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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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혜진 金惠珍

1983년 대구 출생.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어비』, 장편소설 『중앙역』 『딸에 대하여』 등이 있음. suspens77@naver.com

 

 

 

동네 사람

 

 

너는 잠시 차를 세우고 베이커리에 들를 생각이었다고 한다.

시장 앞은 차와 사람들로 붐비고 그래서 한동안은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고 한다. 한참 만에 자리가 났고 아슬아슬하게 후진과 전진을 반복하고 있을 때 차체에 뭔가 부딪히며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고 말한다.

폐지 줍는 할머니 알지? 왜, 깡통이랑 병이랑 끌고 다니는 할머니.

나는 알고 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커다란 가방 서너개를 들고 늘 동네 골목 어딘가에 주저앉아 있던 노인의 모습이 곧장 떠오른다. 우리가 처음 이사 왔을 무렵엔 비닐봉지 몇개가 전부였다. 그러다 언젠가부터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혼자서는 들지도 못하는 여행가방을 자루처럼 끌고 다니는 모습을 자주 봤다.

할머니를 친 거야?

아니, 내려서 보니까 할머니가 아니고 개였어. 할머니가 데리고 다니는 개 있잖아.

너는 할머니가 데리고 다니는 개 이야기를 한다. 다리가 짧고 털이 많은 개. 언젠가 우리가 동네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 그 노인이 개를 데리고 들어왔다. 주인이 생맥주 두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재빨리 출입문 쪽으로 다가갔다. 노인은 천원짜리 한장을 내밀며 치킨을 달라고 요구했다. 주저하거나 미안한 기색은 없었다. 주인이 거의 내쫓듯 노인을 몰아붙이고 승강이가 이어지는 동안 작은 몸이 공중에 뜰 정도로 맹렬히 짖던 개의 모습이 생각난다.

개가 다쳤어?

아니, 그런가 해서 봤는데 아니더라고. 할머니가 폐품 쌓아놨잖아. 거기 앞에. 그게 쏟아진 거였어. 개는 멀쩡해. 잘 걷더라고. 다행이지?

너는 노인을 따라 노인의 집까지 갔었다고 말한다. 베이커리 뒤편 골목 안쪽에 노인의 집이 있다고 알려준다. 오래된 한옥이지만 마당도 있고 집 안이 꽤 넓은 편이었다고 말할 땐 몰랐지, 하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뜬다.

집이 있어? 의외네. 근데 왜 만날 길에 나와 있대?

몰라. 그건 안 물어봤어.

너는 개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피고 몇번이고 동물병원에 가려고 했다고 말한다. 노인에게 다친 곳이 있느냐고 묻고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제안을 뿌리친 노인에게 오만원을 건넸다고 털어놓는다.

오만원은 왜?

그냥 청심환이라도 사드시라고 했어.

상의 없인 차를 쓰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기름을 넣고, 수리를 하고, 보험비와 과태료, 세금을 내는 일까지. 모든 비용을 내가 지불하는데도 너는 그것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네 명의로 된 차니까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차를 갖고 나가기만 하면 이런 문제들을 안고 돌아오는 네가 제일 먼저 사과해야 할 사람이 나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비로소 긴장이 풀어지고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 같다. 나는 남은 오렌지케이크 조각을 한입에 다 털어넣고 말한다.

그래. 잘했네. 놀랐겠다.

주말이 되고 일요일 오후에 우리는 집을 나선다.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동네가 북적거린다. 인도는 좁고 울퉁불퉁해서 다들 걸음이 느리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시장까지 간다. 그럼에도 이 동네로 이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동네가 점점 더 좋아진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런저런 가게들이 새로 문을 열고 멀리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주말이나 휴일엔 이렇게 낯선 사람들 속에 섞여 동네를 어슬렁거릴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든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모르는 인파 속에서 느끼는 어떤 편안한 기분에 대해 알게 된다.

한주가 지나고 수요일 저녁 건물 반상회가 있다. 누가 가느냐 하는 문제로 우리는 잠시 실랑이를 벌인다. 결국 아홉시가 되기 전에 내가 아랫집으로 내려간다. 201호 여자가 문을 열고 나를 맞는다. 달큼한 양념 냄새, 코가 매운 향 냄새 같은 것들이 달려든다.

