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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대전환, 어디서 시작할까
수구의 ‘롤백 전략’과 시민사회의 ‘대전환’ 기획
이남주 李南周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정치학. 저서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동아시아의 지역질서』(공저) 등, 편서로 『이중과제론』(창비담론총서 1) 등이 있음. lee87@skhu.ac.kr
“그럼 이제 독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나요?” 내가 물었다. “나치의 쿠데타, 아니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까요?”
베른하르트가 웃었다. “열정을 아직 잃어버리지 않았네요. 정말! 난 그저 그 질문이 당신에게처럼 내게도 중대해 보이기를 바랄 뿐이에요……”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베를린이여 안녕』, 272면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의 『베를린이여 안녕: 베를린 이야기 2』(성은애 옮김, 창비 2015)는 동성애자이면서 외국인(영국인)인 작가가 “셔터를 열어놓고. 생각하지 않으며, 수동적으로, 기록만 하는” 태도로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기 직전의 베를린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위의 인용문은 작가(나)와 이미 나치로부터 협박편지를 받고 있던 유대인 백화점 관리인(베른하르트) 사이의 대화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평소의 조심스러운 태도에서 벗어나 당시 베를린의 정치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베른하르트의 반응에 “요새 같으면 충분히 중대한 문제로 보일 텐데요”라고 반박을 하려다 말기도 한다. 나치운동에 동참한 이들과 일부 공산주의자를 제외하고는 이 소설의 다른 독일인 등장인물들이야말로 시종일관 당시 상황을 말 그대로 수동적으로 바라만 보거나 이를 수용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지금 관찰자 시점이라는 우위에 서서 이들에게 어떤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라고 묻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에게 같은 질문이 던져지고 있다면 다른 반응과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한다.
1. 위기의 심화와 위기담론
박근혜정부 3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국가는 심각한 위기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 경제의 돌파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사이에 나쁜 분배와 저성장의 악순환이 고착되었다. 새해 들어서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다시 커지고 있는데 우리 경제의 높은 해외의존도를 고려하면 이는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둘 이상의 태풍이 충돌하여 그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커지는 현상)을 몰고 올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북의 4차 핵실험으로 남북관계와 동북아질서의 토대도 변했다. 북한 핵능력이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는 수준을 향해 발전하고 있음에도 정부는 여전히 제재강화라는 낡은 방송만 되풀이하며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실행 가능한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제든 우발적인 군사충돌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제 국민의 삶과 생명이 직접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국가위기라는 현 국면에 대한 진단에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위기담론의 확산은 민주개혁세력에 유리하게만 작용하지 않는다. 위기의식이 정권에 의해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기담론은 야권 및 시민사회는 물론이고 정부·여당에 의해서도 호출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골든타임”이라는 표현을 남발한 지 오래되었고, 김무성(金武星) 새누리당 대표도 올해 신년기자회견에서 “위험과 불안의 시대”라는 화두를 들고 나왔다. 정권심판론을 정치심판(사실상 야당심판)론으로 덮고 국가적 위기상황을 정국 주도의 호재로 만들려는 낯익은 시도이다. 새해 들어 야당심판론을 총선의 핵심 의제로 부각하려는 의도가 더욱 노골화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총선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은 국가위기의 책임을 야당과 시민사회에 돌리려는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민주개혁세력은 박근혜정부가 저지른 그동안의 각종 실정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활동을 부지런히 펼쳤지만 국민적 공감대를 크게 넓히지는 못했다. 각종 여론조사에 나타난 박근혜정부의 지지율은 여전히 40% 전후로 안정되어 있다. 높은 지지율은 아니지만 의회와 야당의 지지율보다 높다는 이유로 정치적 주도권을 계속 행사할 수 있는 수준이다. 더구나 의석수에서 여당 내 압도적 다수를 점할 뿐 아니라 여당의 풍향을 좌우하는 영남에서의 지지도는 전국 기준보다 훨씬 높다. 따라서 여당의 시녀화를 강요하고 이를 통해 의회와 야당까지 무력화하는 메커니즘을 작동시킬 수 있다. 국가위기의 심화 속에서도 위기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세력들의 정치적 지배력이 더 높아지는 역설적 상황이다. 가장 심각한 위기는 여기에 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진행되는 실천이 좋은 성과를 얻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이 출현한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박근혜정부에 대한 민주개혁세력의 비판이 현 국면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기초하기보다는 “박근혜정부는 원천적으로 ‘악’이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이미지와 박근혜 대통령 자신의 유신시대에 대한 향수, 권력기관의 선거개입과 그 덕을 본 후보자의 당선이라는 정통성 문제 등이 적지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전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는 다수 국민과 유권자에게 설득력이 있는 비판은 아니며 진영논리에 갇힌,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비치는 경우가 많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정부는 근본적인 원칙에 대한 문제마저 정파적 견해들 사이의 지루한 다툼으로 전락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에 대한 비판을 무디게 만들었다. 