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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광국의 석농화원』, 눌와 2015
200년 만에 나타난 전설적 업적
안병욱 安秉旭
가톨릭대 명예교수, 한국사 ahn@catholic.ac.kr
얼마 전 새로 발견되어 번역 출판된 『김광국의 석농화원』(유홍준·김채식 옮김)이라는 조선시대 화론집(畵論集)을 큰 감동 속에 통독했다. 『석농화원(石農畵苑)』은 조선 영정조시대 인물인 석농 김광국(金光國)이 평생 수집한 그림으로 만든 화첩(畵帖)에 담긴 화제(畵題)를 필사해서 정리한 책이다. 석농은 화첩에 당대 서예가들의 글씨로 본인을 비롯한 유명 문사들이 지은 화제나 시(詩)를 붙였다. 이 화첩은 그간 흩어져 그 전체 실상을 알 수 없어 전설처럼 회자되었는데 최근 『석농화원』이 발견되어 화첩의 목록과 그림의 화제를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0년 전의 저술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시대를 초월한 인식과 깊이있는 사상적 식견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저자가 탁월한 안목으로 풀어낸 화제(畵題)와 일화(逸話) 등은 그 자체로 시대를 뛰어넘는 훌륭한 회화사이며, 또한 동시대 최고 경지에 이른 지식인들의 사유와 인식에 관한 흥미로운 자료이다.
작년 고서경매에 출품된 원본 『석농화원』은 ‘본첩(本帖)’ ‘보유(補遺)’ ‘별집(別集)’ 등 열권으로 구성되었다. 김광국은 의관(醫官)을 지낸 부유한 중인 출신이었고 1776년에 연행사신을 따라 중국에도 다녀왔으며 그 길에 중국의 그림과 서양화도 살펴보았다. 『석농화원』이 다루고 있는 작품은 우리나라, 중국, 일본, 러시아의 회화 그리고 네덜란드 동판화까지 모두 280점에 이른다. 이런 거질(巨帙)의 그림첩과 거기 첨부된 화제·화론· 일화들을 최근 편역자들이 자세한 주석을 달아 번역하고 또 관련된 현존하는 그림들을 일일이 수배해 도판으로 첨부해서 출간한 것이다. 나는 이 저술이 가져다준 감동에 겨워 책을 펴낸 유홍준(兪弘濬) 교수에게 고마운 뜻을 전했다가 그만 서평의 짐을 지고 말았다.
『석농화원』에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서문을 비롯해서 매 작품마다 석농 자신과 당대 문인들이 지은 화평에다가 강세황(姜世晃), 이광사(李匡師), 황기천(黃基天), 유한지(兪漢芝), 김이도(金履度), 이긍익(李肯翊), 박제가(朴齊家) 등 뛰어난 문사들의 글씨로 화제를 써서 시(詩)·서(書)·화(詩書畵) 삼절(三絶)을 갖추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어느 뛰어난 한 인물에 의한 돌출적인 업적이라는 범주를 넘어 당시의 문화역량이 종합되어 이루어진 성과라는 데 있다. 우리는 영정조시대의 뛰어난 문예와 높은 경지에 이른 문화를 언급하곤 하지만 정작 그 시대의 정수가 집대성되어 이렇게 한손에 잡히는 저술을 찾기는 어렵다.
이 저술은 그 자체로 획기적 가치를 지녔다. 김광국이라는 천재적인 감식안의 수집가와 더불어 무엇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표암(豹菴) 강세황,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등 뛰어난 화가들이 당시 연이어 배출되지 않았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뛰어난 문장력을 지닌 일군의 학자와 그들의 서예 그리고 국제사회에 대한 인식이 수준 높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한 여러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석농화원』이라는 업적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능, 역량, 지식, 인식, 사상 등의 모든 면에서 그렇다. 예컨대 김광국이 아무리 뛰어난 감식안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만일 그에게 그림을 구매할 수 있는 재산이 없었다면 그가 이렇듯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
석농이 살았던 영정조연간은 역사학도인 내가 전공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로 정치, 사회, 사상 등의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다보니 문화나 풍류 등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다. 때문에 김광국의 화론에 나타난, 최고도에 이른 18세기 문예의 진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야겠다. 그럼에도 책에 기술되어 있는 여러 재미있고 생생한 일화를 석농이 시간을 초월해 우리 앞에 나타나 당시 일들을 전해주는 듯 흥미롭게 읽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 지식인 들과 어울리면서 그림을 감상하고 평가하고 때로는 그 자리에서 붓을 휘갈겨 멋진 그림을 그려냈다. 풍류와 창작과 지적인 담론이 어우러지는 광경이 곳곳에 묘사돼 있는데, 그가 배꽃에 가랑비 내리는 날 차를 마시며 산수도(山水圖)를 완상(玩賞)한다고 서술한 대목에 이르면 생각만으로도 황홀해진다.
