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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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179_524

최현비 崔賢妃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2학년. 1996년생.

2rum07@naver.com

 

 

 

속죄양, 유다*

 

등장인물

남자 : 40대 후반

여자 : 17

남자2: 30대 중반

 

시간

2017115일 금요일

 

무대

무대 오른편에 문, 중앙에 긴 책상, 의자 두개.

책상 위에는 카세트플레이어와 시계, 녹음기가 있다.

 

여자 혼자 앉아 있다. 지루해하는 것 같다.

여자의 한쪽 손은 책상 아래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사이. 남자, 등장한다.

 

남자 좀 늦었죠? 오늘따라 차가 막히네요.

여자 (남자를 보고) 안녕하세요.

 

남자, 의자에 앉는다. 가방에서 빵과 음료수를 꺼내 여자에게 주고 종이와 펜을 꺼낸다.

 

남자 이건 된다고 하네요.

여자 와, 감사합니다.

남자 뜯어줄까요?

여자 네.

 

남자는 빵의 비닐을 벗겨 여자에게 건네준다.

여자, 빵을 먹는다. 음료수는 마시지 않는다.

 

여자 (약간 실망한 듯) 팥이네요.

남자 급하게 오느라.

여자 그래도 맛있어요.

남자 오늘이 마지막이니까요.

여자 아, 맞다.

남자 5일 동안 고생 많이 했어요.

여자 선생님도요.

 

사이.

 

남자 어젠 어땠어요?

여자 그냥 똑같죠 뭐. 밥 먹고, 자고, 심심하고.

남자 밥은 아직도 맛이 없어요?

여자 그 중국집이요, 진짜 맛없는 곳이에요. 아저씨들 어떻게 먹고 사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밥이 맛없으면 일하기 싫을 것 같아요.

남자 (작게 웃는다.)

여자 오늘 아침엔 한식 주더라구요. 맨날 거의 다 남기니까.

남자 뭐 먹었는데요?

여자 갈치조림이요. 가시가 너무 많았어요.

남자 그랬구나.

여자 다음주에도 이럴까요? 구치소 밥은 어떤지 아세요?

남자 맛이 있지는 않을 거예요.

여자 큰일 났다.

 

사이.

 

남자 결과 궁금하지 않아요?

여자 재판이요?

남자 네.

여자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뭐.

남자 기분이 어때요?

여자 아무렇지도 않아요.

남자 두렵지 않아요?

여자 별로.

남자 왜 그럴까요?

여자 별생각이 없으니까요.

남자 아직도 미안한 감정이 없어요?

여자 누구한테요?

남자 누구한테든.

여자 음.

 

사이.

 

여자 그 중국집이요.

남자 응?

여자 그 중국집 주인한테는 좀 미안해요.

남자 아까 다연씨가 말했던 중국집이요?

여자 네. 제가 거의 다 남기잖아요 매번. 얼마나 짜증 나겠어요. 애써 만들어서 갖다줬는데.

남자 그래서 미안해요? 그 사람한테?

여자 미안하죠. 제가 요리를 진짜 못해요. 할 수 있는 요리가 참치랑 마요네즈 섞은 밥 정도? 근데 항상 마요네즈를 너무 많이 넣거나 너무 조금 넣어요. 아니다. 밥을 많이 넣는 건가?

남자 다연씨가 요리 못하는 거랑 그 사람한테 미안한 거랑은 상관없지 않아요? 그 사람은 주방장인데요.

여자 그러니까요. 그 사람은 자기가 주방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미안하다는 거예요.

 

사이. 남자, 종이에 무언가를 적는다.

 

남자 그 사람이 다연씨한테 무시당했을까봐 미안하다, 그런 건가요?

여자 네.

남자 (사이) 어머니 얘기를 좀 해볼까요? 다연씨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아버지 발을 씻겨줬다고 했잖아요. 기억나요?

여자 네.

남자 그때 어머니는 왜 그런 행동을 하셨을까요?

여자 음. 글쎄요.

남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무시당하신 적은 없었어요? 다연씨가 봤을 때요.

여자 딱히…… 사이가 좋았어요.

남자 기억에 남는 다른 건 없어요?

여자 다 말씀드렸어요, 선생님.

 

긴 사이.

 

남자 여전히 후회하지 않아요?

여자 엄마를 죽인 거요?

남자 엄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여자 안 해요.

남자 ……그래요.

여자 선생님, 계속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아직도 이해가 안 되세요?

남자 이해해요.

 

침묵.

 

여자 어제 선생님 꿈을 꿨어요.

남자 제 꿈이요?

여자 선생님이 나왔어요, 꿈에.