301호 맞죠? 두분이 같이 올 줄 알았더니 혼자 오셨네.

여자의 말이 나를 놀라게 한다. 우리는 지난겨울 새로 이사 왔고 여자는 내게 처음 보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왜, 맨날 두분이서 사이좋게 다니잖아요. 둘이 자매예요? 닮은 거 같아.

내가 모르는 어떤 순간 여자가 나를, 혹은 우리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곧바로 뒤따라온다. 나는 간단히 고개를 까딱하고 만다. 좁고 긴 현관을 지나자 3인용 소파가 놓인 작은 거실이 나온다. 먼저 온 두 사람이 알은체를 한다. 언젠가 한번쯤은 마주쳤을 텐데도 다들 본 적이 없는 사람들 같다.

아홉시를 조금 넘기고 회의가 시작된다. 일층 한 가구, 사층 한 가구를 제외한 여섯 가구가 마주 앉아 논의하는 것은 주차장과 옥상에 쌓아둔 개인 물품들을 처리하는 문제다. 이주 동안 각자 물건을 되가져가고 그후에도 남는 물건들은 일괄 폐기하는 것에 모두 합의한 뒤에도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자꾸만 다른 문제들이, 사안들이 따라나온다. 재활용쓰레기를 잘 분리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옥상 방수공사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누군가 우편함과 건물 외벽에 광고 스티커가 너무 많이 붙어 있다고 말하면 이는 청소업체에 대한 불만으로 옮겨간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관리비를 더 내서라도 청소업체를 바꾸고 건물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게 좋지 않으냐는 제안에 사람들이 열을 올리고 있다.

301호는 어떻게 생각해요?

맞은편에 앉은 201호 여자가 묻는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이야기들을 마무리하고 서둘러 이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싶은 눈치다. 나는 고민해보겠다고 말한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긴 나도 마찬가지다.

참, 그때 할머니 사고 난 거 그건 잘 해결했어요?

현관 앞에서 201호가 다시금 놀라운 말을 건넨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할머니 발가락이 부러졌다고 그러던데 아니에요? 강아지 발이 부러졌댔나. 아무튼 잘 해결됐나 해서 물어봤어요.

여자는 요 앞 철물점에서 들었다고 하고, 미용실에서 들었다고 하고, 목욕탕에서 들었었나, 하면서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복도에 서서 여자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눈다. 주로 내가 상황을 설명하고 여자가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식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말이 길어진다. 센서등이 꺼질 때마다 한 팔을 휘휘 내두르면서 나는 계속 말을 보탠다. 결국 여자가 내 말을 끊고 말한다. 어쨌든 옥상과 주차장에 내놓은 물건들을 가능한 한 빨리 치워달라는 부탁이다.

이틀이 더 지난 뒤에야 201호가 왜 그 이야길 꺼냈는지 알게 된다. 퇴근 후 나는 곧장 네가 알려준 베이커리로 간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카운터 앞에 서서 주인과 이야기하는 네 뒷모습이 보인다. 카운터 쪽으로 상체를 잔뜩 기울인 뒷모습에서 조바심과 초조함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그때 보셨잖아요. 할머니랑 저랑 여기 앞에 서 있다가 할머니 댁으로 걸어가는 거요.

저녁 시간이라 가게 안이 붐빈다. 손님들이 트레이에 빵을 담아 올 때마다 너는 한두걸음 물러나서 남자의 대답을 기다린다. 남자는 빠른 손놀림으로 빵을 포장하며 굼뜨게 대답한다.

뭔 일인가 싶어서 나가보기야 했지. 내가 뭐 그걸 보고 말고 할 게 어딨어요.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네가 다시 묻는다.

아니, 그때 할머니 잘 걷는 거 보셨잖아요. 개도 멀쩡했는데요.

매대를 빙빙 돌며 빵을 고르던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린다. 그럼에도 네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멀리 있어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다 알아들을 정도다. 남자의 얼굴에 성가신 기색이 역력해진다. 주방 쪽에서 믹서기 소리가 딱 그치고 위생모자를 쓴 여자 하나가 걸어나온다. 소란스럽던 가게 안이 일순 고요해진다.

우리는 잘 몰라요. 그 할머니한테 가서 물어보세요.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지, 왜 여기 와서 그래요.

