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경건히 뒤돌아보지 말라
4·3항쟁 70주년을 맞으며
김시종 金時鐘
재일조선인 시인. 1929년에 태어나 1948년 제주 4·3항쟁에 참여하고 이듬해 망명한 뒤 다양한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저서로 장편시집 『니이가타』, 시집 『광주시편』, 시선집 『경계의 시』, 자전 『조선과 일본에 살다』,산문·평론집 『재일의 틈새에서』 등이 있다.
* 이 글은 2015년 일본에서 열린 제주 4·3사건 67주년 희생자위령제(이꼬노구민센터)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오늘 여는 위령제는 기묘하게도 4·19혁명 기념일과 겹칩니다.
미 점령군의 대대적인 지원하에 지극히 음참한 몰살 작전으로 1947년 제주도 ‘4·3사건’을 진압한 이승만은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의 결사적인 항쟁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젊은 목숨을 새빨갛게 길 위에 뿌린 186명의 넋에게 추모의 마음을 담아 끝나지 않을 기원을 올립니다. 이처럼 선명하고 강렬한 4·19학생혁명과 비교해 제 체험은 아무리 생각해도 궁상맞고 비굴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4·3으로부터 도망친 사람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사실로부터 저는 50년 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살았습니다. 함께 지내는 아내에게조차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번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건 1999년이었을 겁니다. “이제 슬슬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고 정신적으로 편해져야지” 하는 선배인 김석범(金石範)씨의 독촉을 받고 제가 겪은 4·3사건을 4·3위령제에 참여한 많은 분들 앞에서 처음으로 털어놓았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입을 꾹 닫고 살아온 이유는 우선 다음 두가지에서였습니다.
첫번째는 4·3항쟁의 봉기투쟁은 1949년 중반까지도 인민봉기로 일컬어졌다는 점입니다. 당시는 ‘민중’이 아직 ‘대중’이라 불리던 시대여서 인민이라는 말이 좀더 큰 공감을 얻는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분명히 밝힌 것처럼 저는 제주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의 말단 조직원이었습니다. 또한 연락원의 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4·3 관련자인 제가 일본으로 도망친 사실을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잔학한 학살을 해온 미군정을 포함한 정권 측에서는 제주 4·3사건을 ‘공산폭동’이라 계속 말해왔고, 지금도 그런 억지 주장을 고집하는 우익세력 인사들이 뿌리 깊게 남아 있습니다. 남로당의 말단 조직원이었다 해도 제가 4·3사건으로부터 도망쳐온 것을 밝히면, 4·3사건은 공산폭동이었다고 인정하는 꼴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인민봉기의 정당성이 훼손될 듯하여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었습니다.
두번째는 비겁하고 고식적이었습니다만, 일본에서 살아가는 것에 너무나 집착해서 제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게 됐습니다. 이름을 밝히게 되면 제가 정당한 수속 없이 일본에 불법 입국한 사실을 털어놓는 것과 매한가지입니다. 출입국관리법은 시효가 없습니다. 50년이 지나도 80년이 지나도 일본의 국익을 해치는 행위가 인지되면 언제고 강제 송환됩니다. 제가 거쳐오며 경험한 사실은 이와나미쇼뗀(岩波書店)에서 출판된 책(『조선과 일본에 살다』, 2015, 한국어판 돌베개 2016)에 비교적 소상히 기록돼 있으니, 그 책을 읽어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어쨌든 복권에 당첨되는 확률로 일본에서 목숨을 구한 저는 외동아들이라 누이동생 한사람 없습니다.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를 살리기 위해 집안의 모든 가재도구 등을 돈으로 바꿔서 경관을 매수하고 어부를 끌어들여 관탈섬이라는 제주도 북쪽의 바위섬으로 피신시켰습니다. 나흘 동안 저는 혼자 숨어 지내다 여기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기적에 가까운 탈출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설령 죽는다 해도 내가 볼 수 있는 곳에서만은 죽지 말아달라”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피신시켰습니다. 그런 저이기에 출입국관리법에 걸려서 강제 송환됐다면 이승만정권이 무너졌다 해도 군부독재정권이 이후 30년 가까이 지속된 대한민국에서 제 존재 자체는 아마도 그대로 말살됐을 겁니다. 