이러한 방식은 종편 등의 지원을 받아 꽤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는 나아가 위기의 책임을 야당과 시민사회에 돌릴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현재 국가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 박근혜정부를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나아가 위기극복 방안을 만드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야당은 그때그때의 반사이익에 기대어 현상유지를 하는 데 급급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아니, 대국적인 현실인식과 대안적 비전의 결여로 전반적인 무기력증에 빠져 정치인 개인이나 계파의 이익 이상의 것을 생각할 여력을 상실한 것도 같다. 지난 1월 문재인(文在寅)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근혜정부 3년이 국가의 “총체적 위기”를 초래했다고 일갈했지만 상황의 심각성이 얼마나 전달되었는지는 의문스럽다. 이 역시 야권의 상투적 비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만약 야권이 위기의 본질을 더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극복할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면 정치권의 분열도 지금처럼 확산되지 않았을 것이고, 설사 선거를 앞두고 분열상이 나타나더라도 정치적 중심이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정치권에서 앞으로도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가 이에 대한 논의를 시급히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수구세력의 ‘롤백 전략’ vs. 대전환
현재 위기국면은 이명박정부 출범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 우리 사회에서 민주적 거버넌스(governance)가 어디까지 진전될 수 있는가 혹은 어느 정도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를 둘러싼 대립이 다시 전면화되었다. 우리 헌법이 주권재민을 원칙으로 하고 국가의 성격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적 거버넌스는 원칙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6월항쟁을 거친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민주주의 자체가 매우 논쟁적인 개념이고 여기에 거버넌스라는 개념이 추가되면 사태는 더 복잡해진다. 특히 권력의 구성과 구성된 권력에 의한 통치 사이의 관계에 해결하기 어려운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1) 민주적 거버넌스에 내재한 일반적이고 개념적인 문제들에 대한 논의를 다시 하자는 것은 아니다.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어느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민주적 거버넌스의 내용과 형식이 사실은 이를 부정하는 토대 위에서 작동해왔다는 점이다. 즉 분단체제하에서 민주적 거버넌스를 제약하는 제도적·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 뒷문으로 정치체제에 도입되었다. 여러차례의 헌법개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남아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광범하게 제약하는 국가보안법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는 비판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게 해주는데, 법의 작용이 법의 중단을 통해 완성되는 ‘예외상태’의 일상화가 작동하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징표이다.2) 민주주의 수호라는 이름 아래 반민주적 통치행위가 허용되는 역설적 상황은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다. 우리 사회의 수구 헤게모니도 이를 토대로 해서 구축되었다.3)
한국사회의 이러한 특징을 염두에 두면 1987년 이후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진전이 갖는 성과와 한계를 한층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87년 6월 민주화 대항쟁을 거치며 민주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국가운영 원칙이자 목표로서의 위치를 확보했다. 이는 보수정부하에서도 부정되지 않았고 보수세력 내에서 수구 헤게모니도 뚜렷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수구세력들은 민주적 거버넌스를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민주적 거버넌스의 진전이 ‘예외상태’의 작동공간을 침식했고 이는 수구세력의 기반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불안감은 김대중정부 시기부터 남북화해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러한 위기의식으로 보수세력 내에서 수구가 다시 헤게모니를 강화하기 위한 시도에 나섰다. 그 주된 수단은 분단체제의 적대적 상호의존 메커니즘을 적극 동원하는 것이었으며 ‘종북론’의 확산을 돌파구로 삼았다. 이는 자신에 대한 비판자들의 발언권과 정치적 생존권을 박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담론이라는 점에서 다른 정치적 논쟁구도와 성격이 다르다. 이명박정부 출범과 함께 1987년부터 진행된 민주화의 성과를 무화하려는 시도가 집권층 주도로 시작되었다. 즉 수구보수연합 정부의 출범과 함께 수구세력이 민주주의에 대한 일종의 ‘롤백(roll back, 뒤로 되감기) 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따라서 이명박정부를 1987년 이후 노태우·김영삼정부와 같은 성격의 보수정부로 분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남북관계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남북대결/분단체제의 강화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라는 수구세력의 전략이 작용한 결과이다.