너는 기다렸다는 듯 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일을 아무한테나 말하고 다니느냐고 따져 묻는다. 다른 사람들. 201호 여자를 염두에 둔 것 같다. 남자는 과일 케이크를 상자에 넣다 말고 고개를 들어 네 얼굴을 빤히 본다.

아무한테나라니. 내가 이 동네서 몇년 살았는지 알아요? 이십년이야, 이십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어. 동네 사람 다 알지. 그리고 사고를 냈으면 사람이 다쳤는지 확인을 해야지. 누가 그렇게 돈으로 입막음을 해요.

입막음이라뇨.

몇만원 주고 말았다면서. 그 양반이 여기 와서 그러던데? 아무리 노인네라도 그렇지. 돈 몇푼 주고 나 몰라라 하면 되나, 젊은 사람이. 저 오거리 너머 빌라에 살지 않아요?

남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가게를 찾아오는 노인 때문에 난처해진 건 자신이라고 하소연한다. 아픈 개 때문에 멀리 갈 수가 없다느니, 배가 고파 죽겠다느니, 유통기한이 지난 빵이라도 달라느니, 가게에 들어오면 안 나가려고 버티는 노인 때문에 곤란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낮춘다. 결국 내가 뭔가 더 따져 물으려던 너를 끌고 나온다.

카운터 앞에 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남자의 목소리가 문밖까지 따라나온다. 아, 그 양반. 고시원 뒷집. 이 동네 사람인가. 큰일이네. 여자 둘이. 저 너머 빌라에. 외지인들이 몰려와서. 그런 말들이 문밖까지 따라 나온다.

너와 나에 관한 말들이 사람들의 입을 타고 동네를 맴돌 거라는 생각. 모르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우리를 단번에 알아볼 거라는 생각. 기분 나쁜 추측과 짐작들이 너와 내 주변을 기웃거리고 고요한 일상을 넘겨다보고 결국엔 이 동네에서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나 하고.

너는 금방이라도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갈 것처럼 가게 안을 노려본다. 마을버스 정류장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우리 쪽을 힐끔거린다. 무심하고 무표정한 얼굴. 그럼에도 우리의 차림새와 행동거지 따위를 찬찬히 뜯어보는 게 다 느껴진다. 밝게 염색한 너의 머리칼, 민소매 셔츠, 맨발이 다 드러나는 슬리퍼 따위에 언짢은 시선들이 머문다. 동네 어딘가에서 언젠가 한번은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 같다. 아니, 우리만 모르고 저 사람들은 다 아는 것 같다.

할머니 집이 이 뒤편이랬지?

나는 너를 끌고 서둘러 자리를 뜬다. 노인의 집엔 노인이 없다. 그 개도 보이지 않는다. 상자더미, 플라스틱 대형 양념통, 다리가 부서진 철제 의자와 녹슨 자전거가 마당 한쪽을 다 차지하고 있다. 노을 속에서 가늘고 긴 거미줄들이 반짝거린다. 나는 까치발을 하고 대문 너머를 들여다보며 계속 목소리를 높인다.

저기요, 저기, 계세요?

곁에 선 너는 답답하다는 듯 대문을 쾅쾅 두드리고 집 앞에 쌓인 폐품더미를 뒤지기 시작한다. 다시 보니 담벼락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골목을 지나던 사람들이 그런 너를 못마땅한 얼굴로 지나친다. 지나쳤다가 몇번이고 뒤돌아보는 사람도 있다.

담배 꺼. 담배 끄라고.

왜 그래. 너까지 자꾸.

너는 투덜거리며 담배꽁초를 바닥에 비벼 끈다. 담뱃재가 새어나온 자리가 노랗다. 허기가 진다. 목구멍이 간질간질하다. 감기가 올 것 같다. 이런 예감은 거의 틀린 적이 없다. 손등을 이마에 갖다 대자 미열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나는 조금 더,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고집을 부린다.

어디 다친 데가 없으니까 집을 비운 거겠지. 아프면 못 움직이잖아.

그런 말을 하는 너는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 같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일들이 오해를 불러오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결국엔 우리를 자꾸만 더 멀고 낯선 동네로 밀어넣는다는 생각은 못하는 것 같다.

