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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츠 쯔젠 『뭇 산들의 꼭대기』, 은행나무 2017
룽잔진, 지킬 수 있을까?
이소정 李素貞
아시아여성학센터 연구원 suzhen@empas.com
서가에 놓인 츠 쯔젠(遲子建)의 새 작품 『뭇 산들의 꼭대기』(강영희 옮김)를 본 많은 독자들은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는 동시에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과연 어느 정도일까’를 궁금해할 것이다. 낯선 존재에게서 익숙함을 기대하는 일견 모순적인 마음은 국내에 번역된 외국 문학작품의 첫 장을 넘기는 모든 독자들의 마음이 아닐까. 낯섦과 익숙함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독자를 마지막까지 유도하다가 독자가 그동안 대면하지 못했던 오래된 질문과 결국 마주 서게 한다면 그 작품은 ‘좋은’ 작품으로 완성된다.
중국에서의 높은 명성이 무색하게 츠 쯔젠의 국내 인지도는 매우 낮다. 더구나 중국에서도 최북 변방의 ‘극소수’민족 어룬춘족이라니, 낯섦의 문턱이 너무 높은 것은 아닌지. 그러나 유난히 생기 넘치고 입체적인 이 작품을 탐험하는 방법은 여럿이니 중국문학·소수민족문학(작가는 한족이다)·동북지역문학, 또는 여성문학 같은 라벨에 얽매일 필요는 없겠다. 그 대신 ‘현대화’에 대한 나름의 경험—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이 있다면 그것을 활용하길 제안하고 싶다. 이런 경험이 우리 대부분 어느 정도 있지 않을까?
작품의 공간 좌표인 쑹산지구 칭산현 룽잔진은 중국 북쪽 변경에 가까운 고산지대로서 한겨울에는 기온이 영하 30도 밑으로 떨어지는 고장이다. 시간 좌표는 그 파란만장함이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 지난 백년을 배경으로 삼는 20세기 말 정도이다.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중국에서도 가장 척박하고 고립된 이 고장으로 흘러들어와 삼대가 지나는 동안 각각 지역사회의 바닥과 천장, 또는 멸시와 존경을 맡아온 것이 신씨 집안과 안씨 집안이었다. 사회경제적으로 보면 물과 기름 같았던 신카이류-신치짜-신신라이의 ‘신’라인과 안위순-안핑-안쉐얼의 ‘안’라인이 한순간에 얽혀버린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니, 그것은 바로 신신라이가 안쉐얼을 강간한 사건이다.
이 강간은 산골 공동체의 오랜 인식의 창을 하루아침에 와장창 깨버린 현대화라는 벽돌의 한 조각이다. 20세기 내내 중국사회가 지나온 그 지난한 길의 방향은 거칠지만 현대화라는 한마디로 요약이 가능하다. 정부조직의 현대화 따위는 변방의 기층민들이 알 바 아니다. 그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은 의식주행(물건)의 현대화, 생로병사 관리(시스템)의 현대화, 그리고 생사/자연 관념(인식)의 현대화이다. 작품은 사형제가 총살에서 주사형으로 바뀌고 입관이 화장으로 대체되면서 일어나는 깊은 혼란을 오래 포착한다. 이 시절, 예로부터 내려온 것들—대장장이·백정·수놓는 이·전쟁영웅·가족과도 같은 가축—은 속속 종말을 맞이한다. 강간을 통해 안쉐얼도 인간인지를 확인하려 했다는 무뢰한 신신라이의 말은, 가속화되는 현대화 과정에서 무당이라는 직업군이 피하기 어려운 힘든 말로를 암시한다. 동시에 피해자(victim)는 물론 생존자(survivor)라는 말도 무색하게 만들 만큼 안쉐얼이 강간으로 인한 충격과 변화를 멋지게 이겨내며 차차세대의 문을 열게 한 것은 작가가 제안하는 희망의 끈이다.