민주개혁세력은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퇴행적 현상을 역주행으로 규정했고 그 연장선에서 이른바 3대 위기론(민주주의·민생·남북관계의 위기)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이명박정부 이후 변화가 ‘87년체제’의 큰 흐름을 되돌리려는 시도의 결과라는 사실을 환기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두가지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첫째,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가 하는 구조적 원인에 대한 설명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둘째, 새 정부의 행태적 특성의 나열이었지 수구세력의 헤게모니 강화와 민주적 거버넌스의 변경을 위한 체계적 전략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이명박정부하에서 진행된 수구세력의 롤백 전략은 촛불항쟁 등의 저항에 직면해 뜻한 대로 진전되지는 못했다. 2010년 천안함 침몰을 계기로 ‘예외상태’를 호출하고 수구 헤게모니를 강화하려고 시도했지만,4) 그 직후 지방선거의 패배로 순조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때 발표된 5·24조치는 남북관계의 진전에 자물쇠를 채웠고, 종북논리와 남북대결의식을 조장하는 데 큰 위력을 발휘했다. 그뿐 아니라 종편 허가, 국정원의 정치화 등 롤백 전략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장치들을 구축했다. 이 시기 수구보수동맹 내에도 수구적 경향과 부조화를 느끼는 흐름이 없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수구 헤게모니가 큰 어려움 없이 복원되어갔다. 여기에는 다른 대안에 비해 수구 헤게모니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 효과적으로 보호해줄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겠지만, 수구세력에 장악된 국정원, 검찰 등의 통치기구가 보수세력을 훨씬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구보수동맹이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를 거두자 롤백 전략이 전면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조건이 갖춰졌다. 따라서 민주개혁세력으로서는 승리할 수 있었던, 그리하여 롤백 전략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던 2012년 양대 선거에서의 패배가 매우 뼈아픈 일이다.
이러한 변화에서 우리는 다음 두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진전은 예외상태의 일상화를 허락하는 법적·제도적·이념적 요인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기 어렵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근원적 대립이다. 한국사회가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히 행정부의 교체가 아니다. 예외상태의 일상화를 차단할 수 있게 하는 사회의 ‘대전환’이 수반되어야 한다.5)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도 ‘민주 대 독재’의 구도 속에서 이해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개혁세력 스스로도 민주주의의 의미를 ‘민주 대 독재’ 구도로 왜소화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전시키고자 하는 민주주의는 훨씬 발본적인 전환의 토대로서의 민주주의이다.
둘째, 이러한 대전환을 목표로 하는 노력들은 수구세력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수구세력의 매우 적극적인 정치적 동원은 우발적이고 정세적인 대응이 아니라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하여 한국사회를 자신의 구상대로 재편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같은 시도를 막아내는 것은 우리 사회의 최대과제 중 하나이다. 다른 사회에서 유효한 그 어떤 정치전략도 이러한 과제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올바른 방편이라 할 수 없다.
수구세력이 롤백 전략을 추진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진 것은 불행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근원적 대립이 드러났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역사의 간지(奸智)’에 의한 진전이 이루어지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전환에 이르기까지는 더 힘들고 고단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현실이고 수구세력의 롤백을 허용한 원인에 대한 자기성찰이 없이는 대전환의 길은 요원하다. 더구나 우리는 롤백 전략이 새로운 국면, 더 심각한 국면으로 진입하는 사태를 먼저 직면하고 있다.