남자 (웃으며) 제가 다연씨 꿈에 나왔군요.

여자 우리는 방 안에 단둘이 있었어요. 여기보단 조금 더 작은 방이었는데, 구조는 똑같았죠. 선생님은 늘 그랬듯이 저한테 뭔가를 열심히 묻고 있었어요. 저는 듣는 둥 마는 둥. 사실 선생님이 질문하는 거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저는 다른 거에 관심이 있어요.

남자 그게 뭔데요?

여자 방에는 문이 없었어요. 저는 다행이다 싶었죠. 별로 나가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시계도 고장 나버려서 알람이 울릴 수 없었어요. 녹음기…… 잘 모르겠어요. 신경을 못 써서.

남자 제가 다연씨한테 뭐라고 질문했죠?

여자 …… 생리를 처음 시작했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물었어요. 그리구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섹스하는 상상을 해봤냐고 물었던가. 그런 욕구에 대해서…… 언제 그걸 느끼느…… 자기한테 그걸 느낀 적이 있…… 뭐 그런 것들.

남자 다 제가 질문한 적 없던 것들이네요.

여자 꿈이니까요.

남자 다연씨가 관심 있던 건 뭐였죠?

여자 저는 계속해서 방법을 찾고 있었어요. 근데 꿈에서도 한쪽 손은 묶여 있더라구요.

남자 나갈 방법?

여자 아뇨.

남자 그러면요?

여자 선생님을 죽일 방법요.

남자 나를? 다연씨가요?

여자 네.

남자 (사이) 저를 왜 죽이고 싶어했죠?

여자 꿈에서요, 아니면 현실에서요?

 

짧은 침묵.

 

남자 나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드나요?

여자 아뇨. 그런 생각은 딱히 안 드는데……

남자 근데 왜 날 죽이려고 했죠?

여자 꿈에서요?

남자 아니, 둘 다요.

여자 현실에서는 선생님을 죽이려고 했던 적 없는데요.

남자 ……그래요.

여자 저는 선생님을 죽일 수 없어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한쪽 손은 이렇게 묶여 있고. 여긴 수면제도 없고 학교 과학실도 아니어서 청산가리도 없잖아요. 꿈에서도 그랬어요. 방법이 없더라구요. 큰일 났다 싶었어요.

 

짧은 사이.

 

남자 그래서요?

여자 그냥 그러고 꿈에서 깼어요. 아무도 못 죽인 채로.

남자 기분이 어땠죠?

여자 말했잖아요. 큰일 났다 싶었다구. 여기가 진짜 감옥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남자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여자 선생님을 죽여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까요.

남자 나를 죽이고 싶은, 아니 죽여야 하는 이유…… 그러니까 다연씨…… 죽인 열명의 사람들과 똑같다는 거죠?

여자 네.

남자 그냥 그래야 하기 때문에…… 그렇죠?

여자 네.

남자 나 말고도 더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하나요?

여자 그건 아니에요.

남자 그럼요? 내가 마지막인가요?

여자 네. 한명만 더 죽이면 돼요.

남자 왜죠?

여자 유치장에서 그 얘기를 들었어요. 한명이 아직 중환자실에 있다구.

남자 그러니까 왜 열한명을 죽여야 할까요?

 

긴 사이.

 

여자 잘 모르겠어요.

 

침묵.

남자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는다. 남자는 의자를 조금 당겨 앉는다.

 

남자 지금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여자 무슨 생각요?

남자 나를 죽여야 한다는.

여자 네.

남자 구체적인 계획을 생각해본 적 있어요?

여자 계속 생각해봤는데 불가능할 것 같아요. 선생님을 다른 사람들처럼 죽이는 건요.

남자 ……

여자 그래서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선생님이 스스로 죽음을 생각하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어요.

남자 ……자살을 말하는 건가요?

여자 네.

남자 그래요.

 

짧은 침묵.

 

남자 어떤 답이 나오던가요?

여자 선생님은 유능하고 좋은 분이시잖아요, 그렇죠?

남자 제가요?

여자 네. 그러려고 노력하시는 분 같아요.

남자 노력이요?

여자 현장검증할 때 기자들이 그러던데요. 죄책감이 안 드냐고. 가족들 다 죽이고 아무 잘못 없는 반 남자애들까지 죽인 이유가 뭐냐고. 상담할 때마다 선생님도 그러셨잖아요. 미안하지 않냐고. 근데 전 없어요. 계속 말했잖아요. 아무런 죄책감도 없다구요. 그런 저한테 이렇게 빵도 가져다주시고 다정하게 대해주시고. 아직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남자 ……

여자 그래서 그걸 한번 이용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남자 네?

여자 선생님이 노력하는 부분을요.

