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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폭력을 상상하기

앨더먼의 『파워』와 페미니스트 판타지

 

 

일레인 쇼월터 Elaine Showalter

미국 프리스턴대학 영문과 명예교수. 국내 번역된 책으로 편서 『페미니스트 비평과 여성 문학』이 있음.

 

* 이 글은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Daily 2018년 2월 26일자에 발표되었으며, 원제는 “Imagining Violence: ‘The Power’ of Feminist Fantasy”이다. From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Daily Copyright ⓒ 2018 by Elaine Showalter/한국어판 ⓒ 창비 2018

 

 

올해 남자를 해치는 여자들 이야기를 다룬 소설 한편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오미 앨더먼(Naomi Alderman)의 베스트셀러 『파워』(The Power, 2017; 2016년 영국에서 처음 출간)에서 청소년기 소녀들은 자기 손이 강력한 정전기를 뿜어 남들에게 충격을 주고 고문해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기가 나오는 곳은 쇄골 근처의 횡문근인데, 경악한 과학자들은 갓난 여아의 MRI(자기공명영상)에서 그 부위를 확인하고 실타래라는 이름을 붙인다. 십대 소녀들은 나이 든 여성들이 자신의 ‘파워’를 활성화하도록 돕기도 한다.

나오미 앨더먼 『파워』

나오미 앨더먼 『파워』

여성들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출발해 여러 나라로 옮겨 다니며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고, 자기를 노예로 삼고 학대했던 남성에게 잔인한 복수를 감행한다. 여성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해방하기 위해 ‘파워’를 사용하며, 그 결과 여성들의 자아상이 바뀐다. 미국 공영 라디오(NPR)와의 인터뷰에서 앨더먼은 이야기한다. “만일 필요시 해를 가할 힘이 있다면, 설사 그 힘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해도 삶은 매우 달라질 거예요. 상시적인 두려움이 줄어들 테지요.” 소설에서 한 소녀는 자신을 상습적으로 강간한 양부를 감전사시킨다. “그는 경련을 일으키며 그녀에게서 튕겨 나갔다. 그는 요동치며 발작했다. (…) 그는 쿵 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파워는 급속히 타락해 일부 여성들은 약한 이들을 괴롭히며 잔인해진다. 한 여성 경관은 경계근무 중 공격적인 젊은 남성 저항자에게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그녀의 손이 닿자 그의 머리가죽이 바삭해졌다. 그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두개골 안 액체가 끓기 시작했다. (…) 파워가 지나간 자리가, 생각보다 빠르게, 흉터처럼 부풀어 올랐다. (…) 그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얼굴부터 흙 속에 처박혔다.” 남성들은 한층 더 잔혹한 방식으로 반격에 나선다. 그들은 파워를 외과적으로 파괴하거나 강탈하려 하며, 여성의 시력을 앗아 가두려 하고, 여성을 상대로 중화기를 사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앨더먼은 위해를 가하고 죽일 수 있는 힘이 여성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앞서의 인터뷰에서 앨더먼은 토로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만약 더러운 지하실에 팔려와 성폭행당하기 직전의 여성들에게 갈 수 있다면, 내가 그녀들에게 감전사시킬 힘을 마음대로 줄 수 있다면, 설령 결말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할 거예요.”

대담하고 충격적인 이 소설은 베일리스 여성 소설상(the Baileys Womens Prize for Fiction)을 수상했고, 2017년 『뉴욕타임즈 북리뷰』(The New York Times Book Review)의 10대 소설에 선정되었다. 버락 오바마(Barack Obama)도 이 소설을 그해 자신이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 중 하나로 언급했다. 하지만 단순히 요즘 가장 잘나가는 작품이라는 뜻만은 아니다. 『파워』는 페미니스트 디스토피아/유토피아, SF, 가상소설(speculative fiction: 초자연적이거나 미래파적이거나 환상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는 소설들을 포괄하는 명칭옮긴이)이 중첩되는 장르에서 중대한 변화를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여성 작가의 이야기는 비폭력적이며 이상적 비전을 제시해왔다.

이 중에 미국 작가 위니프리드 하퍼 쿨리(Winnifred Harper Cooley)의 1902년작 「21세기의 꿈」(A Dream of the Twenty-First Century)은 내가 좋아하는 초기 소설이다. “자유의 세기가 낳은” 미래의 “건강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가 꿈속에서 작가를 찾아와 미국에 장차 도래할 유토피아를 보여준다. 가난, 질병, 성적 불평등, 무지, 범죄, 전쟁 같은 사회적 병폐가 개선되었을 뿐 아니라, 소녀는 계몽된 국민들이 “전국 득표수가 아니라 주별 득표수를 기록하는” “불합리한 선거인단제도”를 마침내 개혁했다고 전한다.