3. 롤백 전략의 새로운 국면: 점진 쿠데타의 특징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수구보수동맹이 승리한 이후 민주적 거버넌스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 시작되었다. 이 선거들에서 수구보수세력이 경제민주화나 복지 같은 시대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취했던 것이 승리에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박근혜정부는 출범 직후 주요 공약을 폐기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이라면 그나마 유력한 민주주의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선거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대선 당시의 댓글 사건과 그에 대한 처리과정에서 나타난 문제까지 고려하면 그러한 의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세월호사건의 발생과 수습 과정에서 보여준 문제는 “도대체 이것이 나라인가?”라는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없을 수 없는데 박근혜정부는 정치적 공간을 위축시키고 폐쇄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통진당 해산, 집회 및 시위에 대한 탄압,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 대한 소요죄 적용 시도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사태가 이쯤에 이르면 박근혜정부의 행태를 단순히 역주행을 계속하고 있다는 식으로 규정하는 것이 현 상황에 대한 올바른 진단인지 의심스러워진다. 그간의 변화에 대해 두가지 상반된 이해방식이 있다. 하나는 현 상황을 민주주의의 폭과 수준을 둘러싼 갈등국면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이해방식을 따르면 현 국면은 다른 나라의 정치에서 나타나는 보수와 진보 사이의 싸이클 내에서 출현하는 변화와 큰 차이가 없다. 한국사회의 퇴행적 현상도 ‘언젠가’ 선거를 통해 권력을 교체하면 해결될 문제이다. 야권 지지층에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여전히 다수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의 기반이 이미 무너진 상태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논리는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시민들이 총궐기 같은 더 직접적인 저항과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두 설명은 모두 상황의 한 측면씩만 보는 것이다. 첫째 설명은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수구세력의 움직임을 민주적 거버넌스를 전제로 하며 진행되는 정치적 경쟁이라는 틀로 해석하는데, 이들이 민주주의의 거버넌스 자체를 부정하려는 일관된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특히 롤백 전략이 전면적이고 다면적으로 추진되는 상황에 대한 적절한 진단이 되기 어렵다. 둘째 설명은 그동안의 시민사회의 진전, 그리고 민주적 제도들의 효과 등을 간과한다. 수구세력의 헤게모니 강화와 민주주의적 메커니즘의 무력화 등을 목표로 하는 행위들이 큰 문제지만 이것이 그동안 이룩된 민주화의 성과를 하루아침에 부정하지는 못한다. 민주적 거버넌스를 근본적으로 허물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의 힘이 결코 만만하지 않고 이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도 여전히 적지 않다.
현재 상황은 위의 두가지 설명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을 필자는 최근 ‘신종 쿠데타’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6) 그런데 ‘신종’이란 수식어로는 그 새로운 종류의 내용을 드러내는 데 한계가 있어 이하 ‘점진 쿠데타’(creeping coup d’état)로 표현을 통일해 사용하고자 한다. 이 표현이 당장 군사쿠데타를 연상시키고 그에 따라 총궐기 같은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저항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점진 쿠데타는 군사정변과는 사뭇 다른 사태의 진전이어서 그 차이에 주의하며 대응방안을 만들어야 한다.7) 점진 쿠데타는 배경, 목표, 방법과 수단, 내용과 효과 등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우선, 한 사회에서 지배연합이 내용적으로 민주적 거버넌스와의 전면적인 부조화를 느끼지만 민주적 거버넌스의 작동을 전격적으로 중단할 수 없을 때 점진 쿠데타 같은 거버넌스 변경 시도가 출현한다. 심화되는 공동체의 위기의식을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전화시킬 수 있다면 이러한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서 과거 진보세력 내에서 진행되었던 민주화와 ‘민주정부 10년’에 대한 비판적 논의들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비판이 민주화 과정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같은 비판은 주관적 의도와 관계없이 민주주의 일반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조장하고 민주적 거버넌스에 대한 수구세력의 도전을 더 손쉽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방식의 문제와 수구세력의 기획을 구별해 보아야 한다. 전자의 문제가 전면에 부각되기 쉬우나 점진 쿠데타는 수구세력 전체의 기획으로, 박근혜 개인의 권력연장이 아니라 수구세력의 영구적 헤게모니 확보를 추구한다. 즉 점진 쿠데타는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만들어진 국가운영의 기본원칙에 대한 부정이며 분단체제하에서 형성된 기득권을 영속적으로 유지하려는 시도이다. 물론 87년체제도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87년체제가 전적으로 부정적인 프레임이기 때문이 아니라 앞서 말한 것처럼 87년체제 내부에 이 체제가 지향하는 가치의 온전한 실현을 가로막는 요소가 내재하기 때문이다. 87년체제는 사회의 근본적인 전환을 꿈꾸는 국민의 열망을 상당부분 반영하기는 했지만 기득권세력과의 타협을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구적 요소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 게다가 1997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기존 발전국가모델은 해체된 반면 새로운 발전체제가 만들어지지 않은 채 독점적 대기업의 힘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경제적으로는 자유화가 민주화를 압도하고 보수적 헤게모니가 더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측면에서 87년체제가 극복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증가했다.8) 그렇지만 87년체제의 기본정신인 주권재민, 경제민주화, 평화적 남북통일은 앞으로도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주요 원칙이다. 87년체제의 극복은 이러한 원칙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을 과제로 삼아야 하며, 이것이 분단체제 극복과정과 연관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경험을 통해 더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점진 쿠데타는 그 반대로 이러한 원칙을 무력화하기 위한 시도이다.