나도 몰라. 집주인이 이제 신분이 좀 확실한 사람들한테 집을 놓고 싶어하네. 그게 안심이 된대요.

지난해 살던 집 계약기간이 끝날 무렵 부동산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신분이 확실한 사람들이라니. 여자는 신혼부부나 왜 애 키우는 가족들 있잖아요,라고 덧붙였다. 너는 가만있지 않았다. 도대체 그게 계약을 연장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며, 따지고 대들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너의 충동적인 행동이 그 사람들에게 또 얼마간 확신을 준 게 분명했다.

이상한 사람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

직장이 없는 사람들. 가족이 아닌 사람들. 밤이나 낮이나 할 일 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나 하면 없고 없어졌나 하면 어디선가 또 나타나는 우리의 신분을 확인해줄 수 있는 건 너와 나뿐이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더이상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다. 이곳에서 눈에 띄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다. 계약이 종료되면 기간을 연장하고 또 연장하면서 몇년간은 편하게 지내고 싶다. 그렇게 사는 데에 얼마나 섬세하고 큰 노력이 필요한지, 너는 여전히 모르는 게 틀림없다.

난 더 못 기다리겠어. 갈래.

너는 크게 기지개를 켜고 골목을 빠져나가버린다. 나는 너를 뒤쫓아가며 한 블록 아래 새마을금고 이야기를 한다. 그 할머니가 자주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나는 할머니와 직접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묻고, 찾아보자고 너를 달랜다.

자동입출금기 3대가 있는 새마을금고 안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다.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 밖이 내다보이는 문 앞에 나란히 서 있다. 뙤약볕이 쏟아지던 여름날. 이곳 바닥에서 가방을 베개 삼아 누워 자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곳에 쪼그리고 앉아 찢어진 가방 귀퉁이를 꿰매던 노인의 모습도 생각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노려보고, 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멀쩡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던 모습도 떠오른다. 현금지급기를 이용하러 온 사람들이 자꾸만 우리를 힐끔거린다.

우리는 그곳에 서서 한시간을 더 보낸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날 할머니랑 개랑 잘 살펴봤다고 하지 않았어?

액세서리 가게 앞을 지날 때 내가 묻는다. 목구멍이 따끔거린다.

어. 할머니도 개도 멀쩡했어.

너는 과일과 채소를 실은 트럭을 피해 길 끝으로 물러나며 대답한다.

그때 베이커리 사장이 나와서 봤어? 다른 사람들은?

트럭 확성기에서 나오는 소음이 멀어지길 기다렸다가 내가 묻고 네가 답한다. 네가 묻고 내가 답할 때도 있다. 우리는 나란하게 걷다가 어긋나고 비껴나면서 계속 걷는다. 마을버스 한대가 지나가고 배달 오토바이 몇대가 지난다. 대화는 차분하게 우리를 따라온다.

근데 왜 자꾸 다쳤대? 그날 확실하게 본 거 맞아?

다친 게 아니라니까. 다쳤으면 그냥 왔겠어?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그러나 편의점 앞에 이르렀을 땐 네 목소리에 짜증이 실린다. 나도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된다.

다쳤으면 어떻게 할 건데? 정말 다리라도 부러졌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를 자꾸만 몰아세우게 된다. 어떤 실수가 있었던 건 아닌지, 뭔가 놓친 건 아닌지, 집요해진다. 나는 오래전, 더 오래전 일들을 들먹거리며 너를 다그친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너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네가 이렇게 불신을 키운 탓이다. 네 목소리가 커지고 내 목소리도 커진다. 대화가 이리저리 튄다. 너도, 나도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지 않는다. 급기야 편의점 알바생이 무슨 일인가 하고 문을 열고 내다볼 정도다.

왜들 그래요? 아, 왜 길에서 난리야.