그런 공포를 짊어진 사람으로서 4·3 관련자임을 털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1997년으로 기억합니다만, 토오꾜오와 오오사까에서 처음으로 제 신상에 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4·3의 경위나 진상, 4·3의 제대로 된 사실에 대해서는 오늘 열리는 위령제의 실무자 중 한 사람인 문경수 교수가 관련된 분들의 마음을 잘 살피면서 몇권의 책을 쓰고 있으니 제가 여기서 거듭해서 말씀드릴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남북 조선의 통일을 위한 과도적 조치로 제기된 신탁통치 제시에 대해서는 제 체험에 비춰서 부언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1945년 8월, 식민지통치로부터 해방됐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조선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주도에도 당연히 미군 점령통치의 영향력이 미쳤습니다. 물론 분할점령은 제주도에 7만명가량이나 주둔하던 일본군을 무장해제해야 하기도 해서 임시적인 조치로 여겨졌습니다. 국토의 분할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적인 조치로 인식됐던 셈입니다. 분할점령에 임하는 미소 양국이 조선반도의 전후처리로 구상하고 있던 틀은 로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발의에 의한 신탁통치안이었습니다. 조선인 자신의 임시정부를 남북이 합쳐서 수립할 수는 있으나 5년 동안은 4대국인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이 후견인처럼 돌봐주는 신탁통치하에 두는 조선 통일독립안입니다. 미소가 이 구상에 합의한 시기는 해방된 해인 1945년이 끝나가던 12월 말입니다. 신탁통치 발표는 그 찬반을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을 조선반도에 불러왔습니다. 식민지 통치가 끝나고 이제 막 해방됐는데 또다시 통치를 당할 수 없다는 소박한 민족 심정이 격화돼 신탁통치를 모두 모여서 반대했지요. 저는 그 당시에 제주도에 있었는데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기운은 그야말로 쓰나미처럼 고조돼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소속돼 있던 남로당의 서기장이었던 박헌영씨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대다수의 민족감정이 신탁통치를 반대했음에도 박헌영의 남로당은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남로당은 그때까지는 김구 선생 등이 선두에 섰던 반탁투쟁에 동조했지만, 어느날 갑자기 총궐기 집회 직전에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는 방안에 찬성했습니다. 이러한 남로당에 대한 민중의 반발이 커서, 이때다 싶은 미군정부는 민족의 독립을 저지하는 것이 남로당이라며 우익단체와 함께 온갖 반남로당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헤이본샤(平凡社)에서 나온 김석범씨와의 대담집 『왜 계속 써왔는가 왜 계속 침묵해왔는가: 제주도 4·3사건의 기억과 문학』(2015)에 수록된 문경수 교수의 해설이 실로 적확하게 쓰고 있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신탁통치안의 발표는 조선반도에서 그 찬반을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과 혼란을 불러왔다. 북에서는 민족주의자 조만식이 끝까지 이를 거부했고, 남에서는 김구가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모체로 한 독립국가의 즉시 수립을 내걸고 맹렬히 반대했다. 여기에 이승만 등의 반소·반공을 내건 우파도 합류해서 일제시대의 모든 친일파도 여기에 편승했다. 신탁통치 반대(반탁)운동은 이미 상처를 입은 친일파가 민족독립의 대의를 내걸고 정치적으로 복권할 수 있는 절묘한 기회를 안겨줬다. 한편 당초 반탁 입장을 보였던 좌파는 박헌영이 평양에 비밀 방문한(1945.12.28) 이후, 신탁통치 지지(찬탁)로 돌아서서 신탁통치 찬반은 그대로 좌우분별이 돼 해방 후 조선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불러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4·3사건은 이처럼 ‘신탁통치’가 구체화를 향한 미소의 대화가 꼬여서 편의적인 분할점령이 항구적으로 남북분단으로 향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비극이었다.(255면)
4·3의 희생자는 공식적으로는 3만명이라 합니다만, 최저 5만명 이하는 아니리라는 것이 제 완고한 실감입니다. 실제로 최근 몇년 동안 4천명 가까운 4·3 관련 희생자가 새로 판명됐습니다. 아무튼 이 정도로 고개를 돌리고 싶을 만큼 많은 희생자가 미군정하에서 발생했으니,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만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사정이 4·3을 감싸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미군정이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희생자 중 대부분은 죽지 않고도 끝날 수 있는 ‘폭동’이었습니다.