남자 어떻게요?

여자 (사이) 글쎄요.

 

긴 침묵.

 

남자 결과 궁금하지 않아요?

여자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남자 아뇨. 진단 결과.

여자 아.

남자 말해줄까요?

여자 제가 그걸 알아야 하나요?

남자 형식상은 그래요.

여자 뻔할 것 같긴 한데.

남자 뻔할 것 같아요?

여자 싸이코패스, 뭐 그런 거 아니에요?

 

남자, 가방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카세트테이프다.

 

남자 (테이프를 카세트플레이어에 넣으며) 그렇게 생각해요?

여자 (작게 웃으며)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때, 카세트플레이어에서 카펜터스의 「Top Of The World」가 재생된다.

여자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 카세트플레이어를 바라본다.

짧은 사이.

갑자기 여자는 소리를 지른다. 귀를 막으려고 하지만 한쪽 손이 책상에 묶여 있어 그럴 수 없다.

여자는 책상 밑으로 들어간다.

 

여자 (소리를 지르며) 제발 꺼줘요. 제발요. 선생님. 제발 꺼주세요. 제가 빌게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선생님. 꺼주세요 제발.

 

남자, 카세트플레이어에서 테이프를 꺼낸다.

긴 사이. 여자는 몸을 떨고 있다.

 

남자 어떤 기분이 들던가요?

여자 (멍하게) 기분이요.

남자 두려웠나요?

여자 두려웠어요.

남자 왜 꺼달라고 말했어요?

여자 ……꺼주세요.

남자 껐어요. 주다연씨. 이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일어나요.

 

긴 침묵.

남자, 여자를 일으켜 앉힌다.

사이.

 

남자 이가온이라고, 기억 나요?

 

여자,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 다연씨랑 제일 친했어요. 맞죠?

 

침묵.

 

남자 다연씨의 병명은 해리성 정체장애예요. 다연씨가 말했던 반사회성 인격장애가 아니고요.

여자 그게 뭔데요?

남자 한 사람이 둘 이상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정신질환을 말해요. 흔히 다중인격장애라고도 말하죠. 다연씨는 스스로 이가온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자 난 주다연이에요.

남자 이가온의 자살이 다연씨에게 꽤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되었을 거예요.

여자 ……

남자 수요일부터 우리는 최면치료를 했어요, 그렇죠?

여자 네.

 

남자, 가방에서 다른 테이프를 꺼내 카세트플레이어에 바꿔 끼운다.

목소리들이 재생되는 동안, 남자와 여자는 침묵한다.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고, 여자는 카세트플레이어를 바라보고 있다.

긴 사이.

 

남자의 목소리 지금 어디에 있어요?

여자의 목소리 ……방.

남자의 목소리 다연씨 방이요?

여자의 목소리 ……내 방이에요.

남자의 목소리 내 방? 당신은 누구죠?

여자의 목소리 ……가온.

남자의 목소리 가온?

여자의 목소리 이가온.

남자의 목소리 가온씨는 몇살이죠?

여자의 목소리 ……열다섯.

남자의 목소리 여자예요, 남자예요?

여자의 목소리 ……여자요.

남자의 목소리 지금 혼자 있나요?

여자의 목소리 ……네.

남자의 목소리 뭘 하고 있어요?

여자의 목소리 ……그림을 그려요.

남자의 목소리 무슨 그림이죠?

여자의 목소리 ……남자.

남자의 목소리 남자?

여자의 목소리 ……남자를 그려요. 머리가 짧고…… 긴 자지를 가진……

남자의 목소리 그건 누군데요?

여자의 목소리 ……이건 아무도 아니에요. 이건 그…… 긴 자지를 가진 남……

남자의 목소리 그림을 왜 그리고 있어요?

여자의 목소리 ……무서워서요.

남자의 목소리 무엇이?

여자의 목소리 그림이.

남자의 목소리 그림 속 남자가?

여자의 목소리 네.

남자의 목소리 그 남자가 가온씨한테 무슨 짓을 했죠?

여자의 목소리 ……기억이 안 나요.

남자의 목소리 그래요. 주다연을 알아요?

여자의 목소리주다.

남자의 목소리 주다? 주다연의 별명인가요?

여자의 목소리 네. 주다.

남자의 목소리 그래요, 주다. 주다와 어떤 사이인가요?

여자의 목소리 ……친구요.

남자의 목소리 주다는 어떤 사람이죠?

여자의 목소리 주다…… 말이 없어요. 거의 나만 말해요. 그 앤 그냥 내 말을 듣고만 있어요.

남자의 목소리 가온씨는 무엇을 말하나요?

여자의 목소리 농담이에요. 시시한 농담.

