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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기영 朴基永
1959년 충남 홍성 출생. 198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숨은 사내』 『맹산식당 옻순비빔밥』 등이 있음. myhardbox@hanmail.net
산메기를 잡다
밤새 지붕 몰아치던
그 사납던 추위가 어디로 달아났는지 몰라.
햇살이 빼꼼히 얼굴 내밀고
삐걱이는 사립문 열고 산길을 걸어가면
아침까지 처마 끝에
고드름 달아놓고 울먹이던 바람소리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산모퉁이마다
소나무 가지 끝에 달빛이 구름 뒤에 숨어
수북이 쌓아놓았던 눈발,
산이 여름내 푸른 가면 속에 숨겨놓았던
희디흰 맨 낯이
‘쓰윽’ 하고 눈앞에 펼쳐지는 거야.
그런 날, 길을 나서는 것이지.
산메기 잡으러 지리산 칠선계곡. 집채만한 바위들 여기저기 웅덩이 품은 채, 눈밭 아래 숨어 있는 곳. 어디선가 계곡 숨 쉬는 소리 들려오는지. 얼어붙은 물웅덩이 밑으로 꽐꽐거리는 맥박소리 울려 퍼지고. 그 소리 잠재우기 위해 눈폭탄 털썩하고 떨어져 내리면, 그 소리에 홀려 산귀신 되지 않기 위해 귀 잔뜩 세우고, 발에는 정강이까지 칡으로 감아 올린 신발 신고 오래 된 친구와 계곡으로 내려가는 거야.
옆구리에
밤새 나눠 먹던 얼어붙은 됫병 소주 .
같이 살아온 세월만큼
오래되어 투명해진 서로의 이야기
새어나오지 못하게
주둥이 꽉 막고, 눈 덮인 골짜기.
그곳에 이빨 빠진
사기그릇처럼 겨울마저 눈발로 덮어놓지 못한
작은 소 찾아가는 거야.
그렇게 산메기 잡기 위해 골짜기로 나선 날. 왜 그렇게 청청한 바람소리, 산울음처럼 들렸는지 지금도 몰라. 아마 그 소리에 놀라, 우리는 평생 땅 위 헤매며 떠돌고 있었던 것 아니었는지 몰라.
얼마나 많은 슬픔과 눈물 가슴 고여 있으면, 넓고 넓은 강물 모두 버리고. 겨울이면 한달에 스무날도 더 길 끊기는 곳. 자전거 타고 오던 우체부마저 골짜기 입구 편지통에 사연 두고 가는 곳.
그 섬처럼 고혹한 얼어붙은 산골짜기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계곡물 흐르는 돌틈 사이에 숨어 사는 것일까?그런 궁금함 떨어내기 위해 바위 밟을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소리 지르는 얼어붙은 계곡물 소리 푸념처럼 들으며 산메기를 잡는 거야.
그 산골짜기 제대로 된 낚시가 있겠어. 맨손으로 계곡을 더듬어 내려가다 얼어붙은 소 옆으로 계곡의 숨구멍이 비시시 얼굴을 내밀면, 그 옆 물가 나뭇가지 꺾어 젓가락같이 가는 낚싯대 만들고, 거기에 미늘 있는 바늘 묶어, 우리처럼 산골짜기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놈들 잡기 위해 멍청하게 생긴 낚시 바위틈에 끼워놓는 거야.
입가에 수염 있는 점잖은 그놈들 잡기 위해 미끼도 없는 그런 황당한 낚시를 쓰는 것이지. 차가운 바위에 배 깔고 엎드려, 바위틈 사이로 숨어서 흐르는 물살 속으로 한없이 사패질하다보면, 덥석 하고 바위틈 숨어 있던 산메기들 마침내 걸려들지. 한겨울 아무도 찾지 않던 물밑으로 귀찮은 불청객들이 나타났다고, 신경질을 부리던 놈들이, 목구멍 깊숙이 미늘을 삼키고는 온 전신을 뒤틀며 낚여 올라오는 것이지.
욕심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
자기 목숨 걸어야 할 만큼 온 지느러미로
자신을 후려쳐도,
쉽사리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차가운 겨울 햇살에 처절하게 깨달으면서
우리는 눈 쌓인 산골짜기 돌아다니며
계곡에 숨어 있는
겨울 숨소리 들으러 하루 종일 돌아다니지.