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분하에서 도민 학살이 용인되고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미소가 충돌하면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됐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1947년 8월 12일에 벌어진 일입니다. 위원회가 결렬된 후 동서 양쪽 진영이 대결하게 되는 냉전의 발단이 됐습니다. 이는 조선반도에서 남과 북이 분단, 대립하는 큰 요인을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반공이라는 대의가 남조선에서의 정치정세를 석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좌파세력에 대한 총검거는 미소공동위원회 결렬을 계기로 해서 전국 규모의 민중세력 소탕으로 확대됐습니다. 이렇게 신탁통치 가능성은 어느새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북조선이 내세우던 민주기지확립론이 현실감을 띠고서 제주도의 남로당에도 긴장된 분위기 속에 바싹 닥쳐와서 당원 사이에 열렬한 공감을 불러왔습니다.
민주기지확립론은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이 주도해서 구성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제시한 운동방침입니다. 이 권력기관은 조만식 등의 민족주의 세력을 배제하고, 박헌영의 남로당이 진행하던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의 조직마저 실질적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요컨대 신탁통치가 상정했던 ‘조선임시민주정부’의 기초를 만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던 운동체까지 거부한 채 발족된 것이었습니다. 북조선 중심의 권력기구였지만, 그 임시인민위원회의 전략적 운동방침으로 김일성이 내세운 ‘민주기지’에 제주도 남로당 내의 청년간부들이 투쟁의 활로를 만들어내려고 해서 지어진 호칭입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저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신탁통치론과 민주기지확립론 사이의 이율배반적인 자가당착에 몰리면서도 저는 심정적으로 도당 내 군사위원회의 움직임에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남조선에서도 민주기지를 얼른 확립해 북과 호응하여 싸우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저는 제 4·3 체험을 한권의 책으로 정리했지만 자가당착에 빠졌던 일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못했습니다. 저희가 조금 더 현명했다면, 아니 저희가 문제를 넓게 보고 파악할 지견을 갖추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합니다만, 그 당시 갓 스무살이 된 풋내기로서는 미칠 수 없는 정세인식이었던 셈입니다. 부감해서 내려다보면 이것은 대단히 오해를 부르기 쉬운 발언입니다. 애써 말하자면 4·3항쟁의 결기는 무장봉기적인 의식하에 이뤄진 것이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몇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궐기’가 되리라고는 도당위원회라 해도 상상조차 못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일본에 와서 겨우 넓은 시야로 자신이 지나온 길을 돌아볼 수 있게 돼 박헌영의 남로당이 신탁통치에 찬성했던 진의를 알게 됐습니다. 신탁통치에 반대하면 미국이 남조선만을 독립시키는 쪽으로 선회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예상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만을 독립시키려는 미국의 의도와 그 기세를 막기 위해서라도 신탁통치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겁니다. 그런데 혈기가 넘쳐서 “다시 또 통치를 받는 것인가” 하는 민족 심정이 격화돼 신탁통치의 실상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자가당착에 빠진 좁고 험한 길에 대해 저는 회상기의 형태로 써왔습니다만, 그래도 그 실상을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일본에 온 지도 65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잠 드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희생자로 불리는 참살당한 시체의 영상에 종종 떨고 있습니다. 희생자라 하면 경건한 마음이 드는 대상이지만, 4·3 희생자들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추악한 모습의 썩어 짓무른 사체입니다. 그 악취는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4·3사건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6월 중순까지도 제주농업학교는 큰 마을인 오라리, 아라리와 가까웠기에 민중들이 산부대라 부르던 무장대와 연락교신을 취하는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 그 농업학교 오른쪽에 한라산으로 향하는 곧장 뻗은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 한라산 기슭의 관음사 바로 앞 들렁귀라는 협곡이 나옵니다. 