건너편에서 부동산 주인이 문을 열고 나온다. 안경을 여러번 고쳐 쓰는 모습이 마뜩잖은 기색이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던 세탁소 주인도 나온다. 골목을 지나가던 몇 사람은 아예 걸음을 멈춘다. 이층 까페테라스 너머로 고개를 내미는 사람들도 있다. 어디나 눈들이 있고 고개를 돌리면 나를, 너를 빤히 바라보는 눈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주목을 끌면서 온 동네가 우리를 멋대로 마음대로 오해하도록 내버려둔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노인은 보이지 않는다. 무심히 볼 때엔 언제 어디서나 눈에 띄던 노인을 찾으려고 밤마다 우리는 동네를 돌고 또 돈다. 가게들이 문을 닫고, 관광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밤의 동네는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문을 열어놓은 채 가게를 마감하는 상인들의 얼굴엔 친절과 호의 같은 것은 다 사라지고 없다. 밖을 내다보는 그들의 눈초리에는 의혹과 의심, 피로와 고단함 따위가 뒤섞여 있을 뿐이다. 그럴 땐 한낮에 한가하게 동네를 거닐며 느끼던 편안한 기분은 사라지고 없다.

이건 동네의 문제가 아니고 네 문제일지도 모르지. 네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일지도 모르지. 우리가 함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우리는 어둑어둑한 길가 쪽에 붙어서 걷고, 차들이 지나는 환한 대로가 아니라 좁은 골목길로 걷는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서야 노인과 만날 수 있게 된다.

누군가 차 앞 유리에 메모를 붙여둔 덕분이다. 금요일 밤 재활용쓰레기를 내놓고 온 너는 망가진 사이드미러를 살피다가 그 쪽지를 봤다고 말한다.

미친놈들 아니야? 왜 남의 사이드미러를 부수고 난리야. 설마 할머니가 이런 건 아니겠지? 누구한테 시켰나? 할머니 자식들인가?

네 말대로 왼쪽 백미러는 완전히 망가져 있다. 전선들이 튀어나와 있고 사이드미러는 겨우 그 전선들에 매달려 있다. 거울에 허옇게 발자국이 남아 있다. 어떻게든 사이드미러를 다시 끼워보려고 하지만 더는 못 쓸 것 같다.

노란색 포스트잇엔 접촉사고 건으로 연락드린다는 메시지와 연락처 하나가 남겨져 있다. 오전 열한시 전에 연락달라는 글자는 아주 작아서 나중에 급하게 적어넣은 것 같다. 반듯하게 씌어진 글씨는 정중하고 예의바른 것 같지만 묘하게 주눅 들게 하는 데가 있다. 우리 차라는 걸 어떻게 안 걸까. 우리 차가 여기 있다는 걸 누가 알려준 걸까. 우리가 사는 집을 언제 다녀간 걸까.

이튿날 오전에 내가 전화를 건다. 너는 곁에 앉아 물끄러미 그 포스트잇을 내려다보고 있다. 베란다 창을 등지고 앉은 너의 그림자가 내 쪽으로 쏟아진다. 신호가 가고 전화를 받는 건 앳된 여자 목소리다. 앳되지만 정확하고 빈틈없는 목소리다.

근데 할머니랑은 관계가 어떻게 되시죠?

내가 묻자 여자는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말한다. 나는 어떻게든 상황을 잘 설명해보려고 한다. 이건 우리 잘못이 아니고, 할머니가 혹은 네가 뭔가 잘못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개 짖는 소리가 난다. 수화기 너머로 여자가 개를 달래는 소리가 들린다. 웅얼거리는 말소리도 들린다. 그 노인일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여자는 노인과 통화하고 싶다는 내 말을 못 들은 척한다. 여자는 개가 다친 것 같다고 말하고 사고 이후로 할머니가 다리를 절뚝거린다고도 한다. 내 말을 그저 변명이나 핑계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날 사고 난 뒤에 다 잘 확인한 거 맞아?

통화가 끝나자마자 문득 그런 말이 튀어나온다. 도대체 일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왜 일을 이렇게 번거롭게 만드는 걸까. 너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나와 눈을 맞춘다. 그럼에도 한동안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다.

가서 사과하자.

내가 말한다. 사이드미러 이야긴 꺼내지도 말고 어쨌든 오늘은 이 일을 분명히 해결하자고 말한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면 되겠지, 지금이라도 어딘가 불편하다고 하면 병원에 데리고 가면 되겠지, 생각하려고 애쓴다. 노트북 앞에 앉은 너는 인터넷 창에다 접촉사고, 동물병원, 보험, 허위 따위의 단어를 번갈아 넣고 메모를 하느라 분주하다. 그러면서도 내 말엔 대꾸조차 없다.

