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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힐러리 로즈‧스티븐 로즈 『급진과학으로 본 유전자, 세포, 뇌』, 바다출판사 2015
집단최면에 빠진 첨단 생명공학
이두갑 李斗甲
서울대 서양사학과·자연대 협동과정 교수 doogab@snu.ac.kr
1976년 캘리포니아 대학 쌘프란시스코 분교,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한 사람이 생화학자 허버트 보이어(Herbert Boyer)의 실험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씨티은행에서 벤처캐피털을 담당하는 로버트 스완슨(Robert Swanson)이었다. 보이어는 유전공학의 기반기술이었던 유전자재조합기술의 특허를 막 출원한 상태였다. 당시 그의 기술이 지닌 의학적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정작 대학 실험실에서 개발된 한 기초생물학 기술을 통해 이윤을 얻는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보이어와 같이 유전자재조합기술을 개발한 스탠포드의 유전학자 스탠리 코헨(Stanley Cohen)은 특허출원조차 주저했으며, 대학 기술이전국의 지속된 요구에 마지못해 특허를 출원했을 정도였다.
당시 씨티은행에서 해고될 위기에 있었던 스완슨은 자신의 운명을 거는 모험을 택했다. 적당한 투자자를 모집하지 못한 그는 자신과 보이어의 돈을 반반 출자해 제넨텍이라는 유전공학회사를 설립한다. 불과 몇년 만에 보이어의 실험실은 유전공학기법을 사용해 인간 인슐린을 대량생산할 수 있음을 보이며 클라이너 퍼킨스라는 벤처캐피털 회사의 큰 지원을 받게 된다(클라이너 퍼킨스는 후에 구글과 페이스북에 초기투자해 큰돈을 번 씰리콘밸리 벤처캐피털 회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80년 제넨텍은 유전자를 상징하는 디엔에이(DNA)라는 기호로 월 스트리트에 상장되었다. 보이어는 주식상장 당일 즉각 4천만 달러의 부를 획득했으며, 이 소식을 듣고 고가 자동차인 포르셰를 사러 달려갔다고 한다. 보이어는 첫 분자생물학 백만장자의 전형이 되었다.
제넨텍의 성공은 보이어와 스완슨을 백만장자로 만든 것만이 아니었다. 당시 특허의 공동출원을 도모했던 스탠포드와 캘리포니아 대학도 2억 5천만 달러라는 특허권 사용료를 벌어들이게 된다. 제넨텍으로 대표되는 생명공학산업은 당시 불황에 깊게 빠져 있던 미국 경제를 되살릴 첨단 고부가가치산업으로 부상했다. 제넨텍의 성공 이후 많은 생물학자, 의학자, 그리고 연구대학 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러한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각종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지적재산권 관련 법률과 생물 및 인체 실험에 관한 규제와 윤리를 정비했다. 환자들은 각종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마법의 약을 약속하는 생물학자들에게 도덕적 찬사와 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힐러리 로즈(Hilary Rose)와 스티븐 로즈(Steven Rose) 부부의 『급진과학으로 본 유전자, 세포, 뇌: 누가 통제하고 누가 이익을 보는가』(Genes, Cells and Brains: The Promethean Promises of the New Biology, 2013, 한국어판 김동광·김명진 옮김)는 생명공학의 부상을 둘러싼 이러한 ‘열광’이 현재까지도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저서이다. 각각 과학기술학자와 신경과학자인 저자들은 생명공학을 둘러싼 이러한 열광이 왜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는지를 살피면서, 이것이 앞으로도 요원할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생명과학의 첨단분야인 유전체학, 줄기세포를 위시한 재생의학, 그리고 신경과학 영역에서 나타난 인식론과 개념상의 예기치 않은 변화와 새로운 발견 들을 살펴본다. 우선 이들은 유전체학의 최근 연구결과가, 하나의 유전자가 하나의 형질 혹은 질병을 일으킨다는 환원론적이고 기계적인 유전자 개념의 붕괴를 불러왔음을 지적한다. 즉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아는 것만으로는 생명현상을 이해하기 힘들며, 이러한 환원주의를 넘어 유전자와 환경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전자 염기서열의 분석이 생물학과 의학의 ‘성배’라며 정치인들과 대중에게 유전체학에 대한 열망을 일으켜온 과학자들을 비판한다. 또한 줄기세포와 신경과학 영역에서도 과학자들이 미래에 달성할 수 있는 생물학적·의학적 혁신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미래를 금전화하기에 바쁘다고 이들을 공격한다.
저자들은 규제와 윤리 영역의 정부정책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다. 대학의 학자와 정치인, 대중이 마법 같은 혁신을 통해 치료와 경제성장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 것처럼 각종 생체·인체 실험에 대한 윤리적 비판의 고삐를 늦추는 상황에서 그 의학적 활용에 대한 정부규제 역시 완화되었다는 것이다. 1999년 유전자치료 시험 중이던 18세 소년이 사망하기도 했으며, 줄기세포에 관련된 치료가 지구적 차원의 규제체계 미비로 임상시험을 거치지 않은 채 전세계 곳곳에 널리 퍼지고 있다. 저자들은 각종 유전자검사의 대중화로 새로운 우생학적 사고가 생겨나고 있으며, 신경과학의 발전이 지능의 향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두뇌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미리 발견하여 이를 치유할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이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책은 무엇보다 21세기 생명공학과 연관된 많은 연구 프로젝트와 벤처산업이, 유전학과 줄기세포 등의 재생의학, 그리고 신경과학을 통해 커다란 수익을 얻으려는 자본과 이를 통해 경제성장과 의학혁신을 기대하는 정부 및 정치권의 결탁을 통해 행해지고 있음을 주의깊게 살펴봐야 한다고 경고한다. 일례로 각종 유전자 염기서열과 지도, 환자들의 기록, 두뇌기능 등에 관한 막대한 양의 데이터베이스가 생명공학에 대한 열망에 기대어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수집·사용하는 윤리적 문제와 관련한 프라이버시 이슈에 대해서는 정작 정부가 적절한 대처를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생명공학 벤처기업들을 위해 자신의 유전정보와 세포, 두뇌영상 등을 제공한 환자나 실험대상의 이익은 간데없고, 의학 데이터와 실험결과의 지적재산권이 산업체에 양도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과학자와 산업체, 정부와 환자들 모두 생명공학에 환호하고 이를 지원하지만, 그 성공에 대한 보답은 특정한 이들에게 집중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각종 첨단 과학기술 발전과 생명공학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생명공학에 열광하는 과학자와 산업계, 정부와 대중 모두가 과학기술의 발전과정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이로 인해 열린 새로운 의학적·경제학적 지평을 고찰해야 하며, 거기서 나타날 성과들이 민주적이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성찰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해주는 의미있는 연구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