남자의 목소리 하나만 말해줄 수 있어요?

여자의 목소리 어떤 남자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으려는 여자를 발견했어요. 여자는 옷을 하나씩 벗고 있었죠. 신발까지 벗고 뛰어내렸는데, 남자는 결국 여자를 구하지 못해요.

남자의 목소리 왜죠?

여자의 목소리 (웃으며) 주다새끼. 너가 그래서 주다새끼라는 거야.

남자의 목소리 (짧은 사이) 내가?

여자의 목소리 그래. 여자는 속옷을 입고 뛰어내렸거든. 남자는 다 벗고 뛰어내릴 줄 알았던 거지.

남자의 목소리 재밌네.

여자의 목소리 (갑자기 돌변하며) 재밌어? 이게 정말 재밌어?

남자의 목소리 ……아니.

여자의 목소리 말해봐. 넌 재밌잖아. 이딴 거에 웃고 있잖아 지금.

남자의 목소리 난 그……

여자의 목소리 주다새끼. 내 앞에서 꺼져. 니네 집에 가. 연락하지 마. 여기 다신 오지 말라고.

 

남자, 카세트플레이어에서 테이프를 꺼낸다.

 

남자 다연씨는 지금 스스로를 이가온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날 속였던 거죠.

여자 ……난 주다연이에요.

남자 그냥 증상일 뿐이에요, 다연씨.

여자 난 주다연이에요.

남자 날 죽여야 한다고 했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다연씨가 아니라 자살한 이가온이 날 죽이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렇죠?

여자 말했어요. 난 주다연이라고.

남자 이가온의 목소리가 들린 적 있죠? 사람들을 죽이라고 협박하지 않던가요?

 

짧은 사이.

 

여자 아니요.

남자 거짓말이 아니라는 거죠?

여자 네.

남자 단 한번도 나한테 거짓말한 적. 없었다는 건가요?

여자 단 한번도 없어요.

 

긴 사이.

 

남자 좋아요. 그럼 이렇게 물어보죠. 이가온과는 언제 만났죠?

여자 ……2년 전이요.

남자 2년 전이면, 열다섯?

여자 네.

남자 같은 반이었나요?

여자 네.

남자 어떤 친구였죠?

여자 ……

남자 어떻게 친해졌어요?

여자 경찰 같네요, 선생님.

 

사이.

 

남자 경찰관은 이걸 모르죠. 그리고 난 이걸 그분들한테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고요.

여자 ……말이 많은 애였어요. 농담을 잘하고. 웃음이 많았어요. 같이 있을 땐 거의 장난밖엔 안 쳤어요.

남자 다연씨도 같이?

여자 전 아니에요. 거의 걔 혼자 했어요. 자기가 한 농담에 자기가 웃고, 그랬어요. 제가 안 웃으면 왜 안 웃냐고 뭐라고 하고. 웃으면 또 이거에 웃냐고 뭐라고 했어요.

남자 다연씨는 그 친구를 좋아했나요?

여자 처음엔 싫었어요.

남자 왜죠?

여자 그냥…… 수업도 안 듣고. 아무것도 관심이 없어 보였어요.

남자 그런데 좋아졌어요?

 

사이.

 

여자 대답해야 하나요?

남자 그럼 다른 걸 물어볼게요. 둘은 주로 뭘 하고 놀았죠?

여자 ……요리를 하거나, 그림을 그렸어요.

남자 남자 그림?

여자 ……걘 그걸 자지 그림이라고 말했어요. 서로 얼굴 그려주기도 했는데 걘 무조건 그것만 그렸어요.

남자 그 친구는 왜 그런 그림을 그렸죠?

여자 몰라요.

남자 물어보지 않았나요?

여자 네.

남자 (짧은 사이) 좋아요. 조금만 더 말해볼래요?

여자 ……요리를 해 먹을 때면 항상 참치랑 마요네즈를 섞은 밥을 먹었어요. 가끔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는데 후레이크만 넣은 라면이었어요.

남자 왜요?

여자 걔가 고기를 안 먹어서요.

남자 고기?

여자 스프에 고기가 들어 있대요. 갈린 게.

남자 다연씨는 고기를 먹어요?

여자 전 원래 먹었는데, 걔가 안 먹어서 저도 그냥 안 먹었어요.

남자 그 친구는 왜 고기를 먹지 않죠?

여자 그것도 몰라요.

남자 다연씨는 궁금하지 않았어요? 그런 게?

여자 궁금했는데 그냥 안 물어봤어요.

남자 왜요?

여자 ……그냥요.

남자 또 뭘 했어요? 그림 그리고 밥 해 먹고. 그것뿐이었어요?