두시가 되기 전에 우리는 집을 나선다. 건물을 나서고 시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네가 말한다.

내가 말했나? 어제 헬스장에서 미용실 아줌마 만났거든. 저 아래 목욕탕 앞에 있는 미용실 있잖아.

토요일이어서 동네가 북적인다. 도대체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왔을까 싶을 정도로. 가게들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손님을 맞고 있다. 누가 봐도 너와 나는 나들이 나온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럼 우리는 주민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잠시 이 동네에 머무르는 사람이고 그러므로 이도 저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옷 입을 때 보니까 사람들이랑 그 할머니 이야길 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가서 말했거든.

뭐라고 말했는데?

뭘 뭐라고 해. 있는 그대로 말했지.

나는 사람들을 피해 걸음을 빨리한다. 아니, 네 이야기를 피해 멀찌감치 물러나려는 걸지도 모른다. 너는 내가 어떤 말들을 간신히 참고 있다는 걸 짐작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말을 하고 다니면서도 그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 저희는 주민자치회 봉사단인데요.

노인의 집 대문이 반쯤 열려 있고 우리를 맞은 건 젊은 남자 둘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개 옆에 쪼그리고 앉은 여자가 몸을 일으킨다. 오전에 나와 통화를 했던 그 사람 같다.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짖던 개는 너와 내가 자리를 잡고 앉자 다시금 몸을 웅크리고 잠잠해진다.

할머니, 저 기억하시죠? 그날 요 앞 빵집 앞에서 제가 여기 집까지 모시고 왔잖아요.

현관 마루에 걸터앉은 노인이 고개를 들고 너를 본다. 아니, 나를 보는 것 같다. 다시 보니 내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눈짓을 주고받는 것 같다. 네가 말하면 노인은 말이 없고 대답을 하는 건 그 봉사단원들이다.

저희가 동네 어르신들 챙겨드리는 일을 하거든요. 저희가 8기니까, 십년 다 되어가요. 아무튼 지난주인가, 개가 제대로 못 걷는다고 하셔서 왔더니 상태가 심각하더라고요. 할머니도 좀 다치신 것 같고요.

말은 주로 봉사단원의 여자가 한다. 스물둘. 스물셋. 대학생 같다. 현관 미닫이 유리창이 열려 있어서 집 안이 다 들여다보인다. 쿰쿰한 나무 냄새와 녹슨 고철 냄새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여자는 할머니 곁으로 가 헐렁한 바지 끝을 잡아올린다. 맨살이 드러나고 정강이 부분에 푸릇푸릇한 멍자국이 보인다. 색깔은 옅고 부위는 좁아서 큰 상처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할머니. 이게 그날 다치신 거라고요? 이건 차에 부딪힌 게 아니에요. 그날 폐품 뒤에 서 계셨잖아요. 뒷범퍼가 이 정도 높이인데 거기 부딪히셨으면 허리나 등에 상처가 나거든요. 제가 못 봤을 리도 없고요. 어디 다른 데서 다치신 거 아니에요?

네가 쏘아붙인다.

노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정강이 부분을 쓰다듬는다. 그러면서 그날 이후로 몸이 쑤시고 아파서 어딜 나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고 투덜대기 시작한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오로지 그 말만 하기로 작정한 사람 같다. 너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곤 한번도 상상 못한 표정이다.

나야 다 늙어서 딸깍 죽으면 그만이지. 근데 우리 개는 어쩔 거야. 그날부터 밥도 안 먹고 종일 저기 퍼져 있어. 그전엔 사람 소리만 나도 나가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였는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너는 엎드린 개 곁으로 간다. 원래 하얀색이었을 개의 털은 거의 잿빛에 가깝다. 그럼에도 너는 맨손으로 개를 쓰다듬으며 여기저기를 살피기 시작한다. 앞다리를 쥐어보고 머리를 감싸쥐고 배 아래 손을 넣어 여기저기 만져보기도 한다. 개는 끙끙거리지만 잠자코 있다. 혀를 내밀어 네 손바닥을 핥기도 한다. 네 말대로 개는 멀쩡한 것 같다. 거짓말을 하는 건 네가 아니고 노인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짐승이라고 해도 그렇게 막 대하면 어떡해. 이봐, 손대지 마, 손대지 말라고!