점진 쿠데타는 민주적 거버넌스의 토대를 지속적으로 약화하고 이를 선거절차를 통해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선거와 쿠데타가 서로 모순적 개념처럼 보이나 히틀러나 일본 파시즘의 대두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다. 점진 쿠데타의 귀결이 반드시 독일이나 일본의 파시즘 체제와 같게 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9) 다만 거버넌스 성격의 근본적인 변화가 꼭 전격적이고 급진적인 파괴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님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점진 쿠데타를 통한 민주적 거버넌스의 급진적 부정은 가능하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또다른 질적 비약이 필요하다. 반면 이러한 변화에 대한 국민의 경계심을 낮춤으로써 수용성을 높이는 데는 그 점진성이 더 효과적이다. 즉 헌정의 급진적 폐기가 아니라 자신의 통치를 위협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세력과 제도를 무력화함으로써 영구집권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다. 민주적 거버넌스의 법적 형식을 전면적으로 폐기하지 않고서도 그 운영에서 자신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거버넌스의 질적 전환이 추진되고 있다면 그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10) 다만 어떤 경우에도 현재 상황을 일상적인 변화, 흔히 말하는 ‘business as usual’(평시업무)로 보아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180석 이상, 나아가 200석 이상을 확보한다면 어떤 변화가 발생할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80석까지는 아니더라도 여권이 안정적 과반수를 확보할 경우에도 상황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즉 올해는 역주행이 본격적으로 임계점을 넘어서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다가오는 총선은 물론이고 그후의 변화에 대해서도 사태의 심각성과 과제의 중차대함을 고려한 대응방안의 마련이 시급하다. 다시 강조하건대 단순한 독재반대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민주주의 수호’ 같은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비전으로는 점진 쿠데타를 저지할 동력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더구나 새누리당의 압승을 막음으로써 점진 쿠데타의 저지에 일조한다는 겸허한 자세가 아니라 자기 당의 승리가 그 자체로 한국사회의 대전환을 뜻한다는 식으로 나와서는 유권자의 빈축이나 사기 십상이다.
앞서 강조했듯이 민주적 거버넌스의 진전은 한국사회의 더 근본적인 전환을 실현할 때만 가능하다. 곧 대전환의 실마리를 다음 세 영역에서 만들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첫째는 민주주의 진전과 분단체제 극복과정 사이의 선순환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이러한 과정에 진입할 때 다른 영역에서의 질적 전환이 가능하다. 둘째, 경제민주화를 중심으로 경제사회의 구조전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생활영역에서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제도적 수준만이 아니라 직장을 포함한 삶의 영역에서 작동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제도적 수준에서 민주주의 진전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노력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제 단순히 ‘독재 반대, 민주주의 수호’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대전환을 위한 큰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정치주체를 형성해가야 한다.
4. 시민사회의 대응: 연합정치와 ‘시민정치’의 재활성화
현 국면에서 민주개혁세력의 대응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야권의 위기와 분열이다. 점진 쿠데타 같은 거버넌스 전환 시도는 선거를 통해 사후적으로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승인받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총선은 그저 정부의 ‘독주를 견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점진 쿠데타의 동력을 급격히 떨어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반대로 최근 몇차례의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승리하며 이전의 심각한 실정과 스캔들을 덮고 갈 수 있었던 사실을 보더라도 야권의 분열은 역주행이 임계점을 순탄하게 넘길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따라서 야권 위기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야권 위기의 근원은 2004년 총선에서 다수당이 되었던 열린우리당 체제의 퇴화에 있다. 현재 야권의 토대와 성격은 기본적으로 2000년과 2004년 총선을 거치며 형성되었다. 특히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과 2004년 총선을 거치면서 지지기반으로는 호남과 수도권 및 다른 지역의 개혁적 성향의 유권자가 결합했고, 정당 운영에서 상향식 의사결정방식과 참여가 강조되었다. 이는 야권의 개혁적 성향을 강화시키고 야권 지지세력을 정치적으로 활성화했다는 점에서 한국정치에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 동시에 이 체제가 그후의 주요 선거에서 대부분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받았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미 2006년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뒤로 열린우리당의 기반이 약화되고 불안정성도 높아졌다. 