샬럿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의 고전 『허랜드』(Herland, 1915)에서 세 미국인 남성 모험가들은 과학탐험 중 전설 속 여인국을 발견한다. 그곳은 아름답고 현명하고 어머니답고 협력적이며 애정 어린 돌봄과 배려를 실천하는 차분한 여성들이 지배하는 여성만의 나라이다. 세 모험가는 각기 허랜드 여성과 사랑에 빠지지만, 폭력에 반대하고 경쟁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며 “살생”을 꺼리는 이 사회에 적응하는 데 모두가 성공하지는 못한다. 그중 공격 성향이 가장 강한 남성은 허공을 향해 총을 발사한 다음 마취당하고 결국 강제 추방된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에선 여성들이 육체적·지적·전략적 우위를 점하지만, 작가는 대체로 여성들이 이를 자격있는 남성과 공유할 길을 찾아낸다. 속편인 『아워랜드에서 그녀와 더불어』(With Her in Ourland, 1916)에서 가장 성공적인 남성 개종자는 1차대전 발발 직후 부인을 미국으로 데려가 그녀에게 배우게 된다. 그녀는 심지어 “남자도 여자와 꼭 마찬가지로 사람”이라고 인정하기까지 한다.

1970년대에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이 쏟아져 나왔는데, 도로시 브라이언트(Dorothy Bryant)의 공동체적이며 영적인 『아타 일족이 당신을 기다려요』(The Kin of Ata Are Waiting for You, 1976; 1971년 ‘위로를 주는 이: 신비한 환상’ The Comforter: A Mystical Fantasy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와 모계제 행성에 남성이 침공하면서 살상이 시작되는 이야기인 어슐러 르귄(Ursula LeGuin)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The Word for World Is Forest, 1976)이 이에 속한다. 1970년대 소설들은 길먼의 평화주의적 주제를 이어받는다. 이 이야기들에서 여성이 남성권력에 맞서 물리적 폭력이나 무력을 사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여성주의 디스토피아 소설인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 1985)에서도 여성들은 길리아드(Gilead) 남성들에게 맞서 봉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수호자, 사령관, 눈, 천사를 없애려 시도하지 않는다. 여성이 남성을 공격하는 것은, 시녀가 잡혀온 메이데이(Mayday) 남성 첩자의 머리를 잽싸게 걷어차서 그가 능지처참될 운명을 면하게 해주는 게 유일하다. 페미니스트 가상소설은 무한한 상상력의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대부분 “이 책에서 어떤 남성도 해를 입지 않았다”라는 인도주의적 구호를 되풀이한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이 시위와 봉기에 나섰던 시기의 여성 디스토피아 작품에서는 남성억압자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욕망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제1차 여성참정권 운동기에 그 예를 확인할 수 있는데, 미국 작가이자 참정권 운동가인 아이네즈 헤인스 길모어(Inez Haynes Gillmore)는 이렇게 썼다. “영국에서 첫 전사가 첫 벽돌을 던졌을 때 내 마음도 함께 날았다. 그후 나는 공격전술의 확고한 신봉자가 되었다.” 길모어는 원칙적으로 전투적 여성은 남성의 항시적인 도구였던 “저항과 폭력”을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길모어는 여성참정권 운동의 실천적 전술로 자살을 고려하기도 했다.

 

능력 있고 성공한, 젊고 행복한 여성이 보스턴에서 쪽지 한장을 남긴 채 자살한다. “여성이 자유롭지 않아서 나는 죽는다.” (…) 다음 주 또다른 젊은 여성이 뉴욕에서 비슷한 쪽지를 남긴 채 자살한다. 그다음 주는 아마 시카고가 될 것이며, 워싱턴,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뉴올리언즈로 이어질 것이다. 부모들이 혹시 우리 딸이 다음 차례가 아닐까를 염려하며 전국에 얼마나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가 퍼져나갈지 상상이 가는가.