노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학생이 다가와 개를 빼앗듯 한다.

저기요. 그렇게 막 만지시면 어떡해요.

대문 너머로 사람들 말소리가 들린다. 여기 서라, 저기 서라, 하면서 사진을 찍고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오간다. 그 소리를 이기려고 너는 자꾸만 목소리를 키운다. 그날 집까지 따라와서 같이 확인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 그날은 괜찮다고 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 그리고 대문 앞 폐품 상자 위에 걸터앉아 있던 남자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자 너는 기다렸다는 몸을 돌리고 그 사람을 똑바로 본다.

근데 이 쪽지는 누가 붙인 거예요? 쪽지만 붙이면 되지 사이드미러는 왜 부수고 가요?

남자의 얼굴에 엷은 웃음기가 떠올랐다가 가신다. 아니, 그건 내 착각인지도 모른다. 너는 남자 둘과 여자, 할머니를 번갈아 보며 사이드미러 부수는 건 범죄라고 말한다. 블랙박스 돌려보면 다 나온다는 말을 하고 고소할 거란 말을 하는 네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오른다.

결국 내가 나선다.

할머니, 그럼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보실래요?

대답은 할머니 곁에 있는 여자가 한다.

일단 사과부터 하세요. 저희가 그거 부수는 거 봤어요? 그렇게 막말을 하시면 안 되죠. 그리고 사고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잖아요. 병원도 사실 그날 바로 갔어야 했고요. 일주일 동안 일도 못하시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대요.

너의 얼굴에서 표정이라 할 만한 게 사라져버린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허탈한 듯 웃음을 짓는다. 그럼에도 얼른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것 같다.

사과라뇨. 지금 사과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저를 무슨 사고 내놓고 도망간 사람 취급하는데, 저 그런 사람 아니고요. 그런 경우 없는 짓은 해본 적도 없어요. 이 동네 사는 동안도 그랬고요.

동네 분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시는 것 같던데요?

네 말이 끝나자마자 노인 곁에 앉은 여자가 되받아친다. 저쪽에 선 남자 둘이 저희들끼리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으며 낄낄거린다.

그 순간 우리가 알 필요도 없고, 들을 필요도 없는 어떤 말들을 여자가 금방이라도 해버릴 것 같다. 나는 잠시 네 팔을 잡았다가 놓은 다음 할머니와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 어쨌든 그날은 아무 문제가 없었으니 그런 줄 알았다고 말하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내 말을 자르고 네가 끼어든다.

아, 정말 왜 그래. 뭘 죄송이야. 할머니, 저희가 여기 몇번이나 온 줄 아세요? 그때마다 안 계시던데, 집에만 계신 거 맞아요?

좁은 골목에 붙은 한옥들은 낮은 담으로 간신히 구분되어 있고 네 목소리는 번번이 가볍게 담을 뛰어넘는다. 옆집 담벼락에서 누군가 얼굴을 반쯤 내밀었다가 신발을 끌고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나는 더이상 노인에게 말이 나올 만한 여지를 주고 싶지 않다. 어디에서건 불시에 노인의 입에서 무슨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 듣게 되는 일도 피하고 싶다.

그리고 네가 기다렸다는 듯 바로 그 말들을 쏟아냈다. 왜 사실이 아닌 말들을 여기저기 하고 다니느냐는 힐난이다. 노인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너를 바라보다가 혀를 찬다. 족보도 없는 저런 상것들이 들어와 동네를 다 버려놓는다느니, 오래 사니 별 더러운 꼴을 다 본다느니, 그러면서도 너와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잠깐씩 나를 봤다가 말다가 한다.

노인 곁에 선 여자가 거든다.

보통 이런 경우엔 다들 연락처를 남기지 않아요? 연락처도 없이 이거 뺑소니예요. 할머니 연락처 못 받으셨죠? 그죠?

뺑소니라뇨. 말조심해요.