여자 영화를 봤어요.

남자 기억에 남는 거 있어요?

여자 제목은 몰라요. 다 걔가 골랐어요. 학원 끝나고 걔네 집 가면 걔가 영화 틀어놓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남자 어떤 영화였나요?

여자 잔인한 영화요.

남자 잔인한 영화라면, 고어물을 말하는 건가요?

여자 네.

남자 다 그런 영화들만 봤어요?

여자 네. 전부 다 그런 거였어요.

남자 다연씨 기분은 어땠어요? 다연씨도 그걸 보고 싶었어요?

여자 아뇨.

남자 근데 왜 봤죠?

여자 걔가 봐서요.

남자 다연씨는 그 친구를 좋아했군요. 그렇죠?

 

침묵.

 

남자 대답하기 싫어요?

여자 ……

남자 그래요.

 

사이.

 

남자 아직도 나한테 거짓말하고 있지 않나요?

여자 네.

남자 아직도 날 죽여야 하고요?

여자 네.

남자 다연씨. 난 의사예요. 다연씨는 지난달 존속살인과 연쇄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이자 환자고요.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야 돼요. 이러면 다연씨만 더 불리해집니다. 교도소에 가고 싶어요? 아픈 채로?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다연씨가 어떤 병이 있는지 진단하러 온 전문의예요. 그리고 그 병명은 다연씨가 하는 행동이나 최면치료를 통해서 이미 다 밝혀졌고요. 자꾸 이가온을 부정하는 이유가 뭐죠?

여자 걘 죽었어요.

남자 아뇨. 이가온은 죽지 않았어요. 지금 다연씨 마음속에 있죠. 단지 복수를 하기 위해 다연씨 마음에 들어온 거예요. 다연씨한테 사람들을 죽이라고 협박하고, 다연씨 인생을 완전히 빼앗아갔어요.

여자 걘 여기 없어요!

남자 날 속이려고 하는 이유가 뭐죠? 날 죽여야 하기 때문에요?

여자 선생님을 속인 적 없어요.

남자 다연씨는 지금 날 속이고 있어요. 상담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속였던 거죠.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날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자 무서워요.

 

사이.

 

남자 무섭다고요.

 

침묵.

남자는 시계를 본다.

 

남자 미안해요.

여자 ……괜찮아요.

남자 다연씨. 본인이 스스로 아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돼요. 그게 시작점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다연씨한테 내가 필요한 거고요.

여자 저는 아프지 않아요, 선생님.

남자 아프지 않은데 열명의 사람들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죽일 순 없어요. 가족들까지 포함해서.

 

사이.

 

남자 목요일이에요. 자신을 마주해봐요.

 

남자, 가방에서 테이프를 꺼내 카세트플레이어에 넣는다.

사이.

 

남자의 목소리 당신은 누구죠?

여자의 목소리 ……주다.

남자의 목소리 주다연?

여자의 목소리 ……주다. 난 주다.

남자의 목소리 그래요, 주다. 주다는 지금 어디에 있죠?

여자의 목소리 가온의 방.

남자의 목소리 뭘 하고 있어요?

여자의 목소리 노래를 들어요.

남자의 목소리 무슨 노래?

여자의 목소리 (흥얼거린다) Im on the top of the world…… lookindown on creation.

남자의 목소리 무슨 노래죠?

여자의 목소리 (점점 크게) And the only explanation I can find. Is the love that Ive found ever since youve been around. Your loves put me at the top……

남자의 목소리주다연씨?

여자의 목소리우린 노래를 듣고 있어요. 가온이 집에 하나밖에 없는 테이프예요. 난 태어나서 그걸 처음 봤어요. 우리 집은 CD만 썼는데. 오래되고 낡은 집이에요. 방문은 다 열려 있어요. 그런 집도 처음 봤어요. 방 모서리에 곰팡이들이 있어요. 가온이는 자꾸 그걸 만져요. 그러다가 노래 후렴구가 나오면 갑자기 일어나요. 몸을 흐느적거리면서 이상하게 움직여요. 춤을 추는 것 같아요. 아니에요. 저건 진짜 춤이에요. 난 가만히 그걸 보고 있어요. 이상한 것 같아요. 아니, 이상해요. 얜 진짜 이상해요. 너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절대로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해요.

남자의 목소리 주다연씨는 뭘 하고 있죠?

여자의 목소리 ……가만히 그걸 듣고만 있어요. 걔를 보고만 있어요. 걔가 춤추는 걸 봐요. 웃는 걸 봐요.

남자의 목소리 주다연씨. 이제 이가온이 죽기 전날로 가볼까요? 주다연씨는 그날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죠?