그럼에도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전개된 역주행에 대한 국민의 우려가 커지면서 2010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야당의 지지기반이 상당부분 복원되었고 2012년 총선을 앞두고는 과반수 의석 확보를 자신할 수 있을 정도로 세를 확장했다. 이는 야당 내부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민정치와 연합정치 활성화의 덕을 크게 본 것이다. 결국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빛과 그림자가 모두 나타났다. 일단 민주개혁세력이 정략적 지역연합이나 보수의 분열에 기대지 않고 수구보수연합과 사실상 우열을 가리기 힘든 일대일 구도를 만들었다는 점은 성과이다. 그렇지만 승리가 예상되던 선거에서 패하고 박근혜정부의 탄생, 그리고 현재와 같은 점진 쿠데타 국면으로의 진행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한계도 명확하다. 2012년 선거패배를 거치며 그 원인이 무엇이고 이를 극복할 방안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진행되지 못했다. 이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 이런 퇴화현상이 출현했을까? 우선 한국의 민주주의 토대가 수구세력의 반격에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한 인식이 부재했고, 따라서 이러한 도전에 맞서기 위한 정치주체의 강화를 주요 과제로 삼지 않았던 탓이 크다. 예를 들어 노무현정부의 대연정 구상은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던가. 순진할뿐더러 한국사회에 대한 근본적으로 잘못된 인식이 이러한 발상을 낳게 만들었다. 수구 헤게모니 강화와 그것이 초래하는 민주적 거버넌스에 대한 위협을 간과한 채 민주주의의 진전을 낙관했다. 그로 인해 수구세력 및 수구의 헤게모니에서 탈피하지 못한 보수에 손을 내밀었고, 수구 헤게모니를 극복하기 위해 협력할 세력과는 갈등을 초래했다. 그 결과는 지지기반의 급속한 붕괴였다.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에 있는가, 그리고 수구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한가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기는 했지만 야권 내에서 한국사회가 직면한 위기의 성격과 극복방안에 대한 공감대가 얼마나 넓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많다.
게다가 야권 당내에서는 변화의 요구와 새로운 사회적 역동성의 수용을 가로막는 기득권 구조가 강화되었다. 그러면서 2011년부터 안철수현상으로 표출되었던 유권자의 요구와 역동성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야권 내 기득권이라고 하면 호남이라는 지역기반에 안주한 정치인을 떠올리기 쉽지만 수도권 현역 의원이나 지역위원장의 기득권도 지나쳐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구성과 성격도 2004년 이후 큰 변화가 없다. 당원 증대 등 당의 조직적 기반이 확장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상향식 정당운영조차 기득권 보호장치로 전락할 수 있다. 새로운 세력이 들어와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은 호남이나 수도권이나 마찬가지다. 작은 기득권에 연연하며 더 많은 사람들과 통 큰 연대를 이루지 못했던 지난 과정이야말로 과연 야권이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를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지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권(受權)정당 혹은 수권세력으로서의 신뢰를 얻기는 어렵다. 수권세력으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통합 논의의 의미도 반감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문제가 반드시 파괴적 방식으로 해결될 이유는 없었다.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이가 남에게 떠밀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결단하여 가장 많이 내려놓음으로써 내부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갔다면,11) 이를 통해 수권능력과 대전환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갔다면 현재의 분열사태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고 또 일부의 이탈이 큰 충격을 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동안 혁신작업이 내부적으로는 수권정당으로의 재탄생, 외부적으로는 반동적 흐름의 저지와 우리 사회의 대전환 등을 명확한 목표로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 와중에 진행된 여러 혁신작업은 계파싸움의 볼모가 되었고 오히려 분열을 촉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2014년 3월 새정치민주연합의 창당과 함께 시도된 혁신작업은 지방선거가 잇달아 이어진 관계로 선거대응의 뒷전으로 밀렸고, 7월 재보궐선거 패배로 당대표가 사퇴함으로써 그 방안이 실행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 이후 문재인 대표 체제에서 비교적 충분한 시간과 의지를 갖고 혁신작업이 진행되었으나, 초기부터 공천규칙에 지나치게 집중했고 패권주의 시비를 불식하지 못한 탓에 계파갈등이 격화됐다. 특히 혁신방안 마지막 발표단계에서 주요 지도부의 출마 문제에 대해 혁신위의 입장을 발표한 것은 혁신위가 공천작업을 특정계파에 유리하게 끌고 가려 한다는 비판을 스스로 정당화해준 면이 있다. 결국 혁신위의 활동은 당내 분열을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분당사태 이후 인재영입과 이후의 비상대책위 체제 등을 통해 쇄신을 추진하고 있으나 아직은 이러한 작업이 일시적인 지지율 상승을 가져온 것을 넘어 우리 사회의 위기극복 방향을 제대로 제시한다고 보기 어렵다.
