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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상처받은 애착의 형식

백가흠 소설집 『힌트는 도련님』

 

 

조형래 趙亨來

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주체의 시차, 소설의 형식: 김영하의 『빛의 제국』을 중심으로」 등이 있음.

modernus@gmail.com

 

 

3541드디어 소설가 백가흠(白佳欽)이 소설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기존 백가흠 소설의 독자라면 이 의미를 모를 리 없다. 그의 소설들은 대개 무참한 현세의 지옥을 관조하는 카메라의 눈과 같은 위치에서 씌어졌다. 그 속에서 개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아귀다툼을 통해 그보다 더 비참할 수 없는 축생의 모습으로 조락해갔다. 이를 직시하겠다는 자세로부터 많이 물러서지도, 너무 나아가지도 않는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 백가흠 소설이 환기하는 페이소스가 있었다고 해도 좋다.

그런데 『힌트는 도련님』(문학과지성사 2011)에 수록된 「P」나 「그래서」 또는 「힌트는 도련님」 등에는 작가 자신과 연관시키지 않을 수 없는 소설가의 형상이 등장한다. 자전소설의 내용을 이중삼중으로 부정해버리는 작가라든가 매순간 사라지는 자신의 글에 고통스럽게 매달리는 소설가의 유령, 자기 소설의 주인공과 섞이거나 분열되는, 마감에 쫓기는 소설가의 모습 말이다. 그들은 소설을 뜻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조차 제어하지 못하며 심지어 그것이 멋대로 증식하거나 완전히 날아가버리는 사태에 대한 소설가의 불안이 전경화된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에 잠식된 채 의미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들에게서 카메라의 눈이 환기하는 냉정과 긴장이 불식되는 것은 당연하다.

소설가만 배반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의 개인들은 자신을 둘러싼 소문에, 「통(痛)」의 원덕씨나 「쁘이거나 쯔이거나」의 쯔이 등은 자신의 환상으로부터 배반당한다. 이처럼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자신에게 배반당하는 하위주체의 멜랑꼴리에 대한 관심은 백가흠 소설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진 테마다. 그중에서도 백가흠 소설 고유의 인장(印章)을 고스란히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윤리적 지향을 보여주는 「그런, 근원」은 단연 백미다. 주인공 ‘근원’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원인은 유년의 트라우마에서 연유한 수동적 태도로 일관하는 데 있다. 그는 원하는 바를 드러내기보다 주저하거나 포기하는 태도를 내면화한 채 매사를 사장이나 캐쉬 같은 타인의 결정에 의존하고자 한다. 그들이 부과하는 제약과 금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식으로 근원은 그들을 선망한다. 그가 무언가를 요구하는 순간, 유대는 해체된다. 더욱이 그러한 댓가를 감수하고 잃어버린 어머니와 상봉하기 위해 떠났을 때에도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기대가 배반당하는 사태와 맞닥뜨린다. 그 길 끝엔 어머니가 아닌 이름 모를 주검 곁에서 보내는 하룻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육친과의 해후가 불가능해진 이 최종적인 배반의 결과를 여느 때처럼 자연스럽게 수긍한다. 금지를 감수함으로써만 누군가에게 애착할 수 있었던 근원의 삶의 방편은 여기에서 빛을 발한다. 그것은 명목상 어머니와의 조우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 바로 금지에의 순응을 댓가로 우연과 익명이 내포한 가능성 일체를 애도하고자 하는 태도로 전회되는 것이라 해도 좋다.

스스로 설정한 금지에 충실하고자 하는 강박증은 역설적으로 대상에 대한 애착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내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의 노 평론가를 비롯해 이 책의 여러 단편에 등장하는 소설가들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바벨의 도서관에 대한 욕망, 뜻대로 씌어지지 않는 소설에 대한 불안 일체는 스스로에게 부과한 제약으로부터 연유한 것이 아니었던가. 심지어 참혹하기 그지없는 아비규환의 지옥에 대해 불편부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카메라의 눈과 같은 관점을 취하고자 하는 백가흠 소설의 지배적인 태도 역시 작가가 서술자에게 부과한 제약이자 금지에 해당한다. 그것은 근원의 경우처럼 악몽 같은 현세를 도무지 어찌할 수 없다는 절망에 따른 무력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리 또는 금지에의 강박을, 도리어 모든 대상에 대한 애착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려는 백가흠 소설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간주해도 좋지 않을까. 일찍이 한 비평가는 백가흠 소설의 공포물적인 장면을 가리켜 어떤 이상화한 질서에 관한 상처받은 애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는데, 이는 백가흠 소설 근저에 내포되어 있는 형식의 본질에 관한 지적으로도 유효하다. 자신의 이야기 혹은 환상으로부터 배반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는 소설가, 그것과 유사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인간들을 서술자로 전경화한 『힌트는 도련님』은 백가흠의 소설들이 발단하고 있는 형식의 비의를 일러주는 텍스트로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단언할 수 있겠다. 백가흠의 소설이 재현하는 난국을 보며 더할 나위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힌 적이 있는 독자라면 그 무력함의 크기만큼 세계로부터 상처받았고 또 꼭 그만큼 세계에 애착하고 있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