여자의 목소리 ……영어학원이 끝났어요. 가온이 집에 가고 있어요. 오늘도 살이 뜯기고 피가 나오는 영화를 보겠지. 걘 그걸 보고 난 그걸 보는 걔를 보고. 가는 길에 참치캔을 사요. 익숙한 아파트가 보여요. 복도식 아파트예요. 3층. 걔네 집은 맨 끝이에요. 복도를 걸으면서 생각해요. 내일은 다른 걸 사가야지. 내일은 다른 영화를 보자고 말해봐야지. 꼭.

남자의 목소리 자, 이제 문을 열어보세요.

여자의 목소리불이 다 꺼져 있어요. 가온이 방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요. 그 앤 항상 그 노래만 듣고 있어요.

남자의 목소리 이가온을 봤나요?

여자의 목소리 ……매트리스 위에 길게 누워 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반쯤 벌리고 있어요. 천장을 보나. 아니에요. 아무것도 보지 않아요. 내가 온 것도 몰라요. 가슴에 핸드폰이 켜진 채로 놓여 있어요.

남자의 목소리 핸드폰?

여자의 목소리 기사가 떠 있어요. 2년 뒤에 출소를 한대요.

남자의 목소리 누가?

여자의 목소리 어떤 남자.

남자의 목소리 그 남자가 무슨 짓을 했죠?

여자의 목소리 자기 딸을 성폭행했대요. 11년 전에.

 

긴 사이.

여자의 목소리는 흐느끼기 시작한다.

 

여자의 목소리 나는 가온이 핸드폰을 꺼버려요. 노래의 후렴구가 나오고 있어요. 갑자기 나는 몸을 흐느적거리면서 이상하게 움직여요. 가온이가 나를 봐요. 아무런 초점도 없는 눈으로. 나를 봐요. 나는 웃어요. 춤을 춰요. 가온이처럼. 가온이는 한참 동안 나를 봐요. 나는 한참 동안 춤을 춰요. 그런데 금방 지쳐요. 노래도 금방 끝나요. 나는 가온이 옆에 길게 누워요. 나란히. 천장을 봐요. 내가 가온이 손을 잡아요. 그리고 깨달아요.

남자의 목소리 무엇을?

여자의 목소리 모든 게 완벽하다는 걸. 지금 이 모든 게.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여자의 목소리 눈을 감아요. 아주아주 깊은 잠을 잘 거야. 나쁜 꿈을 꾸지 않을 거야. 내일은 다르고 예쁜 영화를 보자고 할 거야. ……가온이 목소리가 들려요. ……다연아.

남자의 목소리 네?

여자의 목소리 다연아. 처음으로 그렇게 불렀어요.

남자의 목소리 이가온이?

여자의 목소리 나는 대답하지 않아요. 다연아. 또 불러요. 부른다기보단 속삭여요.

남자의 목소리 대답했나요?

 

이때부터 여자와 여자의 목소리, 남자의 목소리는 동시에 발화된다.

여자의 어조는 차분하고,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나오는 여자의 목소리는 감정적이다.

 

여자, 여자의 목소리 (남자를 쳐다보며) 아뇨.

여자, 남자의 목소리 왜죠?

여자, 여자의 목소리 ……모르겠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어. 미안해. 미안해.

 

남자, 카세트플레이어를 멈춘다.

 

여자 너가 죽고 한참 동안 미안하다는 말을 했어.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너가 그날 지었던 표정을 따라했어. 눈을 크게 뜨고 입은 반쯤 벌린 채로 어디를 쳐다보는지도 모르게. 너랑 같이 봤던 영화를 수백번은 돌려봤어. 이젠 피가 튀기고 살이 뜯기는 영화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

남자 지금 뭐 하는 거지?

여자 생각해보니까 넌 한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어. 웃거나 짜증 내기만 했지. 그날 봤던 니 얼굴이 울고 있던 거였는데.

남자 주다연.

여자 나도 이제 눈물을 흘리지 않고 울어.

 

남자, 카세트플레이어를 바닥에 집어던진다.

사이.

 

남자 주다연. 똑바로 말해. 어떻게 기억하고 있지?

 

여자는 카세트플레이어를 바라보고 있다.

 

여자 최면에 걸리지 않았으니까요.

 

짧은 침묵.

 

남자 뭐라고?

여자 (남자를 쳐다보며) 난 주다연이에요. 이가온은 죽었어요.

남자 아니, 넌 이가온이야.

 

여자, 작게 웃는다.

 

남자 왜 웃지?

여자 (웃음을 참으며) 재밌어서요.

남자 재밌다고.

 

사이.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화를 참는 제스처를 보인다.