열어놓은 대문 틈으로 옅은색 선글라스를 쓴 누군가가 얼굴을 불쑥 내민다. 눈이 마주쳤나 싶었는데 얼굴은 곧장 사라지고 대문 너머가 고요해진다. 그럼에도 대문 밖에 누군가 서 있다는 기척만은 분명하다. 누굴까. 낯선 동네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는 유별난 관광객인지도 모르지. 아니, 후미진 골목까지 들어온 걸 보면 근처에 사는 주민일지도 모르지.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해진다. 네가 한마디를 하면 여자가 두마디를 하고 남자 둘이 가세한다. 개까지 덩달아 짖기 시작한다. 조그마한 집이 터져나갈 것처럼 시끄러워진다.

나도 점점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된다. 막무가내로 이따위로 억지를 쓰는 노인과 잘잘못을 분명하게 가려보고 싶다. 따지고 대들고 싸우면서 사실을 밝히고 싶다. 심장박동 소리가 거세진다.

사과하자.

그리고 내가 말한다. 네 곁으로 가서 만류하듯 네 팔을 잡고서 소곤거린다.

그냥 미안하다고 해.

그러니까 그 말을 할 때 나는 이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집까지 왔다는 생각을 하고, 차 앞유리에 메모를 붙이면서 차 안을 들여다봤을 거란 생각을 한다. 도대체 누가 우리가 사는 집을 말해준 걸까. 어디서 들은 걸까. 생각은 베이커리를 지나 철물점, 미용실을 지나치고 헬스장과 부동산을 돌아 새마을금고 주변까지 간다. 너와 내가 매일 오가는 그 길을 따라 우리가 모르는 어떤 말들이, 추측들이, 오해들이, 따라온다. 고작 사과를 하고 말고 하는 문제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불필요한 관심을 끌고 싶지 않다. 사람들의 호기심이 너와 나의 일상 근처를 어슬렁거리게 만들고 싶지 않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사과를 해? 왜 그래, 너까지!

너는 내 손을 뿌리치고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한다.

빨리 미안하다고 해.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나는 이쯤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 사과하고 잊어버리고 싶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하고 조용한 주말을 보내고 싶다.

할머니 이거 나쁜 거예요. 사실대로 말씀하셔야지 왜 거짓말을 하세요. 여기 이 학생들이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인 거 같은데 자꾸 이러시면 저도 가만 못 있어요.

결국 내가 너를 막아선다. 할머니에게 다가가려는 너를 막아선 다음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게 뭐가 중요해. 그냥 한마디만 해. 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렇게 하는 게 편하잖아. 사과하고 빨리 가자. 너는 노인과 노인 곁에 선 학생들을 노려본다. 그러니까 이 동네에 사는 동안, 사람들이 너와 나에 대해, 우리에 대해, 우리도 모르는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불필요한 오해를 키우고 그게 어떤 부당한 일로 돌아올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사과해. 미안하다고 하라고.

너나 해. 너나 사과하라고!

너는 내 손을 뿌리친 다음 소리 나게 대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나는 잠시 그곳에 서서 노인과 몇마디를 더 나눈다. 연락처를 알려주고 학생들이 알려주는 노인의 계좌번호를 받아 적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오늘 저녁 틀림없이 돈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꼭 병원에도 가고, 강아지도 치료하라는 말을 한다. 그날은 아마 네가 당황하고 놀라서 그랬을 거라는 말을 덧붙일 때 보니 노인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져 있다.

그리고 집을 나설 때 내가 묻는다.

근데 차에 붙여둔 메모 말인데요. 저희 집을 어떻게 아신 거예요?

그걸 왜 몰라.

내가 무슨 말이지 하는 얼굴로 서 있자 노인이 중얼거린다.

다 알지. 다 알아. 다 안다고.

나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큰 도로를 따라 걷고 첫번째 골목 안으로 들어선다. 어디나 사람들로 붐빈다. 고개를 돌리면 환한 통유리 너머 테이블에 마주 앉은 사람들이 뭔가를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느리게 걷는 사람들의 나지막한 말소리가 끊임없이 동네를 돌고 또 돈다.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들. 내가 모르는 사람들.

그들 속에 섞여 있을 때 느꼈던 편안하고 자유로운 기분은 다 사라지고 없다. 길가에 멈춰 서 숨을 골라본다.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쉬어도 화끈거리는 열기가 가시지 않는다. 목덜미를 타고 뜨거운 기운이 치솟는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또렷해진다. 지금껏 수없이 오간 이 길에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오싹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