 

사실 페미니스트 가상소설에서 저항의 방식으로 살인은 물론이고, 벽돌 던지기보다 자살을 택하는 것이 훨씬 더 일반적이다. 거의 잊힌 길모어의 소설 『천사의 섬』(Angel Island, 1914)은 자기방어와 자기희생 사이의 이 모순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허랜드』의 선구자 격인 이 소설은 남태평양 무인도에 난파된 줄만 알았던 다섯 남성이 실은 멋진 날개 달린 다섯 여성이 자신들을 줄곧 관찰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면서 시작된다. 처음에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완전히 빠져서 그들을 경탄하고 두려워하지만, 곧 그들을 사로잡아 강제로 짝을 짓고 종족 번식을 하고자 한다. “미래는 모든 것을 정당화해주지. 이 계집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 해.” 배에서 약탈한 거울, 스카프, 빛나는 보석을 이용해서 남자들은 여성들을 클럽하우스라고 부르는 오두막으로 유인한다. 그들을 “양손을 앞으로 결박한 채” 벽에 묶어 오두막에 감금한다. 그러고 난 후 여성들이 소리 지르며 발버둥치자 미리 날을 벼려둔 가위로 그들의 날개를 자른다.

천사들은 살아남는다. 하지만 날개를 잃은 그들은 다루기 쉽고 무력해진다. 흔적기관인 두 발로 걷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포획자와 결혼해 그들의 아이를 갖는다. 하지만 남자들이 막 돋아나는 어린 딸의 날개를 자르려 한다는 걸 알아챈 후 여성들의 지도자 줄리아(Julia)는 결정한다. “우리 여성들은 이제 날고 싶다는 욕망을 접어야 해. 지나간 것을 곱씹느라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짓은 그만두어야 해. 우리는 걷는 법을 배워야 해.” 여성들은 매우 고통스럽게 왜소한 발로 비틀비틀 걷는 법을 배우고, 그다음엔 뛰고, 6개월마다 잘려서 짤막해진 날개로 날게 된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아이들을 데리고 탈출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여성들은 클럽하우스에 돌을 떨어뜨리지도,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대신 남성들이 사과하고 더이상 날개를 자르지 않겠다고 약속하자 이 설득에 넘어가 돌아온다. 사실 천사들은 남편과의 재결합에 매우 기뻐하며, 양보를 얻어낸 후 나는 능력을 기꺼이 남성과 나누고자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줄리아는 날개 달린 아들을 낳는다.

1988년 『천사의 섬』 재판본 서문에서 어슐러 르귄은 길모어가 날개 자르는 장면을 “모호하게” 처리했다고 말한다. “일반적인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의 난잡한 소동”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여성들은 심지어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들은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조금 소란을 피우다가 잠잠해진다.” 여성들은 남성에게 강력히 맞서 싸우거나 자기들 나름의 가위를 휘두를 모의를 꾸미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귄은 피투성이 장면을 순화하고 유혈적 대응을 피했다는 점에서 길모어가 칭찬받을 만하다고 결론 내린다. “양자를 피함으로써 길모어는 폭력으로 표현되지 않는 진정한, 실질적인 분노를 보여줄 여지를 마련했다.” 르귄에 따르면 길모어가 원한 것은 우리가 “모두, 함께 날아오르는 것”이다. 매우 디스토피아적인 소설에 아주 희망적이며 유토피아적인 페미니즘을 보여주는 결말인 셈이다.

페미니스트 소설이 여성 폭력 문제를 진지하게 숙고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여성해방운동(Womens Liberation Movement)에 이르러서다. 1970년 뉴욕에서 개최된 한 여성회의에서 단명한 급진주의 단체 ‘더 페미니스트’(The Feminists)가 ‘페미니스트 포르노그래피’라는 반어적 수식어가 붙은 「가지가 굽는 이유」(The Twig Benders)라는 이야기를 판매했다. 윌더 체이스(Wilda Chase)라는 필명으로, 낙태찬성 집회용 유인물 뒷장 핑크색 종이에 등사 인쇄된, 20센트짜리 이야기 「가지가 굽는 이유」는 가학적 남성 포르노그래피의 성역할을 뒤집는다. 이 이야기에선 여성이 소년과 성인 남성에게 굴욕감을 주고, 때리고, 강간하고, 죽이면서 강력한 성적 만족감을 얻는다. 물론 이 이야기가 노리는 것은 페미니스트에게 성적 자극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작가 포르노물에서 여성이 당하는 폭력적 학대를 재구성해서 충격적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본명이 윌더 홀트(Wilda Holt)인 작가는 근친상간과 성폭력 생존자였다. 분노와 절망의 광기에 사로잡힌 그녀는 1970년대 중반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했다.