박지원과 홍석주(洪奭周)의 서문, 유한준(兪漢雋)의 발문에 담긴 사상은 하나같이 시대를 초월하여 심금을 울린다. 박지원은 서문에서 김광국이 중국에 갔을 때 연경의 천주교회당에도 들러 여러 그림을 두루 살펴보았다고 했다. 연암은 김광국이 조선에 귀국해서는 아마도 그동안 모은 우리나라 그림을 모두 불태울 것이라 예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리어 갈수록 수집에 열을 올리면서 그림 하나라도 놓칠까, 한 화가라도 빠트려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면서 날을 아껴가며 수집에 급급했다고 한다. 박지원은 이를, 모든 생물은 제각기 천성대로 사는 것이며, 또 제가 살고 있는 곳이 제일인 이치와 같다고 보았다. 문장을 짓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중국 것을 받들어 흉내 내려고 할수록 더욱 사이비 가짜가 되고 만다고 지적했다.(75면)
석농은 이런 철학에 기초해서 겸재를 평하길, 정밀하고 오묘한 이치를 깊이 터득하였으니, 그 심오한 기상과 빛나는 색채는 중국 송(宋)·원(元)의 훌륭한 작품과 견주어도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상에서는 고금의 시대적 거리와 화이(華夷)의 지리적 차이를 가지고 그 우열을 논하기도 하는데 이같은 분별없는 주장으로 겸재의 위상을 논해서는 안된다고 했다.(120면) 또 그는 우리나라 사람의 그림이 모두 중국인의 틀에 얽매였지만, 오직 매화 그리는 법은 우리나라가 독창적으로 새로운 경지를 열었기 때문에, 잘되고 못되고를 막론하고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정서에 부합한다는 점을 조속(趙涑)의 ‘묵매(墨梅)’에 붙인 화제에서 날카롭게 지적한다.(99면)
한편 유한준은 이 책 발문에서, 그림을 대하는 유형에 따라 아는 자, 사랑하는 자, 보는 자, 모으는 자 등 네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그림을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면 모으게 된다는 것이다. 아는 것이란 형식과 법도를 접어놓고 심오한 이치와 현묘한 조화 속에서 정신으로 이해하는 것인데 바로 김광국이 그렇게 신묘한 정신을 가지고 그림을 인지하는 사람이라고 했다.(394~95면) 이 발문을 가지고 꼭 200년이 지난 오늘날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로 번안하여 일세를 풍미한 경구로 만들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탄은(灘隱) 이정(李霆)의 대나무 그림을 좋아한다. 『석농화원』에도 대나무 화제가 몇편 실려 있다. 그 가운데 윤두서는 이정의 「청록대죽(靑綠大竹)」을 두고 대나무의 강건함은 터득했으나 윤택함은 얻지 못했고, 꼿꼿한 기세는 있으나 아리따운 색채는 없으니, 이것은 습기(習氣, 습성)에 구애된 때문이라 비판하면서도, 그럼에도 우리나라 대 그림 가운데 으뜸이라고 했다.(91~92면)
하지만 석농의 감상은 달랐다. 이정의 「묵죽(墨竹)」 8폭을 구한 후 쓴 서문에서 그의 대나무 잎은 조밀해도 싫증이 나지 않고, 줄기는 성글어도 희열을 안겨주었으며, 댓잎 소리가 황홀하게 귀에 들리고 그 빛깔이 눈에 들어오는 듯하니, 비록 중국 역대의 유명작가라도 이보다 뛰어나지 않다고 했다. 또 대나무의 철마다 변하는 다양한 모습을 그림으로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화첩이 실제 대숲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흡족해한다.(93면)
나는 평소에 대나무 그림들이 간결하게 매듭을 지으면서도 부드럽게 휘날리고, 잎과 가지와 줄기가 각기 날카로우면서도 서로 기대며 어울리는 모양에 그냥 좋아했다. 아, 그런데 석농의 화제와 감상문에 이르러서는 진짜 좋아해서 사랑에 빠지는 경지가 이런 것인가! 무언가에 홀리듯 미치도록 좋아해보지 못한 메마른 가슴이 촌스럽게 느껴지면서 석농의 화제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천금을 들여서라도 끝내 간직하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인 모양이다.
석농은 그림을 예술작품의 차원을 지나 신묘한 혼을 지닌 생명체로 간주하면서 신앙의 마음으로 감상하고 철학의 경지로 깊은 사상을 모색하여 화제로 표현했다. 그는 그림이 한가지 기예이지만, 가슴속에 소탈하면서 툭 트인 일종의 운치를 갖춘 자가 아니면 공교로움을 다 발휘하더라도 곧장 속된 투식(套式)으로 떨어지고 만다고 했다. 또 사람 때문에 전해지는 그림이 있고, 사람도 그림으로 인해 전해지는 이가 있는데, 사람으로 인해 그림이 전해지는 것이야 그림엔 행복이지만 그림으로 인해 사람이 전해지는 것은 사람에겐 불행이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옛것을 옳다고 하면서 지금 것을 그르다 여기며, 귀로 듣는 소문을 높이 치고 직접 눈으로 본 것을 하찮게 여기기 마련이라고 했지만 어찌 오늘날이라고 다르겠는가. 석농은 곳곳에서 이런 잘못을 바로잡을 후세의 안목을 갖춘 평가를 기다린다고 했는데 오늘 우리는 그가 기다린 안목을 갖춘 후세로 비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