나라(奈良)의 와까꾸사산(若草山) 같은 민둥산이 있는데 그 계곡은 진달래 명소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중간연락원으로 농업학교에서 들렁귀까지의 중간연락을 6월 중순까지 맡았습니다. 오후 네시 무렵 들렁귀 계곡의 와지(窪地)로 소를 끌고 오는 소년처럼 보이는 농부가 저와 교신연락을 했습니다. 같은 날 오후에 토벌대가 오고 밤에는 유격대가 내려옵니다. 저는 밤이 되면 어둠에 뒤섞여 잠입했는데 그날은 토벌대가 시간을 연장해서 재수색하러 왔습니다. 저는 풀숲에 숨었습니다. 그 바로 옆에 학살당해 썩고 있는 농부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밭일을 할 때 입는 바지 아래에 새끼줄로 각반을 맨 거년스러운 ‘전사’였습니다. 이토록 무참하게 살해당해 방치된 시체는 어쩌면 이리도 악취가 풍기는 것일까요. 인간이 썩어가는 냄새와 사체에 모여 있는 구더기의 무시무시한 모습은 그 어떠한 표현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제주 4·3 희생자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추악한 모습의 썩은 사체입니다. 체포된 ‘빨갱이’는 본보기로 목을 매달아놓았습니다. 6월이라 일주일 정도면 목 아래가 떨어져나갑니다. 거기에 구더기가 몰려듭니다.
인간의 시체에 우글대는 구더기는 꼬리가 깁니다. 우선 눈구멍에서 솟아나와 우글우글 뒤얽혀서 몰려듭니다. 살해당한 생명은 얼굴을 돌리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손상된 육체를 드러냅니다. 저는 희생자를 경건한 기분만으로 추모하는 것은 희생자들의 풀지 못한 원한을 더욱 응고시키는 행위처럼 생각돼 참을 수 없습니다. 희생자는 결코 엄숙한 대상이 아닙니다. 사체에 우글거리는 구더기가 햇빛에 비친 황금색 꼬리를 움직이며 사체를 탐하고, 죽음을 강요당한 죽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유격대의 초라한 몸차림도 눈에 강렬하게 새겨져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붙잡혀서 처형된 유객대원은 누구나 헐렁한 바지를 무릎 아래에서 끈으로 묶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전투복 정도는 입혀주고 싶었던 소박한 용사들이었습니다. 죽창이나 낫으로 싸운 민중봉기의 범위를 넘지 않는 ‘폭도’들이었습니다. 그것을 공산폭동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면서 섬멸하려 했던 겁니다. 미군정의 횡포와 단독선거에 반대해 도저히 참을 수 없기에 일어섰던 겁니다. 저는 무장봉기 측의 말단에 속한 한명으로 목숨을 구해 도망치고 숨었지만 실은 죽는 편이 더 좋았다고 느낄 만큼 지금도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로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제가 제주도를 탈출한 것은 1949년 6월입니다. 그로부터 두달 전에 일본에서 귀환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외사촌누님의 남편인 고남표(高南杓)라는 친척이 있었는데 평화공원 영안실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도두봉 근처에서 낚시를 하다가 토벌대에게 학살당했습니다. 제가 토벌대에 의해 학살된 시체를 말끄러미 본 것은 외사촌누나의 남편이 처음입니다. 눈 한쪽을 도려냈고, 오른쪽 팔은 위팔 부근에서 비틀어 떼어져 한조각의 피부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친척의 장례는 검문을 통과하기 쉬운 것도 있어서 다른 변통을 하려던 저도 달려갔지만, 정말로 증오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도려내진 눈에는 피가 선지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귀환해 아직 조선어가 미숙한 외사촌누나는 정신을 거의 놓은 상태였습니다만, 결국 갈 곳을 잃은 저는 제주도를 탈출하기 전까지 그 누님의 집에 숨어 있었습니다. 토벌대 쪽에서도 터무니없는 짓을 했다는 의식이 있어서 외사촌누님의 집까지는 조사하러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청년동맹 등의 조직과 연결된 청년은 붙잡히면 그 자리에서 참살당했습니다. 돌로 머리를 부수는 식으로 죽였습니다. 그중에는 도망칠 곳이 없어서 짚단 속에 숨은 이들도 있습니다. 토벌대는 무조건 밀고 들어와서 겨냥을 한 후 일제사격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불까지 질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참하게 죽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1949년 6월에 제주도를 탈출하기 전까지 아지트를 다섯번이나 바꿔가며 도망쳐 다녔는데 세번째 피신처는 해변가 집 뒤에 있는 작은 오두막이었습니다. 1948년 10월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심방(무당의 제주 방언)이 치는 징소리가 바람에 날려서 흘러왔습니다.