「가지가 굽는 이유」는 출판된 적도 심지어 출판을 위해 제출된 적도 없으며, 오늘날에는 몇몇 학술용 페미니스트 역사기록물 보관소에만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파워』와 1970년대 몇몇 여성주의 소설 속 장면과 기이할 정도로 유사하다. 가지가 굽으면 나무가 자라면서 굽는 법이듯, 여성 작가들은 폭력을 상상하며 남성 작가 작품의 주제를 모방한다. 홀트의 작품은 폭력적 저항과 앙갚음의 여성적 판타지를 탐색하는 페미니스트 이야기와 소설에 속한다. 그런 소설은 아주 적지만, 평온한 시대적 물결의 밑바닥에 흐르는 일탈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저류를 형성한다. 조애나 러스(Joanna Russ)의 『여성 인간』(The Female Man, 1975)은 여성만의 행성 “와일어웨이”(Whileaway)를 배경으로 하는데, 여성 인간-동물 하이브리드 앨리스 제일 리즈너(Alice Jael Reasoner)가 숨겨진 신체적 힘날카로운 발톱과 강철 이빨을 거침없이 드러내서, 그녀를 강간하려던 맨랜드(Manland) 침략자를 죽인다.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친구들의 걱정스런 질문에 제일은 답한다. “필요했는지 아닌지는 조금도 관심 없어. 그러고 싶었어.”

마지 피어시(Marge Piercy)의 『시간의 끝에 선 여자』(Woman on the Edge of Time, 1976)는 1970년대 이상주의적 페미니스트 소설의 고전이다. 2016년판 서문에서 피어시는 이 책을 “변화가 가능성을 넘어 머지않았다고 느껴지면서, 우리가 갖지 못했던 것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페미니스트 유토피아가 창조되었던” 2차 여성주의 운동의 소산으로 규정한다. 주인공 코니 라모스(Connie Ramos)는 스패니시 할렘(Spanish Harlem, 뉴욕의 라틴계 거주지옮긴이) 출신의 멕시코계 미국 여성이다. 그녀는 벨뷰(Bellevue) 병원(1736년 세워진, 미국 최초·뉴욕 최대의 공공병원옮긴이)과 매우 흡사한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데 그곳에서 약에 심하게 취해 미래의 평등한 유토피아 사회를 본다. 하지만 그녀의 현실은 가난, 폭력, 무기력이 지배하는 지옥 같은 디스토피아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코니는 병실에서 뇌엽절리술 수술을 기다리던 중 직원의 커피주전자에 제초제를 탄다. “미안하지 않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심장이 매우 세차게 뛰었고, 그녀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기다리면서.”

수지 맥키 차나스(Suzy McKee Charnas)의 『모계』(Motherlines, 1978)에서 ‘말 타는 여인’(Riding Woman) 쉴(Sheel)은 대평원과 남성이 통치하는 홀드패스트(Holdfast) 사이 국경지대를 지키는 강인한 척후병이다. 홀드패스트는 전사를 보내 “계집들”(fems)을 포획해서 노예로 부린다. “평생 그녀(쉴)는 순찰을 돌면서 총 7명의 남자를 죽였다. 넷은 멀리서 명중을 확신했을 때 활로, 셋은 가까이서, 은신처에서 말을 타고 갑자기 튀어나와 사냥용 긴 창으로.” 쉴은 페미니스트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성공한 전사이다. 마침내 여성들은 희망에 차서 “홀드패스트는 죽은 땅이고 남자들은 더이상 위험하지 않다”고 믿는다. 하지만 독자가 이를 확신하기는 어렵다.

