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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가벼운 마음의 뒷면

유형진 시집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평론집 『환각의 칼날』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 등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3541유형진의 ‘가벼운 마음’은 소심, 투명한 마음, 양심, 동심, 무심 등을 의미한다. 어른이 되었지만, 내면에는 나이를 먹지 않는 아이가 살고 있는 사람들. 우리는 모두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나 내면의 아이는 실제의 아이와 같으면서도 좀 달라서, 기억과 상상과 소망의 형태로만 살아 있다. 우리의 삶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내면의 아이를 끊임없이 필요로 하고 계속 살게 하는 것이다(이 점에서 동화와 만화, 애니메이션은 실제의 아이와 내면의 아이, 둘 다를 위한 어른의 상상적 배려이자 판타지다). 내면의 아이에 대해 유형진은 놀라울 만큼 적절한 설명을 내놓는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길을/천천히 걷고 있는/난 아픈 게 아니고/생이 조금 모자랄 뿐”(「빛, 벚꽃」, 『피터래빗 저격사건』, 랜덤하우스중앙 2005) “전원이 꺼져도 계속 켜져 있는 잔상 같은 너/반전의 구름같이 내 망막 뒤에서 나를 괴롭히는 너”(「다이알 비누로 목욕시킨 마론 인형의 냄새같이」,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민음사 2011)

경험된 현실의 ‘이후’에 태어났으면서, 그 현실의 ‘이전’부터 존재해온 아이. 내면의 아이는 경험과 기억, 상실과 소망, 실재와 상상, 어른과 아이, 자아와 타자의 “이중국적자”이며(「겨울밤은 투명하고 어떠한 물음표 문장도 없죠」,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현실의 법에 앞서 “감각으로 사유하는 종(種)(「표본실의 나비들」, 『피터래빗 저격사건』)의 최초의 조상이다. 사실 시란, 이 내면의 아이가, 더불어 이 내면의 아이와 공생하는 어른이 현실세계에 쏟아놓는 철없는, 돌발적인, 빨간 피가 흐르는, 터무니없이 사소한, 웃기지도 않은, 사라지는 등등의 말들이 아니겠는가. “새벽녘 안개비 속에서 꼭 더러운 자동차를 닦아야만 하는 사람들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깜짝 놀랄 만한 거짓말들을 만들어내”(「심장」)는 시인은 그 아이의 입으로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아이-시인이 목격한 것처럼, 우리의 피터래빗이 ‘유년의 시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저격당하는 것은 이 아름답고 깜짝 놀랄 만한 거짓말(시)의 필연적인 결말이다.

유형진의 첫 시집이 ‘유년의 시간’이 저격당한 현실세계에서 벌이는 저항과 탈주의 혼종극이었다면, 이번 시집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은 피폐한 현실에 재건하는 ‘유형진 시-랜드’의 생기 넘치는 스토리텔링이다. 버블버블랜드, 프라이왈라힐라, 랜드 하나리, 낭만사회 등 이 테마파크의 이름은 여럿이며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입장이 허락된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라면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이름을 붙일 수도 있다. 랜드의 입구에는 “나 어릴 때 창문 아래 살던 작은 나무”(「어린 나무」)가 여전히 자라고, 내부에는 그 나무의 친척들인 유니콘, 마론인형, 올드밤비, 얼룩무늬 조로 등이 천진하게 살고 있다. 유년의 시공간에 속한 이들은 내면의 아이를 통해 “꼬깃꼬깃한 생활”의 현실세계로 역 침입한다. 유형진은 이 침입을 부추기면서 ‘유형진 시-랜드’의 지분을 넓혀가며, 동화/만화적 알레고리로 극화된 현실에서 현실과 상상/환상은 서로 즐겁게 몸을 교환한다. “아이들이 법을 만들고 엄마가 법을 공표하고 아빠들이 그것을 지키”(「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는, 지배질서의 역전이 가볍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유형진이 펼치는 시-랜드 스토리텔링은 발랄한 재기로 반짝이면서도, 생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으로 묵직하다. 전자문명의 비인간화를 비판하면서 때로 기법의 작위성을 노출하기도 했던 첫 시집에서와 달리, 이번 시집에서는 삶과 현실의 구성원리 자체를 성찰하면서 좀더 정제되고 자연스러운 시법을 보여준다. 데뷔작으로 주목받은 시인들이 시달린다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보기 좋게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구축하는 시적 주체의 정체성이 ‘감각으로 사유하는 종’의 세대지향적 층위에서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의 보편적 층위로 이동한 것이 그 하나의 이유일 수 있겠다.

아이들이 법을 만들고 어른들이 실행하는 유형진의 시-랜드는 낙관적인 상상력과 믿음에 기초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다. “아무도 답할 수 없는 물음을 한가득 입에 물고 슬픔을 쪽쪽 빨다 뱉어버리”(「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는 고뇌와 절망이 이 랜드의 자산이며 운영기조다. 같은 맥락에서 시인이 살뜰하게 호명하는 물품들, 즉 메이플시럽, 달토끼 스티커, 제라늄의 운명, 콜리플라워 구름 속 작은 얼음 알갱이들 등은 유토피아를 호출하는 단순한 문화적 기호가 아니다. 이들은 순수한 이미지와 리드미컬한 어감이 촉발하는 미적 충족감을 통해 랜드와 현실이 접속하는 충격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샤이니 샤이니 퀵, 퀵” “히치히치 콕, 콕” “클클클, 깔깔깔, 엉엉엉, 낄낄낄” 등 마법의 주문과도 같은, 유머러스한 의성어도 마찬가지다. 현대문명의 테마파크가 환상과 아름다움을 과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유형진의 시는 똑같이 공유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정반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