돌담 사이 틈으로 해변가를 바라보자, 400미터 정도 떨어진 해변가에서 적색, 청색, 황색의 제례 의상을 입은 여자 심방이 저녁 햇볕을 맞으면서 슬로모션 영화처럼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제주도 해안은 모래사장이 아니라 자갈해변입니다. 바다에 던진 희생자의 시체가 아직 올라오지 않아서 유족들이 “하루 빨리 시체가 떠오르게 해주세요” 하고 기원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사회주의를 믿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처럼 독선적·독단적 ‘사회주의’를 과시하는 왕정체제 국가가 있기에 사회주의는 꽤나 평판이 나쁩니다. 하지만 그러한 전횡은 ‘사회주의’가 아닙니다. 본래 목소리로 사양하지 않고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지극히 명료한 시민사회가 건강하게 기능하는 사회주의도 가능합니다. 나이를 먹어도 생활하는 데 불안함을 느끼지 않고, 공부를 하려면 다른 것을 밀어내야만 하는 교육체제가 아닌, 일을 해도 수탈당하지 않는 국가나 사회가 나쁠 리가 없습니다. 무장봉기 선두에 섰던 제 선배들인 4·3 용사들은 그러한 인민적인 국가체제를 꿈꾸며 자신의 인생을 걸었던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도 유물사관을 세계관으로 삼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을 믿지 않으며 당연히 심방의 주술도 믿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심방은 미신이다”라고 일본인 선생님께 들었던 것도 있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심방을 경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가 슬로모션 영상처럼 해변가에서 춤을 추는 심방의 진혼의식을 봤을 때 등줄기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 땅에 내린 재앙은 그 땅의 신이 아니고서는 진정시킬 수 없다는 땅의 원초적인 기원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1948년 여름도 다 끝나갈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바다에 빠뜨려 죽인 희생자의 시체가 짝을 이뤄서 자갈해변으로 밀려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네다섯명 정도씩 짝을 이룬 시체의 손목에 철사가 감겨 있었습니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시체의 옷이 헐거워져서 허리띠는 이미 벗겨진 상태로 노출된 다리의 피부가 자갈에 비벼져 무지러지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뼈가 그대로 드러난 시체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희생자의 원한은 역시 그 땅의 수호신, 토착신이 아니면 진정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뼈에 사무치도록 깨달았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제가 심방에 의해 구제된 사람임을 고백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명수배를 받고서 도망쳐 다닐 때 어쩔 수 없이 외숙부님 집에 몸을 숨긴 적이 있었습니다. 한낮에는 뒤뜰로 이어진 밭의 씨받이소 움막에 숨어 있었습니다. 숙부님은 그 지역의 구장이어서 조카를 뒷밭에 숨겨준 데 부담감을 느낀 것인지 경관이 오면 대접을 했습니다. 그것을 산부대 쪽에서는 토벌대와 밀통해서 정보를 팔고 있다고 착각해서 1949년 2월 13일 동틀녘에 숙부님을 처형했습니다. 죽창으로 복부를 두군데 찔렸습니다. 인간의 목숨이란 정말 상상을 초월합니다. 창자가 밖으로 비어져 나온 채로 집 뒤 돌담을 넘어서 작은 길가에 떨어졌는데도 죽지 않고서 사흘 밤 동안 소가 신음하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제가 비난받는 것 같아서 정말로 자살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몇번이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숙부님의 장외 생활이 끝난 후 더이상은 부담을 줄 수 없어서 남편이 살해돼 넋을 잃고 있는 친척 누님의 집으로 은신처를 옮겼습니다. 누님은 밤이 되면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뒷문에 서서 저주에 찬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궤팡(집안에 있는 헛간)에 숨은 저를 끝까지 돌봐줬습니다.