통한의 시절을 이 악물고 살아낸 옛 인물들은 스러져가고 새 세대(안쉐얼·신신라이·탕메이·린다화 등)는 어지럽고 연약하며 무지막지한 금권의 바람 앞에 놓인 등불 신세라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단순할 뿐이다. 이 작품은 노세대와 신세대를 이어주는 허리세대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칼의 달인 신치짜와 총의 명인 안핑이 들려주는 애달픈 인간사 외에도, 매형 덕으로 진장 자리에 올랐으나 부패하기 짝이 없는 매형과는 달리 위정자로서 고결한 일면을 보여주는 탕한청도 있다. 룽잔진의 대자연을 개발(그에게 ‘좋은’ 개발은 없다)로부터 지키기 위한, 헛되지만 부단한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이 허리세대의 복잡다단한 활약상을 읽으며 독자들은 역사란 평범한 사람들의 이어달리기인 동시에 미래의 청탁과 성패는 쉽게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말없이 깨닫게 된다.
작품을 더욱 독보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쑹산 설국의 초인간적인 대자연이다. 이곳의 아름답고 거대하며 냉혹한 자연을 인간은 결코 쉽게 굴복시킬 수 없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룽잔진 사람들은 그에 감사하고 철마다 탄복하며 자연과 인간의 감응에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지니고 산다.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사는 룽잔진을 배경으로 죽은 여인의 웃음소리나 포승줄 푸는 이리가 등장해도 받아들일 만한 것은, 그들의 믿음이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도 변함없이 그리고 보편적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계속되는 재난과 풍파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진실과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 저 돌덩이 같은 맷집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자연으로부터 오는 회복력이 도움을 준다고 답할 수 있다.
이 자연 감응력은 과연 이 시대, 그리고 앞으로의 또다른 시대와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자연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탕한청은 무연탄의 존재를 숨기고(그러나 그 사실은 이미 외부에 알려졌고 개발은 아마 정해진 수순일 것이다) 산꼭대기에 토지사(土地祠)를 세운다. 선한 의도가 시대에 역행하거나 최소한 부질없는 행동을 낳은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탕한청이 가장 지켜주고 싶어했던 안쉐얼이 그 토지사에서 두번째 황당한 환난에 빠지고 마는데, 바로 이 장면에서 작가는 펜을 멈춘다.
책을 읽으며 즉각적으로 떠오른 한국의 문학작품은 우선 천명관의 『고래』, 그다음은 이문구의 『관촌수필』이었고, 책의 끝에서는 염상섭의 『삼대』였다. 『삼대』의 마지막 장면은 묻는다. 덕기는 이제 필순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갈 것인가? 앞 두 세대의 못된 전철을 밟지 않고 전대미문의 상생구조를 구축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반반이다. 『뭇 산들의 꼭대기』의 마지막 장면은 묻는다.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서 폭설과 완력에 갇힌 안쉐얼은 이제 어떻게 될까? 앞의 두 세대가 저물어가고 마땅한 동년배도 없는 이때, 그녀가 쓰러진다면 룽잔진과 함께 이 전환기를 뚫고 나아갈 이는 누구일까?
그런데 작가가 신체의 장애를 포함한 여러 장치를 통해 차세대 일군 선수로 강하게 단련해낸 이 여성에게 또 한번 강간(최악의 경우)이라는 시련을 내리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사실 작가가 여성인물에게 엄한 대목은 이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아이코가 사이비 민족주의자들에게 두차례나 강간을 당한 사실이 한두 문장으로 가볍게 처리되는 지점에서 나는 좀 놀랐다. 하지만 지금은 작가가 정치적 올바름을 포함한 이데올로기적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산촌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독특하고 분방한 시선을 핍진하게 드러내고자 했고, 각기 자기 이름을 딴 장편소설의 주인공이 되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인상적인 여성인물을 열명 이상 배출하였으며, 룽잔진의 미래는 물론 벌써 박물관에 박제되기 시작한 어룬춘족의 미래를 안쉐얼이라는 여성에게 맡겼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 것은 나 역시 산촌에서 왔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90년대 중반부터 유원지로 개발되면서 더이상 예전의 그 자연은 물론 그 촌락공동체 역시 찾기 어렵게 된 내 고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연 많고 개성 강하던 선주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개발이 임박한 시점에서 탕한청 또는 쉐얼 같은 사람은 있었을까?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어떤 방법이 있었을까?
룽잔진의 굳센 사람들은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쉐얼 역시 설령 토지사에서 최악의 상황을 만난다 해도 쑹산의 쨍한 추위 속에서 오뚝이처럼 일어설 것이고 아들 마오볜을 잘 키우며 행복하게 살아갈 거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