짧은 겨울 해 삽시간에 기울고, 골짜기 가득 메웠던 깨달음이 살얼음 어는 소리와 함께 산 그림자 속으로 살아나면. 다시 오랜 친구와 같이 물가에 앉아 산 채로 망태기 안에서 꿈틀거리는 산메기들 꺼내 회를 뜨지. 날카로운 쐬기에 쏘이지 않기 위해서 주둥이 잘라내고, 가을이 산메기 피부에 새겨놓은 노란 빛깔 껍질도 벗겨내고, 물속 숨어 있던 겨울 살갗 오랫동안 씹어서 삼키는 거야. 옆구리에 끼고 갔던 소주에 지난 설움을 털어 넣고. 지난 한해 도시에서 시달려왔던 영혼들을 산메기 그 투명한 살과 섞어서 또 한번 혹독한 세월을 견디어낼 양식들을 몸 안에 새겨 넣는 거야. 그렇게 산메기의 세례식에 낚여서 우리는 한철을 보내는 거야.
지리산 칠선계곡.
멀리서 들려오는 세상소리 시끄러워
날마다 산 그림자 적시는 계곡 물소리로 귀 씻고 사는 친구와 더불어
오래간만에 만나
지난 세월 징징거리는 사연
입안에서 오물거리며 어두운 바위 밑에서
산메기들 소리 없이 헤엄치며
헤매던 시간들 온몸으로 뒤집어쓰며
눈 내리는 산속을 지키는 거야.
커다란 산울음 소리에 갇혀서
우리도 한마리 물고기처럼 숲을 소리치며
지나가는 세찬 달빛소리
커다란 물속에 갇혀 듣는 거야.
누군가 하늘에서
미늘 숨긴 빈 바늘로 낚아주길 기다리며
겨울 산속 헤매는
한마리 산메기 되는 거야.
뱀장어잡이
태전교라고 있었어.
대구 시내 북쪽으로 나가는 길목. 길이 안동과 김천으로 갈라지는 입구에 태전교라는 다리가 하나 떡하니 버티고 있었어.
그 아래 뱀장어들이 숨어 있는 굴 있다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모르지.
옛날에 동네 사람 몇명, 그 굴에 눈독 들이고 있었어. 그들은 장마가 들기만 기다렸지. 삽자루 하나 문지방에 턱 하고 걸어놓고. 태전교 다리 아래 보가 넘치기만 기다리는 거야.
“우루릉 꿍” 하고 천둥이 치면 달려가는 거야.
태전교 보 도랑으로 미친 듯 달려가. 뱀장어와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겠다는 듯 삽자루 들고 뛰어가는 거야.
때를 잘 맞춰야 해.
물이 겁나게 불어나거든.
삽시간에 보 위를 넘쳐서 일대 장관을 이루어,
문제는 그것이 불과 여름에 보리밥 비벼 먹고 담배 한대 피울 시간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야. 그때를 놓치면 보 위로 흘러넘치는 물살이 진노해서 뱀장어 잡는 사람 “휘익” 하고 낚아채서 불어난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버려.
그럼 뱀장어 대신 사람이 잡히는 것이지. 그렇게 안 잡히려면 재빨리 뛰어가야 하는 거야.
보 날망에 흙탕 끓인 물살이 넘실거리다 넘치기 시작하면, 금호강에서 올라와 태전교 부근 동굴 속에 숨어 있던 놈들이, 보를 타고 자기 아버지가 살던 고향 찾아가기 위해 고개 빳빳이 쳐들고 지느러미 미친 듯 움직이며 물을 타고 올라가는 거야.
뱀장어 사냥꾼은 그때를 노리는 거야. 뱀장어 머리가 물살 가르며 보 타고 오를 때, 두 다리 물속에 버티고 있다 그놈들 보이면 사정없이 삽자루 칼처럼 휘두르는 것이지.
“덜컹” 하고 삽날이 뱀장어 머리에 꽂히면 끝이야. “벌러덩” 하고 뱀장어가 기절해서 물살에 뻗어버리면 재빨리 주워서 옆구리에 찬, 대주머니에 넣어버리지. 여기저기 그런 삽질하는 소리 공기 가르고, “첨부덩, 첨부덩” 뱀장어들 넘어지면 먹장구름 데리고 있던 하늘이 진노하는 것이지.
천둥과 함께 빗방울이 주먹만해지고, 삽시간에 온 보 위로 물줄기가 넘실거리게 되는 것이지. 그때 재빨리 도망 나와야 해. 미련하게 뱀장어 더 잡겠다고 욕심부리다가는 보 넘어 쏟아지는 물살에 휩쓸려 장어들의 밥이 되지.
그렇게 잡는 거야. 뱀장어는 하늘이 더 크게 노하기 전, 재빨리 삽자루 숨기고 태전교 다리 위로 올라가 무서운 강물 범람하는 것 보며 숨 크게 내쉬는 거야.
남의 고향 길 막은 죄를 비 흠뻑 맞으며 씻어내는 것이지. 그런 뱀장어잡이가 한때 이 땅에 있었어. 태전교. 대구 북쪽으로 가는 길목. 그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