2007년 영국 작가 쌔러 홀(Sarah Hall)은 『북쪽의 딸들』(Daughters of the North, 영국에서는 ‘카훌란 군대’ The Carhullan Army라는 제목으로 출판)에서 여성의 대항폭력을 주제로 삼는다. 영국의 최북단 지역을 배경으로 한 종말 이후의 디스토피아에서 자신을 ‘자매들’(Sisters)이라고 부르는 소수의 여성들이 남성 ‘당국’(Authority)의 도시 거점을 공격하기 위해서 길고 몹시도 고통스러운 게릴라전쟁 훈련과정에 자원한다. 스파르타식 집단거주지에서 광적 지도자 재키 닉슨(Jackie Nixon)은 여성들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고통을 주고 궁핍에 시달리게 한다. 그녀는 여성들을 조롱한다. “자매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건 남성 구역이란 말인가? 우리는 날 때부터 평화주의자인가? 우리는 유약한 성인가? 살아남으려면 항복해야 하는가?” 이 소설은 영국과 SF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각각 존 루엘린 리스 상(John Llewellyn Rhys Prize)과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상(James Tiptree Jr. Award)을 수상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평가는 대부분 부정적이었고, 『뉴요커』는 평론에서 여성 전사라는 주제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들은 디스토피아의 수동적 여성 희생자를 더이상 참아내지 못하는 것 같다. 늦은 감이 있지만 제사 크리스핀(Jessa Crispin)은 『시녀 이야기』를 논하며 묻는다. “좋아요, 그런데 이 여자들은 대체 언제 사람들을 찔러 죽이나요?” 이제 『파워』에서 폭력적 여성주의 디스토피아는 전에 비해 한결 중요한 흐름으로 부상하는 듯하며, 마거릿 애트우드는 그 대모 격에 해당한다. 나오미 앨더먼은 2002년 “세계적 예술유산을 다음 세대로 전승하기 위해서” 마련된 롤렉스 선후배 예술 프로그램(Rolex Mentor and Protégé Arts Initiative)에서 2011년 말 애트우드에게 멘토링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비웃을까 두려워한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한다.” 자주 인용되는 애트우드의 익살스런 풍자인데, 앨더먼은 이 경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파워』는 “남성의 잠재적 폭력성이 여성의 삶을 크게 제한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남자를 비웃을 뿐 아니라 그들을 죽일 힘이 생기면서, 여성들은 자신을 다르게 보고 기회를 얻게 된다.

앨더먼은 여성이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여성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리터러리 허브』(Literary Hub)와의 인터뷰에서 앨더먼은 자신이 바란 것은 여성 스스로 자문하는 것이었다고 밝힌다.

 

삶에서 이건 어떻게 나타날까? 이게 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내 딸에게는 어떤 변화를 줄까? 내 일은 어떻게 달라질까? 늦은 밤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떻게 달라질까? 내 학교생활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오늘 아침 내가 겪은 그 예기치 못한 만남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지만 그녀는 폭력이 부질없다는 것과, 폭력이 점점 더 심해져 성서 속 아마겟돈(Armageddon, 요한계시록 16장에서 사탄과 신의 마지막 결전의 장소옮긴이)처럼 인류종말의 대결전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강력하게 극화한다.

그렇다면 왜 지금 이 판타지인가? 앨더먼은 남성의 폭력을 용서하고, 봐주고, 감추고, 수용할 의사가 없는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의 분노를 반영해서 그것을 표현할 길을 마련하고 있다. ‘파워’가 청소년기에 먼저 나타나고, 소녀들 덕에 나이 든 여성들도 자신의 힘을 깨닫게 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지난 수십년간 정치의식이 높은 3세대 페미니스트는 “순진한” 2세대 페미니스트를 비판하고, 밀레니얼 세대인 4세대 페미니스트는 말만 많은 3세대 페미니스트를 깔본다는 식의 수사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판은 다르다.

여성들은 기꺼이 공권력을 동원해서 남성의 경력을 파괴하고, 결혼을 깨고, 심지어 그들을 감옥에 보내려고 한다. 여성들은 남성이 사과하고 ‘타임즈업!’(Times Up!, 2017년 하비 와인스타인 성추문 사건으로 촉발된 미투 캠페인의 영향으로 미국 할리우드 배우와 작가 등이 직장 내 성폭력과 성차별 문제 해소를 위해 결성한 공공단체옮긴이) 배지를 달았다고 해서 그들과 권력을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린디 웨스트(Lindy West)가 말하듯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느끼는 분노의 집단적 표현”이라면, 이번 여성주의 물결은 일종의 쓰나미다. 앨더먼은 자신을 이 물결의 일부로 본다. 그녀는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희한하게도 최근 벌어지는 일들이 뭐랄까 내 책의 이야기대로 되고 있어요. 둘 다 지난 10년간 커져온 분노를 보여주는데, 내가 보기에 이것은 점차 두드러지는 특정 여성혐오 현상과 관계가 있습니다.”

『파워』는 하나의 문학적 경향의 시작을 알리는가? 아직 이렇게 말하기는 이르다. 왜냐하면 앨더먼의 소설이 페미니스트 문학 전통에서 예외적 존재로 판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노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어떤 페미니스트도 ‘천사의 섬’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니까.

 

번역: 김영아/한성대 교양교육원 교수