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산산이 부서진 것들을 다시 결합하고자 하는 새로운 천사를 이야기했듯, 제 의지와 상관없이 미래로 뒷걸음치게 만드는 ‘새로운’-‘진보적인’-문학적 경향들 틈에서 귀가하는 엄마의 풍경은 현실이라는 허무주의에 맞서고 있는 듯 보인다면? 아니면 어떤가, 어쨌거나 우리 소설은 커다란 장바구니 가득 시장 곳곳의 풍경을 담아 집으로 돌아오는 엄마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