이같은 상황에서 시민사회가 감당할 일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힘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큰일을 꿈꾸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힘을 너무 얕잡아볼 일도 아니다. 또한 우리는 국민과 유권자가 항상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신의 요구를 분출해온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점진 쿠데타 시도에 대한 인식이 높아질수록 유권자는 자신의 요구를 표현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모색할 것이다. 시민사회가 대전환의 비전을 만들어내면서 이러한 잠재적 역동성이 표출되도록 하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선거를 앞두고 야권의 경쟁을 생산적 방향으로 끌어가려 노력해야 한다. 이는 2012년 당시의 연합정치론과는 다른 구상이다. 전국적인 여야 일대일 구도가 당시보다 더욱 어려워진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분열된 야권이 출혈경쟁이 아니라 경쟁과 연대를 조화시켜, 총선에서의 압도적 승리라는 집권세력의 목표를 좌절시키고 점진 쿠데타에 균열을 낸다는 발상이다. 이로써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2017년까지 이어지는 정국에서 주도권을 회복할 가능성을 지켜내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민사회는 각 야당에 대해 2004년 이후 누적된 내부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점진 쿠데타를 저지할지 설득력있는 답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성의있게 진행하는 정당이 결국 유권자의 지지를 받게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호남지역은 그러한 경쟁의 좋은 무대가 될 수 있다. 물론 이것만으로 총선에서 야권이 승리하기는 어렵다. 현행 선거제도에서 전국적으로 ‘일여야다(一與野多)’ 구도가 형성되면 야권은 참패를 면하기 어렵다.
따라서 수도권과 충청, 영남 등의 지역에서는 공개적이든 암묵적이든, 전국적인 범위든 지역적인 범위든 어떤 방식으로라도 선거연합이 추진되어야 한다. 적어도 표적공천이라거나 상대방의 출혈을 겨냥하는 ‘묻지 마 출마’ 같은 경쟁은 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수도권에서 더 강한 세력을 갖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의 책임있는 처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른 야권 정당들의 경우는 수도권과 영남에서 지혜롭게 선택과 집중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비례대표 득표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지역구에 후보를 내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있으나 과거 진보정당의 사례를 보면 비례대표의 득표율 제고가 반드시 지역구 출마자의 수와 직결되지는 않았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총선 승리를 위한 희생적이고 현명한 자세를 보여줄 때 오히려 야권 지지자에게 정당명부제 투표에서는 자기 정당을 찍어달라고 더 적극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 그리고 수도권, 충청, 영남에서 상징성이 높고 전국적 판도에 미치는 영향이 큰 구역의 경우 공동선거운동까지 포함하는 연대를 실현해야 한다. 이러한 연합을 위해 시민사회도 할 바를 다해야 한다. 정치권에만 맡겨둬서는 이런 결과를 얻기 힘든 현실에서 시민사회의 역량이 선별적으로나마 어떻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개입하는가에 따라 총선 결과를 두고 국민이 희망을 견지할 수 있을지가 좌우될 것이다. 그 방법도 ‘아니면 말고’ 식으로 선거연합을 외쳐댄다거나 후보들에 대한 도덕성 또는 정책 평가로 자족하는 시민단체판 ‘평시업무’적 사고를 넘어 오늘의 상황에 맞춰 새롭게 창안해야 할 터이다. 전국적 차원에서는 연합의 의미, 필요성, 그리고 구체적 실현방식에 대한 논의를 조직하는 일, 지역별로는 지역사정에 맞는 연대를 실현하기 위한 작업에 나서는 일에서 시작할 수 있다.
