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올해 예심위원으로 신용목 안현미 황규관(이상 시 부문) 심진경 이경재 황정아(이상 소설 부문) 백영경 이남주(이상 비문예 부문)를 위촉했다. 예심위원들은 만해문학상 운영규정에 따라 등단 10년 이상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최근 2년간(2017년 5월 31일까지) 출간된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예심을 진행하였다. 각 부문별로 진행한 예심회의에서 논의 끝에 아래와 같이 시집 5종, 소설 5종, 비문예물 2종(총 12종)을 본심 진출작으로 선정했다.
김언희 『보고 싶은 오빠』, 김정환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 김해자 『집에 가자』, 도종환 『사월 바다』,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이상 시), 김이설 『오늘처럼 고요히』, 김탁환 『거짓말이다』, 은희경 『중국식 룰렛』, 정이현 『상냥한 폭력의 시대』, 황정은 『아무도 아닌』(이상 소설), 민종덕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평전』,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이상 비문예).
마찬가지로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가 위촉한 4인의 본심위원들은 8월 5일 1차 본심을 열고 총 12편의 본심 진출작을 대상으로 한 심사에서 앞의 발표문에 나온 대로 시집 2종, 소설집 3종, 비문예물 2종(총 7종)을 ‘최종심 대상작’으로 결정했다. 만해문학상은 2016년에 개편된 방식에 따라 최종심인 2차 본심에서 수상작(상금 3천만원)을 선정한다. 아울러 본상과 다른 장르의 작품에 특별상(상금 1천만원)을 수여할 수 있다. 9월 중순의 2차 본심(최종심)을 거쳐 10월 초 2017년 만해문학상 수상작이 결정되며 본심위원 명단 및 자세한 심사평은 『창작과비평』 2017년 겨울호에 발표된다.
최종심 대상작 7편에 대한 예심평은 다음과 같다.
최종심 대상작 예심평
시 부문
김정환의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은 역사와 인식에 대한 거침없는 발화를 이어가면서도, 일상의 연민과 슬픔까지 끌어안는 보폭을 내디뎠다고 할 만하다. 이때 ‘몸’과 ‘지명’의 구체성은 인간이 어떻게 시대적 특수성을 감당하는가를 윤리적으로 드러내는 지표일 것이다. 우리가 공히 맞닥뜨린 사건에 대해 집요하게 되물으면서도, 시간을 넘나들고 공간을 뒤바꾸며 인간의 삶을 한데 얽어나가는 언술들은, 역사가 마땅히 지녀야 할 보편성의 가장 먼 곳에서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론의 한 전범을 보여준다. 그때 문맥에 얼비치는 죽음과 슬픔의 정조는 마치 정신의 갑옷 같은 것이어서, 우리가 패배와 절망의 무게를 짊어짐으로써, 이 공포와 지옥을 극복할 수 있다고 북돋우는 듯하다.
허수경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에는 일상의 비애 가운데서도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인류 자체의 감각과 마주한 채 운명과 대결하려는 순간들이 포진되어 있다. 그것은 고고학이나 디아스포라처럼 단순화된 기표로 유추되는 게 아니라, 시간의 절대성과 공간의 상대성 속에 놓인 인간의 고통과 결핍을 존재론적 증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래서 타자의 서사로 맞닥뜨린 전쟁과 궁핍의 역사를, 화자가 자신의 목소리로 동참하는 방법으로써 그는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그의 시는 어떤 정치적 타산이 개입할 여지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가장 정치적인 한순간을 선보이는데, 이는 일부에서 난해한 문법 속에서만 호명되어왔던 한국시의 다른 가능성을,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를 통해 제시하는 귀한 사례일 것이다.