사이.

 

남자 그거 알아? 내가 말하는 대로 니 인생은 달라지게 돼 있어. 내가 말 한마디 하면 넌 평생 동안 더러운 감옥 안에서 썩어야 한다고. 그런데 나를 속여? 나를 죽이겠다고?

여자 전 선생님을 속인 적 없어요.

남자 아니, 넌 최면에 걸렸어. 지금 니가 하는 말들은 다 무의식 속에서 튀어나온 말이라고. 최면도 기억이 될 수 있는 거 아나? 넌 그냥 환자야.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고. 난 너 같은 애들을 13년 동안이나 치료해왔어. 그런데 나를 속이겠다고? 니가 나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재판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니? 넌 폐쇄병동에 가게 될 거야. 나갈 수도 누굴 만날 수도 없는 독방에 갇혀서 온갖 종류의 약들을 삼키면서 살게 되겠지. 니가 이가온이라는 착각 속에서 말이야.

 

갑자기 여자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린다.

남자는 침묵하고, 여자는 웃기 시작한다.

긴 사이.

 

여자 (웃음을 가라앉히고) 아주 어렸을 때 내 방은 원래 하얀색이었어요.

 

사이.

 

여자 그러다가 동생이 태어났는데. 벽 색깔이 달라진 거예요. 아니, 가구까지 다요. 내 방 침대엔 레이스가 있고 벽은 분홍색. 인형들이 나를 보고 있어요. 그 수많은 눈알들이 나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해요. 나를 예뻐해주세요. 나를 사랑해주세요. 나는 그 눈알들을 싸인펜으로 까맣게 칠해버렸죠. 동생 방은 파란색이었어요. 비행기가 날고. 경례를 하고 있는 장난감들. 영웅들.

 

사이.

 

여자 이상한 건, 내가 동생의 장난감에는 그렇게 못했다는 거예요. 맨날 동생이 잘 때 몰래 방에 들어가서 시도해봤는데. 경례하는 손을 꺾어버린다거나. 영웅들의 망토를 찢어버린다거나. 그런데 그러질 못했어. 아무것도 나는 할 수 없었어요.

 

사이.

 

여자 매일 밤마다 엄마가 거실에 오래된 노래를 틀고 예쁜 그릇 같은 걸 놓고 아빠를 기다려요. 아빠가 퇴근하고 오면 아빠는 자연스럽게 소파 위에 앉아서 그릇 안에 발을 담가요. 그러면 엄마는 아빠의 발을 씻겨줘요. 일종의 의식같이. ……그 그릇 안에선 늘 좋은 향기가 났어요.

 

사이.

 

여자 나는 매일 그 향기를 기다려요. 좋은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사이.

 

여자 어느날 나는 아빠한테 물어요. 왜 그 좋은 냄새가 나는 물로 엄마의 발을 씻겨주지 않냐고. 아빠가 대답해요.

 

사이.

 

여자 엄마는 늘 너네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네 옆에 있지는 않을 거야.

 

사이.

 

여자 난 아무것도 몰랐어요.

 

사이.

 

여자 내 방은 왜 분홍색인지. 나는 왜 동생의 장난감을 부러뜨리지 못한 건지. 아빠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왜 가온이 농담에 웃었는지.

 

짧은 사이.

 

여자 아니야, 이런 바보 같은 질문들조차 하지 않았어요.

 

사이.

 

여자 그래서 가온이 장례식장에 가지 않고 연습을 했어요. 그런 질문들을 하는 연습.

 

사이.

 

여자 걔가 세상에서 지워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아니, 원래부터 지워졌던 것 같아요. 걔가 네살 때부터.

 

사이.

 

여자 선생님. 저는 너무 두려워요.

 

짧은 사이.

갑자기 알람이 울린다.

남자2, 등장한다.

 

남자 2 (남자에게) 드디어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남자2는 여자의 한쪽 손과 책상에 함께 묶여 있던 수갑에 열쇠를 넣는다. 남자2는 수갑을 풀고 다시 여자의 두 손에 수갑을 채운다.

(남자2가 하는 이 행동은 여자를 대하는 태도와 남자를 대하는 태도가 매우 상반되게 보여야 한다. 예컨대 남자2는 여자를 사물로 대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남자 2재판이 벌써 다음주더라구요. 진단서는 녹음된 테이프랑 같이 일요일 자정까지 보내주시면 되고요.

 

남자2, 남자에게 서류봉투를 건넨다.

 

남자 2이건 읽어보시고 싸인해주시면 됩니다. (여자를 일으켜 세우며) 지금까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뭐,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남자 잠시만요.

 

사이.

 

남자 2 (웃으며) 그새 정이라도 들으셨어요?

