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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백원담‧강성현 엮음 『열전 속 냉전, 냉전 속 열전』, 진인진 2017

냉전 지식의 실험실, 한반도라는 현장

 

 

임유경 林惟卿

연세대 비교사회문화연구소 전문연구원 limyu1@naver.com

 

 

177_465한국전쟁이 어떤 전쟁이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이후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고찰하려는 시도는 많이 있어왔지만, 이 문제를 ‘냉전 아시아의 사상심리전’이라는 관점에서 집중적으로 파고든 사례는 드물다. 최근에 출간된 『열전 속 냉전, 냉전 속 열전: 냉전 아시아의 사상심리전』이 주목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이 책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의 ‘냉전적 학지팀’이 2년 동안 진행한 연구의 결과물로, 여기에는 한국, 일본, 대만, 홍콩, 중국 등지에서 활동하는 학자 12명이 저술한 10편의 논문이 실렸다. 총론 성격인 백원담(白元淡)의 글은 냉전연구사에 대한 이해를 도울 뿐만 아니라, 기존의 냉전적 학지(學知)에 ‘아시아가 어떻게 개입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일정한 비전을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이 글은 필자들이 공유하는 특정한 문제의식을 확인시켜주는데, 저자의 표현을 빌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시아에서 새로운 냉전 연구는 냉전적 학지가 형성·전개되면서 그 자체로 냉전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어 온 강고한 역사 구조와 대면하고, 이를 해명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33면)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실 동아시아연구소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연구목표이자 취지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문화로서의 아시아’라는 어젠다를 통해 아시아의 사상, 제도, 일상을 폭넓게 연구하기 시작한 동아시아연구소는 일찌감치 “학지 생산과 유통의 서구 중심성을 극복하고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 연구’를 통해 탈냉전적 지역문화지식의 새로운 지형을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는데, 이 점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의 근저에는 서구에서 생산되는 냉전의 주류 서사와 그 구조를 떠받치는 자본주의/공산주의라는 대립적 이항관계만으로는 한반도, 나아가 아시아의 냉전 문제를 충분히 다루거나 입체화할 수 없다는 고민이 깔려 있다. 미국과 소련은 냉전시대의 종주국이었던 만큼, 이 두 축을 매개하지 않고 전지구적 냉전에 대한 이해를 구성하기는 어렵지만, 냉전 연구의 진폭이 좀더 확대되려면 냉전의 축들을 새롭게 설정하고 복잡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단지 세계적 냉전 연구를 보충한다는 차원을 넘어, 대안적 학지의 구성과 이를 통한 냉전 연구 지형의 재편에 기여한다는 목표를 갖는다. 또한 이 축들이 회전하는 동안 맞닿게 되는 여러 면들은 기존의 관점으로는 충분히 포착되거나 기술될 수 없었던 전지구적 냉전의 풍경들을 풍부하게 드러내줄 것이며, 이것은 곧 여러개의 근대 기획과 복수의 아시아, 그리고 냉전‘들’에 관하여 사유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건대 저자들이 시도하는 일련의 작업들, 이를테면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고 효과적인 분석틀을 고안하는 일은 “아시아 자체의 냉전 아카이브를 형성하는 주체적 맥락화 과정”(50면)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즉 ‘냉전 아시아’에 관한 연구는 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민족에 의해 행해진 반식민지 민족해방과 근대국가 건설의 과정을 규명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며, 또한 반대로 탈식민화와 국가건설에 관한 논의는 당시 아시아에서 서로 다르게 경험된 냉전을 더욱 다채롭고 풍부하게 드러내줄 수도 있다. ‘탈식민적 냉전’ 틀의 유효성에 대해 질문하며, 한국, 중국, 홍콩, 대만, 인도네시아 등이 경험한 식민과 냉전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논의의 결을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20세기의 기본적인 정치 경험을 형성한 것은 의회 정부와 민주적 정당기구가 아니라 전쟁과 혁명”(『정치의 약속』, 김선욱 옮김, 푸른숲 2007, 237)이었다고 말하며, 강제력과 파괴수단의 엄청난 성장에 관심을 기울인 바 있다. 그녀가 무엇보다 주시했던 것은 원자폭탄의 발명이었다. 제1차세계대전 때 처음으로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대규모 기계화 전투에서부터 이후의 원자폭탄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발명’의 도정은 ‘강제력이 국제 문제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라고 생각했다.

한나 아렌트에게 영감을 주었던 대상이 ‘원자폭탄’이었다면, 『열전 속 냉전, 냉전 속 열전』의 저자들에게 그것은 아마도 “사상심리전”이었다. 이 책의 첫 장에 실린 글이 냉전 아시아에서의 사상심리전 연구가 갖는 의의를 설명하기 위해 메타적 차원에서 냉전 연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면, 이후의 지면들은 이러한 사상심리전의 진행 과정과 그로 인해 파생된 다양한 결과들을 밀도 있게 탐구함으로써 “아시아에서의 냉전을 세계사의 지평에 중층적으로 맥락화할 수 있는 방법적 경로”(34면)를 모색하는 데 할애된다. 각론을 맡은 필자들의 구체적인 관심사는 약간씩 다르지만, 이들의 연구는 ‘냉전학지의 형성’과 ‘사상심리전’이라는 두가지 공통된 학술 의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접합점을 갖는다. 시기적으로는 아시아·태평양전쟁기부터 1950년대까지를, 공간적으로는 한반도와 거제도, 일본과 오끼나와, 중국과 대만 진먼다오, 필리핀 등을 포괄하며 냉전 아시아의 사상심리전을 폭넓게 살피고 있는 것이다.

연속성을 갖는 이 일련의 연구들은 ‘사상심리전’이라는 렌즈를 통해 한국전쟁의 의미, 나아가 아시아 냉전의 풍경들을 새롭게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학술적 성취라 할 수 있다. 특히나 한국전쟁을 중심에 놓고 냉전적 학지의 생산구조를 분석하고 그 과정에서 제안되고 실행된 심리전의 양상을 규명하려는 여러 필자의 공통된 시도가 서로를 잇고 보충함으로써 한층 풍부한 논의를 만들어낸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들의 연구는 한국전쟁을 매개로 하여 군학복합체가 생산한 냉전지식의 성격을 밝히고 그 일환으로 제안된 심리전의 특징과 효과를 분석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군과 학의 미묘한 균열과 현지와 본국 사이의 간극을 주시함으로써 냉전적 학지가 특정한 메커니즘 속에서 예상치 못한 갈등과 부침을 거치며 구성되었던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제시해준다. 이러한 연구가 기존과는 다른 시각을 통해 확보한 학술적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냉전지식의 실험장으로서의 한반도, 즉 한반도라는 ‘현장’에 주목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강제력과 파괴수단의 엄청난 성장은 기술 발명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공적 정치 공간이 근대세계의 이론적 자기기만 안에서, 그리고 잔인한 현실 안에서 강제력의 광장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치의 약속』 189면)

 

아마도 이 책을 덮고 나서 한나 아렌트가 떠올랐던 것은 무엇보다 이 구절이 생각났기 때문인 듯하다. 이 말을 여기서 상기해보는 까닭은 이러한 통찰이 어떤 점에서는 ‘종주국들의 원자폭탄’보다 ‘냉전 아시아의 사상심리전’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한국전쟁기에 본격화된 ‘사상심리전’이 매우 긴 시간 동안,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를 무겁게 짓누르며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