중기적으로 시민사회는 2017년 대선이 대전환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가는 일에 나설 필요가 있다. 특히 이번 선거를 시민정치의 역량을 복원하고 강화하는 장으로 삼아야 한다. 2012년 총선까지 매우 활성화되었던 시민정치가 2012년 대선 이후 급속하게 위축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정당들의 낙후성은 역사적이고 구조적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이므로 정당정치가 발전해야 한다는 당위론만으로는 단기간에 극복되기 어렵다. 이같은 조건에서 시민정치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정치사회에 공급하고 유권자와 정당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시민정치는 정당정치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정당정치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12) 그런데 2012년 선거패배와 현실정치에 대한 실망감, 정치는 정당에 맡겨야 한다는 당위론이 상승작용을 하면서 정치사회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이 줄어들었다. 시민사회는 조직적 역량이 지역적으로나 개별 영역에서 꾸준히 증가해왔지만 우리 사회의 대전환을 위한 비전을 생산하는 데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고 오히려 후퇴한 면도 있다. 사실 이 글에서 제시하는 점진 쿠데타론이나 대전환론 등을 포함해 우리 사회의 비전에 대한 여러 발신이 있었지만 시민사회 내에는 이에 대해 무관심한 경우도 많고 자기 일이나 열심히 하자는 태도가 만연해 있는 듯하다. 그 결과 풀뿌리조직의 활성화가 시민의 정치적 참여와 영향력 증대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점진 쿠데타가 순조롭게 진전되면 시민사회가 가장 먼저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점진 쿠데타를 저지하고 우리 사회의 대전환을 실현하는 작업은 시민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이며, 이를 위해 시민정치를 활성화해야 한다. 다가오는 총선이 그것의 중요한 계기이다. 나아가 점진 쿠데타를 저지하고 새로운 정치적 지평을 여는 것은 1987년까지의 민주화운동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역사적 사명의식도 필요하다. 분단체제에 내재한 모순이 전면에 드러났으며 이의 극복은 대전환에 값하는 변화를 촉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먼저 대전환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고, 대전환을 위해 시민사회 내에서 어떤 공동의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시민정치는 풀뿌리 차원에서의 역량 강화를 바탕으로 발전해야 한다. 실제로 최근 시민사회의 발전이 주로 이 영역에서 이루어져왔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시민정치보다 더 직접적이고 효과적으로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통로이다. 야권은 몇몇 시민사회 출신을 영입하는 방식으로 시민사회와의 관계를 관리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정치와 시민사회의 진정한 협치를 위해서는 풀뿌리 시민정치의 활성화가 관건이다. 이러한 토대가 구축되어야 과거 민주정부 10년이 반동의 시대로 이어진 전철을 다시 밟지 않고 한국 나아가 한반도의 업그레이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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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르조 아감벤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관한 권두노트」, 조르조 아감벤 외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 김상운 외 옮김, 난장 2010.
2) 조르조 아감벤 『예외상태』, 김항 옮김, 새물결 2009, 24~27면 참고. 홍민은 “분단-안보 프레임”으로 예외상태가 창출되고 일상화되는 메커니즘을 분석한 바 있다. 홍민 「분단과 예외상태의 국가」, 동국대 분단/탈분단연구센터 엮음 『분단의 행위자: 네트워크와 수행성』, 한울 2015.
3) 우리 사회에서 ‘수구’란 보수보다 더 퇴행적이며 극단적인 이념적 경향을 지칭한다. 특히 보수는 근대 민주주의 틀 내에서 작동하지만, 수구는 이를 부정하는 경향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김호기 「2000년 이후의 보수세력: 수구적 보수와 뉴라이트 사이에서」, 『기억과전망』 통권 12호(2005) 69면. 이러한 구분은 여전히 유의미한데, 더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할 문제는 왜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주변적 경향에 머무르고 있는 극우 등의 수구적 세력이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이다. 이는 분단체제의 작용과 분리되어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4) 졸고 「이명박정부의 통치 위기: 민주적 거버넌스와의 부조화」, 『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참조.
5) 백낙청은 시대교체의 열망을 모아야 정권교체라는 일차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고려에서 2012년 선거를 앞두고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2013년체제 건설”이라는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선거패배로 그 기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이러한 인식은 2017년 새로운 대선이 다가오는 현 시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며 최근에는 “대전환”이라는 개념으로 그 문제의식을 진전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백낙청 「큰 적공, 큰 전환을 위하여: 2013년체제론 이후」, 『창작과비평』 2014년 겨울호 및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창비 2015 참고.
6) 졸고 「역사쿠데타가 아니라 신종 쿠데타 국면이다」, 『창작과비평』 2015년 겨울호 및 『창비주간논평』 2015.11.25(http://weekly.changbi.com/?p=6638&cat=5).
7) 이러한 점에 대한 강조는 백낙청 「신년칼럼—신종 쿠데타가 진행중이라면」, 『창비주간논평』 2015.12.30(http://weekly.changbi.com/?p=6729&cat=2) 참고.
8) 이에 대해서는 김종엽 「분단체제와 87년체제」, 『창작과비평』 2005년 겨울호 참고.
9) 물론 박근혜정부의 성격을 ‘유사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주장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점진 쿠데타가 성공적으로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과거 군사독재나 파시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수구세력의 영구집권을 실현시키게 될 것이다.
10) 염무웅은 이러한 시대인식에 공유하면서도 쿠데타가 현 국면을 설명하는 적절한 용어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염무웅 특별기고 「‘신종 쿠데타’론에 대하여」, 『한겨레』 2016.1.15.
11) 졸고 「역사쿠데타가 아니라 신종 쿠데타 국면이다」.
12) 이에 대해서는 졸고 「시민정치의 부상과 정당정치: 위기인가 기회인가」, 『역사비평』 2012년 봄호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