 

사이.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쳐다본다.

 

남자 (천천히) 다연씨가 하려던 게 이거였나요?

 

긴 침묵.

 

여자 네.

 

사이.

 

남자 2끝인가요?

 

짧은 침묵.

 

남자 2 (웃으며) 뭘 하려던 건진 모르겠지만.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카세트플레이어를 발견하고) 저건 왜 떨어졌지.

 

남자2, 여자와 함께 퇴장한다.

긴 침묵.

남자, 녹음기에서 테이프를 꺼낸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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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은 이연주 시집 『속죄양, 유다』(세계사 1993) 참조.

 

 

 

심사평

 

예년보다 월등히 늘어난 81편의 젊은 희곡을 만날 수 있었다.

인간과 시대를 통각하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쏟아졌지만, 무대와 객석 간의 거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온 설명적이고 작위적인 작품들이 많아 질적인 발전을 담보하진 못했다. 응모작을 나눠 읽은 후 본심에 올린 작품은 모두 6편이다.

 

「즐거운 나의 집」은 역할대행이라는 설정을 통해 단절된 가족의 마주 보기를 시도하는 발상이 특별했던 반면 가족의 현실에 대한 반복적인 설명, 전형적이며 단순한 캐릭터들이 아쉬웠다. 「청소」는 청소용역업체 직원들이 맞닥뜨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의 연속을 통해 개인과 사회의 어긋나는 관계를 모색하는 시도가 좋았지만 개연성 없는 장면, 기능적인 인물 설정 등이 몰입을 방해했다. 「컬럼비아대학 기숙사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동양인 임산부와 현장에서 도주한 동양인 남성에 대한 뉴욕타임즈의 지나치게 짧은 보도기사」는 길고 매력적인 제목만큼 새로운 연극적 형식을 시도하고 있는데, 극의 서사가 제목을 뚫고 나오지 못한 채 다소 냉소적인 재현에 그치고 말았다. 「스윕(Sweep)」은 재난 이후 생존자의 삶을 바라보는 독특한 거리감이 매력적인 작품으로, 특히 야구장이라는 공간과 상황 설정을 통해 담담히 그들의 현재를 바라보게 하는 미덕이 있었다. 그러나 작품의 목표가 선명하지 못함으로 인해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대합실」은 리모델링을 앞둔 강원도 평창의 한 버스터미널을 배경으로 기다림과 사라짐의 드라마를 밀도있게 다룬, 완성도 면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동시에 지금까지 많이 봐온 익숙한 이야기, 새롭지 않은 주제의식이라는 면에서 망설여졌다. 「속죄양, 유다」는 연쇄살인을 저지른 17세 여고생과 정신의학적 소견을 쓰고자 하는 정신과 의사의 마지막 상담을 통해 구원에 관한 기독교적 세계관의 전복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연쇄살인, 존속살해, 친족 간의 성폭행 등의 강력범죄를 다루면서도 흔들림 없이 도약하여 신화를 성취해내는 작가의식이 돋보였다. 그러나 관객에게 도달하는 지점이 모호하다는 측면에서 역시 완성도가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대합실」과 「속죄양, 유다」를 놓고 토론을 거듭했다. 극의 완성도인가, 젊은 작가의 패기인가. 답은 이미 나와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대라는 광활한 시공간을 채우기 위해 젊은 극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익숙한 것을 거부하고 경계를 뛰어넘으려는 서늘한 패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속죄양, 유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새로운 작가의 탄생을 축하하며, 인간과 세계의 이면을 통찰하고 도약하는 작가로 성장하길 바란다.

고연옥 김수미

 

 

 

당선소감

 

감사합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무엇이 됐든 일년에 하나씩만 하자, 그게 제 목표였습니다.

다짐한 열여덟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지키고 있는데도 여전히 마음이 무겁습니다.

늘 그래왔습니다.

 

사실 두렵습니다.

많은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쓸 때는 모릅니다.

 

쓰고 나서야 내가 뱉은 대사가, 인물이, 그리고 그 인물과 닮은 누군가가 느껴야 하는 고통스러운 감정들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사실 왜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읽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나 아픈 사람들이 등장하는데도

왜 그 작가들을 그렇게나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게 위로라고 합니다.

자기만족이라고도 합니다.

엇비슷한 감정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이 너무 좋다가도 싫습니다.

사람이 너무 싫다가도 또 좋습니다.

아마 이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항상 이해라는 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지만

적어도 뭔가가 느껴지는 게 있기는 한가봅니다.

 

어쩌면 그게 기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몫입니다.

그 당위로 계속 쓰겠습니다.

부족한 작품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최현비

최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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