소설 부문
은희경의 『중국식 룰렛』에는 특유의 단단한 구성과 엄밀한 서술로 빚어진 여섯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여기서 인물들은 크고 작은 실패를 안고 살아가지만 이 실패는 심각한 부덕이나 결정적 실수보다 제 몫으로 주어진 삶을 따르다보니 도리 없이 생긴 궤적에서 비롯된다. 그 점이 은희경 소설의 예리함이지만, 이 소설들에는 실패가 역설적으로 만들어낸 가능성 또한 미세한 불연속적 흐름으로 새겨져 있다. 삶의 한계를 한사코 부인하거나 거칠게 돌파하는 대신, 엄격한 절제와 더불어 그 안에 머묾으로써 가까스로 진실과 미덕을 살려내는 식이다. 그와 같은 미시적이고 스토아적인 삶의 윤리가 『중국식 룰렛』을 관통하는 주된 매력이다.
정이현의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지리하고도 섬뜩한 삶의 속내를 냉혹하게 절개하거나, 그런 가운데서 드물게 이루어진 연약한 소통을 그려낸다. 흔히 정이현의 소설에 붙여지는 세태나 발랄이라는 말에 더는 귀속되지 않는 이 시대 세속의 주요 면면들이, 여기서 단지 폭로되고 냉소되기를 넘어 그 인간적 의미를 정식으로 심문받는다. ‘상냥’과 ‘폭력’의 외설적 결합을 성찰하는 이 작업은 냉담과 감상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문장으로 수행된다. 각각의 단편 어느 것도 다른 것을 연상시키지 않을 만큼 다양한 인물과 소재를 다룬 점도 정이현의 솜씨를 입증한다.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에서 ‘아무도 아닌’ 존재들은 폭력적 현실을 두고 분리와 개입, 저항과 투항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이 갈등이 야기한 불안이야말로 그들의 윤리감을 떠받치는 역설적 토대다. 황정은은 일상적으로 경험되지만 실제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미묘한 윤리적 불안을 민감한 자의식을 통해 그려냄으로써 인물들의 삶을 풍성하고 깊이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들을 ‘아무도 아니게’ 만들고 또 갈등하게 하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적대라는 뚜렷한 맥락을 가지며, 그 때문에 개별 인물에게 윤리의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작품 전체로는 정치적 함축마저 갖게 된다. 황정은의 소설을 ‘민중문학’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문예물
이소선은 전태일의 어머니이자 오랜 세월 노동운동을 넘어 핍박받는 자들의 어머니로서, 그 이름 석자는 전태일의 희생 이후 한국현대사의 투쟁 현장에 대한 기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한 사람의 생애가 역사의 흐름을 관통할 때 그 삶을 기록하는 사람에게는 역사가로서 시대를 탐구할 의무에 더해서 마치 구도자처럼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책무가 주어지게 된다. 더욱이 식민지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나 도시빈민으로 살아가면서 갖은 차별과 삶의 아픔을 겪었으나 이를 감수하기보다는 언제나 당차게 맞서면서 살아온 이소선의 삶은 자칫 쉽게 어머니로서, 투사로서만 전형화되어버릴 위험이 있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평전』은 언제나 누군가의 어머니로만 상상되어온 그가 실은 인간 전태일과 이후 무수한 전태일들을 가능하게 한, 스스로 우뚝한 존재였음을 알게 해주는 미덕이 있다.
1980년 5월 군부의 권력찬탈이 순탄하게 진행되었다면, 이들이 당시 광주에서 자행했던 폭력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반복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물론이고 이번 촛불혁명이 평화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데에는 1980년 5월 광주의 희생과 이를 올바르게 기억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따라서 촛불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 1985년 출간되었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의 전면개정판이 나온 것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 책은 내용적으로도 ‘개정판’이라는 형식을 뛰어넘는다. 우선 초판 발간 당시의 시대적 제약에서 벗어나 그동안 조사, 재판, 그리고 연구 등을 거치며 축적된 방대한 자료를 기초로 광주민중항쟁을 매우 충실하게 재현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이 광주민중항쟁을 폄훼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들과의 싸움이자 한국현대사상 드물게 기억투쟁에서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징표라는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역사가 과거라는 시간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 살아 있는 것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신용목 안현미 황규관 심진경 이경재 황정아 백영경 이남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