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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볼프강 슈트렉 『시간 벌기』, 돌베개 2015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동행은 가능한가
조홍식 趙泓植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chs@ssu.ac.kr
미국의 경제사학자 제프리 프리든(Jeffry Frieden)은 거시 역사적 시각에서 집필한 『세계 자본주의』의 부제로 ‘20세기의 추락과 부상’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19세기에 만들어진 글로벌 자본주의가 20세기 들어 1차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면서 추락했으나, 1970년대부터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볼프강 슈트렉(Wolfgang Streeck)은 이 책 『시간 벌기』(Gekaufte Zeit, 김희상 옮김)에서 1970년대부터 다시 역사의 무대에 오른 세계적 자본주의를 민주 선진국가를 중심으로 연구했다. 이 책의 부제는 ‘민주적 자본주의의 유예된 위기’다. 슈트렉은 미국과 유럽 등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이 지역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지난 반세기 동안 상호작용하면서 진화해왔는지 소개한다. 세계화의 시대라 불리기도 하고 신자유주의의 확산기라고 규정할 수도 있는 이 시기, 슈트렉은 자본주의가 내부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공략하고 변질시키고 조종해왔는지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는 이런 거대한 흐름을 막거나 극복할 수 있는 혜안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솔직히 ‘절망적 상황’을 고백하면서, 그럼에도 현실을 진단하는 일을 게을리할 수는 없다고 역설한다.
포디즘, 수정자본주의, 사회적 자유주의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온 전후(戰後)체제를 슈트렉은 민주적 자본주의라고 지칭한다. 국민의 기본적 권리와 복지라는 민주적 요구와 자본주의체제의 생산력을 결합한 민주적 자본주의는 1970년대 본격적인 축적의 위기를 맞으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슈트렉 분석의 핵심은 자본주의가 내적 모순으로 인한 위기의 폭발을 다양한 방법으로 지연시켜왔다는 주장이다.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정책 패러다임으로 탈규제, 민영화, 노조 약화 등을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통화정책을 통해 돈을 마구 찍어냈다는 것이다. 이는 위기를 유예하는 첫번째 시간 벌기 전략이다. 하지만 이 ‘꼼수’는 거의 곧바로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따라서 두번째 시간 벌기 전략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공공부채를 늘림으로써 조세국가를 부채국가로 전환시키는 일이었다. 1980년대부터 등장한 이 전략은 국민에게 혜택을 주는 복지를 축소하는 동시에 부자 감세라는 특별한 형식을 띤다. 하지만 이 또한 임시방편일 뿐 시간이 지나면 공공부채 위기라는 한계에 봉착한다. 결국 세번째 시간 벌기 전략은 민간이 빚을 지게 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일이다. 인플레이션에서 공공부채, 그리고 민간부채로 이어지는 시간 벌기는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로 정점을 찍는다.
미국, 유럽 등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부에서 지난 40여년간 벌어진 정치경제의 맥락을 이처럼 포괄적이면서도 냉철하고 명확하게 꼬집어내기는 힘들다. 실제 이 책은 많은 도표와 통계를 동원해 실증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슈트렉은 특히 이런 변화가 특정 국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민주적 자본주의를 채택했던 국가들의 공통적이고 구조적인 변화임을 설득력있게 도출해낸다. 특히 흥미로운 주장은 많은 맑스주의 계열 위기이론가들의 기대와는 달리 노동이 아닌 자본이 70년대부터 변화의 동력을 제공하면서 민주적 자본주의의 변화를 이끌어왔다는 분석이다. 이 책은 슈트렉이 2012년에 행한 ‘프랑크푸르트 아도르노 강의’ 내용을 엮은 것이다. 그만큼 학술적 깊이를 담았지만 일반인도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설명하는 친절한 책이다. 게다가 종종 “긍정적인 것이 없는데 지어내기라도 하란 말인가”라며 절망적 분석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한마디로, 술술 읽혀내려가는 선진자본주의 정치경제학 강의다.
개인적으로 슈트렉의 유로존 위기에 대한 분석에는 대부분 공감하지만 유로화를 ‘경박한 실험’으로 평가절하하거나 유로를 해체하고 회원국 중심의 화폐로 돌아가자는 주장에는 찬성하기 어렵다. 슈트렉은 ‘민주주의 공간은 민족국가’라는 전통적 틀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하버마스(J. Habermas)나 울리히 벡(Ulrich Beck)처럼 ‘민주주의의 새로운 단위로서의 유럽’을 비현실적이라고 본다. 다른 한편 『시간 벌기』는 변화의 거시적 흐름에 주목하게끔 만드는 데 기여하지만, 맑시즘 전통의 사회과학이 안고 있는 구조기능주의의 한계를 만족스럽게 극복하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행동하는 시장’ ‘변화주체로서의 자본’ 등은 도식적이고 구조기능적인 방법론을 반영할 뿐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행동한 결과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슈트렉 스스로 던지는 질문, “끊임없이 연출되는 (…) 무대 뒤에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숙고하며 전문성으로 대처하는 전략센터가 있기는 할까?” 그는 이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거나 증명하기보다는 “변화무쌍함에서 불변을 상수”(207면)로 찾는 데 만족한다. 끝으로, 서구 자본주의의 변화는 슈트렉의 말대로 자본의 능동적 전략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도전이라는 지경학적 요인을 빼놓고 설명하기는 어려울진대, 그는 한번도 이를 동인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시간 벌기’는 자본주의의 중심뿐 아니라 이에 다가서려는 한국에서도 나타난다. 민주적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경험을 가질 기회조차 없었던 한국이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한 것은 선진국에서 이미 인플레이션과 공공부채 전략이 한계에 부딪히고 신자유주의가 지배적 위상을 확보한 시점이다. 자세한 연구가 뒤따라야 하겠지만 한국은 공공부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민간부채와 재정건전화 국가의 단계로 돌입한 듯하다. 민간부채도 1997년 경제위기 전에는 기업 중심이었다가 이후에 가계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자본주의 ‘시간 벌기’의 짐을 개인과 가족이 몽땅 짊어지는 기형적 구조가 정착한 셈이다.
유럽에서 한국과 유사한 경로, 즉 권위주의에서 민주화를 경험하면서 유럽 자본주의 시스템에 편입된 스페인의 사례는 의미심장하다. 스페인은 2000년대 중반까지 민간부문이 무리한 부채를 누적했지만 국가재정은 모범적이라고 불릴 만큼 건전했다. 하지만 2008년 세계위기가 터지면서 금융부문이 붕괴하는 상황이었고, 이를 막기 위한 정부의 개입으로 민간부채가 공공부채로 전이되면서 재정위기를 당했다. 이처럼 직접적이고 즉흥적인 방식으로 활황과 위기가 급속하게 전파되는 금융화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도 『시간 벌기』는 유용하며, 세계 자본주의 속 한국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