제가 자랐던 제주도에 다시 갈 수 있었던 것은 1998년 10월이었습니다.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이를 환영하는 축하연이 오오사까에서 열렸습니다. 그때도 여전히 조선적(朝鮮籍)이었던 제게 생각지도 않던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저는 단 한명의 조선적 참가자였습니다. 그게 좋게 작용했던 것일까요. 임시여권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 덕분에 49년 만에 부모님의 산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깊게 우거진 덩굴 깊숙한 곳에 봉분이 두개 나란히 있었습니다. 임시여권을 손에 넣은 것은 요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감사한 일이었으나 아내를 데리고 가야 할지 말지 고민했습니다. 제주도에 가면 외가 친척들로부터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매도될 것이 뻔히 보여서 그런 모습을 일본에서 자란 아내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위로부터 강한 비판을 당할 결심을 하고서 1998년 10월 아내와 함께 제주공항에 내려섰습니다.
거의 40년 동안 부모님의 묘를 돌봐주었던 외조카와 여조카가 달려와서 욕을 퍼붓기는커녕 “용케도 살아서 돌아와주셨습니다” 하고 목에 매달려서 울었습니다. 제주도야말로 제 무덤이 될 땅이라고 마음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제주도 방문을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닐 수 없는 마음속 응어리가 콕콕 쑤셔왔습니다. 성묘를 하기 위해서라도 제주도에 가면 종형(산부대에 살해된 숙부님의 장남)과도 인사해야 합니다. 숙부가 몰래 숨겨주신 것도 있고 해서 저는 계속 신경이 날카롭게 서 있었습니다. 종형은 종형대로 저를 배려해서인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5년 정도가 지나서 저를 취재한 다큐멘터리 「해명 속을(海鳴りのなかを)」이 NHK에서 제작돼 현지촬영차 제주도에 가게 됐습니다. 그때 결심을 하고서 6시간에 걸쳐서 심방의 제례를 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차 한잔 내어드린 적이 없는 불효자입니다. 저를 숨겨준 숙부님은 오해를 사서 산부대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저 자신이 구원을 받고 싶었습니다. 제주도의 신앙에 따라서 진혼제례를 바쳤습니다. 숙부님의 혼을 달래고, 아버지 어머니의 혼을 달래는 제례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습니다. 종형 일가도 모두 와줬습니다. 하루가 걸린 제례가 끝나고 종형과도 손을 맞잡았는데, 종형은 제 양손을 감싸듯이 쥐고서 제주말로 더듬더듬 “시종이 탓은 아니난, 그런 시대여서난…… 아버지의 운명이어시난……” 하고 굵은 눈물을 흘리며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말이 마음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번져갔습니다.
동구권의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하고 연이어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뜨 연방까지 해체돼 사라졌습니다.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국가체제였다고 일찍부터 납득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주의는 확실히 세계관으로서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제도이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개개인의 심정까지도 통괄하려 했기에 민중의 마음이 떠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쓸데없는 것까지 다 말씀드려서 시간이 많이 지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이 한마디로 집결됩니다. 5만이 넘는 제주도의 무고한 희생자들을 단정한 형태로, 혹은 신성한 형태로 그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희생자는 썩을 대로 썩어서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한 육체를 드러내고 목숨이 끊어진, 성불 못할 원한을 간직한 시체입니다. 우리는 그 희생자들을 경건한 마음으로 기려서는 안 됩니다.
오랜 시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번역: 곽형덕(郭炯德)/광운대 박사후연구원 kwak20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